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현종玄宗헌종憲宗에 대한
的確明切하다
〈논리가〉 적확하고 분명하고 절실하다.
唐玄宗憲宗 皆中興之主也니라
현종玄宗헌종憲宗은 다 중흥中興군주君主였다.
玄宗하여 하고 約己任賢하니 可復也니라
현종玄宗중종中宗예종睿宗을 이어받아 안에서는 정치가 문란하였지만, 밖에는 번진藩鎭이 분열되는 우환이 없으며, 자기를 단속하고 어진 사람을 임용하였으니 정관貞觀의 정치를 회복할 수 있었다.
헌종憲宗대종代宗덕종德宗폐정弊政을 이어받아 정치는 조정에서 실패하고 기전畿甸의 밖은 모두 반국叛國이 되었으니, 이런 국면에서 장차 치세治世를 구한다는 것은 그 형세가 더욱 어려웠다.
雖然이나 하니 所以失之者 一道也니라
비록 그러하나 두 임금은 다 그 시초는 잘 다스렸고, 그 종말은 잘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실책한 것이 동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用管仲하여 九合諸侯하고 一匡天下하여 爲五니라
환공桓公관중管仲을 임용하여 제후諸侯들을 규합하고 천하天下의 기강을 바로잡아 오패五伯(五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관중管仲이 죽자 수조竪刁역아易牙를 임용했다가 몸이 죽어도 안장할 수 없었고, 다섯 공자公子가 왕위 다툼을 하니 패업霸業이 따라서 무너졌다.
蓋中人 可以上下니라
대개 중등 인물은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方其起於憂患厄困之中 知賢人之可任以排難이니 則勉强而從之이나 非其所安也니라
이 세 임금은 모두 중등 재덕才德을 가진 군주君主였을 따름이니, 막 우환憂患액곤厄困 중에 일어났을 때에는 현인賢人을 임용해서 위난危難을 배제할 수 있음을 알았으니, 억지로 따랐지만 편안히 여기는 바가 아니었다.
及其禍難旣平하여 國家無事 則其心之所安者佚樂이요 所悅者諛佞也니라
화난禍難이 이미 평정되어 국가가 무사할 때에 가서는 마음이 편안히 여기는 바가 바로 일악佚樂(逸樂)이고 기뻐하는 바가 바로 유녕諛佞이었다.
禍發皆不旋踵 若合符節이니라
그러므로 의 발현이 모두 발꿈치를 채 돌리기도 전에 있었음이 마치 부절符節을 합한 것처럼 똑같았던 것이다.
昔太宗 旣平天下 始任房玄齡杜如晦魏徵하고 終用長孫無忌岑文本褚遂良하며 帝亦恭儉節用하고 去冗官하고 節浮費하며 內無宮掖侈靡之奉하고 旁無近幸賜予之失하니 貞觀之治 斯已過半矣니라
옛날 태종太宗이 이미 천하天下를 평정하고 나서 처음에는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위징魏徵을 임용하였고, 나중에는 장손무기長孫無忌잠문본岑文本저수량褚遂良을 임용하였으며, 태종太宗 또한 공검恭儉하고 절용節用하여 쓸데없는 관원官員을 없애고 불필요한 비용을 절약하였으며, 안에는 궁액宮掖의 사치스런 공봉供奉이 없었고, 곁에는 총애寵愛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잘못이 없었으니, 정관貞觀의 정치가 이에 이미 절반은 초과한 셈이다.
侍書御史權萬紀嘗言 宣饒部中鑿山冶銀이면 歲可取數百萬緍하여 以佐國用이니이다하니 帝怒罵曰 吾所忠言嘉謨 有益於民者耳니라
시서어사侍書御史 권만기權萬紀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주宣州요주饒州 일대에서 산을 파서 을 불리면 해마다 수백만 을 취하여 국용國用을 도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태종太宗하여 꾸짖기를 “내가 부족을 느끼는 것은 백성에게 유익함이 있는 충언忠言가모嘉謨뿐이다.
汝爲御史하여 不能進賢退不肖하고 而訹吾以利하니 豈謂我아하고 斥去不用하니라
너는 어사御史가 되어 능히 어진 사람을 진출시키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퇴출시키는 일은 하지 못하고 나를 이익으로 꾀니, 어찌 나를 나라의 환제桓帝영제靈帝로 생각하는 것인가?”라고 하고서 그를 내치고 쓰지 않았다.
於是 士莫敢以利言者니라
그래서 신료臣僚들은 감히 이익에 대해 말하지 못하였다.
房杜諸人 得效其忠力하여 以致貞觀之盛이니라
그러므로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는 충성과 힘을 바쳐 정관貞觀성세盛世를 이루었다.
及玄宗하여는 初用姚崇宋璟盧懷愼蘇頲하고 後用張說源乾曜張九齡하며 憲宗 初用杜黃裳李吉甫裴垍裴度李絳하고 後用韋貫之崔群하니라
현종玄宗에 와서는 처음에 요숭姚崇송경宋璟노회신盧懷愼소정蘇頲을 임용하고 뒤에 장열張說원건요源乾曜장구령張九齡을 임용하였으며, 헌종憲宗은 처음에 두황상杜黃裳이길보李吉甫배기裴垍배도裴度이강李絳을 임용하고 뒤에 위관지韋貫之최군崔群을 임용하였다.
雖未足以方駕房杜이나 皆一時名臣也니라
비록 족히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는 능가하지 못했으나 모두 한때의 명신名臣들이었다.
之初 其治庶幾於貞觀이니라
그러므로 개원開元원화元和의 초기에 그 치정治政이 거의 정관貞觀에 가까웠다.
이나 玄宗方用宋璟이나 而宇文融하여 遽至宰相하고
그러나 현종玄宗이 바야흐로 송경宋璟을 임용하였으나 우문융宇文融괄전括田으로써 현종玄宗의 총애를 받아 갑자기 재상宰相에 이르렀고,
後雖以公議罷去 而思之不已하여
뒤에 비록 공론에 의해 파직되어 갔지만, 현종玄宗은 그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오르자,
謂宰相曰 公等暴融惡하여 朕已罪之矣니라이나 國用不足이어늘 將奈何오하니 裴光庭等 不能答이니라
재상宰相들에게 말하기를 “공들이 우문융宇文融의 악한 점을 폭로해서 이 이미 그를 죄주었지만, 국가 재용財用이 부족하거늘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니, 배광정裴光庭 등은 답변하지 못하였다.
우문융宇文融이 이미 죽자 이익을 말하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였다.
韋堅楊愼矜王鉷 日以益甚하고 至楊國忠 而聚斂極矣니라
위견韋堅양신긍楊愼矜왕홍王鉷은 날마다 더욱 심하게 굴었고, 양국충楊國忠에 이르러 취렴聚斂이 극심하였다.
그러므로 천보天寶해내海內가 분열되어 다시 통합할 수 없었다.
憲宗方平淮蔡하고 裴度未及還朝 而程异皇甫鎛 皆以利進하니 度三上書하여 極論不可하니라
헌종憲宗이 바야흐로 회채淮蔡를 평정하고 배도裴度가 미처 조정에 돌아오지 못했을 때에 정이程异황보박皇甫鎛은 모두 재리財利로써 관계에 진출하였는데, 배도裴度는 세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그것이 불가함을 적극 논하였다.
帝以天下略平으로 亦欲崇臺池宮觀以自娛樂하니 异鏄揣知其意하고 數貢羨財하여 以順所欲하니라
헌종憲宗천하天下가 약간 평정되었다고 하여 또한 대지臺池궁관宮觀을 증축해서 스스로 오락娛樂을 하려고 하니, 정이程异황보단皇甫鏄헌종憲宗의 의중을 헤아리고 자주 공물貢物을 거두어 재용財用을 늘려서 헌종憲宗이 하고 싶은 것에 순종하였다.
하고 而异鏄皆相하니라
그러므로 배도裴度는 결국 쫓겨갔고, 정이程异황보단皇甫鏄은 모두 정승이 되었다.
그리하여 3년이 채 못 되어서 환관宦官에서 발생하였다.
蓋玄宗在位歲久하여 聚斂之害 遍於天下
대개 현종玄宗은 재위기간이 오래여서 취렴聚斂천하天下주편周遍하였다.
天下遂分이니라
그러므로 천하天下가 드디어 분열되었다.
憲宗之世 其害未究
헌종憲宗의 세대에는 그 주편周遍하지 않았다.
禍止於其身이니라
그러므로 가 그 몸에 그쳤다.
이나 之强 宦官之橫 遂與唐相終始하니 可不哀哉
그러나 방진方鎭강성强盛환관宦官횡포橫暴가 결국 나라와 서로 운명을 함께 하였으니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嗚呼
아!
太宗之恭儉 所忍無幾耳 而福至於不可勝盡이요 玄憲之淫佚 所獲無幾耳 而禍至於不可勝言이니라
태종太宗공검恭儉은 참은 바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 은 이루 다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현종玄宗헌종憲宗음일淫佚(放縱逸樂)은 얻은 바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 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而世主終莫之悟하여 覆車相尋 不絶於世하니 蓋未之思歟
세상 군주君主들은 끝내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실패의 답습이 세상에서 끊어지지 않으니, 아마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주
역주1 玄宗憲宗論 : 唐 玄宗은 明皇이라고도 칭하는데, 睿宗의 아들 李隆基(685~762)를 가리킨다. 延和 원년(712)에 禪讓을 받아 즉위하였는데, 초기에는 姚崇과 宋璟 등을 임용하여 소위 ‘開元之治’를 이룩하였고, 후기에는 李林甫와 楊國忠 등을 임용하여 정치가 부패하였다. 게다가 중앙에는 武備가 허술하고 方鎭 節度使가 重兵을 가져 마침내 소위 ‘安史의 亂’을 釀成하였다.
憲宗은 곧 唐 憲宗 李純(778~820)을 가리킨다, 재위기간에 江淮 財賦를 정돈하고 재정수입을 증가시켰으며, 선후로 劉辟‧李錡‧吳元濟 등의 藩鎭 叛亂을 평정하여 형식상으로는 전국을 통일하였다.
本文의 標題가 《欒城集》에는 〈唐玄宗憲宗〉으로 되어 있다.
역주2 中睿之亂 : 唐 中宗 때의 武氏의 亂과 唐 睿宗 때의 韋氏의 亂을 가리킨다. 中宗 李顯(656~710)은 高宗의 일곱째 아들로 武則天의 소생이다. 高宗이 죽고 中宗이 즉위하였는데, 武則天이 中宗을 廢黜하고 睿宗을 세운 다음 臨朝하여 30년 동안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였다. 뒤에 五王政變이 발생하자 武則天이 정권을 내놓으니 中宗이 즉위하였다. 睿宗은 李旦(662~716)을 가리킨다. 中宗이 즉위한 뒤에 皇后 韋氏가 정권을 휘둘렀고, 中宗이 鴆毒으로 죽자 少帝가 즉위하니 臨朝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평소 威望이 높은 睿宗을 꺼려 몰래 해치려고 하였다. 臨淄王(玄宗)이 韋氏의 亂을 평정하고 睿宗을 擁立하였다.
역주3 政紊於內 : 《舊唐書》 〈玄宗本紀〉의 史評에 “李氏의 唐은 武氏가 나라를 옮겨간 뒤로 30여 년 동안 조정에 올바른 사람이 적고 붙따른 자 중에는 험악한 사람이 많았으며, 뇌물 청탁이 분주하게 權門을 드나들었다.……朋比가 풍속을 이루고 廉恥가 모조리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역주4 外無藩鎭分裂之患 : 藩鎭이 분열되는 우환은 玄宗朝의 安史亂에서부터 시작되었다. 太宗朝에서 府兵 8백을 설치하되 關內에 5백 府를 배치하여 重兵이 關內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唐代 초기에는 중요한 각 州에 都督府를 설치하였고, 睿宗 때에는 節度使를 설치하였으며, 玄宗 때에는 또 邊境에 10節度使를 설치하였으니, 이를 통틀어 ‘藩鎭’이라 칭한다. 각 藩鎭은 원래 1개 지구의 軍政만을 관장하였는데, 뒤에 권력이 점점 확대되어 民政‧財政을 겸해 관장하였고, 결국은 전체 軍政의 大權을 장악하는 동시에 지방 할거 세력을 형성하여 항상 중앙정부와 대항하였다.
역주5 貞觀之治 : 唐 太宗의 貞觀 연간(627~647)에는 賢能한 사람을 임용하는 동시에 科擧制度를 발전시켜 인재를 선발하고, 均田制를 실행하여 인민을 휴식시켰기 때문에 당시 인구가 증가되고 경제가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史家가 ‘貞觀之治’라고 훌륭하게 칭하였다.
역주6 憲宗……皆爲叛國 : 代德은 곧 唐 代宗 李豫(726~779)와 唐 德宗 李适(761~ 806)을 가리킨다. 代宗과 德宗의 재위기간에 安史의 亂으로 말미암아 藩鎭이 모두 重兵을 가졌기 때문에 節度使가 누차 반란을 일으켰다. 代宗 때에는 僕固懷恩‧李靈耀‧田承嗣가 선후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德宗 때에는 朱滔‧田悅‧王武俊‧李納‧李希烈이 ‘五大天王’이라 僭稱하였으며, 涇原軍이 京師를 나가서 반란을 일으켰다. 節度使 姚令言이 그것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에 德宗은 奉天의 行在所로 피신하였는데, 亂兵은 朱泚를 맞아 장수로 삼아서 재차 奉天을 공격하였다.
‘叛國’은 반란을 일으킨 諸侯國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節度使가 한 지방을 割據함을 가리킨다. 당시 淮‧蔡‧河北에 모두 반란을 일으킨 자가 있었다.
역주7 二君……而不善其終 : 玄宗과 憲宗이 처음부터 끝까지 賢能한 사람을 임용하여 治世를 도모하지 못하였음을 가리킨다.
역주8 齊桓公……爲五伯(패)首 : 《論語》 〈憲問〉에 “管仲은 桓公을 도와 제후들의 霸者가 되게 하였고, 周나라의 왕실을 받들어 천하의 기강 명분을 바로잡았으므로, 사람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다.[管仲相桓公 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란 말이 보인다.
역주9 : 《朱子全書》, 《西山讀書記》 등에서 齊 桓公을 齊 威公으로 적고 있는데, 이는 宋 欽宗의 이름인 桓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저본의 ‘威’도 송대 학자가 바꾸었는데, 《欒城集》에 의해 ‘桓’으로 환원하였다. 이하에서도 ‘桓’이 ‘威’로 바뀐 것은 모두 환원하였다.
역주10 : 패
역주11 及管仲死……伯業隨毁 : 《史記》 〈齊太公世家〉에 의하면 “管仲이 임종할 때에 桓公이 ‘누가 대신 정승이 될 만한가?’라고 물으니, 管仲은 ‘竪刁‧易牙‧開方을 정승으로 임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였다.
그런데 管仲이 죽은 뒤에 桓公은 이 세 사람을 親信하였으니, 齊나라는 이들의 專權으로 인하여 크게 어지러웠다. 桓公이 죽자, 다섯 公子 惠公‧孝公‧昭公‧懿公‧公子 雍이 왕위를 다투었다. 이때 孝公이 太子가 되었는데, 易牙와 竪刁가 孝公을 세우지 않고 公子 無虧를 세웠는데, 齊나라 사람이 公子 無虧를 죽였으므로 宋 襄公의 도움 아래 孝公을 세웠다.
齊나라의 혼란으로 인하여 桓公의 시체가 67일간이나 屍床 위에 놓여 있었다. 桓公이 12월에 죽었는데, 다음해 8월에 겨우 安葬할 수 있었다.
역주12 三君 : 여기서는 唐 玄宗‧唐 憲宗과 齊 桓公을 가리킨다.
역주13 中主 : 중등 才德의 君主란 뜻이다.
역주14 : 저본에는 ‘用’으로 되어 있는데, 《新唐書》와 《欒城集》에 의하여 ‘乏’으로 바꾸었다.
역주15 漢桓靈 : 東漢의 桓帝 劉志(132~167)와 靈帝 劉宏(156~189)을 가리킨다. 이들은 재위기간에 공개적으로 賣官과 增稅를 하고 크게 宮室를 수축하였다.
역주16 開元元和 : 開元은 唐 玄宗이 제2차 개원한 연호(713~741)이다. 元和는 唐 憲宗의 연호(806~820)이다.
역주17 括田 : 田地를 측량하여 稅籍에 누락된 정황을 조사하는 일이다.
역주18 然玄宗方用宋璟……而言利者爭進 : 《新唐書》 〈宇文融列傳〉에 의하면 “玄宗 開元 연간 宋璟이 宰相으로 있을 때 宇文融의 건의에 따라 전국의 戶籍을 정리함으로써 숨기고 보고하지 않은 田産을 몰수하여 국가 財用을 보충하니, 국가 수입이 수백만 緡이나 많아졌다. 開元 17년(729) 宇文融이 黃門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여 宰相으로 있은 지 백 일 만에 파직되니, 錢穀의 수입이 이때에 와서 갑자기 감축되었다. 玄宗이 이를 생각하여 宰相 裴光庭 등을 책망하였다. 宇文融이 죽은 뒤에 이익에 대한 것을 말하여 임금의 총애를 얻은 자들이 잇따랐다.”고 한다.
역주19 天寶之亂……不可復合 : 天寶의 亂은 곧 安史의 亂을 가리킨다. 玄宗 天寶 14년(755)에 三鎭節度使 安祿山이 楊國忠을 誅伐한다는 명분으로 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亂은 8년 만에 평정하였지만, 이때부터 唐 王朝의 통치가 쇠약해져서 藩鎭이 割據하여 통합할 수 없는 국면을 형성하였다.
역주20 憲宗方平淮蔡……而异鏄皆相 : 《新唐書》 〈裴度列傳〉에 의하면 “憲宗이 裴度를 門下侍郞 平章事로 삼아 蔡州 吳元濟를 쳐서 元濟를 사로잡고 蔡州를 안정시켰다. 憲宗이 蔡州를 칠 때에 程异와 皇甫鎛이 부족한 軍需를 원활하게 조달함으로써 憲宗의 총애를 받고, 얼마 후에 宰相의 자리를 얻으니, 裴度는 세 번이나 上書하여 그 불가함을 논하였으나 憲宗은 가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역주21 度卒逐去 : 裴度가 조정에서 쫓겨 나가 河東節度使의 일을 맡은 것을 가리킨다.
역주22 不三年而禍發於宦官 : 《舊唐書》 〈憲宗本紀〉 元和 15년(820)에 “上(憲宗)이 大明宮의 中和殿에서 승하하니 향년 43세였다. 이때 갑자기 서거하였기 때문에 모두들 ‘內宮 陳弘志가 弑逆하였다.’고 말하였으나 史氏가 이를 숨기고 쓰지 않았다.”고 하였다. 元和 13년(818)에 憲宗이 皇甫鏄과 程异를 정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3년이 채 되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역주23 方鎭 : 兵權을 쥐고 한 방면을 지키는 長官으로, 唐代에는 곧 觀察使‧節度使‧經略 등을 가리켰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