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而所本주역易之形而上으로 以爲석가釋노자老之原則하니 又對癡人說夢矣니라
自
으로 以形器治天下
하되 導之以禮樂
하고 齊之以政刑
하여 道行於其間
이나 而民莫知也
니라
문왕文무왕武之後엔 雖소공召公필공畢公之賢이라도 君子不以爲知道者니라
至春秋之際에 관중管仲안자晏子자산子産숙향叔向之徒 以仁義忠신信으로 成功於天下나 然이나 其於道則已遠矣니라
其稱曰
이라하며 라하고 於其門人
엔 惟
안자顔子증자曾子 庶幾以道許之
니라
一時賢者 若노자老子之明道를 其所以尊之者至矣니라
사기史稱공자孔子旣見노자老子하고 退謂弟공자子曰 鳥 吾知其能飛요 魚 吾知其能遊요 獸 吾知其能走니라
走者 可以爲網이요 遊者 可以爲綸이요 飛者 可以爲繒이니라
노자老子體道而不嬰於物하니 공자孔子至以용龍比之니라
捨禮樂政刑而欲行道於世하니 공자孔子固知其難哉인저
하니 其道與
노자老子相
하여 皆
주역易所謂形而上者
언만 而
동한漢世士大夫
는 不能明也
요 위진魏晉以後
에 略知之矣
니라
好之篤者는 則欲施之於世하고 疾之深者는 則欲絶之於世하니 二者皆非也니라
老불佛之道 與吾道同而欲絶之하고 老불佛之敎 與吾敎異而欲行之하니 皆失之矣니라
하여 譯經談妙
하니 至者凡數千人
이나 而
요씨姚氏之亡
은 이니라
양梁무제武繼之하니 강남江南佛事는 前世所未嘗見이니라
후위後魏태무제太武 深信최호崔浩라 최호浩不信佛法하여 勸태무제帝斥去僧徒하고 毁經壞寺하니라
노老불佛之道는 非一人之私說也요 自有天地而有是道矣니라
古之君子는 以之治氣養心하여 其高不可嬰이요 其潔不可溷이니 天地神人이 皆將望而敬之니라
노자老子曰 天得一以淸
하고 地得一以寧
하고 神得一以靈
하고 得一以盈
하고 萬物得一以生
하고 侯王得一以爲天下貞
하니라
無以盈
이면 將恐竭
하고 萬物無以生
이면 將恐絶
하고 侯王無以爲貞而貴高
면 將恐蹶
이라하니라
誠以形器治天下
하되 導之以禮樂
하고 齊之以政刑
하여 道行於其間
이나 而民不知
하고 하여 泯然不見其際而天下化 不亦
주공周공자孔之遺意也哉
아
소씨蘇氏 형제兄弟는 만년晩年에 아울러 석전釋典(佛經)의 뜻을 가지고 스스로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주역周易》의 ‘형이상形而上’을 가지고 석가釋迦와 노자老子의 원칙으로 삼았으니, 또 어리석은 사람을 마주하고 꿈 이야기를 한 것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형이상形而上의 것을 도道라 이르고, 형이하形而下의 것을 기器라 이른다.”고 하였다.
오제五帝‧삼왕三王으로부터 형기形器(물질)를 가지고 천하天下를 다스리되 예악禮樂으로써 지도하고 정형政刑으로써 규제하여 도道가 그 사이에 행하였으나 백성들은 〈도道를〉 알지 못하였다.
문왕文王‧무왕武王 이후에는 비록 소공召公(姬奭)‧필공畢公(畢公高)처럼 현명하다 하더라도 군자君子는 그들이 도道를 알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와서 관중管仲(管夷吾)‧안자晏子(晏嬰)‧자산子産(公孫僑)‧숙향叔向(羊舌肸)의 무리가 인仁‧의義‧충忠‧신信으로써 천하天下에 공功을 이루었으나 그 도道에 대해서는 거리가 이미 멀었다.
공자孔子는 주周나라의 말기에 출생하여 문왕文王‧무왕武王의 유의遺意를 거두고 요堯‧순舜의 극치極致를 얻었다.
그리고 칭하기를 “군자君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小人은 아래로 통달한다.”고 하였으며, 일찍이 스스로 ‘나는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하늘의 진리를 통달한 자’라고 생각하였고, 그 문인門人에 있어서는 오직 안자顔子‧증자曾子에게만 거의 도道를 허여하였다.
그래서 한때 현자賢者 중에 노자老子처럼 도道를 밝힌 이를 추숭한 것이 이미 정점에 도달하였다.
《사기史記》에서 칭하기를 “공자孔子가 이미 노자老子를 만나보고 물러와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새는 잘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고, 물고기는 잘 헤엄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고,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도 낚시로 낚을 수 있고, 나는 것도 주살로 잡을 수 있느니라.
용龍에 대해서만은 내가 알 수 없으니, 그것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노자老子를 만나보니 그는 용龍과 같았느니라.’ 했다.”고 하였다.
노자老子는 도道를 체득하고 외물外物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공자孔子가 용龍으로써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와 더불어 당세를 함께하지는 않았다.
〈노자老子는〉 예악禮樂‧정형政刑을 놓아버리고 도道를 세상에 행하려고 하였으니, 공자孔子는 본래 그 어려운 점을 알았던 것이다.
동한東漢 이후에 불법佛法이 비로소 중국中國에 들어왔는데, 그 도道가 노자老子와 서로 출입出入이 있어 모두 《주역周易》에서 이른바 ‘형이상形而上’인 것이었건만, 한대漢代의 사대부士大夫들은 그것에 밝지 못하였고, 위진魏晉 이후에 약간 그것을 알았다.
독실하게 좋아하는 이는 그것을 세상에 베풀려고 하고, 심하게 미워하는 이는 그것을 세상에서 끊으려고 하였으니, 이 두 경우는 다 잘못된 것이다.
노老‧불佛의 도道가 오도吾道(儒道)와 같은데도 끊으려고 하고, 노老‧불佛의 교敎가 오교吾敎(儒敎)와 다른데도 행하려고 하였으니, 모두 잘못된 것이다.
진秦나라의 요흥姚興이 자그마한 영토에서 승려僧侶와 신도信徒들을 초청하여 불경佛經을 번역하고 묘리妙理를 담론하니, 이르는 자가 무려 수천 명이나 되었지만, 요씨姚氏의 멸망은 〈왔던 사람이 채〉 발꿈치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양梁 무제武帝가 뒤를 이어 불교佛敎를 신봉하니, 강남江南의 불사佛事는 전대前代에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심지어 사신捨身하여 노예奴隷가 되고 교묘郊廟의 제사에 모혈毛血을 올리지 않기까지 하였으나, 부자父子가 모두 후경侯景에게 함락되고 나라가 따라서 망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진秦나라와 양梁나라의 패망敗亡을 보면 불법佛法은 족히 신뢰할 것이 못 된다고 할 것이다.
후위後魏의 태무제太武帝는 최호崔浩를 깊이 믿었는지라, 최호崔浩는 불법佛法을 불신하여 태무제太武帝에게 권해서 승도僧徒를 내쫓고 불경佛經을 헐고 사찰을 파괴하게 하였다.
이미 불법佛法을 멸하였으나 최호崔浩 또한 비죄非罪로 전 가족을 주멸誅滅시켰다.
당唐 무종武宗은 장생술長生術을 구하고자 도사道士의 사정私情을 따라주고, 불교佛敎를 깔아뭉개고 승려僧侶를 멸살하였는데, 1년이 채 안 되어서 시해당해 죽었다.
의논하는 자가 위魏나라와 당唐나라의 화禍를 보면 불법佛法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두 가지 경우는 모두 한쪽만을 본 것일 뿐이다.
노老‧불佛의 도道는 한 사람의 사설私說이 아니고 천지天地가 생겨난 이래로 이 도道가 있었던 것이다.
옛적의 군자君子는 도道로써 기氣를 다스리고 마음을 수양하여, 그 높음은 부여잡을 수 없고, 그 깨끗함은 더럽힐 수 없으니, 천지天地와 신인神人이 모두 바라보고 존경하였다.
성인聖人이 속행하지 않아도 신속하게 도달하고 행하지 않아도 다스려지게 된 것은 한결같이 이 도道를 썼기 때문이다.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하늘은 하나인 도道를 터득해서 청명하고, 땅은 하나인 도道를 터득해서 영정寧靜하고, 신神은 하나인 도道를 터득해서 영묘靈妙하고, 골짜기는 하나인 도道를 터득해서 충만하고, 만물萬物은 하나인 도道를 터득해서 생육生育하고, 임금은 하나인 도道를 터득해야 천하가 바르게 다스려진다.
하늘이 〈만일 하나인 도道를 잃고〉 청명하지 못하면 아마도 갈라져 내릴 것이고, 땅이 〈만일 하나인 도道를 잃고〉 영정寧靜하지 못하면 아마도 무너져 뒤집힐 것이고, 신神이 〈만일 하나인 도道를 잃고〉 영묘靈妙하지 못하면 아마도 막히고 통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골짜기가 〈만일 하나인 도道를 잃고〉 충만하지 못하면 아마도 말라 고갈될 것이고, 만물萬物이 〈만일 하나인 도道를 잃고〉 생육生育하지 못하면 아마도 죽어 없어지게 될 것이고, 임금이 〈만일 하나인 도道를 잃고〉 바르게 다스려 고귀하지 못하면 온 천하가 쓰러지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도道는 만물에 있어서 없는 데가 없거늘 오히려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군신君臣을 멸하고 부자父子를 폐하고서 도道를 세상에 행한다면 그 폐단에는 반드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진실로 형기形器(물질)를 가지고 천하天下를 다스리되 예악禮樂으로써 지도하고 정형政刑으로써 규제하여 도道가 그 사이에 행하였으나 백성들은 〈도道를〉 알지 못하고, 만물萬物이 아울러 생육生育하여 서로 해치지 않고, 도道가 아울러 행하여 서로 위배하지 않아, 그 즈음을 보지 못하나 천하가 교화되는 것이 또한 주공周公‧공자孔子의 유의遺意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