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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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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8. 무제武帝에 대한
論利害處 却審이니라
이해관계를 논한 곳이 매우 세심하였다.
적자嫡子를 왕으로 세울 경우는 먼저 연장자를 세우고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은 따지지 않으며, 서자庶子를 왕으로 세울 경우는 모친의 신분이 귀한 아들을 세우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은 따지지 않는 것이 고금의 공정하고 정당한 도리이다.
이나 하고 하니 古之人蓋有不得已而行之者矣리라
그러나 단주丹朱를 폐하고 을 등용하니 천하가 편안하였고, 제을帝乙미자微子를 폐하고 를 세우니 이 망하였는데, 옛사람은 아마 부득이해서 그와 같이 행했을 것이다.
得已而不已하고 不得已而已之 二者皆亂也니라
할 수 있는데도 안하고 할 수 없는데도 한다면, 두 가지는 다 어지러운 것이다.
子非朱紂而廢天下之正義 君子不忍也 子如朱紂而守天下之正義 君子不爲也니라
아들이 단주丹朱가 아닌데도 천하天下정의正義를 폐하는 것은 군자君子가 차마 하지 않고, 아들이 단주丹朱와 같은데도 천하天下정의正義를 지키는 것은 군자君子가 하지 않는다.
고제高帝가 처음에 혜제惠帝인약仁弱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폐하고 여의如意를 세우려고 했다가, 이윽고 민심이 태자太子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태자를 폐하고 여의如意를 세우려는 의론을 잠재우고 진평陳平주발周勃을 중용하였다.
平勃皆賢而權任均이라
진평陳平주발周勃은 다 어질고 권력과 직책이 균등하였다.
그러므로 혜제惠帝가 비록 승하하고 여산呂産여록呂祿이 비록 멋대로 행동했음에도 문제文帝를 옹립하니 한실漢室이 병들지 않았다.
무제武帝가 이미 늙음에 연왕燕王 광릉왕廣陵王 가 쓸 만하지 못함을 알았는지라, 그들을 폐하고 소자少子를 세운 다음, 곽광霍光김일제金日磾상관걸上官桀상홍양桑弘羊에게 후사後事를 맡겼다.
當是時 昭帝之賢否 未可知 而四人니라
이때에 소제昭帝현부賢否를 알 수는 없었으나 네 사람의 은 서로 반반이었다.
幸而昭帝明哲하고 霍光忠良하니 니라
다행히도 소제昭帝명철明哲하고 곽광霍光충량忠良하였으니, 상관걸上官桀상홍양桑弘羊이 비록 을 일으키려고 해도 일으키지 못하였다.
그 뒤에 다시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우니, 조정朝廷이 안정되어 화환禍患이 없었다.
蓋人君不幸而立幼主 當如屬任賢臣이라야 乃免於亂이니 此必然之勢也니라
대개 군주君主가 불행하여 어린 임금을 세울 경우에는 마땅히 고제高帝 무제武帝처럼 어진 신하에게 맡겨야만 을 면할 수 있으니, 이는 필연의 사세인 것이다.
명제明帝는 병이 위중하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소원한 종실宗室의 자제를 버리고 제왕齊王을 세워서 처음에 조우曹宇조조曹肇로 보좌시키려고 하였으나, 행신倖臣 유방劉放손자孫資조우曹宇조조曹肇의 정직함에 불편을 느끼고 명제明帝에게 사마중달司馬仲達조상曹爽으로 바꾸도록 권하였다.
齊王旣非天下之望이요 而爽又以庸才 與仲達姦雄爲對하니 니라
제왕齊王은 이미 천하天下의 선망 대상이 아니고, 조상曹爽은 또 용렬한 재주를 가지고 간웅姦雄 사마중달司馬仲達과 상대하였으니, 몇 년 사이에 결국 찬시簒弑를 이루었다.
晉武帝 親見此敗矣니라
무제武帝는 이와 같은 패망을 직접 지켜보았다.
혜제惠帝의 어질지 못함은 뭇 신하들이 다 알았지만 차마 견제하지 못하였고, 제왕齊王 의 어짊은 꺼렸지만 민회태자愍懷太子의 총명함은 믿어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우환憂患을 소멸시키리라 생각하였다.
〈훌륭한 사람은〉 오직 여남왕汝南王 한 명만이 있었을 뿐인데 일찍이 그를 쓰지 않고, 사직社稷중임重任양준楊駿에게 맡겨서 일패도지一敗塗地하기에 이른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帝之出齊王也 王渾言於帝曰 하니 若預聞朝政이면니이다
무제武帝제왕齊王 를 〈번국藩國으로〉 내보낼 때에 왕혼王渾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 “나라에 대하여 마치 희단姬旦(周公)의 지친至親이 있는 격이니, 만일 조정朝政에 참여해서 정사政事를 듣게 한다면 두 마음을 가지지 않는 신하가 될 것입니다.
國家之事 若用이면 則有 付之同姓至親이면 又有 事任輕重所在 未有不爲害者也니이다
국가國家의 일은, 만일 후비외친后妃外親을 쓰면 여씨呂氏왕씨王氏우환憂患 같은 것이 있게 되고, 동성지친同姓至親에게 맡기면 또 나라‧나라 등 일곱 나라의 우려와 같은 것이 있게 되니, 직책을 과중하게 맡기면 해를 끼치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惟當任正道求忠良하고 不可事事曲設疑防하여 慮方來之患也니이다
오직 정도正道를 지키는 대신大臣에게 맡기고 충량忠良한 선비를 구해야 할 것이고, 일마다 여러 방면으로 시의猜疑의 방어를 설치하여 장래의 우환을 염려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若以智猜物이면 雖親見疑어늘 至於疏遠이면 亦安能自保乎잇가
만일 지혜智慧로써 다른 사람을 시의猜疑한다면 아무리 지친至親이라 하더라도 의심을 당할 것인데, 소원疏遠한 관계에 이르면 또한 어찌 스스로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人懷危懼 非爲安之理 此最國家之深患也니이다하니 渾之言 天下之至言也니라
사람이 위구심危懼心을 품는 것은 안정을 위하는 도리가 아니니, 이것이 국가國家의 가장 큰 화환禍患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왕혼王渾의 말은 천하天下의 지극히 고명한 언론이다.
무제武帝왕혼王渾의 말은 쓰지 않고 왕우王佑의 계략을 써서, 태자太子모제母弟진왕秦王 관중關中을 총괄하게 하고 초왕楚王 회남왕淮南王 은 아울러 요해지要害地진수鎭守하게 해서 제실帝室의 세력을 더 강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라 왕실王室은 실제로 팔왕八王에게서 이루어졌다.
吾嘗籌之컨대 如攸之親賢
之禍 非其志也니라
나는 일찍이 생각하건대, 와 같은 친현親賢탈적奪嫡는 그의 본의가 아니었다.
不幸至此 天下所宗이니 宗社之計 猶有賴也니라
불행히 이에 이른 것은 천하의 선망이 그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니, 종사宗社(國家)의 대계大計는 오히려 힘입은 바가 있었다.
如佑之計하여 使子弟據兵以捍外患이니 어니와 若變從中起하여 而使人人握兵以救內難이면 此與何進袁紹 召丁原董卓以除宦官으로 何異리오
왕우王佑의 계책대로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군사를 가지고 외환外患을 막게 하였으니, 효왕孝王처럼 나라‧나라를 막은 것은 오히려 가했지만, 만일 이 그 가운데서 일어나서 사람들로 하여금 군사를 가지고 내난內難을 구하게 하였더라면, 이것은 하진何進원소袁紹정원丁原동탁董卓을 불러서 환관宦官을 제거한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古人有言 이라하니 如武帝之擇禍福 可謂不審矣니라
옛사람이 말하기를 “을 택할 때에는 무거운 것을 택하는 것만 못하고, 를 택할 때에는 가벼운 것을 택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으니, 무제武帝처럼 을 택한 것은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漢高帝 懲秦孤立而大封同姓하여 以瓜分於外이나 其權則統於上이라
고제高帝나라의 고립孤立을 경계로 삼아 크게 동성同姓을 봉하여 밖에다가 외쪽을 나누듯이 분배하였지만 그 권한은 위에서 통솔되었다.
其禍亂之發 得藉之以收磐石之功이요
그러므로 화란禍亂의 발생에 그것을 힘입어 반석 같은 공을 거두었다.
晉武帝 懲魏之後而衆建八王이나이나 其權則散於下
무제武帝나라의 최후를 경계로 삼아 몽땅 8을 세웠으나 그 권한이 아래에 흩어져 있었다.
其禍亂之發 擁腫鞅掌하니 卒之互相蹂籍하여 而特以稔魚爛之釁이니라
그러므로 그 화란禍亂의 발생이 종기처럼 연달았으니, 결국은 상호 유린하여 단지 물고기처럼 썩어 문드러지는 변란만 실컷 겪었을 뿐이다.
역주
역주1 晉武帝論 : 晉 武帝는 司馬昭의 아들 司馬炎이다. 魏나라를 폐하여 帝라 칭하고 洛陽에 도읍을 세웠다.
《欒城集》에는 本文의 標題가 〈晉武帝〉로 되어 있다.
역주2 立嫡……以貴不以長 : 《春秋公羊傳》 隱公 元年에 보이는데, 곧 “가령 嫡妻의 아들을 왕으로 세울 경우는 먼저 연장자를 세우고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은 묻지 않으며, 소실의 아들을 왕으로 세울 경우는 모친의 신분이 귀한 아들을 세우고 연령이 많고 적은 것은 묻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주3 堯廢丹朱用舜 而天下安 : 《史記》 〈五帝本紀〉에 “堯는 아들 丹朱가 어질지 못하여 天下를 전해줄 수 없어서 이에 舜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으니, 舜에게 정권을 넘겨주면 天下는 그 이익을 얻고 丹朱는 병들게 되며, 단주에게 넘겨주면 天下는 병들고 丹朱는 그 이익을 얻게 된다.”라고 하였다.
역주4 帝乙廢微子立紂 而商以亡 : 《史記》 〈殷本紀〉에 “帝乙의 맏아들은 微子 啓인데, 그 모친의 신분이 천하기 때문에 嗣位할 수 없고, 少子 辛은 그 모친이 正后이기 때문에 嗣位할 수 있다. 그래서 帝乙이 서거하자, 辛이 嗣位하니 이가 바로 帝辛인데, 천하에서 ‘紂’라 이른다.”라고 하였다.
역주5 漢高帝……而用平勃 : 《史記》 〈呂太后本紀〉에 “高祖가 漢王이 됨에 定陶戚姬를 얻어 총애하고 그녀에게서 趙隱王 如意를 낳았다. 孝惠는 사람됨이 仁弱하므로 高祖는 ‘나를 닮지 않았다.’고 하였다. 항상 太子를 폐하고 戚姬의 아들 如意를 세우려고 하며 ‘如意는 나를 닮았다.’고 하였다. 如意가 趙王으로 봉해진 뒤에 太子를 대신할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大臣의 諫諍과 留侯(張良)의 策略에 힘입어 太子가 폐위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역주6 惠帝雖沒……漢室不病也 : 본서 권8 〈漢光武論〉 참조.
역주7 武帝旣老……以後事 : 본서 권8 〈漢光武論〉 참조.
역주8 枉直相半 : 正直과 邪曲이 각각 절반이란 뜻이다. 곧 霍光‧金日磾의 正直과 上官桀‧桑弘羊의 邪曲을 가리킨다.
역주9 桀羊雖欲爲亂而不遂 : 《漢書》 〈霍光傳〉에 의하면 “上官桀과 桑弘羊이 霍光을 참소하니, 昭帝가 밝게 판단하였다. 그러나 上官桀과 桑弘羊이 昭帝를 폐하고 燕王 旦을 맞아 세워 天子로 삼으려고 도모하니, 霍光이 上官桀과 桑弘羊의 가족을 모두 주살하였다.”고 한다.
역주10 其後……而朝廷晏然無患 : 《漢書》 〈霍光傳〉에 의하면 “昭帝가 서거하자, 霍光이 太后의 詔書를 받들고 昌邑王 賀를 맞아 세웠는데, 賀가 즉위한 뒤에 淫亂하였다. 그래서 霍光은 田延年‧張安世와 함께 모의하여 宣帝를 맞아 세웠다.”고 한다.
역주11 二帝 : 漢 高帝와 漢 武帝를 가리킨다.
역주12 魏明帝疾篤而無子 棄遠宗子而立齊王 : 遠宗子는 血緣이 비교적 소원한 宗室子弟를 가리킨다. 《魏書》 〈明帝紀〉에 의하면 “明帝가 아들이 없자 齊王 曹芳과 秦王 曹詢을 궁중에서 길렀다. 뒤에 曹芳이 嗣立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淫亂을 행하므로 폐위당하였다.”고 한다.
역주13 始欲輔以曹宇曹肇……勸帝易以司馬仲達曹爽 : 《魏書》 〈明帝紀〉에 의하면 “曹宇는 曹操의 아들이다. 明帝가 병이 위중할 때에 曹宇를 大將軍으로 삼아 後事를 부탁하려고 하니, 曹宇가 굳이 사양하므로 명제의 마음도 변하여 결국 曹宇의 벼슬을 면제하였다.
曹肇는 曹操의 族子 曹休의 아들로 재주와 도량이 있어 散騎常侍와 屯騎校尉 등을 역임하였으므로 明帝가 일찍이 그에게 후사를 부탁하였다가 오래지 않아 변경하였다.
劉放은 劉宏의 후손으로 方城侯에 봉해졌고, 孫資는 中都侯에 봉해졌다. 孫資와 劉放은 中書監令으로 있을 때에 오랫동안 권세를 누리고 曹肇‧曹宇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아 뒤에 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明帝로 하여금 初心을 바꾸어 司馬仲達(司馬懿)과 曹操의 族子 曹丹의 아들인 曹爽으로 국정을 보좌시키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역주14 數年之間 遂成簒弑之禍 : 齊王 曹芳이 景初 3년(239)에 즉위하였는데, 正始 10년(249)에 司馬懿가 군사를 일으켜 曹爽 등을 죽인 다음 丞相이 되어 국정을 장악하고 曹芳을 폐하였으며, 그 아들 司馬昭가 高貴鄕公 曹耄를 왕으로 세웠다가 얼마 안 가서 죽이고, 다시 曹奐을 세워 元帝로 삼았는데, 司馬炎이 그를 폐하여 陳留王으로 삼고 스스로 帝가 되었다.
역주15 惠帝之不肖……以爲可以消未然之憂 : 《晉書》 〈武帝紀〉에는 “武帝(司馬炎)가 말년에 惠帝(司馬衷)가 政事를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다. 그러나 皇孫의 聰睿를 믿었기 때문에 廢立할 마음은 없었다.”고 하였고, 〈惠帝紀〉에는 “帝王이 太子로 있을 때에 조정 백관이 모두 정사를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다.”고 하였다.
〈齊王攸列傳〉에는 “齊獻王 攸는 晉 文帝 司馬昭의 次子이자 晉 武帝 司馬炎의 아우로 태어나 才德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한때 文帝의 총애를 받아 太子가 될 뻔한 기회도 자주 있었다. 武帝의 만년에 여러 아들들은 모두 연약하고 太子는 착하지 못하였으므로 朝臣과 내외 인심이 모두 攸에게 돌아갔다. 中書監 荀勗과 侍中 馮紞은 모두 아첨으로 출세했기 때문에 攸가 평소 미워하였다. 荀勗 등은 조정의 선망이 攸에게 있기 때문에 그가 嗣位하면 禍가 반드시 자기들에게 미칠 것이라 생각하고 조용히 武帝를 설득시켜 攸를 藩國으로 보내게 하였다. 攸는 荀勗과 馮紞이 자기를 무함한 것을 알고 憤怨 끝에 병이 났다. 결국 그는 先后의 陵을 지키러 가기를 자청하여 가는 도중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武帝가 서럽게 울자, 곁에서 모시고 있던 馮紞이 ‘齊王의 명예가 사실보다 지나쳐 천하 인심이 그에게 돌아갔었는데, 지금 그가 스스로 죽었으니 社稷의 福입니다. 陛下께선 무엇 때문에 슬퍼하십니까?’라고 하니, 武帝는 눈물을 거두고 울음을 그쳤다.”고 하였다.
愍懷는 곧 愍懷太子 遹로서 惠帝의 長子인데, 賈后에게 폐위되었다.
역주16 獨有一汝南王亮……至於一敗塗地 : 《晉書》 〈武帝紀〉에는 “武帝가 병이 오래 낫지 않자, 詔書를 내려 汝南王 亮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좌하게 하였는데, 楊駿이 이를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고, 武帝의 병세가 위중하자, 楊后가 詔書를 작성해서 楊駿으로 하여금 정사를 보좌하게 하고, 亮을 서둘러 進發하게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亮은 宣帝의 넷째 아들로서 총명하고 재주가 있었는데, 먼저는 楊駿에게 배척을 당하였고, 뒤에는 楚王 瑋에게 해를 입었다. 楊駿은 武元楊皇后의 叔父이자 武悼楊皇后의 부친인데, 惠帝 賈后에게 피살되었다.
역주17 攸之於晉 有姬旦之親 : 姬旦(周公)은 周 成王의 叔父이고, 齊王 攸는 晉 惠帝의 叔父였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역주18 腹心不貳之臣 : 마음을 놓고 믿을 수 있는 두 마음 가지지 않은 신하를 가리킨다.
역주19 后妃外親 : 外戚으로서 母族과 妻族을 가리킨다.
역주20 呂氏王氏之虞 : 呂后가 天子의 일을 대신 행하면서 여러 呂氏들에게 왕을 시키고 劉氏를 배척하여 천하를 어지럽게 한 일과, 漢 元帝 王皇后 아우의 아들 王莽이 권한이 막중하여 簒弑의 禍를 이룬 일을 가리킨다.
역주21 吳楚七國之慮 : 漢 高祖가 宗室至親을 크게 봉한 데에 생긴 폐단의 일종으로, 곧 吳王 劉濞가 文帝 때에 불순한 마음을 품었다가, 景帝 때에 와서 諸侯의 封地를 削奪하자, 결국 楚‧趙‧胶東‧胶西‧菑川‧濟南을 불러서 무장하고 나서 반란을 일으킨 일을 가리킨다.
역주22 帝不能用……以强帝室 : 《晉書》 〈武帝紀〉에 보인다. ‘母弟’ 곧 同母弟이다. 秦王 柬과 惠帝가 다 武元楊皇后의 소생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23 晉室之亂 實成於八王 : 武帝가 죽은 뒤에 汝南王 亮이 太宰가 되어 권력을 휘둘렀다. 그 뒤에 楚王 瑋, 趙王 倫, 齊王 囧, 河間王 顒, 成都王 穎, 長沙王 乂, 東海王 越이 선후하여 무려 16년 동안 권력 다툼을 하였으니, 역사에서 이것을 ‘八王之亂’이라 칭하였다.
역주24 奪嫡之禍 非其志也 : 攸가 효성으로 인하여 太子(惠帝)를 대신해서 섰으나 이것은 攸의 본래 뜻이 아니고, 다만 武帝 만년에 아들들이 착하지 못하여 조정과 내외의 선망이 攸에게 있었기 때문이란 말이다.
역주25 奪嫡 : 支孫이 宗孫을 누르고 종손 노릇을 하는 일을 가리킨다.
역주26 如梁孝王之禦吳楚 尙可 : 《漢書》 〈文三王傳〉에 의하면 “吳나라‧楚나라 등 일곱 나라가 반역을 할 때에 梁孝王 劉武는 睢陽을 지키고 韓安國‧張羽 등으로 장수를 삼아 吳나라‧楚나라를 치게 하니, 吳나라‧楚나라가 저지를 받아 梁나라를 넘어 서쪽으로 향해서 京師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吳나라와 楚나라의 亂을 평정할 때 梁나라가 사살하거나 사로잡은 숫자가 諸王 중에 최고였다.”고 한다.
역주27 擇福莫若重 擇禍莫若輕 : 《國語》 〈晉語 六〉에 보이는데, 대의는 곧 福 두 개 중에서 하나를 택할 때에는 무거운 福을 택하는 것이 낫고, 禍 두 개 중에서 하나를 택할 때에는 가벼운 禍를 택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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