轍
은 聞之
하니 士不更變
이면 不可與圖遠
이요 는 知得而不知喪
하고 知存而不知亡
하며 始若可喜而終不可久
라하나이다
番番(皤皤)良士 旅力旣愆은 我尙有之하고 仡仡勇夫 射御不違는 我尙不欲이라하나이다
孟明視西乞術白乙丙 此三人者는 秦之豪俊有決之士요 而百里奚蹇叔子는 此秦之所謂老耄而不武者也니이다
穆公이 欲襲鄭한대 孟明은 以爲可하고 而蹇叔은 以爲不可하니 則蹇叔之說이 無乃遠於事情而近於怯哉리잇가
然而要其成敗得失之終하여 而責其思慮之長短이면 則蹇叔不可謂迂요 而孟明不可謂是也니이다
故曰 如有一个臣이 斷斷猗無他技나 其心이 休休焉其如有容이라
人之有技를 若己有之하며 人之彦聖을 其心好之하되 不啻如自其口出하면
是能容之라 以保我子孫黎民이니 亦職有利哉인저하나이다
今夫立於百官之上하여 而宰天下之事者 亦何以其他技爲哉리잇가
往者
에 而明公適爲京兆
시니 當此之時
에 明公之聲
이 上震於朝廷
하고 而下
니이다
行道之人
은 爲之
하고 盜賊
은 하니 可謂才有餘矣
니이다
然
이나 至於參決大政
하여는 而
하고 務爲敦厚
하여 不欲以才蓋天下
시니이다
上承
하고 下拊百官
하며 周旋揖讓
하니 而士大夫 莫不雍容和穆以相與也
니이다
轍은 西蜀之匹夫로 往年에 偶以進士로 得與一命之爵이라
聞天子擧直言之士에 而世之君子는 以其山林朴野之人으로 不知朝廷之忌諱하여 其中無所隱蔽라 故로 以應詔라하나이다
而轍也
는 復不自度量
하고 而言當世之事
나 亦不敢爲
之說
이니이다
其言語文章
은 雖無以過人
이나 而其所論說
은 乃有矯拂切直之過
니이다 竊獨悲古者深言之人
이 遭
하여 이면 而其言不復見錄於世
니이다
方今群公在朝하여 以君子長者自處하고 而優容天下彦聖有技之士하니 士之有言者 可以安意肆志而無患然後에 知士之生於今者之爲幸이요 而轍亦幸者之一人也니이다
素所爲文
은 家貧不能盡致
하고 有歷代論十二篇
은 上自
而下至於
하니 治亂興衰之際
를 可以槪見於此
리이다
철轍은 들으니 “선비가 경장更張하지 않으면 그와 더불어 원대한 일을 도모할 수 없고, 신승가新勝家는 얻는 것만 알고 상실하는 것은 알지 못하며, 있는 것만 알고 없는 것은 알지 못하며, 처음에는 지기志氣가 충만하여 기뻐하는 듯하지만 나중에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철轍이 글을 읽다가 〈진서秦誓〉에 이르러 명언을 발견하였으니,
“파파皤皤(늙은 모양)한 어진 선비로 여력旅力이 이미 쇠한 자는 내 부디 소유하고, 흘흘仡仡(용맹한 모양)한 장부로 활쏘기와 말타기에 실수가 없는 자는 내 부디 등용하고자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었는데,
옛날에 이 말을 한 사람은 아마 그 뜻을 이미 알았던 모양입니다.
맹명시孟明視‧서걸술西乞術‧백을병白乙丙 이 세 사람은 진秦나라에서 재능이 걸출하고 결단력이 있는 무사武士었으며, 백리해百里奚와 건숙자蹇叔子는 진秦나라에서 이른바 ‘쇠로衰老하고 무력武力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목공穆公이 정鄭나라를 습격하려고 하자, 맹명孟明은 ‘옳은 일’로 여겼고 건숙蹇叔은 ‘불가한 일’로 여겼으니, 건숙蹇叔의 말이 사정事情에 오활하고 겁쟁이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성패成敗와 득실得失의 결과를 살펴 사려思慮의 장단長短을 책망한다면 건숙蹇叔을 오활하다고 할 수 없고 맹명孟明을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한 신하가 단단斷斷(정성스럽고 한결같은 모양)하고 다른 기예技藝가 없으나 그 마음이 곱고 포용력이 있는 듯하여,
남이 가지고 있는 기예技藝를 자신이 소유한 것처럼 여기며, 남의 훌륭하고 성聖스러움을 마음속으로 좋아하되 입에서 나오는 칭찬보다도 더 좋아한다면
이는 남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어서 나의 자손子孫과 여민黎民을 보호할 것이니, 또한 전적으로 이로움이 있을진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이른 뒤에야 목공穆公은 건숙蹇叔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지금 관직이 백관百官의 위에 놓여 천하天下의 일을 주재하는 자 또한 어찌 다른 기예를 요하겠습니까?
온량溫良하고 박애博愛하여 능히 천하天下의 선비들을 포용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왕년에 철轍이 동유東遊할 때 명공明公은 마침 경조윤京兆尹으로 계셨는데, 이때에 명공明公의 명성名聲이 위로는 조정朝廷에 진동하고 아래로는 여리閭里에 위엄을 보였습니다.
길에 다니는 사람은 감히 함부로 보지 못하고, 도적盜賊은 숨을 죽이고 발작하지 못했으니, 재능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정무에 참여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마치 태양이 빛을 감추듯이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돈후敦厚하고 관대寬大한 행위만을 힘써 재능으로 천하天下를 덮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위로는 이공二公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관百官을 어루만졌으며, 예절에 맞게 행동을 하시니, 사대부士大夫들이 거기에 맞추어 조용하고 화목한 모습으로 서로 대하였습니다.
명공明公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실 수 있었습니까?
철轍은 서촉西蜀의 필부匹夫로서 왕년往年에 우연히 진사進士로서 일명一命의 관작官爵을 얻었는지라,
지금 곧 효산崤山과 민지黽池의 사이에서 관리가 되어 일없이 한가히 지내는데,
듣건대 “천자天子께서 직언直言하는 선비를 뽑음에 세상의 군자君子들은 산림山林의 소박한 사람으로서 조정朝廷의 기휘忌諱를 알지 못하여 마음속에 은폐隱蔽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조령詔令에 응하였다.” 합니다.
철轍은 다시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당세當世의 일을 말하였으나 또한 감히 노망불상鹵莽不詳한 말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언어言語와 문장文章은 비록 남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 그 논설論說에는 세정世情에 맞지 않게 바른말을 한 과실이 있으니, 유독 옛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좋지 못한 시대를 만나 한번 통치계급의 기휘忌諱에 저촉되면 그 말이 다시는 세상에 기록되지 않았던 것을 슬퍼합니다.
지금 제공諸公들이 조정에 있어 군자君子와 장자長者로 자처自處하며 천하天下의 훌륭하고 성스럽고 기예技藝가 있는 선비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니, 직언을 하는 선비가 마음대로 말하더라도 후환이 없은 연후에야 선비가 지금 태어난 것이 다행임을 알 것이요, 철轍도 또한 다행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본래 지어놓은 글들은 집이 가난해서 전부 수집하지 못했고, 〈역대론歷代論〉 12편은 위로 삼왕三王에서부터 아래로 오대五代에 이르렀으니, 각 왕조王朝 사이에 있었던 치란治亂‧흥쇠興衰의 상황을 여기에서 대충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