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玄宗은 繼
하여 나 而
하고 約己任賢
하니 而
를 可復也
니라
환공公은 用
관중管仲하여 九合諸侯
하고 一匡天下
하여 爲五
首
니라
此
者
는 皆
耳
니 方其起於憂患厄困之中
엔 知賢人之可任以排難
이니 則勉强而從之
나 然
이나 非其所安也
니라
及其禍難旣平하여 國家無事엔 則其心之所安者佚樂이요 所悅者諛佞也니라
昔태종太宗은 旣平天下에 始任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위징魏徵하고 終用장손무기長孫無忌잠문본岑文本저수량褚遂良하며 帝亦恭儉節用하고 去冗官하고 節浮費하며 內장손무기無宮掖侈靡之奉하고 旁장손무기無近幸賜予之失하니 정관貞觀之治 斯已過半矣니라
시서어사侍書御史권만기權萬紀嘗言 宣
요주饒部中鑿山冶銀
이면 歲可取數百
권만기萬緍
하여 以佐國用
이니이다하니 帝怒罵曰 吾所
忠言嘉謨 有益於民者耳
니라
汝爲
어사御史하여 不能進賢退不肖
하고 而訹吾以利
하니 豈謂我
耶
아하고 斥去不用
하니라
故로 방현령房두여회杜諸人이 得效其忠力하여 以致정관貞觀之盛이니라
及현종玄宗하여는 初用요숭姚崇송경宋璟노회신盧懷愼소정蘇頲하고 後用장열張說원건요源乾曜장구령張九齡하며 헌종憲宗은 初用두황상杜黃裳이길보李吉甫배기裴垍배도裴度이강李絳하고 後用위관지韋貫之최군崔群하니라
雖未足以方駕방현령房두여회杜나 然이나 皆一時名臣也니라
然
이나 현종玄宗方用
송경宋璟이나 而
우문융宇文融이 以
幸
하여 遽至
재상宰相하고
謂재상宰相曰 公等暴우문융融惡하여 짐朕已罪之矣니라 然이나 國用不足이어늘 將奈何오하니 배광정裴光庭等이 不能答이니라
위견韋堅양신긍楊愼矜왕홍王鉷이 日以益甚하고 至양국충楊國忠에 而聚斂極矣니라
헌종憲宗方平회채淮蔡하고 배도裴度未及還朝에 而정이程异황보박皇甫鎛이 皆以利進하니 배도度三上書하여 極論不可하니라
帝以天下略平으로 亦欲崇臺池宮觀以自娛樂하니 정이异황보단鏄揣知其意하고 數貢羨財하여 以順所欲하니라
然
이나 之强
과 宦官之橫
이 遂與
당唐相終始
하니 可不哀哉
아
태종太宗之恭儉은 所忍無幾耳나 而福至於不可勝盡이요 현종玄헌종憲之淫佚은 所獲無幾耳나 而禍至於不可勝言이니라
而世主終莫之悟하여 覆車相尋이 不絶於世하니 蓋未之思歟아
당唐 현종玄宗과 헌종憲宗은 다 중흥中興의 군주君主였다.
현종玄宗은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의 난亂을 이어받아 안에서는 정치가 문란하였지만, 밖에는 번진藩鎭이 분열되는 우환이 없으며, 자기를 단속하고 어진 사람을 임용하였으니 정관貞觀의 정치를 회복할 수 있었다.
헌종憲宗은 대종代宗과 덕종德宗의 폐정弊政을 이어받아 정치는 조정에서 실패하고 기전畿甸의 밖은 모두 반국叛國이 되었으니, 이런 국면에서 장차 치세治世를 구한다는 것은 그 형세가 더욱 어려웠다.
비록 그러하나 두 임금은 다 그 시초는 잘 다스렸고, 그 종말은 잘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실책한 것이 동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제齊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을 임용하여 제후諸侯들을 규합하고 천하天下의 기강을 바로잡아 오패五伯(五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관중管仲이 죽자 수조竪刁와 역아易牙를 임용했다가 몸이 죽어도 안장할 수 없었고, 다섯 공자公子가 왕위 다툼을 하니 패업霸業이 따라서 무너졌다.
대개 중등 인물은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 임금은 모두 중등 재덕才德을 가진 군주君主였을 따름이니, 막 우환憂患‧액곤厄困 중에 일어났을 때에는 현인賢人을 임용해서 위난危難을 배제할 수 있음을 알았으니, 억지로 따랐지만 편안히 여기는 바가 아니었다.
그 화난禍難이 이미 평정되어 국가가 무사할 때에 가서는 마음이 편안히 여기는 바가 바로 일악佚樂(逸樂)이고 기뻐하는 바가 바로 유녕諛佞이었다.
그러므로 화禍의 발현이 모두 발꿈치를 채 돌리기도 전에 있었음이 마치 부절符節을 합한 것처럼 똑같았던 것이다.
옛날 태종太宗이 이미 천하天下를 평정하고 나서 처음에는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위징魏徵을 임용하였고, 나중에는 장손무기長孫無忌‧잠문본岑文本‧저수량褚遂良을 임용하였으며, 태종太宗 또한 공검恭儉하고 절용節用하여 쓸데없는 관원官員을 없애고 불필요한 비용을 절약하였으며, 안에는 궁액宮掖의 사치스런 공봉供奉이 없었고, 곁에는 총애寵愛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잘못이 없었으니, 정관貞觀의 정치가 이에 이미 절반은 초과한 셈이다.
시서어사侍書御史 권만기權萬紀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주宣州와 요주饒州 일대에서 산을 파서 은銀을 불리면 해마다 수백만 민緍을 취하여 국용國用을 도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태종太宗이 노怒하여 꾸짖기를 “내가 부족을 느끼는 것은 백성에게 유익함이 있는 충언忠言과 가모嘉謨뿐이다.
너는 어사御史가 되어 능히 어진 사람을 진출시키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퇴출시키는 일은 하지 못하고 나를 이익으로 꾀니, 어찌 나를 한漢나라의 환제桓帝와 영제靈帝로 생각하는 것인가?”라고 하고서 그를 내치고 쓰지 않았다.
그래서 신료臣僚들은 감히 이익에 대해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는 충성과 힘을 바쳐 정관貞觀의 성세盛世를 이루었다.
현종玄宗에 와서는 처음에 요숭姚崇‧송경宋璟‧노회신盧懷愼‧소정蘇頲을 임용하고 뒤에 장열張說‧원건요源乾曜‧장구령張九齡을 임용하였으며, 헌종憲宗은 처음에 두황상杜黃裳‧이길보李吉甫‧배기裴垍‧배도裴度‧이강李絳을 임용하고 뒤에 위관지韋貫之‧최군崔群을 임용하였다.
비록 족히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는 능가하지 못했으나 모두 한때의 명신名臣들이었다.
그러므로 개원開元과 원화元和의 초기에 그 치정治政이 거의 정관貞觀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종玄宗이 바야흐로 송경宋璟을 임용하였으나 우문융宇文融이 괄전括田으로써 현종玄宗의 총애를 받아 갑자기 재상宰相에 이르렀고,
뒤에 비록 공론에 의해 파직되어 갔지만, 현종玄宗은 그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오르자,
재상宰相들에게 말하기를 “공들이 우문융宇文融의 악한 점을 폭로해서 짐朕이 이미 그를 죄주었지만, 국가 재용財用이 부족하거늘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니, 배광정裴光庭 등은 답변하지 못하였다.
우문융宇文融이 이미 죽자 이익을 말하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였다.
위견韋堅‧양신긍楊愼矜‧왕홍王鉷은 날마다 더욱 심하게 굴었고, 양국충楊國忠에 이르러 취렴聚斂이 극심하였다.
그러므로 천보天寶의 난亂에 해내海內가 분열되어 다시 통합할 수 없었다.
헌종憲宗이 바야흐로 회채淮蔡를 평정하고 배도裴度가 미처 조정에 돌아오지 못했을 때에 정이程异와 황보박皇甫鎛은 모두 재리財利로써 관계에 진출하였는데, 배도裴度는 세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그것이 불가함을 적극 논하였다.
헌종憲宗이 천하天下가 약간 평정되었다고 하여 또한 대지臺池와 궁관宮觀을 증축해서 스스로 오락娛樂을 하려고 하니, 정이程异와 황보단皇甫鏄은 헌종憲宗의 의중을 헤아리고 자주 공물貢物을 거두어 재용財用을 늘려서 헌종憲宗이 하고 싶은 것에 순종하였다.
그러므로 배도裴度는 결국 쫓겨갔고, 정이程异와 황보단皇甫鏄은 모두 정승이 되었다.
그리하여 3년이 채 못 되어서 화禍가 환관宦官에서 발생하였다.
대개 현종玄宗은 재위기간이 오래여서 취렴聚斂의 해害가 천하天下에 주편周遍하였다.
헌종憲宗의 세대에는 그 해害가 주편周遍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진方鎭의 강성强盛과 환관宦官의 횡포橫暴가 결국 당唐나라와 서로 운명을 함께 하였으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종太宗의 공검恭儉은 참은 바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 복福은 이루 다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현종玄宗과 헌종憲宗의 음일淫佚(放縱逸樂)은 얻은 바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 화禍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 군주君主들은 끝내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실패의 답습이 세상에서 끊어지지 않으니, 아마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