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조승趙勝傾身下士하여 以竊一時之聲 可耳 至於爲國計慮 조승不知也니라
欲拒 하고하니전단之賢이나 而不知其不爲用也니라
此皆貴公子不知務之禍也니라
乃欲使之相危國拒强하니 難矣哉인저


13. 평원군
조승趙勝이 몸을 낮추고 어진 선비들을 예우하여 한때의 명성을 훔친 것은 괜찮지만 나라를 위하는 모계謀計사려思慮까지는 조승趙勝이 알지 못하였다.
나라가 나라를 막으려고 할 때에는 염파廉頗조사趙奢가 있었으나 쓰지 않고, 땅을 떼어 나라에 주고서 전단田單을 빌렸으니, 전단田單이 어진 것만 알고 그가 나라를 위해 쓰이지 못할 것을 알지 못하였다.
한풍정韓馮亭상당上黨으로써 나라에 를 전가했을 때에는 조표趙豹(趙나라의 재상宰相)가 그 불가함을 밝혔지만 조승趙勝은 〈상당上黨을〉 탐취貪取하였다.
장평長平조승趙勝의 한마디 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모두 귀공자貴公子가 당시의 급무急務를 모른 데서 온 인 것이다.
그런데 그로 하여금 위태로운 나라의 정승을 시켜 강한 나라를 막으려고 하였으니 어려운 일이었다.


역주
역주1 平原君 : 平原君은 곧 전국시대 趙 惠文王의 아우인 趙勝(?~B.C. 251)인데, 惠文王에 이어 孝成王 때에도 정승을 지내고 東武城에 봉해졌다.
齊나라의 孟嘗君(田文), 楚나라의 春申君(黃歇), 魏나라의 信陵君(無忌)과 아울러 전국시대 四公子로 칭해진 그는 賢人을 예우하고 선비들에게 몸을 낮추었으므로 門客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長平의 전쟁이 있고 나서 秦나라 군사가 趙나라의 邯鄲을 포위하여 사태가 위급했을 때는 毛遂가 楚나라와 강제로 체결한 盟約과 李同이 제시한 救國策을 통해서 趙나라를 보존하였다.
이 글은 《古史》 卷46 〈平原君列傳 제23〉에서 篇目으로 취하였다.
역주2 有廉頗趙奢 不能用 : 廉頗는 趙나라의 명장이다. 惠文王 때에는 齊나라를 격파한 공으로 上卿이 되었고, 秦나라와 趙나라가 上黨을 쟁탈할 때에는 長平의 전쟁에서 大軍을 거느리고 성벽을 쌓아 굳게 지키며 3년을 서로 버티었는데, 趙王이 秦나라의 反間計에 걸려들어 廉頗 대신에 趙括를 장수로 삼았다가 참패하였다.
趙奢는 惠文王 때에 田部吏로 있으면서 租稅를 내지 않는 平原君의 집을 법으로 다스릴 정도로 강직하였고, 秦나라가 韓나라를 칠 때에 趙王이 趙奢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니, 秦나라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역주3 割地與齊 以借田單 : 田單은 전국시대 齊나라 將領으로 齊나라의 王族이다. 그는 趙 惠文王 20년에 燕나라에 잃었던 齊나라의 70여 城을 수복하고 그 공으로 安平君에 봉해졌다. ‘借田單’은 곧 趙나라가 田單을 빌려 정승으로 삼았다는 말이다.
역주4 及韓馮亭以上黨嫁禍於趙……而勝貪取之 : 韓馮亭은 원래 韓나라의 上黨太守가 되었는데, 秦나라의 위협적인 공격으로 인하여 上黨郡을 가지고 趙나라로 귀순하니, 趙나라에서 그를 봉하여 華陽君으로 삼았다.
《史記》 〈趙世家〉에 “韓나라의 上黨守 韓馮亭의 使者가 와서 말하기를 ‘韓나라가 上黨을 지킬 능력이 없어서 秦나라에 바치려고 하니, 上黨의 吏民들은 모두 趙나라에 바치기를 원하고 秦나라에 바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城市邑 17개를 再拜하고 趙나라에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趙王은 크게 기뻐하였다. 平陽君 趙豹를 불러서 고하기를 ‘韓馮亭이 바친 城市邑 17개를 받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자, 趙豹가 대답하기를 ‘聖人은 까닭 없는 이익을 큰 禍患으로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사람들이 나의 德을 사모하는데, 어찌 까닭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秦나라가 韓나라의 땅을 잠식하여 중간이 끊어져서 서로 통할 수 없게 하였으니, 가만히 앉아서 上黨의 땅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韓나라가 上黨을 秦나라에 바치지 않는 이유는 그 禍를 趙나라에 전가하기 위해서입니다. 秦나라는 노역을 하고 趙나라는 이익을 받는 꼴이 되었으니, 비록 강대국이라 하더라도 약소국에게 이익을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이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까닭 없는 이익이 아니겠습니까?……韓나라 上黨의 땅이 秦나라의 땅이 되어서 秦나라의 정치가 행해지고 있으므로 秦나라와 더불어 다툴 수 없으니, 반드시 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王은 말하기를 ‘지금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해를 넘겨가며 공격했어도 城 하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城市邑 17개를 우리 趙나라에 마치 폐백을 주는 것처럼 바치니, 이것은 큰 이익이다.’라고 하였다.
趙豹가 나가자, 王이 平原君과 趙禹를 불러서 고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해를 넘겨가며 공격했어도 城 하나를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가만히 앉아서 城市邑 17개를 받게 되었으니, 이와 같은 큰 이익을 잃어서는 아니 됩니다.’라고 하자, 王은 ‘참 좋은 생각이다.’라고 하고는 趙勝으로 하여금 그 땅을 받게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5 長平之禍 成於勝一言 : 《史記》 〈趙世家〉에 “趙나라가 결국 군사를 동원해서 上黨을 취하고 廉頗 將軍이 長平에 주둔하고 있었다. 趙 孝成王 6년 7월에 廉頗가 장군에서 면직되고 趙括이 대신 장군이 되었는데, 秦나라 군사가 趙括을 포위하니, 趙括이 군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그러자 왕은 趙豹의 계략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그래서 長平의 禍가 있게 된 것이다.”란 내용이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