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外無
하고 天下之事
하니 當此之時
를 謂之內重
이니라
內重之弊
는 而外無所忌
하고 於四海而莫能禁
이니 其亂不起於左右之大臣
이면 則生於
之英雄
이라
古者에 諸侯大國은 或數百里니 兵足以戰이요 食足以守요 而其權足以生殺이니라 然後에 能使四이적夷盜賊之患이 不至於內요 天子之大臣이 有所畏忌하여 而內患不作이니 當此之時를 謂之外重이니라
由此觀之면 則天下之重을 固不可使在內요 而亦不可使在外也니라
自주周之衰로 제齊진晉진秦초楚 綿地千里니 內不勝於其外하여 以至於滅亡而不救니라
진秦人은 患其外之已重而至於此也라 於是에 收天下之兵而聚之관중關中하고 夷滅其城池하고 殺戮其豪傑하여 使天下之命이 皆制於天子니라
然이나 至於이세二世之時에 진승陳勝오광吳廣이 大呼起兵하니 而郡縣之吏 熟視而走하고 無敢誰何니라
조고趙高擅權於內
하여 하니 雖
이사李斯爲
승상相이나 備
而死於道路
니라
其子이유李由 守삼천三川하여 擁山河之固나 而不敢較也니라
至於
한漢興
에 懲
진秦孤立之弊
하여 乃大封侯
왕王이나 而
고조高문제帝之世
에 하고 其遺孽餘烈
이 이니라
於是
에 무제武帝分裂諸侯
하여 以懲大國之禍
나 而其後百年之間
에 遂得以奮其志於天下
하니 而
유씨劉氏之子孫
이 無復齟齬
니라
위魏진晉之世에 乃益侵削諸侯하니 四方微弱하여 不復爲亂이나 而朝廷之權臣과 山林之匹夫 常爲天下之大患이니라
此數君者는 其所以制其內外輕重之際에 皆有以自取其亂이나 而莫之或知也니라
而진秦한시대漢之間엔 不求其勢之本末하고 而更相懲戒하여 以就一偏之利라 故로 其禍循環無窮하여 而不可解也니라
得天下而謹守之하고 不忍以分於人은 此匹夫之所謂智也어늘 而不知其無成者 未始不自不分始니라
故로 夫聖人이 將有所大定於天下인댄 非外之有權중신臣이면 則不足以鎭之也어늘 而後世之君은 乃欲去其爪牙하고 翦其股肱하여 而責其成功하니 亦已過矣니라
夫天下之勢는 內無重이면 則無以威外之强臣이요 外無重이면 則無以服內之大臣이요 而絶姦民之心이니라
이니라 上足以制
之難
이요 下足以備匹夫之亂
이며 內足以禁大臣之變
이나 而將帥之臣
이 常不至於叛者
는 內有重兵之勢
하여 以預制之也
니라
然而朝廷之臣이 亦不至於乘間釁以邀大利者는 外有절도사節度之權하여 以破其心也니라
故로 外之節度에 有주周之諸侯外重之勢나 而易置從命하니 得以擇其賢不肖之才니라
是以로 人君無征伐之勞요 而天下無世臣暴虐之患이니라
內之府兵에 有진秦之관중關中內重之勢나 而左右謹飭하여 莫敢爲不義之行하니
蓋주周之諸侯는 內無府兵之威라 故로 陷於逆亂而不能以自止하고 진秦之관중關中은 外無절도사節度之援이라 故로 脅於大臣而不能以自立이니라
有주周진秦之利요 而無주周진秦之害니 形格勢禁하여 內之不敢爲變이요 而외신外之不敢爲亂이니
未有如
당唐制之得者也
어늘 而天下之士
는 不究利害之本末
하고 猥以成敗之遺蹤
으로 而論計之得失
하되 하여 而遂以太宗之制
로 爲猖狂不審之計
니라
夫論天下에 論其勝敗之形하여 以定其法制之得失은 則不若窮其所由勝敗之處니라
하고 而
하니 나 而莫之能
금병禁이니 一亂塗地
하여 니라
由此觀之
컨대 당唐之衰
는 其弊在於外重
이요 而外重之弊
는 起於府兵之在外
니 非所謂制之失
이어늘 니라
今之兵이 滿天下하되 竝不得籍之行伍하여 以折衝禦侮하고 而北自요양遼陽으로 迄임조臨洮延袤五千餘里는 僅得戍守之兵하여 以乘障游徼於其塞耳니라
至於경사京師하여는 所籍兵十餘萬이 僅足以供天子之工匠과 與中官勢人者之侵漁而已요
又無당唐之內設府兵五百하여 以爲居重馭輕之威하니 是所謂內外無以爲重者也니라
故로 四이적夷數侵이 歲以爲常이요 而중주中州卒有一夫跳梁하여 往往衡越不能遽熄하니 豈非兵政이 無以制중주中外之亂與아
이처럼 뛰어난 문장은 고금을 통하여 숫자가 한정되어 있다.
형천荊川(唐順之)이 말하기를 “이해관계를 깊이 구명하였으니, 바로 웅대한 문장이다.”라고 하였다.
천하의 변變은 언제나 세력이 한쪽에 편중되어 제압할 수 없는 곳에 잠복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정에 세력이 편중되면 조정이 걱정거리가 되고, 지방에 세력이 편중되면 지방이 걱정거리가 된다.
고대에는 군대를 서울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지방에는 군력軍力을 가지고 강한 세력을 부리는 신하가 없고, 천하의 일은 모두 다 조정의 제압 안에 있었으니, 이런 때를 세력이 조정에 편중되었다고 이르는 것이다.
세력이 조정에 편중된 폐단은 간신奸臣이 조정에서 권력을 휘둘러도 지방에서 꺼리는 바가 없고, 필부匹夫가 천하에서 제멋대로 행동해도 그것을 제재하지 못하니, 그 난亂이 조정의 좌우 대신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산림山林에 사는 평민 출신의 영웅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천하의 중한 세력은 오로지 조정 내에 있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대에 제후국諸侯國으로서 큰 나라인 경우는 그 영토가 수백 리에 달하였으므로 군사는 전쟁하기에 충분하고, 식량은 나라를 지키기에 충분하며, 그 권세는 영내의 인민에 대한 생살권을 행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이렇게 된 연후에야 사방의 이적夷敵이나 도적이 일으키는 난리의 걱정이 조정에 이르지 않게 할 수 있고, 천자天子를 모시는 대신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있어서 내환內患을 일으키지 않게 할 수 있으니, 이런 때를 세력이 지방에 편중되었다고 이르는 것이다.
세력이 지방에 편중된 폐단은 제후諸侯가 군사를 장악하고 있지만 조정에서 제약制約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천하의 중한 세력은 실로 조정에 있게 해서는 안 되고, 또 그것이 지방에 있게 해서도 안 된다.
주周나라가 쇠미衰微해지면서부터 제齊‧진晉‧진秦‧초楚 등의 제후국이 영토가 천 리에 이어지자, 조정은 이들 지방을 이겨낼 힘이 없어 결국은 멸망하여 구해내지 못하는 데에 이르고 말았다.
진秦나라 사람은 지방 세력이 몹시 커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을 걱정한지라, 그래서 천하의 병기를 거둬서 관중關中에 모으고, 천하의 성지城池를 뭉개 없애버리고, 천하의 호걸豪傑들을 잡아 죽여서, 천하를 움직이는 모든 명령은 다 천자로부터 발령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세二世에 이르러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큰 소리를 질러 군사를 일으키니, 군현郡縣의 관리들은 눈여겨보아 〈그들 세력을 당할 수 없다 여기고〉 도망쳐서 감히 누구 하나 〈진승과 오광을 나무라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조고趙高가 조정에서 권세를 제 마음대로 부리되 턱만 움직임으로써 사람들을 지휘하기를 자기 뜻대로 하였으니, 비록 이사李斯는 승상丞相이 되었지만, 〈조고趙高의 참언讒言에 의하여〉 갖은 형을 다 받고 도로에서 죽었다.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李由는 삼천三川 땅을 지키어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한 요새를 가졌지만, 감히 조고趙高와 싸우지를 못하였다.
이 두 가지 화환禍患은 모두 지방 세력이 부족해서 조정을 견제할 수 없었던 데서 시작된 것이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진秦나라가 고립孤立 때문에 멸망했던 폐단을 경계 삼아 각지에 제후諸侯와 왕王을 크게 봉했었는데, 〈이번에는 그 때문에 환란이 생겨〉 고조高祖의 세상 때만 해도 반란이 아홉 번이나 일어났고, 그들 잔여 세력은 문제文帝,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 회남淮南, 제북濟北, 오吳, 초楚의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래서 무제武帝는 각 제후諸侯의 땅을 분열시킴으로써 큰 봉국封國이 일으키는 화를 경계하였으나, 그 후 백 년이 지나서 왕망王莽이 그 뜻을 천하에 떨칠 수가 있었으며, 유씨劉氏의 자손 〈즉 한漢나라 황실皇室의 사람으로서 왕망王莽과 싸워, 왕망王莽이 뜻대로 하는 것을〉 거역하는 이는 없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시대에서는 더 한층 제후들의 영토를 침식, 삭감함에 동서남북의 각 지방 세력이 미약해서 다시는 난리를 일으키지 못했지만, 조정의 권신權臣이나 산림山林의 필부匹夫들이 항상 천하의 큰 환란을 일으켰다.
위에 든 몇몇 군주君主가 내외內外의 경중輕重을 정한 바에 다 스스로 후일의 난리를 초래케 할 이유가 있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었다.
무릇 천하의 큰 세력이 조정에 있을 것 같으면 안에서 환란이 일어나고, 지방에 있을 것 같으면 밖에서 환란이 일어난다.
그런데도 진秦‧한시대漢時代에서는, 그때그때의 나라 형세에 알맞은 본말本末을 생각지 않고 다만 서로가 전 시대의 일을 경계 삼아, 극단의 일방一方에 치우친 이점을 취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화는 순환하여 끝이 없고 그것을 그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로 천자가 천하를 차지하고 있음은, 부녀자나 어린아이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겨 아끼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천하를 얻어 근신하여 잘 지키고 차마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것은 곧 필부匹夫가 말하는 지智이거늘, 천하의 소지에 실패한 이들의 그 실패가 처음부터 땅을 나누어주지 않는 데서 시작되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장차 천하를 크게 안정시키려고 할진댄 지방에 권신權臣이 없으면 천하를 진정시킬 수 없었거늘, 후세의 군주는 적을 막거나 임금을 호위할 무사武士를 제거하고, 임금을 보필할 중신重臣을 자르고서 성공을 구하려 하였으니, 또한 큰 잘못이었다.
무릇 천하의 형세에 있어, 조정에 큰 세력이 없으면 지방의 강신强臣을 억누를 수가 없고, 지방에 큰 세력이 없으면 조정의 대신大臣을 굴복시키고 간사한 백성의 야심을 근절시킬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서로 균형을 유지한 뒤에라야 나라의 일이 성취될 수 있으니,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 당唐 태종太宗은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사방의 국토를 나누되 변경에는 모두 절도부節度府를 두었는데, 범양范陽과 삭방朔方 두 지방의 절도부는 각각 무장한 군인을 10만씩이나 거느리고 있어 위로는 이적夷狄이 침범하는 난을 막기에 족하고, 아래로는 필부匹夫가 일으키는 난을 대비하기에 족하며, 안으로는 대신들의 변을 금하기에 족했지만, 군대를 거느리는 군신軍臣들이 한 번도 반기를 든 일이 없었던 것은, 조정에 큰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권세를 보유하고 있어서 미리 그것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정관貞觀 때에 천하의 군병은 8백여 부府였거늘, 관중關中에 있는 군병이 5백 부府였으니, 천하의 병력을 다 동원한 뒤에야 관중關中의 병력 절반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조정의 신하가 틈을 타서 큰 이익이 됨을 노리지 못한 것은, 지방에 절도사節度使의 병권兵權이 있어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방의 절도사에게 주周나라 때의 제후처럼 지방의 병권兵權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경질更迭을 행하면 그 명령을 잘 따랐으니, 조정에서는 어질고 못난 인재를 따져 가리어 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므로 군주는 난동 부리는 자를 정벌할 노고가 없고, 천하에는 신하로서 포학한 환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기내畿內의 부병府兵에 진秦나라 때 관중關中에 배치된 막중한 병력만 한 집단 세력이 있었지만, 좌우의 신하들은 근신하고 정직하여 감히 불의不義한 행위를 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임금은 신하에게 핍박당하여 임금 자리를 빼앗길 위험한 일이 없었고, 신하는 죽음을 당할 재앙이 없었다.
주周나라 때의 제후들은 기내畿內에 부병府兵의 위력이 없었기 때문에 역란逆亂에 빠져들어 능히 스스로 중지하지 못했고, 진秦나라 때의 관중關中은 지방에 절도사節度使의 후원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에게 위협을 받아 황제가 능히 자립하지 못하였다.
〈당唐나라에서는〉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의 이로운 점을 구비하였고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의 해로운 점이 없었으니, 형세가 막히거나 제약을 받아 안으로는 대신이 감히 변을 내지 못하고, 밖으로는 실력 있는 외신外臣이 함부로 난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당唐나라의 제도처럼 좋은 것이 없었는데도 천하의 사람들은 이해의 본말을 구명하지 않고, 함부로 성공하고 실패한 자취만을 가지고 국가의 계책이 좋고 나쁨을 논하되, 단지 개원開元 이후에 강한 군대와 사나운 장수가 모두 천하의 큰 우환이 된 것만을 보아, 결국 당 태종이 마련한 제도를 비정상적이고 똑똑하지 못한 계책으로 여기는 것이다.
무릇 천하를 논함에 있어서 승패의 형편을 따져서 그 법제法制가 잘되었나 잘못되었나를 판정하는 것은, 그 승패의 원인을 구명하는 것만 못하다.
즉 천보天寶 때에는 부병府兵이 사방으로 출동하여 그 주력은 범양范陽에 집결되어 있었고, 덕종德宗 때에는 금병禁兵이 모두 조趙나라와 위魏나라 땅을 수수戍守하였으니, 이 때문에 안녹산安祿山과 주체朱泚가 경사京師에 이르렀으나 조정은 그들을 제지할 수 없었으니, 한 번의 내란으로 처참하게 패하여 소종昭宗을 끝으로 당唐나라는 망하여 천하가 끝내 편안할 때가 없었다.
이때 조정의 강신强臣에 이보국李輔國, 정원진程元振, 왕수징王守澄, 구사량仇士良 등이 있었으나 누구 하나 당唐나라의 운명을 지킬 수 없었고, 겨우 왕애王涯와 가속賈餗을 죽이고서 스스로 위세를 사방에 떨친 것으로 여기었으나, 유종간劉從諫이 한마디 함에 무서워서 스스로의 몸을 단속하여 다시는 감히 방자한 짓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 최창하崔昌遐가 주온朱溫의 군사에 의지하여 환관宦官을 죽이고 천하의 감군監軍을 제거하였으나 한 사람도 감히 최창하의 처사에 저항하는 이가 없었다.
이것으로 보건대 당唐나라의 쇠미衰微는 그 폐단이 지방 세력이 컸던 데에 있었고, 지방 세력이 큰 것의 폐단은 부병府兵이 지방으로 나아가 있는 데서 생긴 것이니, 제도의 잘못은 아니었는데도 후세에서는 어째서인지 그 제도를 쓰지 않는다.
오늘날의 군사가 천하에 가득한데도 모두 항오行伍를 조직하여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북으로 요양遼陽으로부터 임조臨洮에 이르기까지 5천여 리에는 겨우 수수戍守하는 군사를 얻어 변방에서 성城에 올라가 수위守衛하여 도적을 막을 뿐이다.
그러나 당唐나라의 절도부節度府가 거느린 갑병甲兵 10만의 위세로 세력이 지방에 편중되게 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호인胡人이 우리 강역을 유린하고 우리 인민을 살해한다.
경사京師로 말하면 병적兵籍에 등재된 군사 10만여 명이 겨우 천자天子의 공장工匠과 중관中官이나 세력 있는 사람이 침탈하는 일을 대비하는 데 제공하기에 족할 뿐이요,
또 당唐나라처럼 기내畿內에 부병府兵 5백 명을 설치하여 ‘거중어경居重馭輕’의 위세가 없으니, 이것은 이른바 ‘기내나 지방에 중병重兵이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적夷狄이 자주 침범함은 해마다 일상적인 것이 되고, 중주中州가 끝내는 한 사람이 날뛰어 이따금 충돌하는 일을 중지시킬 수 없으니, 어찌 병정兵政이 중앙과 지방의 난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