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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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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0. 안평중
管晏兩評處是하고 而姚宋一証更佳니라
관중管仲안평중晏平仲을 평한 부분은 다 옳고, 요원숭姚元崇송경宋璟을 증명한 대문도 아름답다.
管子以桓公伯이나 其家淫侈하여 不能身蹈禮義니라
관자管子(管仲)는 환공桓公패주霸主로 만들었지만, 그 가정은 음란하고 사치하여 몸소 예의禮義를 실행하지 않았다.
晏子之爲人 勇於義하고 篤於禮하니 管子蓋有愧焉이리라
안자晏子(晏嬰)의 사람됨은 에 용감하고 에 독실하였으니, 관자管子는 그에 대해 아마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이나 晏子事靈莊景公하니 皆庸君이라 功業不足道니라
그러나 안자晏子영공靈公장공莊公경공景公을 섬겼는데, 그들은 모두 용렬한 임금이라 공업功業은 족히 거론할 것이 못 된다.
가사 안자晏子가 제대로 임금을 만나기를 마치 관중管仲환공桓公을 만난 것처럼 하였다면 그가 성취한 것은 응당 자산子産과 어깨를 겨루었겠지만, 제후諸侯를 규합하고 융적戎狄을 물리치는 것만은 반드시 관자管子만 못했을 것이다.
나라 요원숭姚元崇송경宋璟은 모두 중흥中興현상賢相이었다.
그러나 원숭元崇권세權勢재화財貨를 좋아하여 여러 간사한 사람들과 함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섬겼지만 윗사람을 침범하는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고, 명황제明皇帝(玄宗)를 섬길 때에 미쳐서 방종한 행동을 하여 태묘太廟의 용마루가 무너졌는데도 동도東都순유巡遊는 아무런 해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至於宋璟하여는 介潔特立於武后世하여 排斥하니 身危者數矣니라
송경宋璟으로 말하면 기개의 고결함이 무후武后의 세대에 특출하여 권행權倖을 배척하였으므로 위험한 고비를 겪은 일이 자주 있었다.
명황제明皇帝 때에도 안색을 살펴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世嘗以元崇比管仲하고 璟比晏子하니 或庶幾焉이니라
그러므로 세상에 일찍이 요원숭姚元崇관중管仲에게 비교하고 송경宋璟안자晏子에게 비교하였으니 그 비교가 거의 맞는 것 같다.
역주
역주1 晏平仲 : 晏平仲은 곧 춘추시대 齊나라 大夫 晏嬰으로 諡號가 平, 字가 仲이기 때문에(《蒙求》에는 字가 平仲이라고 하였음) 史家가 晏平仲이라 칭하였다.
《史記》 〈管晏列傳〉에 “齊나라 靈公‧莊公‧景公을 섬기며 節儉과 力行으로 齊나라에서 이름이 높았고, 이미 齊나라에 정승이 되어서는 밥을 먹을 때 두 가지 이상의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고, 妾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事齊靈公莊公景公 以節儉力行重於齊 旣相齊 食不重肉 妾不衣帛]”란 내용과, “〈莊公이 崔杼에게 시해되자〉 晏子는 莊公의 시신에 엎드려 곡하여 禮를 이룬 뒤에 떠났다.[方晏子伏莊公尸哭之 成禮然後去]”란 내용이 보인다. 후인에 의해 그의 行事와 諫議가 《晏子春秋》로 편찬되었다.
이 글은 《古史》 卷25 〈管晏列傳 제2〉에서 篇名으로 취하였다.
역주2 使晏子而得君……未必能若管子也 : 대의는 “管仲과 晏嬰은 각각 장점이 있으므로 晏嬰의 나라 다스리는 술책은 子産에게 비교할 수 있지만, 다만 軍事를 다스려 霸主가 되게 하는 것은 管仲만 못하다.”는 것이다. 鄭 子産은 鄭나라 正卿을 지낸 公孫僑로 자가 子産이며, 세상에서 名相이라 칭하는데, 그 일은 《左傳紀事本末》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3 唐姚元崇宋璟 皆中興賢相 : 姚元崇은 곧 唐朝의 大臣인 姚崇으로 字는 元之이다. 처음 이름은 元崇이었는데, 突厥의 叱剌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字로 행세하였다. 開元 시대에 와서는 玄宗의 연호(開元)를 피하여 崇으로 개명하였는데, 武則天‧睿宗‧玄宗의 세 조정에 걸쳐 宰相을 역임하였다. 宋璟은 睿宗과 玄宗 때에 宰相을 역임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唐代의 名相으로 꼽혔다.
역주4 元崇好權利……以爲無害 : 《唐書》 〈姚崇傳〉에 의하면 “姚崇은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기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武則天 때에 여러 간사한 사람들과 함께 武后를 섬겼지만 윗사람을 침범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玄宗이 睿宗의 喪中에 있을 때 東都 洛陽을 行幸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太廟의 집이 스스로 무너지는 재변이 발생했으므로 玄宗은 行幸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宋璟과 蘇頲은 모두 ‘天變으로 경고를 보이고 또한 居喪도 아직 마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행행의 중단을 간하였고, 姚崇만은 玄宗의 뜻에 영합하여 ‘구애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明皇帝는 곧 唐 玄宗 李隆基를 가리킨다.
역주5 至於宋璟……亦未嘗有取容之言 : 《唐書》 〈宋璟傳〉에 의하면 “宋璟이 武后 시기 御史中丞으로 있을 때, 마침 張昌宗이 반역할 조짐이 있다는 투서가 올라오자, 武后의 반대를 무릅쓰고 張昌宗을 하옥시킬 것을 끝까지 주장하여 하옥시켰다. 뒤에 張昌宗과 張易之가 자객을 보내 宋璟을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미리 알려준 자가 있어서 살해되지 않았다. 계속 불안을 느끼다가 張昌宗과 張易之가 죽은 뒤에야 사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玄宗朝에서도 宋璟의 강직함은 姚元崇보다 더했으므로 玄宗은 그를 존경하고 항상 뜻을 굽혀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唐書》의 贊에 “姚崇은 應變을 잘하여 천하의 일을 이루고, 宋璟은 文을 잘 지켜 천하의 정도를 유지하였다. 두 사람은 지향하는 길은 같지 않았지만 다같이 治世에 귀착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唐나라를 도와 中興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崇善應變 以成天下之務 璟善守文 以持天下之正 二人道不同 同歸于治 此天所以佐唐使中興也]”라고 평하였다.
역주6 權倖 : 권세가 있고 皇帝의 寵幸을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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