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惠公旣立 而殺이극里克은 以弑君之罪로 罪之어늘 춘추春秋書曰 진晉殺其대부大夫이극里克이라하니라
이극里克弑君이어늘 而以無罪書하니 此춘추春秋之微意也니라
해제奚齊탁자卓子之立
은 니 雖已爲君
이나 而
진晉人不君也
니라
故로 이극里克爲弑君이언만 而國人之所不君은 則勢必不免이니라
이극里克因國人之所欲廢而廢之
하고 因國人之所欲立而立之
면 則
니라
雖使上有明天子하고 下有賢방백方伯이라도 이극里克之罪 猶可議也니라
이어늘 而歸罪於
이극克하고 以自
於諸侯
하니 其
도의義有不可矣
니라
然이나 혜공惠公殺이극克하고 而背內外之賂하니 國人惡之하고 敵人怨之하니라
하고 至其謀臣
여생呂甥극칭郤稱기예冀芮도 皆以兵死
하니라
蓋背理而傷도의義니 非獨人之所不予요 而天亦不予也니라
失德
하니 三人議將廢之
하고 而其弟
의진義眞도 亦以輕動不任社稷
하니 乃先廢
의진義眞而後
에 廢
소제帝니라
하되 自謂廢狂亂以安社稷
하고 不以賊遺君父
하여 無負於國矣
라하니라
然
이나 문제文帝왕화王華공녕자孔甯子왕담수王曇首는 皆陵上好進之人也
라
惡서선지羨之부량亮하고 據其逕路하여 每以弑逆서선지之禍로 激怒문제文帝하니 문제帝遂決意誅서선지之니라
是時에 공녕자甯子已死하고 왕화華與왕담수曇首는 皆受不次封賞이니라
然이나 원가元嘉三年에 始誅三人하고 是歲에 皇子소劭生하니라
하니 왕화華공녕자甯子之
공녕자子孫
은 無聞於世
요 而
왕담수曇首之
공녕자子승작僧綽은 以才能任事
나 亦幷死於
소劭니라
不然이면 진晉혜공惠公송宋문제文帝禍發이 若合符契니라
사회謝晦將之형주荊州에 自疑不免하여 以問채곽蔡廓하니 채곽廓曰
경卿受
顧命
하고 任以社稷
하니 廢昏立明
은 義無不可
나
但殺人
하고 而以
挾
하여 據上流之重
이면 以古推今
컨대 自免爲難耳
라하니 善夫
라
태사공太史公有言 爲國者는 不可以不知춘추春秋니 前有讒而不見하고 後有賊而不知니라
爲人君父而不通춘추春秋之義者는 必蒙首惡之名이요 爲人臣子而不通춘추春秋之義者는 必蹈簒弑之誅니라
송宋서선지之君臣이 誠略通춘추春秋면 則문제文帝는 必無혜공惠公서선지之禍요 서선지徐부량傅사회謝三人은 必不受이극里克서선지之誅리라
진晉 헌공獻公이 그 세자世子 신생申生을 죽이고 해제奚齊를 세우니 국인國人이 순종하지 않았다.
그 대부大夫 이극里克이 해제奚齊와 탁자卓子를 죽이고 혜공惠公을 들여놓았는데, 《춘추春秋》에서는 모두 ‘시군弑君’으로 적고 있다.
혜공惠公이 이미 즉위하여 이극里克을 죽인 것은 ‘시군弑君’의 죄로 죄를 준 것인데, 《춘추春秋》에서는 “진晉나라가 그 대부大夫 이극里克을 죽였다.”라고 적었다.
《춘추春秋》에서 일반인의 살인을 ‘살殺’로 칭함은 죄 있는 사람을 죽인 것이고, 임금의 살인을 ‘살殺’로 칭함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것이다.
이극里克이 임금을 시해했거늘 ‘무죄無罪’로 적었으니, 이는 바로 《춘추春秋》의 은미한 뜻이다.
해제奚齊와 탁자卓子가 왕위王位에 서는 것은 바로 음淫으로 의義를 깨뜨리는 일이니, 비록 이미 임금이 되었다 하더라도 진晉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이미 임금이 되었으니 임금과 신하의 명분이 정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극里克은 분명 시군弑君을 한 셈인데, 진晉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여기지 않은 것은 정세상 〈시해당하거나 폐위당하는 일을〉 반드시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극里克이 진晉나라 사람들이 폐하고자 한 것을 인하여 그를 폐하고, 진晉나라 사람들이 세우려고 한 것을 인하여 그를 세웠다면, 이극里克의 죄는 송宋나라의 화독華督과 제齊나라의 최저崔杼가 시군弑君한 것과 다르다.
비록 위에 명철한 천자天子가 있고 아래에 어진 방백方伯이 있다 하더라도 이극里克의 죄는 오히려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혜공惠公은 〈이극里克이 두 임금을〉 시해했기 때문에 왕위王位에 서게 되었건만, 죄를 이극里克에게 돌리고 스스로 제후諸侯에게 보고하였으니, 그것은 도의道義에 옳지 못한 점이 있다.
그러나 혜공惠公은 이극里克을 죽이고 국내와 국외에 뇌물을 주겠다는 약속을 위반하였으니, 국인國人이 미워하고 적인敵人이 원망하였다.
결국 군사가 진秦나라에 패하자, 자신이 죽고 아들이 멸하였으며, 그 모신謀臣인 여생呂甥‧극칭郤稱‧기예冀芮도 모두 전쟁에서 죽었다.
대개 이치를 위반하고 도의道義를 상실한 것이니, 사람만이 돕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늘 또한 돕지 않았던 것이다.
송宋 무제武帝가 죽음에 국정國政을 서선지徐羨之‧부량傅亮‧사회謝晦에게 부탁하였다.
소제少帝가 덕망德望을 잃으니, 세 사람은 장차 소제少帝를 폐할 것을 의논하였고, 그 아우 의진義眞도 경거망동하여 사직社稷을 맡길 수 없었으므로 먼저 의진義眞을 폐한 뒤에 소제少帝를 폐하였다.
형제兄弟가 모두 재대로 죽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문제文帝를 맞아 세웠다.
문제文帝가 이미 즉위함에 세 사람은 의구심(경계심)을 가져 서선지徐羨之와 부량傅亮은 안에서 조정朝政을 관장하고, 사회謝晦는 밖으로 장강長江의 상류인 형주荊州로 나가서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세우되, 광란狂亂을 멈추게 하여 사직社稷을 안정시키고 적賊을 군부君父에게 끼치지 아니함으로써 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문제文帝의 번국구신藩國舊臣인 왕화王華‧공녕자孔甯子‧왕담수王曇首는 모두 다른 사람의 위를 능가하여 고관대작을 희망하는 사람들이었다.
서선지徐羨之와 부량傅亮을 미워하고 벼슬에 나아갈 길목에 버티고 서서 매번 시역弑逆의 화禍를 가지고 문제文帝의 노여움을 격동시키니, 문제文帝는 결국 결심하고 서선지徐羨之 등을 베어 죽였다.
세 사람이 이미 죽음에 임금과 신하는 스스로 한 세상에 흔히 있지 않는 대단한 공로라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공녕자孔甯子는 이미 죽었고, 왕화王華와 왕담수王曇首는 모두 차서를 뛰어넘어 파격적인 봉상封賞을 받았다.
문제文帝가 재위在位한 지 30년에 그 강좌江左를 다스림은 으뜸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원가元嘉 3년에 비로소 세 사람을 베어 죽였는데, 이해에 황자皇子 소劭(文帝의 장자長子)가 태어났다.
소劭가 이미 장성함에 상신商臣의 난亂을 일으켰으니, 왕화王華와 공녕자孔甯子의 자손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왕담수王曇首의 아들 승작僧綽은 재능才能이 일을 맡을 만하였지만 또한 아울러 소劭에게 죽었다.
하늘이 사람에게 보응報應하는 것이 이처럼 빨랐다.
그렇지 않다면 진晉 혜공惠公과 송宋 문제文帝의 화禍가 발생한 것이 마치 부계符契(符節)를 합한 듯하였느니라.
사회謝晦가 장차 형주荊州로 가려고 할 때에 스스로 죽음을 면하지 못할까 의심하여 채곽蔡廓에게 물었더니, 채곽蔡廓이 말하기를
“경卿은 선제先帝의 고명顧命을 받고 사직社稷을 맡았으니, 혼암한 임금을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운 것은 도의상 불가할 것이 없지만,
다만 남의 두 형을 죽이고 신하로서 임금을 두렵게 하는 위엄을 가지고서 장강長江의 상류인 형주荊州의 중지重地에 의거한다면, 옛일로 오늘날의 일을 미루어보건대, 스스로 면하기 어렵겠다.”라고 하였으니, 훌륭하다!
채곽蔡廓의 말은 《춘추春秋》를 배우지 않았으나 뜻이 그것과 부합하였다.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춘추春秋》를 몰라서는 안 되니, 앞에 참언讒言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뒤에 적賊이 있어도 알지 못한다.
정상적인 일을 지키되 알맞게 처리할 줄 모르고, 갑자기 발생한 사건을 만나되 임기응변할 줄 모른다.
남의 군부君父가 되어 《춘추春秋》의 뜻을 통하지 못하면 반드시 죄괴罪魁의 이름을 입을 것이고,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춘추春秋》의 뜻을 통하지 못하면 반드시 찬시簒弑의 주참誅斬을 당할 것이다.
그 실상은 모두 좋은 일이지만, 그것을 하되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을 시해했다는 죄명을 입었으나 감히 사피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송宋나라의 군신君臣이 진실로 《춘추春秋》를 약간만이라도 통했더라면 문제文帝는 반드시 혜공惠公의 화禍가 없었을 것이고, 서선지徐羨之‧부량傅亮‧사회謝晦 세 사람은 반드시 이극里克의 주참誅斬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