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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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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혜공惠公旣立 而殺이극里克 以弑君之罪 罪之어늘 춘추春秋書曰 殺其대부大夫이극里克이라하니라
稱人以殺 殺有罪也 稱國以殺 殺無罪也니라
이극里克弑君이어늘 而以無罪書하니춘추春秋之微意也니라
해제奚齊탁자卓子之立 雖已爲君이나人不君也니라
旣已爲君이니 則君臣之名正이라
이극里克爲弑君이언만 而國人之所不君 則勢必不免이니라
이극里克因國人之所欲廢而廢之하고 因國人之所欲立而立之니라
雖使上有明天子하고 下有賢방백方伯이라도 이극里克之罪 猶可議也니라
이어늘 而歸罪於이극하고 以自於諸侯하니도의有不可矣니라
이나 혜공惠公이극하고 而背內外之賂하니 國人惡之하고 敵人怨之하니라
하고 至其謀臣여생呂甥극칭郤稱기예冀芮 皆以兵死하니라
蓋背理而傷도의 非獨人之所不予 而天亦不予也니라
失德하니 三人議將廢之하고 而其弟의진義眞 亦以輕動不任社稷하니 乃先廢의진義眞而後소제니라
兄弟皆不得其死하니 乃迎立문제文帝니라
하되 自謂廢狂亂以安社稷하고 不以賊遺君父하여 無負於國矣라하니라
이나 문제文帝왕화王華공녕자孔甯子왕담수王曇首 皆陵上好進之人也
서선지羨之부량하고 據其逕路하여 每以弑逆서선지 激怒문제文帝하니 문제遂決意誅서선지니라
三人旣死 君臣自謂不世之功也라하니라
是時 공녕자甯子已死하고 왕화왕담수曇首 皆受不次封賞이니라
문제文帝在位三十年 其治강좌江左稱首니라
이나 원가元嘉三年 始誅三人하고 是歲 皇子하니라
하니 왕화공녕자甯子공녕자 無聞於世왕담수曇首공녕자승작僧綽 以才能任事 亦幷死於니라
於乎
天之報人 不遠如此니라
不然이면 혜공惠公문제文帝禍發 若合符契니라
何哉
사회謝晦將之형주荊州 自疑不免하여 以問채곽蔡廓하니 채곽
顧命하고 任以社稷하니 廢昏立明 義無不可
但殺人하고 而以하여 據上流之重이면 以古推今컨대 自免爲難耳라하니 善夫
채곽蔡廓之言 不學춘추春秋而意與之合이니라
태사공太史公有言 爲國者 不可以不知춘추春秋 前有讒而不見하고 後有賊而不知니라
守經事而不知其宜하고 遭變事而不知其權이니라
爲人君父而不通춘추春秋之義者 必蒙首惡之名이요 爲人臣子而不通춘추春秋之義者 必蹈簒弑之誅니라
皆以善이나 爲之而不知其義니라
而不敢辭라하니라
서선지君臣 誠略通춘추春秋문제文帝 必無혜공惠公서선지 서선지부량사회三人 必不受이극里克서선지리라
悲夫


02. 문제文帝에 대한
헌공獻公이 그 세자世子 신생申生을 죽이고 해제奚齊를 세우니 국인國人이 순종하지 않았다.
대부大夫 이극里克해제奚齊탁자卓子를 죽이고 혜공惠公을 들여놓았는데, 《춘추春秋》에서는 모두 ‘시군弑君’으로 적고 있다.
혜공惠公이 이미 즉위하여 이극里克을 죽인 것은 ‘시군弑君’의 죄로 죄를 준 것인데, 《춘추春秋》에서는 “나라가 그 대부大夫 이극里克을 죽였다.”라고 적었다.
춘추春秋》에서 일반인의 살인을 ‘’로 칭함은 죄 있는 사람을 죽인 것이고, 임금의 살인을 ‘’로 칭함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것이다.
이극里克이 임금을 시해했거늘 ‘무죄無罪’로 적었으니, 이는 바로 《춘추春秋》의 은미한 뜻이다.
해제奚齊탁자卓子왕위王位에 서는 것은 바로 으로 를 깨뜨리는 일이니, 비록 이미 임금이 되었다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이미 임금이 되었으니 임금과 신하의 명분이 정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극里克은 분명 시군弑君을 한 셈인데,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정세상 〈시해당하거나 폐위당하는 일을〉 반드시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극里克나라 사람들이 폐하고자 한 것을 인하여 그를 폐하고, 나라 사람들이 세우려고 한 것을 인하여 그를 세웠다면, 이극里克의 죄는 나라의 화독華督나라의 최저崔杼시군弑君한 것과 다르다.
비록 위에 명철한 천자天子가 있고 아래에 어진 방백方伯이 있다 하더라도 이극里克의 죄는 오히려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혜공惠公은 〈이극里克이 두 임금을〉 시해했기 때문에 왕위王位에 서게 되었건만, 죄를 이극里克에게 돌리고 스스로 제후諸侯에게 보고하였으니, 그것은 도의道義에 옳지 못한 점이 있다.
그러나 혜공惠公이극里克을 죽이고 국내와 국외에 뇌물을 주겠다는 약속을 위반하였으니, 국인國人이 미워하고 적인敵人이 원망하였다.
결국 군사가 나라에 패하자, 자신이 죽고 아들이 멸하였으며, 그 모신謀臣여생呂甥극칭郤稱기예冀芮도 모두 전쟁에서 죽었다.
대개 이치를 위반하고 도의道義를 상실한 것이니, 사람만이 돕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늘 또한 돕지 않았던 것이다.
무제武帝가 죽음에 국정國政서선지徐羨之부량傅亮사회謝晦에게 부탁하였다.
소제少帝덕망德望을 잃으니, 세 사람은 장차 소제少帝를 폐할 것을 의논하였고, 그 아우 의진義眞도 경거망동하여 사직社稷을 맡길 수 없었으므로 먼저 의진義眞을 폐한 뒤에 소제少帝를 폐하였다.
형제兄弟가 모두 재대로 죽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문제文帝를 맞아 세웠다.
문제文帝가 이미 즉위함에 세 사람은 의구심(경계심)을 가져 서선지徐羨之부량傅亮은 안에서 조정朝政을 관장하고, 사회謝晦는 밖으로 장강長江의 상류인 형주荊州로 나가서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세우되, 광란狂亂을 멈추게 하여 사직社稷을 안정시키고 군부君父에게 끼치지 아니함으로써 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문제文帝번국구신藩國舊臣왕화王華공녕자孔甯子왕담수王曇首는 모두 다른 사람의 위를 능가하여 고관대작을 희망하는 사람들이었다.
서선지徐羨之부량傅亮을 미워하고 벼슬에 나아갈 길목에 버티고 서서 매번 시역弑逆를 가지고 문제文帝의 노여움을 격동시키니, 문제文帝는 결국 결심하고 서선지徐羨之 등을 베어 죽였다.
세 사람이 이미 죽음에 임금과 신하는 스스로 한 세상에 흔히 있지 않는 대단한 공로라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공녕자孔甯子는 이미 죽었고, 왕화王華왕담수王曇首는 모두 차서를 뛰어넘어 파격적인 봉상封賞을 받았다.
문제文帝재위在位한 지 30년에 그 강좌江左를 다스림은 으뜸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원가元嘉 3년에 비로소 세 사람을 베어 죽였는데, 이해에 황자皇子 (文帝의 장자長子)가 태어났다.
가 이미 장성함에 상신商臣을 일으켰으니, 왕화王華공녕자孔甯子의 자손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왕담수王曇首의 아들 승작僧綽재능才能이 일을 맡을 만하였지만 또한 아울러 에게 죽었다.
아!
하늘이 사람에게 보응報應하는 것이 이처럼 빨랐다.
그렇지 않다면 혜공惠公 문제文帝가 발생한 것이 마치 부계符契(符節)를 합한 듯하였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사회謝晦가 장차 형주荊州로 가려고 할 때에 스스로 죽음을 면하지 못할까 의심하여 채곽蔡廓에게 물었더니, 채곽蔡廓이 말하기를
선제先帝고명顧命을 받고 사직社稷을 맡았으니, 혼암한 임금을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운 것은 도의상 불가할 것이 없지만,
다만 남의 두 형을 죽이고 신하로서 임금을 두렵게 하는 위엄을 가지고서 장강長江의 상류인 형주荊州중지重地에 의거한다면, 옛일로 오늘날의 일을 미루어보건대, 스스로 면하기 어렵겠다.”라고 하였으니, 훌륭하다!
채곽蔡廓의 말은 《춘추春秋》를 배우지 않았으나 뜻이 그것과 부합하였다.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춘추春秋》를 몰라서는 안 되니, 앞에 참언讒言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뒤에 이 있어도 알지 못한다.
정상적인 일을 지키되 알맞게 처리할 줄 모르고, 갑자기 발생한 사건을 만나되 임기응변할 줄 모른다.
남의 군부君父가 되어 《춘추春秋》의 뜻을 통하지 못하면 반드시 죄괴罪魁의 이름을 입을 것이고,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춘추春秋》의 뜻을 통하지 못하면 반드시 찬시簒弑주참誅斬을 당할 것이다.
그 실상은 모두 좋은 일이지만, 그것을 하되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을 시해했다는 죄명을 입었으나 감히 사피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나라의 군신君臣이 진실로 《춘추春秋》를 약간만이라도 통했더라면 문제文帝는 반드시 혜공惠公가 없었을 것이고, 서선지徐羨之부량傅亮사회謝晦 세 사람은 반드시 이극里克주참誅斬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슬픈지고.


역주
역주1 宋文帝 : 宋 文帝는 곧 劉義隆(407~453)으로, 宋 武帝 劉裕의 셋째아들이다.
역주2 晉獻公……而立奚齊 : 《春秋左氏傳》 僖公 4년에 의하면 “晉 獻公이 寵妃 驪姬의 讒言을 곧이듣고 太子 申生을 죽였고, 驪姬가 또 讒言을 하여 重耳와 夷吾 두 公子를 해치자 두 공자는 도피하였으며, 獻公이 죽으니 驪姬의 아들 奚齊가 王位에 서지 못하고 피살되었다.”고 한다.
역주3 其大夫里克……而納惠公 : 《春秋左氏傳》 僖公 9년에 의하면 “晉 獻公이 죽자, 大夫 里克과 丕鄭은 외국에 가 있는 文公(重耳)을 모셔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申生‧重耳‧夷吾 세 公子에게 가담된 무리들을 이끌고 모반을 꾀했다.……里克이 奚齊를 祭廳에서 죽이고, 公子 卓子를 조정에서 죽였다.……晉나라의 郤芮는 夷吾로 하여금 秦나라에 많은 뇌물을 주고 晉나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구토록 하니, 夷吾는 그 의견을 따랐다. 齊 大夫 隰朋도 군대를 거느리고 秦나라의 군대와 함께 晉 惠公(夷吾)을 晉나라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夷吾는 고국으로 돌아와 즉위하여 晉 惠公이 되었다.”고 한다.
역주4 春秋皆以弑君書之矣 : 《春秋》에 “僖公 9년 겨울에 晉나라의 里克이 그의 임금의 아들 奚齊를 죽였다.[僖公九年冬 晉里克 殺其君之子奚齊]”고 적었고, 또 “僖公 10년 봄에 晉나라의 里克이 그 임금 卓子와 그 大夫 荀息을 죽였다.[僖公十年春 晉里克殺其君卓及其大夫荀息]”라고 적었으며(어떤 本에는 ‘殺’이 ‘弑’로 되어 있다.), “僖公 10년 여름에 晉나라가 그 大夫 里克을 죽였다.[僖公十年夏 晉殺其大夫里克]”고 적었다.
역주5 以淫破義 : 晉 獻公이 寵妃 驪姬로 인하여 色慾에 미혹되어 立嫡(嫡子를 세움), 立長(長子를 세움), 立賢(어진 이를 세움) 등의 정상적인 도리를 파괴했음을 이른 것이다.
역주6 里克之罪……齊崔杼異矣 : 《春秋》에 “桓公 2년 봄에 宋의 華督이 그 임금 與夷와 그 大夫 孔父를 시해했다.[桓公二年春 宋督弑其君與夷及其大夫孔父]”고 적고, 또 “襄公 25년 여름에 齊나라의 崔杼가 그 임금 光을 시해했다.[襄公二十五年夏 齊崔杼弑其君光]”고 적었다.
역주7 惠公 以弑得立 : 《春秋左氏傳》 僖公 10년에 “周公 忌父와 王子 黨이 齊나라의 隰朋과 모여 晉나라의 임금 惠公을 세웠다. 晉 惠公은 里克을 죽여서 晉나라를 문란하게 한 惡人을 정벌한 일을 諸侯에게 보고했다.
晉 惠公이 里克을 죽이려고 할 때에 使者를 시켜서 말하기를 ‘자네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네는 두 명의 임금과 한 명의 大夫를 죽였으니, 자네와 같은 사람의 임금이 되는 자는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라고 말하니, 里克이 답하기를 ‘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어떻게 일어설 수 있었겠습니까? 저에게 죄명을 씌우려고 한다면 무슨 구실이 없겠습니까? 臣은 오직 명령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칼에 엎드려 죽었다.
이때 里克의 친구 丕鄭은 秦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뇌물이 늦은 것을 사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죽음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역주8 : 저본에는 ‘悅’로 되어 있는데, 《春秋左氏傳》에 의하여 ‘說’로 바꾸었다.
역주9 惠公殺克……身死而子滅 : 《春秋左氏傳》 僖公 15년에 “惠公은 국내의 大夫들에게 자기를 국내로 맞아들이면 뇌물을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그것을 모두 위반하였고, 秦나라 임금에게는 자기가 晉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면 河南의 다섯 城과 기타 동쪽으로는 虢나라의 국경에까지, 남쪽으로는 華山까지, 河內‧河北으로는 解梁 지방까지 주겠다고 약속하고서는 그것도 위반하였다. 그리고 晉나라가 기근이 들자 秦나라에서는 곡식을 보내주었는데, 반대로 秦나라가 기근이 들자 晉나라에서는 곡식을 보내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春秋左氏傳》에 의하면, 惠公은 즉위한 뒤에 里克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뒤에 또 丕鄭을 죽였으며, 오래지 않아 秦나라가 기근이 든 틈을 타서 군사를 내어 秦나라를 공격하였으나 秦나라와 韓原에서 싸우다가 패하였으므로 惠公은 사로잡혔다가 얼마 안 가서 풀려나 돌아왔는데, 僖公 23년에 죽고, 그 아들 圉를 세우니 이가 바로 懷公인데, 懷公은 내쫓김을 당했다가 19년 만에 귀국하여 정권을 잡은 晉 文公 重耳에게 피살되었다. 그런데 蘇轍은 ‘身死而子滅’이라 하여 마치 父子가 秦나라와 전쟁 중에 함께 죽은 것처럼 적고 있다.
역주10 宋武帝之亡也 託國於徐羨之傅亮謝晦 : 《宋書》 〈武帝本紀〉에 의하면 “武帝가 병이 위중하자, 太子를 불러 경계하기를 ‘檀道濟는 비록 지략은 있지만 원대한 뜻이 없고, 徐羨之와 傅亮은 다른 뜻을 품지 않을 것이고, 謝晦는 자주 정벌해서 꽤 機變을 안다.’ 했다.”고 한다.
역주11 少帝 : 武帝 劉裕의 長子인 劉義符(406~424)를 가리킨다.
역주12 文帝旣立……爲自安之計 : 《宋書》 〈文帝本紀〉, 〈謝晦傳〉에 의하면 “文帝가 즉위한 뒤에 謝晦는 撫軍將軍과 荊州刺史로 삼아 衛將軍과 鎭北將軍으로 승진시키고, 徐羨之는 司徒와 衛將軍으로 승진시키고, 傅亮에게는 左光祿大夫, 開府儀同三司, 撫軍將軍을 더 제수하였다. 이때에 徐羨之와 傅亮 등은 攝政을 하고, 謝晦에게는 荊州刺史를 제수하여 밖에서 지원을 할 수 있게 하려고 하였다. 謝晦는 文帝가 즉위한 뒤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매우 걱정을 하였는데, 新亭을 벗어나 石頭城을 바라보고는 다행히 죽음에서 면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역주13 藩國舊人 : 分封된 나라의 옛 신하를 가리킨다. 文帝가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宜都王에 봉해졌었다.
역주14 劭旣壯而爲商臣之亂 : 《宋書》 〈二凶傳〉에 “前代 이래로 임금이 즉위한 뒤에 皇后가 太子를 낳는 일은 없었는데, 오직 殷나라의 帝乙이 이미 즉위하자, 正妃가 紂를 낳는데, 이에 이르러 또 劭가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劭는 皇子가 된 뒤에 巫蠱로 인하여 폐위당했고, 元嘉 30년(453)에 맨 처음 亂을 일으켜 文帝를 시해하였다. 劭가 태어날 때는 마치 殷나라의 亡國君인 紂王과 같았다. 그러므로 ‘商臣之亂’이라고 칭한 것이다.
역주15 先帝 : 이미 작고한 宋 武帝 劉裕를 가리킨다.
역주16 二昆 : 昆은 兄을 말하니, 여기서는 文帝의 두 兄인 義符와 義眞을 가리킨다.
역주17 北面 : 신하를 가리킨다.
역주18 震主之威 : 君主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는 威勢를 가리킨다.
역주19 : 저본에는 ‘意’로 되어 있는데, 《史記》에 의하여 ‘實’로 바꾸었다.
역주20 爲國者……被之空言而不敢辭 : 《史記》 〈太史公自序〉에 나오는 내용이다.
역주21 空言 : 잘잘못에 대해 褒貶하는 말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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