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跌宕하고 其所責굴원屈原以유하혜柳下惠者似也니라
予竊謂 使굴원原如계찰札之逃而終身焉不入於오吳之市라도 亦可니라
曰
리오하니 가의誼之言
은 或一道也
나 而非
굴원原志
니라
이니 不忍棄其君而之四方
이어늘 而
가의誼敎之以
공자孔子맹가孟軻歷聘諸侯
하고 以求行道
하니 勢必不從矣
니라
굴원屈原廉直而不知道하고 殉節以死然後爲快하니 此所以未合於聖人耳니라
使굴원原如유하혜柳下惠用之則行하고 捨之則藏하여 終身於초楚에 優游以卒歲면 庶幾乎其志也哉인저
문장이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였으며, 그중에 굴원屈原을 유하혜柳下惠의 사례로써 나무란 것은 그럴듯하게 보인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건대, 가사 굴원屈原이 도피하여 〈종신토록 오吳나라의 저자에 들어오지 않은〉 계찰季札처럼 하였더라도 역시 옳았다고 여긴다.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어 멱라강汨羅江을 지나며 부賦를 지어 굴원屈原을 조문하기를 “구주九州를 돌아다니며 임금을 도울 수 있었거늘 어찌 꼭 이 고도故都만을 잊지 못하였는가?”라고 하였으니, 가의賈誼의 말이 혹 〈임금을 도울〉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지만, 굴원屈原의 뜻은 아니다.
굴원屈原과 초楚나라는 성姓이 같으니, 차마 그 임금을 버리고 사방(諸侯國)으로 갈 수 없었거늘 가의賈誼는 공자孔子와 맹가孟軻가 제후諸侯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도道를 행하기를 구하던 것을 가지고 굴원屈原을 가르쳤으니, 형세상 반드시 따르지 못할 것이었다.
유하혜柳下惠는 사사士師(典獄官)가 되어 세 번이나 파면당하면서도 〈노魯나라를〉 떠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바른 도리로 사람을 섬긴다면 어디에 간들 세 번쯤 파면당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바른 도리를 굽혀 사람을 섬긴다면 하필 부모가 사시던 내 나라를 떠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굴원屈原은 청렴하고 정직하나 도道를 알지 못하였고, 절의節義를 위해 죽은 연후에야 상쾌할 수 있었으니, 이 때문에 성인에 부합되지 못한 것이다.
가사 굴원屈原이 유하혜柳下惠처럼 등용되면 나아가 도道를 행하고 버려지면 들어앉아, 초楚나라에서 죽을 때까지 한가하게 지내면서 세월을 보냈다면 거의 그의 뜻대로 되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