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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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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之道 惟其辯之而無窮이요 攻之而無間이니라
辯之而有窮이요 攻之而有間이면 則是不足以爲道니라
昔者六國之際 하여 以熒惑天下하니 니라
夫天下之人 不可以絶其之親하고 而合其之懽이니 此其勢然也니라
노담老耼장주莊周 知天下之하고 起而承之하여 以爲兼愛爲我之不足以收天下
是以 不爲爲我不爲兼愛하고 而處乎兼愛爲我之外니라
此其意以爲 不兼愛 則天下議其無親하고 不爲我 則天下譏其爲人이라
하여而曰 我皆無所爲 以是足以自免而逃天下之是非矣라하니라
天下之人 惟其是所是하고 非所非
是以 其說可得而이니라
今以노담장주無所是非하고 而其終歸於하니 此其思之亦已詳矣니라
양씨楊氏之爲我 묵씨墨氏之兼愛 此其爲道莫不有所執也니라
爲我者 爲兼愛之所詆하고 而兼愛者 爲爲我之所毁니라
是二者 其地皆不可居也니라
然而得其間而固守之 則可以杜天下之異端而絶其口니라
蓋古之聖人 惟其得而居之
是以 天下大服하고 而其道遂傳於後世니라
노담老耼장주莊周 不得由大道而見其隙하고 竊入於其間하여 而執其機
是以 其論縱橫堅固하여 而不可破也니라
且夫天下之事 安可一說治也리오
而彼二子者 欲一之以兼愛하고 斷之以爲我
其說有時焉而遂窮이니라
夫惟聖人 能處於其間而이나이나 兼愛爲我 亦莫棄也하고 而能用之하여하며 處天下之紛紜하되 而不失其當이니라
故曰 백이伯夷숙제叔齊 不降其志하고 不辱其身하며
유하혜柳下惠소련少連 降志而辱身이나 言中倫하고 行中慮하며
우중虞仲이일夷逸 隱居放言이나 身中淸하고 廢中權하며
夫無可無不可노담老耼장주莊周之所以爲辯也중니仲尼亦云하니 則夫노담老耼장주莊周 其思之不可以爲不深矣니라
蓋嘗聞之컨대 聖人之道 處於可不可之際하고 而遂從而
是以 其說萬變而不可窮하며 노담老耼장주莊周 從而
是以 其說汗漫而不可詰이라하니 今將以求夫중니仲尼노담老耼是非者 惟能知夫虛實之可用與否而已矣니라
蓋天下固有物也
有物而相遭 則固亦有事矣니라
是故 聖人而制其御有之道하여 以治其有實之事 則於天下 夫亦何事之不可爲리오
則其用力不已甚勞矣哉
노담老耼장주莊周 則亦嘗自知其窮矣 夫其窮者 何也
不若從其有而有之之爲易也니라
故曰
無欲以觀其妙라하고 而又曰 常有欲以觀其徼라하니라
而至於佛者하여는 則亦曰 斷滅이라하고 而又曰 無斷無滅이라하니라
夫旣曰 無矣라하고 而又恐無之反以爲窮이니라
旣斷滅矣하고 又恐斷滅之適以爲累하니 則夫其情 可以見矣니라
노담老耼장주莊周 其亦近於中庸而無忌憚者哉인저


08. 노자老子에 대한
천하天下는 아무리 변론해도 궁진窮盡이 없고, 아무리 공격해도 이론상에 파탄이 없는 것이다.
변론해서 궁진窮盡이 있고 공격해서 이론상에 파탄이 있다면 이는 족히 다운 가 되지 못한다.
옛날 육국시대六國時代초야草野의 선비들이 멋대로 의논하여 천하天下를 현혹시키니, 양씨楊氏는 자신만을 위하는 ‘위아爲我’의 학설을 내놓고, 묵씨墨氏는 똑같이 사랑하는 ‘겸애兼愛’의 학설을 내놓았다.
천하天下의 사람들 중에 군신君臣, 부자父子의 친속을 고념顧念하지 않는 자들은 전부 양씨楊氏에게 돌아가고, 생판 모르는 길 가는 사람이 모두 부자父子, 형제兄弟처럼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는 자들은 전부 묵씨墨氏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천하天下 사람들은 천속天屬을 끊고 친연관계가 없는 사람과 어울릴 수 없는 법이니, 이는 그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담老耼장주莊周천하天下의 부정확한 것임을 알고 일어나서 이어받아 ‘겸애兼愛’와 ‘위아爲我’는 족히 천하天下를 수습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러므로 ‘위아爲我’도 하지 않고 ‘겸애兼愛’도 하지 않고서 ‘겸애兼愛’와 ‘위아爲我’의 밖에 처하였다.
그들 생각은 또 “ ‘겸애兼愛’를 하지 않으면 천하天下 사람들이 친속이 없음을 비방하고, ‘위아爲我’를 하지 않으면 천하天下 사람들이 남을 위함을 기롱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 둘 다 갈 만한 곳이 없어서 범범泛泛하게 그 사이에 부유浮游하면서 “나는 모두 하는 바가 없으니, 이로써 족히 스스로 면하여 천하天下시비是非를 도피한다.”라고 한 것이다.
천하天下 사람들은 옳은 건 옳다고 하고 그른 건 그르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 학설은 시말始末을 고찰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노담老耼장주莊周는 옳고 그른 바가 없고 결국은 ‘무유無有’에 귀착하였으니, 이것은 그 생각이 또한 치밀하고 자상한 것이다.
양씨楊氏의 ‘위아爲我’와 묵씨墨氏의 ‘겸애兼愛’, 이것은 그 도를 행함에 집착하는 바가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위아爲我’는 ‘겸애兼愛’의 비난을 받고, ‘겸애兼愛’는 ‘위아爲我’의 훼방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은 그 땅에서 다 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이를 얻어서 고수하면 천하天下이단異端을 막아 그 입을 다물게 할 수가 있다.
옛적의 성인聖人은 그곳을 얻어서 거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天下 사람들이 크게 복종하였고 그 는 드디어 후세後世에 전해졌다.
그런데 지금 노담老耼장주莊周대도大道를 경유함으로써 그 틈을 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그 사이에 들어가서 그 관건關鍵을 잡았다.
이 때문에 그 이론이 종횡縱橫하고 견고堅固하여 깨뜨릴 수가 없다.
또한 천하天下의 일을 어떻게 한마디 말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 두 사람은 ‘겸애兼愛’를 가지고 일관하려 하고, ‘위아爲我’를 가지고 결단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그 은 결국 한계를 드러낼 때가 있게 된다.
성인聖人은 그 사이에서 합당하게 처리하였으나, ‘겸애兼愛’와 ‘위아爲我’도 버리지 않고 잘 이용하여 대도大道에 부합시켰으며, 천하天下가 어지러운 때에 처하더라도 그 온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백이伯夷숙제叔齊는 뜻을 굽히지 않고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유하혜柳下惠소련少連은 비록 뜻을 굽히고 몸을 더럽혔으나 말이 도리에 맞고 행실이 사리에 맞았으며,
우중虞仲이일夷逸은 숨어 지내면서도 호언장담하였으나, 그들의 몸가짐이 청렴결백하였고, 세상을 버리는 행위도 때에 알맞았다.
나는 그들과는 달라서 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다.”고 하였다.
한 것도 없고 불가不可한 것도 없는 것’은 바로 노담老耼장주莊周가 변론한 바요, 중니仲尼도 그렇게 말하였으니, 노담老耼장주莊周는 그 생각이 깊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일찍이 듣건대 “성인聖人하고 불가不可한 어름에 처하고 따라서 충실充實하게 한다.
이 때문에 그 만변萬變하여 궁진窮盡할 수가 없으며, 노담老耼장주莊周는 따라서 를 부실하게 허부虛浮한다.
이 때문에 그 한만汗漫하여 힐문詰問할 수가 없다.”고 하니, 지금 중니仲尼노담老耼의 옳고 그른 것을 구하려고 하는 자는 오직 그 어떤 것이 쓸 수 있는가의 여부만을 알면 될 뿐이다.
천하天下에는 본디 물체物體가 있다.
물체物體가 있어 서로 만나면 또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그 실체 존재인 ‘’에 의거하여 그 ‘’를 운용하는 방도를 마련함으로써 그 실체가 있는 일을 다스렸으니, 천하天下에 또한 무슨 일이든 할 수 없겠는가?
그런데 구구하게 ‘’를 구해서 ‘’ 속에 넣기까지 한다면 힘쓰는 것이 너무 수고롭지 않겠는가?
노담老耼장주莊周는 또한 일찍이 그 ‘궁진窮盡’을 스스로 알았을 것이니, 그 ‘궁진窮盡’이란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자면, 그 실체 존재에 의거하여 실체를 존재시키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언제나 의 견지에서 그 〈도체道體의〉 오묘함을 볼 것이다.”라고 하고, 또 “언제나 의 견지에서 그 〈도용道用의〉 광대무변함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 ‘’가 활용되기 때문이다.”고 하고, 또 “ ‘’의 물건이 이롭게 쓰이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불자佛者에 와서는 또한 “단멸斷滅한다.”라고 하고, 또 “ ‘’도 없고 ‘’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미 “없다.”고 해놓고는 또 ‘없다.’는 것이 도리어 ‘다함’이 될까 염려하였다.
이미 “단멸斷滅한다.”고 하고 또 ‘단멸斷滅’이 마침 가 될까 염려하였으니, 그 정상을 볼 수가 있다.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군자君子중용中庸을 하는 것은 군자君子을 가지고 또 때에 따라 ‘’에 잘 처하였고, 소인小人중용中庸을 하는 것은 소인小人의 마음을 가지고 또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다.”라고 하였다.
노담老耼장주莊周 역시 아마도 중용中庸을 하되 기탄忌憚함이 없는 자에 가까운가 보다.


역주
역주1 欒城集 : 《欒城集》에는 〈老耼論〉으로 되어 있다.
역주2 處士橫議 : 處士는 草野의 선비이고, 橫議는 멋대로 의논하는 것이다.
역주3 楊氏爲我 而墨氏兼愛 : 楊氏 곧 楊朱는 자신만을 위하고, 墨氏 곧 墨翟은 똑같이 사랑하였다는 뜻이다. 《孟子》 〈盡心 上〉에 “楊子는 자신만을 위함을 취하였으니, 털 한 개를 뽑아서 天下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도 하지 않았고, 墨子는 똑같이 사랑하였으니, 이마를 갈아 발꿈치에 이르더라도 天下를 이롭게 하는 일이면 하였다.[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墨子兼愛 摩頂放踵 利天下 爲之]”라는 말이 보인다.
역주4 處士橫議……擧皆歸於墨氏也 : 《孟子》 〈滕文公 下〉에 “聖王이 나오지 아니하여 諸侯가 放恣하며 草野의 선비들이 멋대로 의논하여 楊朱‧墨翟의 말이 天下에 가득하여 天下의 말이 楊朱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墨翟에게 돌아간다. 楊氏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는 임금이 없는 것이고, 墨氏는 똑같이 사랑하니, 이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없고 임금이 없으면 이는 禽獸이다.[聖王不作 諸侯放恣 處士橫議 楊朱墨翟之言 盈天下 天下之言 不歸楊則歸墨 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라고 한 말과 대략 같다.
역주5 天屬 : 父子‧兄弟‧姉妹 등 혈연관계가 있는 親屬을 가리킨다.
역주6 無故 : 여기서는 親緣관계가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역주7 不正 : 여기서는 ‘爲我’‧‘兼愛’의 이론이 모두 부정확함을 가리킨다.
역주8 兩無所適處 : 爲我와 兼愛는 이론상으로 둘 다 갈 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역주9 泛泛焉浮游於其間 : 老莊의 이론은 虛浮하여 ‘爲我’나 ‘兼愛’의 實處에 落着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역주10 考其終 : 그 始末을 考察하는 일이다.
역주11 無有 : 虛無 또는 空虛를 가리킨다. 《老子》 제40장에 “천하의 만물은 有에서 생기고, 有는 無에서 생긴다.[天下萬物 生于有 有生于無]”란 말이 보인다.
역주12 制其當 : 합당하게 처리하는 일이다.
역주13 無失乎道 : ‘爲我’와 ‘兼愛’를 다 취하여 大道에 부합함을 가리킨다.
역주14 伯夷叔齊……無可無不可 : 《論語》 〈微子〉에 보인다.
역주15 實之 : 聖人의 道를 充實하게 함을 가리킨다.
역주16 虛之 : 道를 變하도록 하고, 다시 虛浮不實을 가해서 그 神秘함을 헤아릴 수 없게 함을 가리킨다.
역주17 從其有 : 실제 존재에 근거함을 가리킨다.
역주18 至區區焉求其有以納之於無 : 區區는 局限의 뜻이니, 곧 局限함에 있어서는 ‘有’를 가져다가 ‘無’ 속에 넣는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바로 老子가 虛無를 강조하기 위해 “有는 無에서 생긴다.”고 한 학설을 가리킨다.
역주19 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徼 : 《老子》 제1장에 보이는데, “언제나 無에서 道의 體가 오묘함을 볼 수 있고, 언제나 有에서 道의 用이 광대무변함을 볼 수 있다.”고 풀이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河上公 같은 이는 “언제나 無欲으로써 道의 미묘함을 보고, 有欲으로써 道가 나타남을 본다.”고 풀이하였고, 蘇轍도 그의 《老子註》에서 “衆有에 들어가 언제나 無의 견지에서 그 〈道體의〉 오묘함을 볼 것이고, 그 〈道體의〉 至無함을 체득하고서 언제나 有의 견지에서 그 〈道用의〉 광대무변함을 볼 것이다.[入於衆有 而常無將以觀其妙也 體其至無 而常有將以觀其徼也]”라고 풀이하면서 ‘欲’을 ‘將’으로 보았으니, 여기서는 당연히 蘇轍의 풀이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역주20 : 저본에는 ‘嘗’으로 되어 있는데, 《老子》와 《欒城集》에 의하여 ‘常’으로 바꾸었다.
역주21 旣曰……有之以爲利 : 《老子》 제11장에는 “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으로 되어 있는데, 蘇轍은 여기서 순서를 바꿔서 인용하였다. 蘇轍은 《老子註》에서 “器의 用은 언제나 無有 중에 있으므로, 有가 아니면 곧 無이니 無로써 그 用을 하게 하고, 無가 아니면 곧 有이니 有로써 그 이로움을 베푼다.[器之用 常在無有中 非有則無 無以致其用 非無則有 有以施其利]”라고 풀이하였다.
역주22 君子之中庸也……小人而無忌憚也 : 《中庸》 제2장에 보인다.
역주23 <주석명/> : 孫琮의 《山曉閣選宋大家蘇潁濱全集》에서 “1篇에서는 다만 老莊의 ‘虛無’한 說은 이를 빌어 스스로 그 학설의 窮盡을 피하자는 데 불과한 것임을 논했을 뿐이다. 문장의 妙味는 먼저 楊墨을 가져다가 앞에 내세우고, 또 聖人을 가져다가 뒤에 절충한 데 있다.
老莊은 楊墨의 學 밖에 처하여 스스로 차별하려고 하였지만, 楊墨의 學은 오히려 그 사이를 얻어 道에 이용할 수가 있다는 것을 몰랐고, 聖人의 ‘無可無不可’의 說을 빌어서 스스로 피하려고 하였지만, ‘可不可’의 虛實이 빌기 어려운 것임을 몰랐다. 楊墨의 學이 오히려 그 사이를 얻어 이용할 수 있는 것임을 알면 老莊의 學은 이용할 수 없음이 도리어 楊墨의 아래에 가서 놓인다는 것임을 알 것이다.
楊墨을 너그럽게 대한 곳은 바로 老莊을 통렬하게 징계한 곳이니, ‘可不可’의 虛實이 빌기 어려움을 알면 더 살피지 않고 반드시 우리 道를 훔쳐서 우리 道를 크게 어지럽히기까지 한 것임을 알 것이다. 聖道를 밝게 변별한 곳은 또한 바로 老莊을 깊이 미워한 곳이니,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땅히 자득해야 할 것이다.[一篇 只是論老莊虛無之學 不過借此以自避其說之窮 妙在先將楊墨相形于前 又將聖人折衷于後 見得老莊欲外楊墨之學以自異 而不知楊墨之學 猶可得其間而用之于道 欲借聖人無可無不可之說以自避 而不知可不可之虛實爲難假 知楊墨之學 猶可得其間而用之 則知老莊之學不可用 反出在楊墨下矣 其放寬楊墨處 正是痛懲老莊處 知可不可之虛實爲難假 則知苟不加察 必至冒竊我道 而大亂我道矣 其明辨聖道處 亦正是深惡老莊處 慧心人當自得之]”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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