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下之讓三에 有不若之讓하며 有相援之讓하며 有無故之讓이니라
然而至於無故之讓은 則聖人深疾而排之하여 以爲此姦人之所以盜名於暗世者也니라
昔者
에 와 은 범선자宣子목자穆子中心誠有愧於彼二人者
니 是不若之讓也
니라
하니 夫
고요皐陶之不能當
우禹之任
하고 주朱호虎웅熊비羆之不能辦
익益之事
는 나
夫使天下之人
이 皆讓其所不及
이면 則賢材在位
하여 而
하고 皆能以相
면 則
以類升
하여 而小人不能間
이니 此二者
는 天下之大善也
요 至於無故之讓
은 則天下之大不善也
니라
유개劉등표鄧은 讓而不反
하여 以遂其非
하고 정홍丁鴻은 讓而不終
하고 하니 此
정홍鴻之所以爲賢於
유개劉등표鄧也
니라
且夫聞天下之讓하고 而欲竊取其名以自高其身하여 以邀望天下之大利者는 유개劉愷之心也요 聞天下之讓하고 而竊慕之하되 而不知其不同하여 以陷於不義者는 정홍丁鴻之心也니라
而定其罪
면 則
이니 此眞僞之辨也
라 賢愚可以見矣
니라
이어늘 末世徇其名而昧其致
하니 則詭激之行興矣
니라
夫君子之立言
은 非以苟顯其理
라 將以啓天下之
요 立行
은 非以苟顯其身
이라 將以敎天下之方動者
니 言行之所開塞
을 可無愼乎
아
世之邪僻之人
은 苟冒天下之美名
하고 하되 自以爲人莫吾察也
나 而不知君子之論
이 有以見之
니라
〈문장이〉 자첨子瞻(蘇軾)만은 못하지만, 법도法度는 정당하다.
천하天下의 겸양 세 종류에 〈재덕才德이〉 남만 못해서 부리는 겸양이 있고, 서로 끌어주어야 할 처지에 부리는 겸양이 있고, 아무런 이유 없이 부리는 겸양이 있다.
겸양의 명성은 천하의 대공大功이요 대선大善이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 없이 부리는 겸양만은 성인聖人이 몹시 미워하고 〈아울러〉 배제하여 ‘이는 간사한 소인이 〈정치가〉 암흑한 세상에서 이름을 훔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
옛날에 공족公族 목자穆子가 한기韓起에게 양보한 일과 범선자范宣子가 지백智伯에게 양보한 일은 선자宣子와 목자穆子의 마음속에 참으로 저 두 사람(韓起와 지백智伯)에게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이니, 이것은 ‘〈재덕才德이〉 남만 못해서 부리는 겸양’이다.
순舜임금이 우禹에게 명하자 우禹는 고요皐陶에게 양보하고, 익益에게 명하자 익益은 주朱‧호虎‧웅熊‧비羆에게 양보하였으니, 고요皐陶가 우禹의 임무를 감당할 수 없고, 주朱‧호虎‧웅熊‧비羆가 익益의 일을 해낼 수 없는 것은 또한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오히려 겸양을 부린 것은 바로 이른바 ‘서로 끌어주어야 할 처지에 부리는 겸양’이다.
가사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 못한 사람에게 양보한다면 어진 인재가 직위에 있으므로 어질지 못한 사람이 다투지 않게 되고, 모두 잘 이끌어준다면 어진 사람들이 다같이 진출하므로 소인이 이간질할 수 없게 되니, 이 두 가지는 천하의 대선大善이고, 아무런 이유 없이 양보하는 것은 천하의 큰 불선不善이다.
동한東漢 말기에 정홍丁鴻‧등표鄧彪‧유개劉愷 이 세 사람은 부친의 관작을 당연히 이어받아야 할 것인데도 그 아우에게 양보하였으니, 선군先君(先親)의 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적서嫡庶의 구별이 있었던 것도 아닌 처지에서 한갓 양보만을 하여 스스로 세속에서 높은 체하였으니, 세상의 군자들이 따라서 기롱하였다.
그러나 이 세 사람 중에도 오히려 우열은 있다.
유개劉愷와 등표鄧彪는 끝까지 양보하여 그 잘못을 완수하였고, 정홍丁鴻은 양보하였지만 끝까지 하지 않고 그 친구인 포준鮑駿의 말을 듣고 결국은 봉지封地로 돌아왔으니, 이것이 바로 정홍丁鴻이 유개劉愷와 등표鄧彪보다 나은 이유이다.
또한 천하의 겸양을 듣고 그 이름을 슬쩍 훔쳐서 몸을 높여서 천하의 큰 이익을 바라려고 한 것은 유개劉愷의 심성이었고, 천하의 겸양을 듣고 슬며시 사모하되 그와 동일하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하여 불의에 빠진 것은 정홍丁鴻의 심성이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그 죄를 정한다면 정홍丁鴻은 용서받을 만하고 유개劉愷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니, 이는 진실과 거짓의 분변이라, 어짊과 어리석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범엽范曄이 말하기를 “태백太伯(泰伯)과 백이伯夷는 애초에 겸양의 이름을 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태백太伯을 ‘지극한 덕성을 갖춘 사람’이라 칭찬하였고, 백이伯夷를 ‘현인賢人’이라 칭찬하였거늘, 말세(후대) 사람들은 그 이름만 흠모하려 하고 〈그 겸양의 깊은〉 정치情致에는 밝지 못하였으니, 궤격詭激한 행동이 생겼다.
등표鄧彪와 유개劉愷 같은 이는 그 아우에게 양보함으로써 의리를 취하여 아우는 봉작封爵이 아닌 땅을 받게 하고 자기들은 아름다운 이름을 받았으니, 너무 잘못한 것이 아닌가?
군자君子가 〈저술 등을 통하여〉 말을 남기는 것은 구차하게 그 이치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천하에 깨우치지 못한 자들을 계발하기 위한 것이고, 양호한 행동을 수립하는 것은 구차하게 그 몸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차 천하에 행동할 일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니, 말과 행동에 영향이 미치게 하는 일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침내 깨달아 정의를 따를 수 있었으니, 두 사람(鄧彪와 유개劉愷)이 이름만을 따른 것과는 사뭇 달랐다.
세상에서 간사하고 편벽한 사람들은 천하의 아름다운 이름을 덮어쓰고 천하의 큰 이익을 탐하면서 ‘남들은 나의 마음속을 관찰하지 못한다.’고 여기지만, 군자君子의 논論이 그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리려고 한다면 군자君子의 논論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