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轍(1)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老成持重 典刑之言이니라
右臣近於六月二十八日 奏以西使入界 恐必有和請地之議리니
乞因此時擧蘭州及安疆米脂等五寨地棄而與之하여 安邊息民 爲社稷之計언마는
見今西使已到로되 竊聞 執政大臣棄守之論 尙未堅決이라하나이다
臣竊見 皇帝陛下登極以來 而疆埸之事 하니 度其狡心컨대 蓋知朝廷厭兵이라 是以 確然不請하고 欲使此議發自朝廷하여 得以爲重이니이다
朝廷深覺其意하고 忍而不與하니 情得勢窮하여 始來請命이니이다
今若又不許하면 遣其來使徒手而歸리니 一失此機 必爲後悔리이다
彼若點集兵馬하여 屯聚境上 許之則畏兵而與 不復爲恩이요 不許則邊釁一開하여 禍難無已리이다
正在此時 不可失也니이다
臣又聞 昔日取蘭州及五寨地 本非聖意라하나이다
先帝始議取靈武 內臣李憲畏懦하여 不敢前去하고 遂以兵取蘭州니이다
先帝始議取橫山이나 帥臣沈括种諤之徒 不能遵奉聖略하고 遂以兵取五寨니이다
此二者 皆由將吏不職하여 意欲邀功免罪 而先帝之意本則不然이니이다
先帝仍爲指揮保安軍與宥州하여 議立疆界 因循未定하고 而先帝奄棄萬國하시니 遂以至今이니이다
由此言之컨대 蘭州五寨 取之則非先帝本心이요 棄之則出先帝遺意니이다
今議者不深究本末하고 하여 苟避棄地之名하며 不度民力하고 不爲國計하니 其意止欲私己自便이요 非社稷之利也니이다
臣又聞 議者或謂棄守皆不免用兵이니 棄則用兵必遲하고 守則用兵必速이니 遲速之間 利害不遠이니라
若遂以地與之 恐非得計라하나이다
臣聞 聖人應變之機 正在遲速之際라하니 但使事變稍緩이면 則吾得算已多리이다
昔漢文景之世 吳王濞 하여 稱病不朝하고 積財養士하여 謀亂天下니이다
文帝專務含養하여 置而不問하고 加賜几杖하여 恩禮日隆이니이다
濞雖包藏禍心이나 而仁澤浸漬하니 이니이다
至使景帝發天下之兵하고 遣三十六將하여 니이다
議者若不究利害之淺深하고 較禍福之輕重이면 則文帝隱忍不決 近於柔仁하고 景帝剛斷必行 近於疆毅니이다
然而如文帝之計인댄 禍發旣遲 可以徐爲備禦 稍經歲月이면 變故自生이나 以漸制之 勢無不可 雖有十濞라도 亦何能爲리잇가
如景帝之計인댄 禍發旣速이니 未及旋踵 已至交兵이리이다
鋒刃旣接 勝負難保하여 社稷之命 決於一日이리니 이나 何益於事리잇가
今者 欲棄之策 與文帝同하고 而欲守之謀 與景帝類니이다
臣乞宣諭執政하소서
欲棄者 理直而禍緩하고 欲守者 理曲而禍速이니이다
況今日之事 主上妙年하고 母后聽斷하며 將帥吏士 하니 兵交之日 誰使效命이리잇가
若其羽書沓至 이리니 臨機決斷이면 誰任其責이리잇가
惟乞聖慈 以此反覆深慮하여 早賜裁斷하사 이면 則天下幸甚이리이다


05. 난주蘭州 등지等地를 두 번째 논한 장문狀文
노련하고 진중한 전형적인 말이다.
이 최근 6월 28일에 “서하西夏 사신이 지계地界에 들어오면 반드시 강화講和를 요구하고 침탈한 땅을 돌려달라고 청하는 의논이 있을 것이니,
바라옵건대 이때에 난주蘭州안강安疆미지米脂 등 5의 땅을 포기하여 그들에게 줌으로써 변경을 안정시키고 인민을 휴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입니다.”라고 아뢰었사온데,
현재 서하西夏 사신이 이미 이르렀건만 가만히 듣자옵건대 집정대신執政大臣의 포기해야 할 것인지, 지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결정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가만히 보옵건대,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 등극登極하신 이래로 하국夏國이 비록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왔지만, 강역疆埸의 일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교활한 마음을 헤아려보옵건대, 대개 그들은 조정朝廷에서 전쟁을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에 강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청하지 않고, 그 의논이 조정으로부터 나오게 해서 이것으로 일의 무게를 높이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들의 의도를 깊이 파악하고는 꾹 참고 돌려주지 않았으니, 그들은 결국 사정이 급박하고 형세가 궁해지자 비로소 와서 침탈당한 땅을 돌려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지금 만일 또 허락하지 않는다면 보내온 사신이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 기회를 한번 잃으면 반드시 후회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만일 병정兵丁마필馬匹을 불러 모아 경상境上둔취屯聚시킬 때에 가서 허락한다면 전쟁이 두려워서 돌려주는 꼴이니, 다시 조정의 은혜를 보일 수 없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변경의 쟁단爭端이 한번 열려서 화난禍難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일의 대단히 위급함이 바로 이때에 있으니, 절대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이 또 듣자옵건대 “옛날 난주蘭州와 5의 땅을 취한 것은 본래 선제先帝의 뜻이 아니었다.” 합니다.
선제先帝께서 비로소 영무靈武를 취할 것을 의결하였지만, 내신內臣 이헌李憲외나畏懦하여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병력으로 난주蘭州를 취하였습니다.
선제先帝께서 비로소 횡산橫山을 취할 것을 의결하였지만, 수신帥臣 심괄沈括충악种諤의 무리가 선제先帝성략聖略을 받들지 않고 결국 병력으로 5를 취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장리將吏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공로를 구하여 죄를 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선제先帝의 뜻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뒤 원풍元豐 6년에 하국夏國이 사신을 보내와 죄를 청하니, 선제先帝께서 그의 공순함을 가상히 여기고는 변리邊吏에게 명하여 침략侵掠을 금지시켰습니다.
뒤에 그들은 또 사신을 보내와 사은謝恩하고 옛 강토疆土를 돌려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선제先帝께서는 이내 보안군保安軍유주宥州에 지휘하여 강계疆界정립定立할 것을 의논하게 하였으나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정립하지 못하고 선제先帝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으니, 결국 그 문제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난주蘭州와 5를 취한 것은 선제先帝본심本心이 아니고, 버리는 것은 선제先帝유의遺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사정의 본말은 깊이 고찰하지 않고 망령되이 굳게 지킬 의논을 확립하여 구차스럽게 땅을 포기한다는 이름을 피하며, 백성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나라를 위하는 계책을 하지 않으니, 그 뜻은 자기만 편안하려고 할 뿐이고 사직社稷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또 듣자옵건대, 의논하는 자들 중에 어떤 이는 “포기하거나 지키거나 모두 용병用兵을 면치 못하니, 포기할 경우는 용병用兵이 반드시 더디어지고, 지킬 경우는 용병用兵이 반드시 빨라지니, 더디고 빠른 사이에 이해利害관계가 그리 멀지 않다.
만일 땅을 그들에게 돌려준다면 그것은 온당한 계책이 아닌 듯하다.”고 합니다.
은 듣건대 “성인聖人이 사변을 대응하는 관건은 바로 더디고 빠른 데에 있다.”고 하니, 다만 사변을 조금 완화시킨다면 우리는 계책의 성과를 얻음이 이미 많을 것입니다.
옛날 나라 문제文帝경제景帝의 세대에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마음속에 모반할 생각을 품고 병을 핑계로 조회하러 오지 않고, 재물을 쌓아 군사를 양성해서 반란을 모의하여 천하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러나 문제文帝는 오로지 포용하고 양육하는 일에만 힘써 그를 놓아두고 문책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궤장几杖까지 하사하여 은례恩禮가 날로 융숭하였습니다.
유비劉濞는 비록 화심禍心을 품었지만 인택仁澤이 스며들었으므로 끝내 발작發作하지 않았습니다.
경제景帝 때에 와서야 조조鼂錯(晁錯)의 꾀를 써서 죄가 있음으로 인하여 그 군현郡縣을 깎아내려고 하되 “깎아내도 모반하고 깎아내지 않아도 모반할 것이지만, 깎아내면 모반이 빨라져서 가 작게 발생하고, 깎아내지 않으면 모반이 더디어져서 가 크게 발생한다.”고 하였는데, 삭서削書가 한번 내려가자 7이 모두 모반하여
결국 경제景帝로 하여금 천하天下의 군사를 발동하고 36명의 장수를 보내어 겨우 깨뜨리게 하였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만일 이해利害천심淺深을 궁구하지 않고 화복禍福경중輕重을 비교하지 않는다면 문제文帝가 꾹 참고 결단하지 않은 것은 유인柔仁에 가깝고, 경제景帝강단剛斷으로 반드시 결행한 것은 강의彊毅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문제文帝의 계략과 같이한다면 의 발생속도가 더디니 서서히 방비할 수 있고, 약간의 세월이 지나면 변고變故가 스스로 발생하나 점차 제어한다면 사세상 불가할 것이 없으니, 비록 10명의 유비劉濞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경제景帝의 계략과 같이한다면 의 발생이 빠르니, 미처 발꿈치를 돌려 돌아서기도 전에 이미 교전이 벌어집니다.
칼날이 이미 교접하면 승부勝負를 보장하기 어려워 사직社稷의 운명이 하루 사이에 결단날 것이니, 비록 조조鼂錯의 육신을 씹어 먹는다 하더라도 일에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현재 포기하려고 하는 계책은 문제文帝와 같은 것이고, 지키려고 하는 계책은 경제景帝와 같은 것입니다.
은 비옵건대 집정執政에게 선유宣諭하옵소서.
포기하려고 할 경우에는 이유가 공정해서 가 더디게 발생하고, 지키려고 할 경우에는 이유가 불공정해서 가 빠르게 발생합니다.
곡직曲直지속遲速이 어떤 것이 이익이 되고 어떤 것이 해가 됩니까?
하물며 오늘의 일은 주상主上께서는 묘년妙年이시고 모후母后께서는 수렴청정하여 결단하시며, 장수將帥이사吏士들에게는 은정恩情이 아직 두루 미치지 못했는데, 접전하는 날에 누가 목숨을 바쳐 전과를 올리겠습니까?
만일 우서羽書(檄文)가 답지沓至하면 승부勝負가 일정하지 않을 것인데, 미리 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가서 결단한다면 누가 그 책임을 맡겠습니까?
오직 비옵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이것을 반복해 깊이 고려하사 일찍이 결단을 내리시어, 서융西戎으로 하여금 다시 창광猖狂을 일으킴으로써 포기하느냐 지키느냐에 대한 조정의 의론이 모두 현실성이 없게 만들지 않으신다면, 천하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역주
역주1 再論蘭州等地狀 : 본 狀文은 元祐 2년(1087) 7월에 쓴 것이다.
역주2 : 저본에는 ‘請’으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講’으로 바꾸었다.
역주3 夏國雖屢遣使 : 元豐 8년(1085)에는 山陵을 돕기 위해 사신을 보내왔고, 元祐 원년(1086)에는 坤成節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왔고, 元祐 2년에는 宋 哲宗의 登極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내왔다.
역주4 初不自言 : 夏國이 먼저 전쟁에서 침탈한 땅 문제를 꺼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역주5 間不容髮 : 머리털 하나 들어갈 틈도 없다는 말로, 곧 일이 대단히 위급함을 이른다.
역주6 先帝 : 여기서는 宋 神宗 趙頊을 가리킨다.
역주7 其後元豐六年……禁止侵掠 : 《宋史》 〈外國 夏國〉에 의하면 “元豐 6년(1083) 6월에 夏主 秉常이 表文과 함께 사신을 보내와 다시 공물을 바치기를 청하니, 조정의 詔書에 대략 ‘지금 사신을 보내오니 그 공순한 禮貌가 가상하다. 따라서 듣건대 國政이 모두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하니, 더욱 嘉納하겠노라. 이미 邊吏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하지 말도록 하였으니, 너희도 先盟을 지키라.’고 하고 드디어 陝西‧河東의 經略使에게 詔書를 내려서 군사를 출동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역주8 旣又遣使謝恩 請復疆土 : 《宋史》 〈神宗本紀〉에 의하면 “元豐 6년 10월에 夏王 秉常이 다시 사신을 보내와 表를 올려 다시 職貢을 닦을 것을 청하고 옛 疆土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역주9 妄立堅守之議 : 아무런 근거 없이 구차스럽게 蘭州와 5寨를 굳게 지킬 의견을 주장한다는 말이다.
역주10 內懷不軌 : 여기서는 마음속에 모반할 계획을 품은 것을 가리킨다.
역주11 吳王濞……終不能發 : 《史記》 〈吳王濞列傳〉에 의하면 “吳王 劉濞가 병을 핑계로 조회하러 오지 않자, 文帝는 吳國의 使者를 문책하고 그 使者가 吳國으로 돌아갈 때에 吳王에게 几杖을 하사하여 吳王이 정말 老病으로 조회하러 오지 못한 것임을 표시하였다. 그래서 劉濞는 40년 동안 모반하지 않고 藩臣의 예절을 잃지 않았다.”고 하고, 또한 “劉濞는 漢 高祖의 형인 劉仲의 아들로 吳王에 봉해졌는데, 그의 아들이 文帝의 아들에게 피살됨으로 인하여 모반의 뜻을 가졌으나, 文帝 때에는 꾹 참고 있다가 景帝 때에 와서 晁錯(鼂錯)를 誅討한다는 명분으로 7國을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군사가 패배하자 亂軍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역주12 及景帝用鼂錯之謀……七國盡反 : 《史記》 〈吳王濞列傳〉에 의하면 “晁錯는 太子家令이 되어 太子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자주 吳의 땅이 너무 큰 것을 걱정하며 깎아낼 것을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자주 글을 올려 文帝를 설득하였으나 文帝가 관용을 베풀고 차마 처벌하지 못하니, 이로부터 吳王은 더욱 專橫하였다. 景帝가 즉위하자 晁錯는 御史大夫가 되어 景帝를 설득하기를 ‘지금 吳王이 전에 태자와 틈이 있는 관계로 거짓 병을 핑계하고 조회하지 않았으니 법에 비추어 응당 誅斬해야 할 것인데, 文帝께서 차마 誅斬하지 않고 따라서 几杖을 하사하였으니, 마땅히 改過遷善했어야 할 터인데, 더욱 교만하여 돈을 鑄造하고 소금을 제조하여 천하의 도망한 사람들을 꾀어 作亂을 도모하였습니다. 지금 그 땅을 깎아내도 모반하고, 깎아내지 않아도 모반할 것이나, 깎아내면 그 모반이 빨라져서 禍가 작고, 깎아내지 않으면 모반이 더디어져서 禍가 클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다.
역주13 至使景帝發天下之兵……僅而破之 : 《史記》 〈吳王濞列傳〉에 의하면 “7國이 모반했다는 소식이 천자에게 전해지자, 천자는 곧 太尉條侯 周亞夫에게 36장군을 거느리고 가서 吳楚를 치게 하고, 曲周侯 酈寄를 보내 趙나라를 치게 하였고, 將軍 欒布는 齊나라를 치고, 大將軍 竇嬰은 滎陽에 주둔하여 齊나라와 趙나라의 군사를 감시하였다.”고 한다. 그때 7國은 정월에 군사를 일으켰다가 3월에 모두 파괴되었는데, 유독 趙나라만은 포위한 지 10개월 만에 겨우 공격해서 이겼던 것이다.
역주14 雖食鼂錯之肉 : 憤怒한 심정을 형용한 말이다.
역주15 曲直遲速 孰爲利害 : ‘이유의 공정함과 불공정함, 禍의 더딤과 빠름이 어떤 것에 이로움이 있고 어떤 것에 해로움이 있는가?’라는 말이다.
역주16 恩情未接 : 恩仁이 아직 두루 미치지 못함을 가리킨다.
역주17 勝負紛然 : 어떤 때는 이기고 어떤 때는 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역주18 無使西戎……皆不得其便 : 西夏로 하여금 다시 狂虐을 일으켜 변경을 침입하게 함으로써, 포기할 것인가 지킬 것인가에 대한 조정의 의론이 모두 현실성 없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