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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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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07. 나라
영왕靈王나라 공자公子 을 이용하여 나라를 멸하였고, 채후蔡侯 이 그 임금을 시해한 사건을 빌미로 정토征討하여 나라를 멸하였으니, 대의大義(正義)를 빌어서 사욕私欲을 성취한 것이다.
晉政已亂하여 莫之能較한대 沛然自以爲得計矣러니 不十年而有니라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수습할 수 없게 되자, 〈영왕靈王은〉 소원대로 된 것에 대해 몹시 의기양양했었는데, 10년이 채 안 가서 건계乾谿가 있게 되었다.
하며 하고 加之以兵하여 遂分楚之半하니 此其惡甚於楚靈王이니라
혜왕惠王장의張儀를 시켜 회왕懷王에게 유세하여 속여서 이용하기를 마치 어린애를 겁주듯이 하였으며, 소왕昭王은 또 회왕懷王을 유인하여 함양咸陽에 잡아두고 군대를 출동하여 드디어 나라의 땅을 반으로 나누었으니, 이는 그 영왕靈王보다 심하였다.
이나 傳子孫累世 其禍乃應이니라
그러나 왕위를 자손子孫에게 여러 세대를 전한 뒤에 그 보응報應하였다.
夫國於天地 有與立矣 一日有惡이라도 禍未卽報也니라
대개 나라란 천지와 더불어 서는 것이니, 하루 악을 행한다 하더라도 가 즉시 보응報應하는 것은 아니다.
本弱者速斃하고 根深者徐拔이니라
근본이 약한 경우는 빨리 망하고 뿌리가 깊은 경우는 서서히 뽑힌다.
彼方以得爲幸이나 而不知니라
나라는 바야흐로 땅을 얻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나 ‘하늘의 법망法網이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是故 楚雖已滅이나 而楚之父老 知秦之禍하고라하니 卒之滅秦者 皆楚人也니라
이러므로 나라는 이미 멸망하였으나, 나라의 부로父老들은 나라가 를 받을 것을 알고서 말하기를 “나라는 비록 세 가호이지만 나라를 멸망시킬 자는 반드시 나라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최종적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자는 모두 나라 사람이었다.
楚莊王 討陳夏徵舒하고 圍鄭及宋하니 力皆足以取之 棄而不有하니 夫豈不欲畏天故也
장왕莊王나라 하징서夏徵舒을 토벌하고 나라와 나라를 포위하였으니, 힘이 모두 그들을 취하기에 충분하였으나 버리고 점유하지 않았으니, 어찌 하늘을 두려워한 까닭이 아니겠는가?
장왕莊王이 이미 제후諸侯패주霸主가 됨에 나라가 드디어 흥기하였다.
天命之不僭如此어늘 而可誣也哉
천명天命의 어긋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속일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 楚나라의 始祖는 鬻熊으로 西周 때에 荊山 일대에서 건국하고 도읍은 丹陽에 세웠다가 뒤에 郢으로 옮겼다. 춘추시대에는 주변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겸병하였고, 끊임없이 晉나라와 패권을 다투다가 莊王이 霸主가 되었다. 강역은 서북으로는 武關에, 동남으로는 昭關에, 북쪽으로는 지금의 河南 南陽에, 남쪽으로는 洞庭湖 이남에 이르렀다. 전국시대에 강역이 끊임없이 확대되더니, 뒤에 秦나라에 멸망되었다.
이 글은 《古史》 卷17 〈楚世家 제10〉에서 篇名으로 취하였다.
역주2 楚靈王……而滅陳 : 《史記》 〈陳杞世家〉에 의하면 “靈王은 楚 康王의 公子 圉로 康王 때에 令尹이 되어 軍事를 관장하였으며, 康王의 아들 郟敖와 郟敖의 아들 子莫과 平夏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바로 靈王이다. ‘陳公子招之亂’은 陳 哀公 43년 3월에 司徒 招(嬀招로 陳 哀公의 아우)가 悼太子를 죽이고 留를 太子로 세우므로 哀公이 노하여 招를 誅殺하려고 하니, 招가 군대를 동원하여 哀公을 에워싸자, 哀公은 목매어 자살하였고, 招가 결국 留를 세워 陳君으로 삼은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9월에 楚나라가 陳나라를 포위하고 11월에 陳나라를 멸하였다.”고 한다.
역주3 追討蔡侯般之弑君 而滅蔡 : 蔡 靈侯 姬般은 景侯의 아들인데, 景侯 49년에 太子 般을 위하여 楚나라에 장가보냈는데, 景侯는 太子의 처와 사사로이 통하였으므로 太子가 景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역주4 乾谿之禍 : 《春秋集義》, 《春秋集傳微旨》, 《史記》 〈楚世家〉 등에 의하면 “楚 靈王은 밖으로는 군사를 출동하여 외국을 정벌하고, 안으로는 백성을 동원하여 乾谿에 章華臺 같은 건물을 지어 사치를 누리니 안팎의 민심이 이반하였다. 그가 나라를 비우고 乾谿에서 장기간 호화스런 생활을 하는 동안, 晉나라에 망명해 있던 楚나라 公子 比가 그 틈을 타서 晉나라의 힘을 업고 입국하여 乾谿를 소탕하자, 靈王은 산중으로 도망했다가 끝내 목매어 자살하였다.”고 한다.
본서 권10 〈郭崇韜論〉에서 蘇轍은 “楚 靈王은 백성들을 괴롭혀 자기 욕심을 채우고, 亂을 일으킬 생각을 품은 백성들을 동원해서 吳나라를 정벌하였으니, 吳나라는 요동시킬 수 없었고 棄疾이 〈楚나라를〉 공격하기를 마치 무인지경을 들어가듯이 하여 靈王은 결국 밖에서 죽었다.[楚靈王殘民以逞 擧思亂之民以伐吳 吳不可動 而棄疾攻之 若升虛邑靈王遂死於外]”라고 적기도 하였다.
역주5 秦惠王……如劫嬰兒 : 《史記》 〈張儀傳〉, 《資治通鑑》 〈周紀〉 등에 의하면 “秦 惠王이 齊나라를 치고 싶으나 齊나라와 楚나라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겁이 났다. 그래서 張儀를 시켜 楚 懷王에게 ‘齊나라와 우호관계를 끊으면 商於의 땅 6백 리를 주겠다.’고 하고는 懷王이 齊나라와 우호관계를 끊은 뒤에 가서는 ‘6리의 땅을 준다고 했지, 언제 6백 리의 땅을 준다고 했느냐?’라고 하여 마치 어린애를 속이듯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역주6 昭王又誘而執之咸陽 : 《史記》 〈楚世家〉에 의하면 “楚 懷王 30년에 秦 昭王이 懷王에게 서신을 보내 서로 盟約을 맺기로 약속하자, 懷王이 會盟에 갔더니 秦 昭王은 한 將軍에게 令을 내려 武關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懷王이 이르자 武關을 닫아 퇴로를 막고 懷王을 咸陽으로 데리고 와서 巫와 黔中의 땅을 떼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懷王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秦나라에서는 그대로 懷王을 咸陽에 구류시켰다.”고 한다.
역주7 天網之不失 : 《老子》 제73장에 “하늘의 法網이 널찍널찍하여 성기지만 빠뜨리지 않는다.[天網恢恢 疏而不失]”는 말이 보인다.
역주8 楚雖三戶 亡秦必楚 : 淸代 金陵書局의 간행본인 《史記》 〈項羽本紀〉에 “秦나라가 六國을 멸하였는데, 그중에서 楚나라가 가장 죄 없이 멸망을 당했다. 懷王이 秦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못한 뒤로부터 楚나라 사람들은 지금까지 가련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楚나라 南公(道人)이 말하기를 ‘楚나라는 비록 세 가호일지라도 秦나라를 멸망시킬 나라는 반드시 楚나라일 것이다.’ 하였다.[夫秦滅六國 楚最無罪 自懷王入秦不反 楚人憐之至今 故楚南公曰 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劉宋 裴駰의 〈集解〉에는 ‘瓉이 말하기를 「楚나라 사람들이 秦나라를 원망하니, 비록 세 가호로도 오히려 족히 秦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했다.’ 하였고, 唐代 司馬貞의 〈索隱〉에는 ‘臣瓉과 蘇林은 해석이 같고, 韋昭는 「三戶는 楚나라의 세 大姓인 昭‧屈‧景이다.」라고 했는데, 두 說은 다 잘못이다. 상고하건대, 左氏가 「三戶 지방에서 楚나라 군사에게 넘겨주었다.[畀楚師於三戶]」란 三戶에 대한 杜預의 注에 「지금 丹水縣 북쪽 三戶亭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地名임에 의심할 나위가 없다.’라고 하였고, 唐代 張守節의 〈正義〉에는 ‘상고하건대, 服䖍은 「三戶는 漳水津이다.」라고 하였고, 孟康은 「津峡의 이름인데, 鄴 땅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라고 하였다.’ 하였고, 《括地志》에는 ‘濁漳水가 또 동쪽으로 葛公亭을 거치고 북쪽으로 三戶峽을 거쳐서 三戶津이 되었는데, 相州 滏陽縣의 지계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南公이 陰陽을 분변하여 興廢의 운수를 인식하였기 때문에 秦나라의 멸망은 반드시 三戶에서 기인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뒤에 項羽가 과연 三戶津을 건너 章邯의 군사를 깨뜨리고 章邯을 항복시키자 秦나라가 드디어 망하였으니, 이는 南公이 잘 알아맞힌 것이다.[集解 瓉曰 楚人怨秦 雖三戶猶足以亡秦也 索隱 臣瓉與蘇林解同 韋昭以爲三戶 楚三大姓昭屈景也 二說皆非 按左氏以畀楚師於三戶 杜預註云 今丹水縣北三戶亭 則是地名不疑 正義按服處云 三戶 漳水津也 孟康云 津峡名也 在鄴西三十里 括地志云 濁漳水又東經葛公亭 北經三戶峽 爲三戶津 在相州滏陽縣界 然則南公辨陰陽 識廢興之數 知秦亡必於三戶 故出此言 後項羽 果渡三戶津 破章邯軍 降章邯 秦遂亡 是南公之善識]”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三戶’를 세 성씨, 땅 이름, 나루 이름 등으로 보았는데, 여기서는 楚나라 사람인 陳涉‧項羽‧劉邦 등 세 명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역주9 楚莊王……而楚遂以興 : 본서 권9 〈五伯論〉에도 “楚 莊王은 陳나라를 치고 鄭나라에 들어가서 나라를 빼앗았으나 취하지 않았으니, 모두 伯者의 風度가 있었다.[楚莊王克陳入鄭 得而不取 皆有伯者之風矣]”란 말이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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