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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3)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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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0. 상고현학上高縣學에 대한 기문
하다
〈문장이〉 우아하다.
옛날에는 학교교육을 정치수단의 한 방편으로 삼았으니, 향려鄕閭의 준걸한 인재를 골라서 학교에 입학시키고, 《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를 교재로 제시해서 학문실력이 성숙하게 하였고, 학문이 이미 이루어졌으면 향려鄕閭로 돌아가 다시 서로 가르쳐서 학문이 그 부자‧형제에게 미치게 하였다.
그러므로 삼대三代의 시절에는 노인을 봉양하고 빈객을 대접하고 송사를 처결하고 모책謀策을 결정하고 적의 왼쪽 귀를 바치는 일들이 모두 학궁學宮에서 거행되었다.
習其耳目하여 而和其志氣하니 是以 其政不煩하고 其刑不瀆하여 而民之化之也速이니라
이목耳目의 문견을 익혀 지기志氣를 화평하게 하였으니, 이 때문에 정치가 번거롭지 않고 형벌이 가해지지 않아도 백성들의 교화속도가 빨랐다.
이나 考其行事 非獨於學然也 凡禮樂之事 皆所以爲政하여 而敎民不犯者也니라
그러나 그 행사行事를 상고하면 학궁에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郊祀사사社祀조제祖祭묘제廟祭산천제山川祭오사五祀는 무릇 예악禮樂에 관한 일로 모두 정치를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윗사람을 범하지 않도록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其稱曰 이라하니라
그러므로 일컫기를 “정치라는 것은 임금이 몸을 편안히 간직하기 위한 도구이다.”라고 하였다.
蓋古之君子 하며 從容禮樂之間 未嘗以力加其民이나 民觀而化之하여 以不逆其上이니 其所以藏身之固如此니라
대개 옛적의 군자君子는 낯빛을 바르게 하고, 용모容貌를 단정하게 움직이고, 말소리를 가다듬어서 부럽게 내며, 조용히 예악禮樂을 운용하는 사이에 한 번도 힘으로 백성들을 억압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지켜보고 감화하여 윗사람을 거역하지 않았으니, 몸을 편안히 간직하는 것이 그처럼 확고하였다.
至於後世 不然하니 廢禮而任法하여 以鞭扑刀鋸 하고 有一不順이면 常以身較之니라
후세에 와서는 그렇지 않았으니, 를 폐하고 에 맡겨서 편복鞭扑도거刀鋸를 가지고 권력으로 아랫사람을 억압하였고, 한 번이라도 불순한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몸소 나서서 따졌다.
民於是始悍然不服하고 而上之人 親受其病하여 而古之所以藏身之術 亡矣니라
백성들은 이에 비로소 사나워져 복종하지 않았고, 위에 있는 사람은 직접 그 병폐를 받았으니, 옛날에 몸을 편안히 간직하던 술책이 없어졌다.
자유子游무성武城읍장邑長이 되었을 때에 현가弦歌로써 정치를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부자夫子께 듣건대 ‘군자가 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를 배우면 〈온순해져서〉 부리기 쉽다.’ 하셨다.”라고 하였으니,
夫使武城之人으로 其君子愛人而不害하고 其小人易使而不違 則子游之政 豈不綽然有餘裕哉
무릇 무성武城 사람들로 하여금 그 군자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 소인은 〈온순해져서〉 부리게 쉽게 했다면, 자유子游의 정치는 어찌 여유작작한 정치가 아니었겠는가?
上高 筠之小邑이니 介於山林之間이니라
상고上高균주筠州의 작은 으로 산림山林의 사이에 끼어 있다.
民不知學하고 而縣亦無學以詔民이니라
백성들은 학문을 알지 못하였고, 상고현上高縣에는 또한 백성들을 가르칠 학궁이 없었다.
縣令李君懷道 始至 思所以導民하여 乃謀建學宮하니 縣人知其令之將敎之也하고 亦相帥出力以繕其事하여 不逾年而學以具니라
현령縣令 이군李君 회도懷道는 갓 도임하자, 백성들을 지도할 바를 생각하여 이에 학궁을 건립할 것을 도모하니, 상고현上高縣 백성들은 그 현령縣令이 장차 교육정책을 펼칠 것임을 알고, 또한 서로들 인솔하고 나와서 힘을 내어 그 일을 도와서 채 1년이 안 되어 학궁이 갖추어졌다.
奠享有堂하고 講勸有位하고 退習有齋하고 膳浴有舍하니 邑人執經而至者 數十百人이니라
제사를 드릴 당실堂室이 있게 되고, 학문을 강권講勸할 자리가 있게 되고, 물러가서 학문을 익힐 재실齋室이 있게 되고, 음식을 장만하고 목욕을 할 수 있는 전용 방사房舍가 있게 되었으니, 그 사람으로서 경전經典을 가지고 온 자가 수십 수백 명이나 되었다.
於是 李君之政 不苛而民肅하고 賦役獄訟 不諉其府니라
이에 이군李君의 정치가 까다롭지 않았으나 백성들이 엄숙하였고, 부역賦役옥송獄訟이 그 관부官府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李君喜學之成而樂民之不犯하니 知其爲學之力也니라
이군李君은 학궁이 이루진 것을 기뻐하고 백성들이 윗사람에게 덤벼들지 않은 것을 즐거워하였으니, 그것은 학문을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求記其事하여 告後以不廢하고 予亦嘉李君之爲邑 有古之道 其所以得於民者 非復世俗之吏也니라
그래서 그는 그 일을 기록하여 후세에 폐기하지 않도록 고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나 또한 이군李君이 고을을 다스림에 옛사람의 치도治道가 있음을 가상히 여겼으니, 그가 백성들에게 민심을 얻은 것은 속세俗世의 관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爲書其實하고 且以志上高有學之始니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그 사실을 적고, 또한 상고현上高縣에 학궁이 최초로 있게 된 연유를 적었다.
元豐五年三月二十日 眉山蘇轍하노라
원풍元豐 5년 3월 20일에 미산眉山 소철蘇轍은 기문을 쓰노라.
역주
역주1 上高縣學記 : 본 기문은 元豐 5년(1082)에 지은 것이다.
역주2 古者 : 여기서는 夏‧殷‧周 三代를 가리킨다.
역주3 膠庠 : ‘膠’는 古代의 大學 이름이었다. 《禮記》 〈王制〉에 “周나라 사람들은 國老는 東膠에서 봉양하였다.[周人養國老於東膠]”고 하였는데, 鄭玄의 注에 “東膠도 大學이었다.”고 하였다.
‘庠’은 古代의 학교이름이었다. 《漢書》 〈儒林傳〉에 의하면 “夏代에서는 ‘校’, 殷代에서는 ‘庠’, 周代에서는 ‘序’라고 했다.”고 한다.
역주4 示之以詩書禮樂……以及其父子兄弟 : 학교에서는 《詩經》‧《書經》‧《禮記》‧《樂記》를 교재로 해서 준걸한 인재를 교육하되 그들의 학문실력이 성숙하게 한 다음에 鄕閭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의 父老와 鄕親들을 가르치게 하였다는 말이다.
역주5 三代之間……無不由學 : 《禮記》 〈王制〉에 “周나라 사람들은 國老는 東膠에서 봉양하고 庶老는 虞庠에서 봉양하였다.……天子가 장차 出征하려고 할 때에는 上帝에게 類祭를 올리고, 社에 宜祭를 올리고, 禰廟에 造祭를 올리며, 정벌하는 곳에서 禡祭를 올리고, 學宮에서 謀策을 결정한다.
출정하여 죄인을 잡아 가지고 돌아와서는 學宮에 釋奠을 올리고, 訊問하는 자와 적에게 벤 왼쪽 귀의 많고 적음을 고유한다.[周人養國老於東膠 養庶老於虞庠……天子將出征 類乎上帝 宜乎社 造乎禰 禡於所征之地 受命於祖 受成於學 出征執有罪 反釋奠于學 以訊馘告]”란 내용이 보인다.
‘馘’은 정벌에서 벤 적의 왼쪽 귀인데, 戰後에 그것을 바쳐서 전공을 계산하는 자료로 삼게 하였다.
역주6 郊社祖廟山川五祀 : ‘郊’는 郊祀로,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내는 것을 가리킨다. ‘社’는 社神에게 제사 지내는 일이니, 곧 土地神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가리킨다. ‘祖’는 祖祭로 곧 출행할 때에 路神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가리킨다. ‘廟’는 廟祀로 祖宗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가리킨다. ‘山川’은 山川神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가리키니, 곧 封禪 등과 같은 것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 제사 활동을 고대에서는 국가를 위하는 大事로 보았다.
역주7 政者 君之所以藏身 : 《禮記》 〈禮運〉에 보인다.
역주8 正顔色……出詞(辭)氣 : 《論語》 〈泰伯〉에 “군자가 소중히 여겨야 할 도리가 셋이 있으니, 용모를 움직임에 거칠거나 방종하지 말아야 하고, 낯빛을 바르게 하여 신의가 있어야 하며, 말소리를 가다듬어 비루하거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을 멀리해야 한다.[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貎斯遠暴慢矣 正顔色斯近信矣 出辭氣斯遠鄙倍矣]”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9 力勝其下 : 권세와 용력으로 아랫사람을 굴복시킴을 가리킨다.
역주10 子游爲武城宰……小人學道則易使也 : 《論語》 〈陽貨〉에 “공자께서 武城에 가셔서 현악 반주로 시를 읊는 소리를 들으시고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기를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느냐?’고 하셨다.
子游가 대답하기를 ‘전에 偃(子游의 이름)이 선생님께 배울 때에는 「군자가 道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道를 배우면 온순해져서 부리기 쉽다.」고 하시더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아, 偃의 말이 옳다. 조금 전의 말은 농담일 뿐이다.’라고 했다.[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曰 割鷄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 偃也 聞諸夫子 曰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子 偃之言是也 前言戱之耳]”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1 : 張伯行은 《唐宋八大家文鈔》에서 “記文을 배우는 데는 曾鞏과 王安石의 기문을 최고로 친다. 이 기문은 醇質하면서 意味가 있으니, 또한 《潁濱集》 중의 粹然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한다.[學記文 以曾王爲最 此文醇質而有意味 亦潁濱集中之粹然者 故錄之]”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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