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錢塘에 有大法師曰
初住
하여 하니 오월吳越人
이 歸之如佛出世
하고 事之如養父母
하며 金帛之施
는 不求而至
니라
居천축산天竺十四年에 有利其富者 迫而逐之하니 師忻然捨去하되 不以爲恨이니라
오월吳越之人이 涕泣而從之者 如歸市하니 천축산天竺之衆이 分散四去니라
事聞於朝에 明年俾復其舊한대 師黽俛而還을 如不得已하니라
오월吳越之人이 爭出其力하여 以成就廢缺하니 衆復大集하니라
無幾何에 師告其衆曰 吾雖未嘗爭也나 不幸而立於爭地니라
천축天竺之南山은 山深而木茂하고 泉甘而石峻이니라
汝舍我면 我將老於是리라하고 言已에 策杖而往하여 以茅竹自覆하니라
聲動오월吳越하니 人復致其所有하여 鑱嶮堙圮하고 築室而奉之하니 不期年에 而荒榛巖石之間에 臺觀飛湧하고 丹堊炳煥하여 如天帝석궁釋宮이니라
名其所居曰
눌재訥齋라하니 도잠선사道潛도잠선사師 告予爲記
니라
予聞之하니 선사師始以法敎人에 叩之必鳴은 如千石鐘하고 來不失時는 如滄海潮라 故로 人以辯名之라하고
及其退居此山에 閉門燕坐하여 寂嘿終日하니 葉落根榮이 如冬枯木이요 風止波定이 如古澗水라 故로 人以訥名之라하니라
彼其全者는 不大不小요 不長不短이요 不垢不淨이요 不辯不訥이니 而又何以名之리오
雖然이나 樂其出而高其退하고 喜其辯而貴其訥은 此衆人意也니 則其以名齋也亦宜니라
以辯見我는 旣非見我요 以訥見我도 亦幾於妄이니라
12. 항주杭州 용정원龍井院 눌재訥齋에 대한 기문
전당錢塘에 있는 대법사大法師 ‘변재辯才’란 이가 처음에 상천축산上天竺山에 머물러서 천태법天台法으로 오월吳越 지역을 교화敎化하니, 오월吳越 지역 사람(신도)들이 그에게 몰려가기를 마치 진불眞佛이 출현한 것처럼 하고, 그를 섬기기를 마치 부모를 봉양하듯이 하였으며, 금백金帛의 시주는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폭주하였다.
그가 천축산天竺山에 거처한 지 14년 만에 그의 부유한 재산을 탐하는 자가 있어 핍박하여 내쫓으니, 선사禪師는 흔연히 버리고 가되 조금도 한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월吳越 지역 사람 중에 흐느껴 울면서 따르는 자가 마치 저자로 몰려가듯이 하였으니, 천축산天竺山의 신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 이듬해에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게 하니, 선사禪師는 마지못해서 억지로 돌아왔다.
그러자 오월吳越 지역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힘을 내어 폐해진 절을 복원하니, 신도들이 다시 크게 모여들었다.
얼마 후에 선사禪師가 신도들에게 고하기를 “나는 비록 다투려고 하지 않았으나 불행하게도 다투는 땅에 섰노라.
오래 거하고 떠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옳은 점을 가지고 남을 비난하게 하는 것은 사문沙門이 할 도리가 아니니라.
천축天竺의 남산南山은 산이 깊고 나무가 무성하며, 샘물이 달고 바위가 준엄하니라.
너희가 나를 놓아주면 나는 장차 거기서 늙을 것이니라.”고 하고, 말이 끝나자 곧 지팡이를 짚고 그곳으로 가서 풀과 대나무로 위를 덮어서 집을 만들었다.
그 소문이 오월吳越 지역에 알려지자, 신도들이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어서 험한 곳을 깎고 끊어진 곳을 메워서 집을 지어 받드니, 1년이 채 안 되어서 우거진 숲과 바위 사이에 대관臺觀이 치솟고 단악丹堊이 선명하게 빛나 마치 천제天帝의 석궁釋宮과 같았다.
선사禪師는 이때부터 세상일을 끊고 다시는 출입하지 않았다.
고우高郵 사람 진관秦觀 태허太虛가 선사禪師의 거처를 명명하기를 ‘눌재訥齋’라고 하니, 도잠선사道潛禪師 참료參寥가 나에게 고하여 기문을 짓게 하였다.
나는 들으니 “선사禪師가 처음 사람을 가르침에 두드리면 반드시 울림은 마치 천석千石의 종鐘이 울리는 것과 같고, 신도들이 몰려옴에 때를 잃지 않음은 마치 창해滄海의 조수가 몰려오듯이 하였는지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변辯’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이 산으로 물러와 삶에 문을 닫고 한가히 앉아 종일 묵묵히 있었으니, 마치 잎은 떨어지고 뿌리는 싱싱한 겨울철 마른 나무와 같고, 바람은 그치고 파도는 안정된 옛 간수澗水와 같은지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눌訥’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선사禪師의 전부가 아니다.
그 전부인 것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달변도 아니고 눌변도 아니니, 또한 무엇으로 이름을 지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그의 나감을 즐거워하고 그의 물러감을 훌륭히 여기며, 그의 달변을 기뻐하고 그의 눌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여러 사람들의 뜻이니, 그것을 재실의 이름으로 삼는 것도 마땅하다.
“달변으로 나를 봄은 이미 나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눌변으로 나를 보는 것도 망령스러움에 가깝다.
달변도 아니고 눌변도 아니며, 법성法性과 같이 하여 동하지 않는다.
제불諸佛이 이미 그러하니 나 또한 이와 같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