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
이나 하고 하니 古之人蓋有不得已而行之者矣
리라
子非단주朱주紂而廢天下之正義는 君子不忍也요 子如단주朱주紂而守天下之正義는 君子不爲也니라
當是時
에 소제昭帝之賢否
를 未可知
나 而四人
也
니라
蓋人君不幸而立幼主
엔 當如
屬任賢臣
이라야 乃免於亂
이니 此必然之勢也
니라
제왕齊王旣非天下之望
이요 而
조상爽又以庸才
로 與
사마중달仲達姦雄爲對
하니 니라
무제帝之出
제왕齊王也
에 왕혼王渾言於
무제帝曰
하니 若預聞朝政
이면 則
也
니이다
國家之事
는 若用
이면 則有
요 付之同姓至親
이면 又有
니 事任輕重所在
면 未有不爲害者也
니이다
惟當任正道求忠良하고 不可事事曲設疑防하여 慮方來之患也니이다
若以智猜物이면 雖親見疑어늘 至於疏遠이면 亦安能自保乎잇가
人懷危懼는 非爲安之理니 此最國家之深患也니이다하니 왕혼渾之言은 天下之至言也니라
吾嘗籌之
컨대 如
유攸之親賢
이 之禍
는 非其志也
니라
如
왕우佑之計
하여 使子弟據兵以捍外患
이니 어니와 若變從中起
하여 而使人人握兵以救內難
이면 此與
하진何進원소袁紹 召
정원丁原동탁董卓以除宦官
으로 하진何異
리오
古人有言
이라하니 如
무제武帝之擇禍福
은 可謂不審矣
니라
한漢고제高帝는 懲진秦孤立而大封同姓하여 以瓜分於外나 然이나 其權則統於上이라
진晉무제武帝는 懲위魏之後而衆建八王이나 然이나 其權則散於下라
故로 其禍亂之發이 擁腫鞅掌하니 卒之互相蹂籍하여 而特以稔魚爛之釁이니라
적자嫡子를 왕으로 세울 경우는 먼저 연장자를 세우고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은 따지지 않으며, 서자庶子를 왕으로 세울 경우는 모친의 신분이 귀한 아들을 세우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은 따지지 않는 것이 고금의 공정하고 정당한 도리이다.
그러나 요堯는 단주丹朱를 폐하고 순舜을 등용하니 천하가 편안하였고, 제을帝乙은 미자微子를 폐하고 주紂를 세우니 상商이 망하였는데, 옛사람은 아마 부득이해서 그와 같이 행했을 것이다.
할 수 있는데도 안하고 할 수 없는데도 한다면, 두 가지는 다 어지러운 것이다.
아들이 단주丹朱나 주紂가 아닌데도 천하天下의 정의正義를 폐하는 것은 군자君子가 차마 하지 않고, 아들이 단주丹朱나 주紂와 같은데도 천하天下의 정의正義를 지키는 것은 군자君子가 하지 않는다.
한漢 고제高帝가 처음에 혜제惠帝가 인약仁弱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폐하고 여의如意를 세우려고 했다가, 이윽고 민심이 태자太子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태자를 폐하고 여의如意를 세우려는 의론을 잠재우고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을 중용하였다.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은 다 어질고 권력과 직책이 균등하였다.
그러므로 혜제惠帝가 비록 승하하고 여산呂産과 여록呂祿이 비록 멋대로 행동했음에도 문제文帝를 옹립하니 한실漢室이 병들지 않았다.
무제武帝가 이미 늙음에 연왕燕王 단旦과 광릉왕廣陵王 서胥가 쓸 만하지 못함을 알았는지라, 그들을 폐하고 소자少子를 세운 다음, 곽광霍光‧김일제金日磾‧상관걸上官桀‧상홍양桑弘羊에게 후사後事를 맡겼다.
이때에 소제昭帝의 현부賢否를 알 수는 없었으나 네 사람의 왕枉‧직直은 서로 반반이었다.
다행히도 소제昭帝가 명철明哲하고 곽광霍光이 충량忠良하였으니, 상관걸上官桀과 상홍양桑弘羊이 비록 난亂을 일으키려고 해도 일으키지 못하였다.
그 뒤에 다시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우니, 조정朝廷이 안정되어 화환禍患이 없었다.
대개 군주君主가 불행하여 어린 임금을 세울 경우에는 마땅히 한漢 고제高帝와 한漢 무제武帝처럼 어진 신하에게 맡겨야만 난亂을 면할 수 있으니, 이는 필연의 사세인 것이다.
위魏 명제明帝는 병이 위중하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소원한 종실宗室의 자제를 버리고 제왕齊王을 세워서 처음에 조우曹宇와 조조曹肇로 보좌시키려고 하였으나, 행신倖臣 유방劉放과 손자孫資가 조우曹宇와 조조曹肇의 정직함에 불편을 느끼고 명제明帝에게 사마중달司馬仲達과 조상曹爽으로 바꾸도록 권하였다.
제왕齊王은 이미 천하天下의 선망 대상이 아니고, 조상曹爽은 또 용렬한 재주를 가지고 간웅姦雄 사마중달司馬仲達과 상대하였으니, 몇 년 사이에 결국 찬시簒弑의 화禍를 이루었다.
진晉 무제武帝는 이와 같은 패망을 직접 지켜보았다.
혜제惠帝의 어질지 못함은 뭇 신하들이 다 알았지만 차마 견제하지 못하였고, 제왕齊王 유攸의 어짊은 꺼렸지만 민회태자愍懷太子의 총명함은 믿어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우환憂患을 소멸시키리라 생각하였다.
〈훌륭한 사람은〉 오직 여남왕汝南王 량亮 한 명만이 있었을 뿐인데 일찍이 그를 쓰지 않고, 사직社稷의 중임重任을 양준楊駿에게 맡겨서 일패도지一敗塗地하기에 이른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무제武帝가 제왕齊王 유攸를 〈번국藩國으로〉 내보낼 때에 왕혼王渾이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 “유攸는 진晉나라에 대하여 마치 희단姬旦(周公)의 지친至親이 있는 격이니, 만일 조정朝政에 참여해서 정사政事를 듣게 한다면 두 마음을 가지지 않는 신하가 될 것입니다.
국가國家의 일은, 만일 후비외친后妃外親을 쓰면 여씨呂氏와 왕씨王氏의 우환憂患 같은 것이 있게 되고, 동성지친同姓至親에게 맡기면 또 오吳나라‧초楚나라 등 일곱 나라의 우려와 같은 것이 있게 되니, 직책을 과중하게 맡기면 해를 끼치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오직 정도正道를 지키는 대신大臣에게 맡기고 충량忠良한 선비를 구해야 할 것이고, 일마다 여러 방면으로 시의猜疑의 방어를 설치하여 장래의 우환을 염려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지혜智慧로써 다른 사람을 시의猜疑한다면 아무리 지친至親이라 하더라도 의심을 당할 것인데, 소원疏遠한 관계에 이르면 또한 어찌 스스로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위구심危懼心을 품는 것은 안정을 위하는 도리가 아니니, 이것이 국가國家의 가장 큰 화환禍患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왕혼王渾의 말은 천하天下의 지극히 고명한 언론이다.
무제武帝는 왕혼王渾의 말은 쓰지 않고 왕우王佑의 계략을 써서, 태자太子의 모제母弟인 진왕秦王 간柬은 관중關中을 총괄하게 하고 초왕楚王 위瑋와 회남왕淮南王 윤允은 아울러 요해지要害地를 진수鎭守하게 해서 제실帝室의 세력을 더 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晉나라 왕실王室의 난亂은 실제로 팔왕八王에게서 이루어졌다.
나는 일찍이 생각하건대, 유攸와 같은 친현親賢이 탈적奪嫡한 화禍는 그의 본의가 아니었다.
불행히 이에 이른 것은 천하의 선망이 그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니, 종사宗社(國家)의 대계大計는 오히려 힘입은 바가 있었다.
왕우王佑의 계책대로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군사를 가지고 외환外患을 막게 하였으니, 양梁 효왕孝王처럼 오吳나라‧초楚나라를 막은 것은 오히려 가했지만, 만일 변變이 그 가운데서 일어나서 사람들로 하여금 군사를 가지고 내난內難을 구하게 하였더라면, 이것은 하진何進과 원소袁紹가 정원丁原과 동탁董卓을 불러서 환관宦官을 제거한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복福을 택할 때에는 무거운 것을 택하는 것만 못하고, 화禍를 택할 때에는 가벼운 것을 택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으니, 무제武帝처럼 화禍‧복福을 택한 것은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漢 고제高帝는 진秦나라의 고립孤立을 경계로 삼아 크게 동성同姓을 봉하여 밖에다가 외쪽을 나누듯이 분배하였지만 그 권한은 위에서 통솔되었다.
그러므로 화란禍亂의 발생에 그것을 힘입어 반석 같은 공을 거두었다.
진晉 무제武帝는 위魏나라의 최후를 경계로 삼아 몽땅 8왕王을 세웠으나 그 권한이 아래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화란禍亂의 발생이 종기처럼 연달았으니, 결국은 상호 유린하여 단지 물고기처럼 썩어 문드러지는 변란만 실컷 겪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