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난성欒城此等文字컨대 其識見甚近裏하니 當勝於증공曾鞏이니라
한漢소제昭帝 聞연왕燕王之譖하니 곽광霍光懼不敢入이니라
소제帝召見곽광光하고 謂之曰 연왕燕王言장군將軍出도이랑都肄郞에 道上稱蹕하고 又擅調益막부교위幕府校尉라하니
故로 議者以爲소제昭帝之賢이 過於성왕成王이라하니라
소제昭帝享國十三年에 年甫及冠하여 功未見於天下하니 其不及성왕成王者 亦遠矣니라
故로 吾以爲성왕成王之壽考는 주공周公之功也요 소제昭帝之短折은 곽광霍光之過也라하니라
昔진晉평공平公有蠱疾에 醫화和視之曰 是謂近女室하여 疾如蠱니 非鬼非食이요 惑以喪志니이다
國之大臣이 榮其寵祿하고 任其大節하여 有災禍興而無改焉이면 必受其咎리이다하니라
성왕成王之幼也에 주공周公爲사師하고 소공召公爲保하니 左右前後 皆賢臣也라
雖以中人之資로도 而起居飮食을 日與之接이면 逮其壯且老也에 志氣定矣리니 其能安富貴易生死리오
使
소제昭帝居深宮
하고 近
이면 雖天資明斷
이라도 而無以養之
하여 朝夕害之者衆矣
니 而安能
乎
아
人主不幸하여 未嘗更事而履大位하니 當得篤學深識之士하여 日與之居니라
不然이면 小人先之하여 悅之以聲色犬馬하고 縱之以馳騁田獵하고 侈之以宮室器服이니라
志氣已亂然後에 入之以讒說하여 變亂是非하고 移易白黑하여 紛然無所不至니라
논어語曰 君子學道則愛人하고 小人學道則易使라하니라
故人必知道而後에 知愛身하고 知愛身而後에 知愛人하고 知愛人而後에 知保天下니라
至한漢소제昭帝하여는 惜其有過人之明이나 而莫能導之以學이니라
假如이윤伊尹相탕湯以及其子하니 而태정太丁외병外丙중임仲壬이 竝不三四年死도 豈皆女室興而皆이윤伊尹之罪歟아
特 目爲大臣이니 有托孤寄國之責者는 不可不知此議니라
난성欒城의 이와 같은 문자文字를 보건대, 그 식견識見이 매우 깊고 투철하니 응당 증공曾鞏보다 낫다.
주周 성왕成王이 관숙管叔‧채숙蔡叔의 참언讒言 때문에 주공周公을 의심하였다가 풍뢰風雷의 변變을 만나 금등金縢의 글을 열어본 뒤에야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환히 알았다.
한漢 소제昭帝가 연왕燕王의 참언讒言을 들으니, 곽광霍光은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소제昭帝가 곽광霍光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연왕燕王이 ‘장군將軍이 도이랑都肄郞에 나감에 도상道上에서 전령傳令하여 계엄戒嚴을 펼치고, 또한 마음대로 막부교위幕府校尉를 더 뽑았다.’고 말하였다.
두 가지 일은 최근의 것이거늘, 연왕燕王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또 장군將軍이 반역을 하려고 했다면 교위校尉를 더 뽑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니, 좌우에서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모두 그 명철함에 굴복하였으므로 곽광霍光은 이로 말미암아 안정을 얻었고, 연왕燕王과 상관上官은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므로 의논하는 자는 소제昭帝의 어짊이 성왕成王보다 낫다고 여긴다.
그러나 성왕成王은 향국享國 40여 년에 치국治國을 잘하여 형법刑法이 쓰이지 않았다.
그가 장차 서거하려 함에 소공召公과 필공畢公에게 명하여 강왕康王을 돕게 하였으니, 사생死生의 갈림길에서 그 말이 분명하여 어지럽지 않았다.
소제昭帝는 향국享國 13년에 나이 겨우 20세여서 공功이 천하天下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성왕成王에 미치지 못한 점 또한 매우 크다.
단명短命과 장수長壽가 비록 천명天命에서 나온 것이나 인위적인 작용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성왕成王의 수고壽考는 주공周公의 공功이요, 소제昭帝의 단절短折은 곽광霍光의 과실過失이라고 생각한다.
옛날 진晉 평공平公에게 고질蠱疾이 있을 때 의원醫員 화和가 보고 말하기를 “이 병은 여자를 가까이해서 생긴 고질蠱疾과 같은 병이니, 귀신 때문도 아니고 음식 때문도 아니며, 〈여색女色에〉 홀려서 의지를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신하가 장차 죽을 것이고 하늘이 돕지 않을 것입니다.
나라의 대신으로서 임금의 은총 어린 복록을 받는 영화를 누리며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재앙이 생겼는데도 구휼하지 않으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조맹趙孟을 기롱하니 조맹趙孟은 그것을 달게 받고 회피하지 않았거늘, 곽광霍光은 어떻게 그 과실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성왕成王이 어릴 때에 주공周公은 사師가 되고 소공召公은 보保가 되었으니, 전후좌우前後左右가 모두 현신賢臣이었다.
비록 중등 가는 사람의 자질資質이라 할지라도 기거음식起居飮食을 날마다 함께 접接하면 장년기와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지기志氣가 굳게 정해질 것이니, 어찌 부귀富貴를 편안히 여기고 생사生死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소제昭帝가 친신親信한 이는 오직 곽광霍光 한 사람뿐이었다.
곽광霍光이 비록 충신忠信하고 독실篤實하였으나 배우지 않아 경술經術이 없었다.
그가 더불어 국사國事를 함께한 이는 오직 장안세張安世 한 사람뿐이고, 더불어 기밀의 일을 결단한 이는 오직 전연년田延年 한 사람뿐이었다.
선비로서 경술經術에 능통하고 의리義理를 아는 이를 곽광霍光은 알아주지 않았다.
그 뒤에 비록 ‘〈하늘이〉 오래도록 구름만 드리우고 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서 하후승夏侯勝을 귀중히 여기고, 괴외蒯聵의 일에 감동하여 준불의雋不疑를 어질게 여겼으나 끝내 또한 임용하지 않았다.
가사 소제昭帝로 하여금 깊고 그윽한 궁중에 거하여 폐행嬖倖을 가까이하게 하였다면 비록 천자天資가 영명英明하고 과단果斷하다 하더라도 함양하는 바가 없어 조석으로 해치는 자가 많을 것인데, 어떻게 멀리 미칠 수 있었겠는가?
군주君主는 불행하여 일찍이 세상일을 경험하지 못한 채 제위帝位에 오르기 마련이니, 마땅히 독실하게 배워 깊은 지식을 가진 선비를 얻어 그와 함께 날마다 지내야 한다.
〈선비가 군주에게〉 사邪‧정正에 관한 일을 보여주고, 시是‧비非에 대한 것을 깨우쳐주고, 치治‧난亂에 관한 것을 살펴보게 한다.
이런 일을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하여 편안히 자리 잡히게 하면 사물의 유사관계를 알아서 도리에 통달하고, 우뚝 자립하여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 스스로 응용하도록 맡겨두면 해로울 일이 없을 것이니, 이는 대신大臣이 할 직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인小人이 먼저 나서서 성색聲色과 견마犬馬를 가지고 즐겁게 하고, 치빙馳騁과 전렵田獵을 가지고 방종하게 하고, 궁실宮室과 기복器服을 가지고 사치하게 한다.
그리하여 지기志氣가 이미 어지러워진 연후에 참설讒說을 들이밀어 시是‧비非를 변란變亂하고 백白‧흑黑을 바꾸는 등 어지럽게 이르지 못할 바가 없다.
작게는 족히 제 몸을 해치고 크게는 족히 천하를 어지럽힌다.
그렇게 되면 대신大臣이 비록 말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이르기를 “군자가 도道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道를 배우면 온순해져서 부리기 쉽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반드시 도道를 안 뒤에 제 몸을 사랑할 줄 알고, 제 몸을 사랑할 줄 안 뒤에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안 뒤에 천하天下를 보호할 줄 안다.
그러므로 내가 ‘삼종三宗의 향국享國이 장구長久함은 모두 도道를 배운 힘’이라고 논하였다.
한漢 소제昭帝로 말하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영명英明은 있으나, 능히 그를 학문으로 인도하지 못했던 점이 애석하다.
그러므로 거듭 논하여 이는 곽광霍光의 과실이라고 한 것이다.
한漢 소제昭帝의 향국享國 연한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화禍가 여자를 가까이한 데서 연유했는지 모르겠다.
가령 이윤伊尹 같은 경우, 탕湯을 도와 그 아들에까지 미쳤으니, 태정太丁‧외병外丙‧중임仲壬이 아울러 3, 4년을 못 넘기고 죽은 것도 어찌 모두 여자가 일으킨 것이며 모두 이윤伊尹의 죄이겠는가?
다만 대신大臣을 지목한 것일 뿐이니, 어린 임금을 받들고 나라의 정사를 맡는 책임을 가진 자는 이 의논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