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者一歲之入은 金以兩計者四千三百이요 而其出之不盡者二千七百이니이다
錢以千計者四千八百四十八萬이요 而其出之多者一百八十二萬이니이다
紬絹以匹計者一百五十一萬이요 而其出之多者十七萬이니이다
穀以石計者二千四百四十五萬이요 而其出之不盡者七十四萬이니이다
草以束計者七百九十九萬이요 而其出之多者八百一十一萬이니이다
故
로 凡國之經費
를 折長補短
하되 常患不足
하여 小有非常之用
이나 有司輒求之朝廷
하여 이리니이다
하니 以爲是媮歲月可也
나 數歲之後
에 將有不勝其憂者矣
리니이다
方今禁中奉養유사有度하여 金玉錦繡不逾其舊하고 宮室不修하고 犬馬不玩하며 유사有司循守法制하고 謹視出入之節하여 未嘗유사有失也어늘 而其弊安在잇가
天下久安하여 物盛而用廣은 亦理之常也니 顧所以處之何如耳니이다
宗室之衆
은 황우皇祐三人
이 今爲九人矣
요 一人
이 今爲八人矣
요 관찰사觀察使一人
이 今爲十五人矣
요 방어사防禦使四人
이 今爲四十二人矣
며 百
공봉관官之富
는 경덕대부景德大夫三十九人
이 今爲二百三十人矣
요 朝
봉의랑奉승의랑郎以上一百六十五人
이 今爲六百九十五人矣
요 승의랑承議郎一百二十七人
이 今爲三百六十九人矣
요 봉의랑奉議郎一百四十八人
이 今爲四百二十一人矣
요 제사사諸司使二十七人
이 今爲二百六十八人矣
요 부사副使六十一人
이 今爲一千一百一十人矣
요 공봉관供奉官一百九十三人
이 今爲一千三百二十二人矣
요 三百一十六人
이 今爲二千一百一十七人矣
요 之吏六十人
이 今爲一百七十二人矣
니이다
昔者
엔 하고 경卿有定員
이어늘 今之
대부大夫朝
정의대부議는 皆無限法
하고 하며 而今之
정의대부正議은청광록대부銀青은 合而爲一
하고 官秩幷增
하니 不知其義
니이다
夫國之財賦는 非天不生이요 非地不養이요 非民不長이니이다
祖宗之世
엔 士之始有
者
는 竢闕則補
하고 否則
而已
며 不妄授也
니이다
인종仁宗末年
엔 之法
을 自
재상宰相以下
로 無不減損
하고 영종英宗之初
엔 三載考績
을 增以四歲
하며 니이다
此四事者를 使今世欲爲之면 將以爲逆人心違舊法이니 不可言也온 而況於行之乎잇가
者
잇가 事勢旣極
에 不變則敗
는 衆人之所共知也
니이다
今朝廷履至極之勢하고 獨持之而不敢議하니 臣實疑之니이다
誠自今日而議之면 因其勢循其理하여 微爲之節文하여 使見任者無損하고 而来者有限이리니 今雖未見其利나 要之十年之後엔 事有間矣리니이다
이라하니 今臣亦云 茍能裁之
면 天下之幸也
라하리니이다
옛날에는 3년의 경작에 반드시 1년 식량의 저축이 있었으니, 30년을 통산한 식량의 저축으로 국가 경비의 예산을 제정하면 9년 식량의 저축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1년의 수입은 금金을 냥兩으로 계산 것이 4,300냥이고, 지출하고 남은 것이 2,700냥입니다.
은銀을 냥兩으로 계산한 것이 5만 7천 냥이고, 지출의 초과분이 6만 냥입니다.
전錢을 천千으로 계산한 것이 4,848만 천이고, 지출의 초과분이 182만 천입니다.
주견紬絹을 계산한 것이 151만 필이고, 지출의 초과분이 17만 필입니다.
곡식을 석石으로 계산한 것이 2,445만 석이고, 지출하고 남은 것이 74만 석입니다.
초草를 속束으로 계산한 것이 799만 속이고, 지출의 초과분이 811만 속입니다.
그렇다면 1년의 수입이 1년의 지출을 공급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경비를 남는 것을 덜어다가 모자란 것을 보충하되, 항상 부족함을 걱정하므로 비상용을 조금 마련해두었으나 담당 관원이 항상 조정朝廷에 도움을 구하여 내장內藏의 미염米鹽을 가져다 써야만 족할 것입니다.
신臣은 몸소 국가의 재정회계를 맡았기 때문에 이처럼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몇 년 뒤에는 장차 그 걱정을 이기지 못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현재 금중禁中(宮中)에서는 봉양奉養에 절도가 있어, 금옥金玉과 금수錦繡는 예전의 치장 정도를 넘지 않고, 궁실宮室을 수축하지 않고, 견마犬馬 같은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으며, 유사有司는 법제法制를 지키고 신중하게 지출을 절제하여 잘못한 점이 있지 않았는데, 그 폐단이 어디 있습니까?
천하가 오랫동안 태평하기 때문에 사물이 성대하고 용도가 확대된 것은 또한 이치의 떳떳함이니, 처리를 어떻게 하는가를 볼 뿐입니다.
종실宗室 관리의 많음은 황우皇祐 연간에 절도사節度使는 3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9인人이고, 양사유후兩使留後는 1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8인人이고, 관찰사觀察使는 1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15인人이고, 방어사防禦使는 4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42인人이며, 백관百官의 부성富盛함은 경덕대부景德大夫는 39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230인人이고, 조봉랑朝奉郎 이상은 165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695인人이고, 승의랑承議郎은 127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369인人이고, 봉의랑奉議郎은 148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421인人이고, 제사사諸司使는 27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268인人이고, 부사副使는 61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1,110인人이고, 공봉관供奉官은 193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1,322인人이고, 시금侍禁은 316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2,117인人이고, 삼성三省의 관리는 60인人이던 것이 지금은 172인人입니다.
그 밖은 유類로 미루어볼 수 있으니, 신臣은 감히 두루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옛적에는 낭郎은 전행前行에만 제한되었고, 경卿에는 정원定員이 있었거늘, 지금의 대부大夫와 조의朝議는 모두 한정된 법이 없고, 상서尙書와 시랑侍郎은 삼조三曹로 고쳤으며, 지금의 정의대부正議大夫와 은청광록대부銀青光祿大夫는 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관질官秩을 아울러 증가하였으니,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국가의 재부財賦는 하늘이 아니면 생겨날 수 없고, 땅이 아니면 길러질 수 없고, 백성이 아니면 성장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법도 있게 취해 쓰고 때에 따라 거두는 것이니 이렇게만 하면 될 것입니다.
종실宗室 관리가 많은 것은 예제禮制와 법규法規를 써서 절제해야 됩니다.
조종祖宗의 세대에는 처음으로 상질常秩을 가진 관원은 궐원을 기다려서 보임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급資級을 따랐을 뿐이며, 함부로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습니다.
인종仁宗 말년에는 임자任子의 법法을 재상宰相 이하로 감손하지 않음이 없었고, 영종英宗 초년에는 3년마다 관리의 성적을 상고하던 것을 4년으로 〈연한을〉 늘려서 상고하였으며, 신종神宗 초년에는 종실宗室 단문袒免 밖의 원친遠親은 다시 추은推恩하지 않고 단문袒免 안의 근친近親은 시관試官을 거쳐서 정식으로 출사出仕하였습니다.
이 네 가지 일을 가사 지금 하려고 한다면 장차 인심人心을 거역하고 구법舊法을 어기는 것이니 말을 해서도 안 될 일인데, 하물며 행해서야 될 일이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조종祖宗께서는 의심 없이 행하셨고, 당세에도 그르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세事勢가 이미 극에 달하였음에도 변개하지 않으면 패한다는 것은 뭇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정朝廷은 지극히 극단에 달한 사세事勢를 경험하면서도 홀로 견지하고 감히 논의하지 않으니, 신臣은 실로 의아스럽습니다.
진실로 지금부터 논의한다면 그 사세에 말미암고 그 이치에 따라 간단한 문자를 적어서 임자任子에겐 손해가 없고 몰려오는 자들에겐 한계가 있음을 보이도록 할 것이니, 지금은 비록 그 이익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요컨대 10년 후에는 일에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가의賈誼가 제후諸侯들의 변란에 대해 말하기를 “지금 기회를 놓치고 다스리지 않으면 반드시 고질痼疾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臣도 “진실로 능히 재제한다면 온 천하가 행복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