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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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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0. 육지陸贄에 대한
贄之事德宗 本末甚詳이니라
육지陸贄덕종德宗을 섬긴 기록은 본말이 매우 상세하다.
昔吾先君 博觀古今議論하고 而以陸贄爲賢하시니라
옛날 나의 선군先君(蘇洵)께서 고금古今의론문장議論文章을 널리 보시고 육지陸贄의 〈주의奏議를〉 훌륭하게 여기셨다.
吾幼而讀其書하니 其賢比漢 而詳練過之니라
내가 어려서 그의 책을 읽어보았더니, 현능賢能한대漢代가의賈誼와 서로 비교할 수 있고 문장의 상밀詳密단련鍛鍊가의賈誼보다 뛰어났다.
육지陸贄는 초년에는 종관從官으로 덕종德宗을 섬기고 노년에는 재상宰相이 되었으며, 덕종德宗을 따라 〈봉천奉天에〉 나아가 있을 때나 덕종德宗과 함께 경사京師로 돌아와 있을 때나 덕종德宗과실過失보구補救하고 나라의 위망危亡을 구제하였다.
比其老也 功業定矣언만하니 其故何也
노경에 이르러 공업功業이 완성되었지만 끝내는 배연령裴延齡의 손에 죽었으니,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孔子曰 南人有言曰 人而無恒이면 不可以作巫醫라하니 善夫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남쪽 나라 사람들의 말에 ‘사람으로서 여일한 결심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원 노릇도 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좋은 말이다.
〈《주역周易항괘恒卦 구삼九三 효사爻辭에〉 ‘덕을 닦음에 여일한 결심이 없으면 항상 수치를 당한다.’ 했다.”라고 하였다.
贄以有常之德으로 而事德宗之無常하니 以巫醫之明으로 而治無常之疾이니라
육지陸贄는 여일한 으로써 덕종德宗의 여일하지 못한 마음을 섬겼으니, 무당과 의원의 밝음으로써 여일치 못한 병을 다스리는 격이었다.
是以 承其羞耳니라
이 때문에 그런 수치를 당했을 뿐이다.
之初 好名而貪功하니라
덕종德宗즉위卽位 초년初年명예名譽를 좋아하고 공업功業을 탐하였다.
하삭河朔(黃河 이북 지역)을 보유한 세 반란자는 부자父子가 서로 계승한 지 30년이었는데도, 덕종德宗이 장차 천하天下의 힘으로써 〈번진藩鎭 세력을〉 제압하려고 하니, 전열田悅은 놀라고 의심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주도朱滔왕무준王武俊이 그에 호응하였다.
덕종德宗마수馬燧이포진李抱眞이봉李芃 등 세 장수로 하여금 가서 그들의 칼날을 맞이하게 하니, 승부勝負의 형세가 결정되지 못하였다.
帝急於成功하여 復使李晟出禁衛之兵하고 李懷光擧朔方之衆하여 五將萃於魏郊하니니라
덕종德宗공업功業을 이루기에 급급하여 다시 이성李晟에게는 금위禁衛의 군대를 출동하게 하고, 이회광李懷光에게는 삭방朔方의 군대를 동원하게 하여 다섯 장수가 모두 위주魏州의 경내에 모이게 되니, 회서淮西 이희열李希烈이 그 기회를 타서 반란을 일으켰다.
兵連禍結하니 常賦所不能贍이라
병화兵禍가 연속되자, 고정된 부세만으로는 경비를 공급할 수 없었다.
於是 爲之하고 하여 空內以事外하니 이언만 而帝不知也니라
그래서 〈부족한 공급을〉 위하여 고정된 부세 외에 관전貫錢가옥家屋간가間架에 세금을 부과하고 상고商賈에게 돈을 빌려, 경성의 부고府庫를 전부 털어서 사방의 번진藩鎭진공進攻하였으니, 관중關中이 이미 어지러워졌건만 덕종德宗은 그런 줄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贄曰 今兩河淮西爲禍亂之首者 獨四五凶人而已 臣料其間必有旁遭詿誤리이다
육지陸贄가 아뢰기를 “지금 하북河北하남河南 그리고 회서淮西에서 화란禍亂의 우두머리가 된 자는 4, 5명의 흉악한 사람일 뿐이니, 이 헤아리건대, 그 사이에는 반드시 잘못 연루된 자가 있을 것입니다.
內畜危疑而計不能止者 未必處心積慮하여 果於僭逆也 而況脅從之黨乎잇가
가슴속에 의구심을 품어 반역할 계획을 중지하지 않는 자도 반드시 모두 꾸준히 생각을 짜내어 참역僭逆을 결행하는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협박을 이기지 못하여 억지로 따르는 무리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陛下若能招懷以禮하고 悔禍以誠하여 使來者必安하고 安者必久하여 人知獲免이면 則誰願復爲惡者잇가
폐하陛下께서 만일 로써 그들을 불러서 회유하고 성심으로써 그들에게 입힌 재화災禍를 제거하셔서, 귀순한 사람은 반드시 편안함을 누리게 하고 편안함을 누리는 사람은 반드시 지속되게 하여, 사람들이 죽음을 면할 수 있음을 안다면 누가 다시 악한 자가 되기를 원하겠습니까?
縱有野心難馴이라도 臣知從化者 必過半矣리이다하되 帝猶意西師可以必克하고 忽其言不用이니라
비록 길들이기 어려운 야심野心을 가진 자가 있더라도 귀화하는 자가 반드시 절반이 넘을 것임을 은 압니다.”라고 하였지만, 덕종德宗은 오히려 서쪽으로 토벌하러 간 군사가 반드시 〈전열田悅왕무준王武俊주도朱滔 등을〉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겨, 육지陸贄의 말을 경시하고 쓰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경원涇原 반졸叛卒이 일어나니, 황급히 구적寇賊을 피했다가 반년 만에 경사京師로 돌아왔고, 덕종德宗 또한 늙어서 전쟁이 싫어졌다.
於是 行一切之政하되 專以姑息涵養藩鎭이니라
그래서 모든 정사를 행하되 오로지 고식지책姑息之策으로 번진藩鎭포용包容하고 양육養育하였다.
凡節度使死 之得士心者 皆就命留後니라
무릇 절도사節度使가 죽으면 장좌將佐 중에 군심軍心을 얻은 자가 모두 임명을 받아 유후留後가 되었다.
雖以簒奪請命者 亦如之니라
비록 찬탈簒奪을 하고 임명을 청하는 자라 하더라도 또한 만찬가지로 처리하였다.
宣武劉士寧 以暴慢失衆하니 其將李萬榮 因其出畋하여 閉門逐之하니라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 유사녕劉士寧포만暴慢한 행동으로 민심을 잃으니, 그 장수 이만영李萬榮이 〈유사녕劉士寧이〉 밖에 나가 사냥하는 틈을 타서 문을 닫고 쫓아냈다.
하니 贄曰 如士寧之惡 萬榮棄而違之可也 討而逐之可也 惟伺隙而簒取其位則不可니이다
덕종德宗이 장차 〈이만영李萬榮을〉 절도사節度使로 임명하려고 하니, 육지陸贄가 아뢰기를 “유사녕劉士寧같이 한 사람은 이만영李萬榮이 버리고 다른 데로 가는 것도 가하고 토벌하여 내쫓는 것도 가하지만, 오직 기회를 엿보아 그 〈절도사節度使〉 자리를 찬취簒取하는 것만은 불가합니다.
何者
왜 그렇겠습니까?
方鎭之臣 事多專制하니 欲加之罪 誰無辭者잇가
방진方鎭의 신하에게는 전제專制하는 일이 많으니, 그에게 죄를 가하려고 한다면 누구에겐들 〈죄를 가할〉 구실이 없겠습니까?
若使傾奪之徒 輒得其處 則四方諸將 無復安者矣리이다
만일 쟁탈하는 무리로 하여금 문득 그 〈절도사節度使의〉 자리를 얻게 한다면 사방의 여러 장수들에게는 다시 편안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且萬榮搆亂之日 諸郡守將 固非其同謀也 一城士衆 亦未必皆其黨也니이다
이만영李萬榮이 반란을 일으킨 날에 제군諸郡수장守將들은 본래 그의 동모자同謀者가 아니었고, 한 의 관리와 민중도 반드시 모두 그의 무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方成敗逆順之勢 交戰於中 其肯捐軀與之同惡乎잇가
바야흐로 성패成敗역순逆順의 형세가 마음속에서 교전할 때에 누가 기꺼이 몸을 버려 그와 더불어 한 일을 함께하려고 하겠습니까?
今若選命賢將하고 降詔軍中하며 獎萬榮撫定之功하고 別加寵任하며 褒將士輯睦之義하고 例賜恩賞하여 使衆知保安이면 則誰肯復助其亂이리잇가
지금 만일 전선銓選을 거쳐 어진 장수를 뽑고 조서詔書군중軍中에 내려보내며, 이만영李萬榮안무安撫하고 평정平定포장襃獎하고 별도로 총애와 신임을 더하며, 장사將士화목和睦한 의리를 포장襃獎하고 의례적으로 은상恩賞을 하사하여 군중으로 하여금 보안保安을 알게 한다면 그 누가 기꺼이 다시 그 반란을 보조하려고 하겠습니까?
萬榮縱欲跋扈 勢亦無所至矣리이다하나
이만영李萬榮이 비록 발호跋扈하려고 하더라도 그 형세가 또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帝方苟安無事하여 하니라
그러나 덕종德宗은 막 구차하게 목전의 무사안일을 탐하고 있는 터였으므로 끝내 또한 〈육지陸贄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由此觀之컨대 帝常持無常之心이라
이것으로 보건대, 덕종德宗은 항상 여일하지 못한 마음을 가졌다.
前勇而後怯하고 贄常持有常之心이라
그러므로 앞에는 용맹스러웠으나 뒤에는 겁을 먹었고, 육지陸贄는 항상 여일한 마음을 가졌다.
勇怯各得其當이니라
그러므로 용맹스러움과 겁내는 것이 각각 그 타당함을 얻었다.
이나 其君臣之間 異同至此하니 雖欲上下相保 不可得矣니라
그러나 그 군신君臣의 사이에 이동異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상하上下가 서로 〈평안무사를〉 보지保持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될 수 없었다.
盧龍諸將 連害帥臣하고 最後張絳殺陳行泰하니라
회창會昌 연간에 노룡盧龍의 여러 장수들이 연달아 수신帥臣을 해쳤고, 최후에는 장강張絳진행태陳行泰를 살해하였다.
宰相李德裕以爲 河朔請帥 皆報下太速이라 軍得以安이니라
재상宰相 이덕유李德裕는 “하삭河朔에서 장수의 임명을 청해오면 모두 빨리 서둘러 임명장을 내려보냈기 때문에 군사가 안정될 수 있었다.
若稍緩之 必且有變이니라
만일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춰서 임명한다면 반드시 또 변고가 생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旣而 回鶻한대 軍使張仲武 請以本軍擊之하니
얼마 후에 회홀回鶻 오개가한烏介可汗천덕새天德塞를 침범하자, 웅무군사雄武軍使 장중무張仲武본군本軍으로 회홀回鶻을 칠 것을 청하였다.
德裕問知仲武可用하고 言之武宗하여 擧以爲帥하니
이덕유李德裕장중무張仲武가 쓸 만한 사람임을 물어서 알고 무종武宗에게 말하여 그를 천거해서 장수로 삼았다.
張絳旣爲其下所殺하고 而仲武遂以功名終하니라
장강張絳은 이미 그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장중무張仲武는 드디어 공명功名으로 일생을 마쳤다.
德裕之謀 則贄之故智也니라
이덕유李德裕모책謀策은 곧 육지陸贄가 썼던 옛 모책謀策이었다.
이나 이요이니 其禍皆出於聚斂之臣이니라
그러나 덕종德宗이 피란 나간 것은 진경陳京조찬趙贊 때문이었고, 육지陸贄가 쫓겨난 것은 정이程异배연령裴延齡 때문이었으니, 그 는 모두 취렴聚斂하는 신하에게서 나왔다.
贄之賢 非不知也니라
육지陸贄의 어짊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帝歸自興元하니 贄因事言曰 齊桓公自莒入齊하여 伯業旣成하니 而管仲以不忘在莒爲戒하니라
덕종德宗흥원興元 원년(784)에 경사京師로 돌아오니, 육지陸贄가 어떤 일을 계기로 아뢰기를 “ 환공桓公나라로부터 나라에 들어와서 백업伯業을 이미 이루니, 관중管仲은 ‘나라에 있을 〈당시의 고생하던 일을〉 잊지 말라.’는 것을 가지고 경계하였습니다.
衛獻公自齊還衛하니 諸大夫逆諸境者 執其手而與之言하고 逆於門者 頷之而已니라
헌공獻公나라에서 나라로 돌아올 때에 여러 대부大夫 중에 국경 지대에서 맞이하는 자에게는 손을 잡고 말을 하고, 성문에서 맞이하는 자에게는 고개만을 끄덕였을 뿐입니다.
경계하는 마음은 잊기 쉽고 교만한 마음은 생기기 쉬우니, 나라와 나라의 임금은 폐하陛下시귀蓍龜입니다.”라고 하였다.
贄言雖切이나 而帝終不改니라
육지陸贄의 말이 비록 절실하였으나 덕종德宗은 끝내 고치지 않았다.
吾以爲使贄反國하여 而爲 則其君臣之間 超然無後患이니 然後可以言智也哉인저
나는 생각하건대, 가사 육지陸贄가 귀국하여 치이자피鴟夷子皮가 배를 타고 떠나갔듯이 하였더라면 그 임금과 신하 사이에 초연超然하여 후환後患이 없었을 것이니, 그렇게 한 연후에야 지혜로운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역주
역주1 陸贄論 : 陸贄(754~805)는 唐나라 蘇州 嘉興 사람으로 자는 敬輿이다. 朱泚의 亂 때 德宗을 따라 奉天에 갔는데, 詔書가 대부분 陸贄의 손에서 나왔다. 裴延齡의 참소를 당하여 忠州別駕로 貶謫되었다가 죽었다. 奏議 수십 편을 지어 時弊를 지적하였는데, 論辯이 명철하여 후세의 추중을 받았다. 諡號는 宣이고, 저서로는 《陸宣公奏議集》을 남겼다.
《欒城集》에는 이 글의 標題를 〈陸贄〉라고 하였다.
역주2 賈誼 : 《漢書》 〈賈誼傳〉에 의하면 “漢 文帝가 賈誼(B.C. 201~B.C. 169)를 불러 博士로 삼았다가 太中大夫로 승진시켰다. 賈誼는 正朔을 고치고 服色을 바꾸고 法度를 제정하고 禮樂을 일으켰으며, 또한 여러 번 상소하여 政事를 진언하고 時弊를 말함으로써 大臣의 忌憚 대상이 되었다. 그는 외직으로 나아가 長沙王太傅가 되고, 이어 梁懷王太傅로 옮겼다가 懷王이 말에서 떨어져 죽자, 太傅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통감하고 哭泣하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역주3 贄始以從官事唐德宗 : 《新唐書》 〈陸贄傳〉에 의하면, 唐 德宗이 陸贄를 불러 翰林學士를 시켰다고 한다. 從官은 여기서는 君主의 近臣을 가리키니, 翰林學士가 바로 皇帝의 親信한 近臣이기 때문이다.
역주4 從之出奔而與之反國 彌縫其闕而濟其危亡 : 《新唐書》 〈陸贄傳〉에 의하면 “陸贄는 德宗을 따라 奉天에 나아가 있을 때나 京師로 돌아와 德宗을 보필할 때나 모두 일에 따라 諫言을 함으로써 過失을 補救하고 危難을 해소하였다.”고 한다.
역주5 卒斃於裴延齡之手 : 德宗이 裴延齡을 등용하여 判度支로 삼으니, 陸贄가 “그는 僻戾하고 躁妄하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오래지 않아 裴延齡이 奸佞으로 인하여 德宗의 환심을 깊이 사서 못되게 굴었으나 감히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陸贄가 상소하여 애써 간하니 德宗은 못마땅해서 太子賓客으로 파직시켰는데, 《新唐書》 〈陸贄傳〉에는 “裴延齡이 皇帝가 陸贄를 박대하는 마음을 헤아리고 온갖 방법으로 陸贄의 단점을 참소하니, 皇帝가 결국 노하여 陸贄를 죽이려고 하자, 陽城 등이 나서서 구제하였기 때문에 忠州別駕로 貶職되는 선에 끝났다.”고 적고 있다.
역주6 孔子曰……或承之羞 : 《論語》 〈子路〉에 보인다.
역주7 帝卽位 : 德宗은 大曆(唐 代宗의 연호) 14년(779)에 帝位에 올랐다.
역주8 河朔三叛 : 《舊唐書》 〈德宗本紀〉에 “大曆 연간에 李正己는 淄州, 靑州, 齊州, 海州, 登州, 萊州, 沂州, 密州, 德州, 棣州, 曹州, 濮州, 徐州, 兗州, 鄆州 등 15州의 땅을 보유하고, 李寶臣은 恒州, 定州, 易州, 趙州, 深州, 冀州, 滄州 등 7州의 땅을 보유하고, 田承嗣는 魏州, 博州, 相州, 衛州, 洺州, 貝州, 澶州 등 7州의 땅을 보유하고, 각각 군사 수만 명을 모았다. 그들은 비로소 반란으로 인하여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비록 조정에서 恩寵을 베풀었으나 의구심을 품고 서로 연대하여 굳게 결속했다.”라고 한 말을 보면, 당연히 魏博七州節度使 田承嗣, 成德節度使 李寶臣, 淄靑節度使 李正己를 가리킨다.
역주9 父子相襲三十年矣 : 田承嗣와 李寶臣은 본래 安祿山의 부하로서 安祿山을 따라 배반하고, 朝廷에 귀순한 뒤에도 여러 번 배반하였다. 李正己(李懷玉이라고도 함)는 侯希逸을 대신해서 節度使가 된 다음 田承嗣와 연대하여 天子를 섬기지 않았다. 田承嗣가 죽으니 그 조카 田悅이 대신 節度使가 되었고, 李寶臣은 아들 李惟岳에게 전하고, 李正己는 아들 李納에게 전하였다. 田承嗣와 李寶臣은 天寶 14년(755)에 배반하였으니, 德宗朝(780~804)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이미 30여 년이었다.
역주10 帝將以天下之力勝之……朱滔王武俊和之 : 《新唐書》 〈藩鎭魏博田悅傳〉에 의하면 “德宗이 帝位에 오르자마자 方鎭에 관심을 가지고 먼저 田悅을 파면하여 軍衆을 歸農시켰으며, 또 동쪽으로 泰山을 봉하려고 하니, 節度使들이 모두 놀라 의구심을 가졌다. 田悅‧李惟岳‧李納이 함께 반란을 일으키니, 王武俊과 朱滔 등이 그들을 토벌하였다. 王武俊은 李惟岳을 죽이고 深州는 朱滔에게 항복하였다. 德宗은 王武俊을 恒州刺史로 삼고, 康日知를 深州‧趙州의 刺史로 삼았다. 王武俊은 賞이 박한 것에 불만을 품고, 朱滔는 深州를 얻지 못한 것을 원망하였다. 그래서 田悅과 연대하여 조정을 배반하였다.”고 한다.
역주11 帝使馬燧李抱眞李芃(봉)三將往迎其鋒 勝負之勢未决也 : 《新唐書》 〈德宗本紀〉에 “建中 2년(781)에 魏博節度使 田悅이 반란을 일으키니, 神策都虞侯 李晟, 河東節度使 馬燧, 昭義軍節度使 李抱眞, 河陽節度副使 李芃이 그를 토벌하였다.”란 말이 보인다.
역주12 淮西李希烈 乘間而起 : 淮西는 唐나라 때의 方鎭 이름이다. 李希烈(?~786)은 德宗 때에 淮西節度使가 되어 황제의 명을 받들고 李納을 토벌하다가 도리어 李納과 通謀하고 朱滔‧田悅 등과 군사를 연합하여 天下都元帥라고 자칭했으며, 오래지 않아 楚帝라 칭하였다. 최후에는 부하에게 독살을 당하였다.
역주13 抽貫筭間 : 抽貫은 唐 德宗 때에 실시하던 일종의 징세 방법으로, 고정된 부세 외에 매 貫錢 중에서 약간의 文을 징수하는 세법이다. 筭間은 家屋의 間架에 부과하는 세법이다.
역주14 假貸商賈 : 唐 德宗 때에 ‘전쟁이 끝나면 償還한다.’는 조건으로 商戶에게 돈을 빌린 일이 있었다.
역주15 關中已亂 : 京城의 안팎에서 家屋의 間架에 세금을 매기고 商戶에서 돈을 빌리는 등의 일을 하여 民怨이 沸騰하였으므로, 京城에 주재한 涇原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가리킨다.
역주16 : 저본에는 ‘能’으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皆’로 바꾸었다.
역주17 未幾而涇原叛卒之變起……半年而歸 : 《新唐書》 〈德宗本紀〉에 의하면 “建中 2년(781)에 田悅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4년에 涇原節度使 姚令言이 반란을 일으켜 京師를 침범하니 德宗이 奉天으로 도피하였고, 興元 원년(784)에 京師를 수복하니 德宗이 京師로 돌아왔다.”고 한다.
역주18 帝亦老 : 이때(興元 원년) 德宗의 나이 43세였다.
역주19 將佐 : 將領과 佐官을 이른다.
역주20 宣武劉士寧……帝將命以其位 : 《新唐書》 〈德宗本紀〉에 “貞元 9년(793)에 宣武軍將 李萬榮이 그 節度使 劉士寧을 쫓아내고 스스로 留後라고 칭하였다.”라고 한 데 대하여, 陸贄는 〈請不與李萬榮汴州節度使狀〉에서 “가사 劉士寧이 장수가 되어 윗사람에게 거만을 부리고 사람들에게 포악한 행동을 하였다면 李萬榮이 나라를 위하는 성의와 惡을 질시하는 천성을 가지고 그를 버리고 다른 데로 가는 것도 가하고 토벌하여 내쫓는 것도 가하지만, 그 장수를 도모하고 그 자리를 찬탈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역주21 竟亦不許 : 《新唐書》 〈德宗本紀〉 貞元 12년(796) 조에 “宣武軍節度使 李萬榮 卒”이라고 적었으니, 李萬榮은 이때 이미 朝廷의 정식 임명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주22 會昌 : 唐 武宗의 연호(841~846)이다.
역주23 烏介可汗 : 回鶻 부락의 酋長을 이른다.
역주24 天德塞 : 唐 玄宗 天寶 연간에 大同川 서쪽에 城을 쌓고 天德軍이라 일컬었다.
역주25 帝之出也 以陳京趙贊 : 唐 德宗 때에 陳京의 건의에 의해 富商의 돈을 빌리고, 趙贊의 건의에 의해 家屋의 間架에 세금이 부과되자, 民怨이 沸騰하였다. 京城에 주재한 涇原의 군대는 民怨이 沸騰한 기회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켰고, 德宗은 이 반란으로 인하여 奉天으로 피란을 나가게 되었다.
역주26 贄之逐也 以程异裴延齡 : 陸贄는 程异와 裴延齡의 참소에 의해 지방으로 쫓겨났다.
역주27 齊桓公自莒入齊……陛下之蓍龜也 : 陸贄가 撰한 《翰苑集》 〈興元論賜渾瑊詔書爲取散失內人等議狀〉에는 “옛날 衛 獻公이 외국으로 달아났다가 오랜 뒤에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大夫 중에 국경 지대에서 맞이하는 자에게는 손을 잡고 말을 하고, 성문에서 맞이하는 자에게는 고개만을 끄덕였을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驕怠가 쉽게 생김을 말한 것이다. 齊 桓公이 장차 霸功을 도모하려고 하자, 管仲이 ‘莒나라에 있을 〈당시의 고생하던 일을〉 잊지 말라.’는 것을 가지고 경계하였으니, 그것은 情志가 쉽게 변함을 두려워한 것이다.[昔衛獻出奔久而復國 大夫迎於境者 執其手而與之言 迎于門者 頷之而已 言其驕怠之易生也 齊桓將圖霸功 管仲戒之以無忘在莒 懼其情志之易變也]”라고 하였다.
역주28 蓍龜 : 점을 칠 때 쓰는 蓍草와 거북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거울로 삼다.’ 또는 ‘본보기로 삼아 경계하다.’의 뜻으로 사용했다.
역주29 鴟夷子皮浮舟而去 : 鴟夷子皮는 곧 춘추시대 越나라 范蠡를 가리킨다. 范蠡는 越王 句踐을 도와 吳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句踐의 사람됨이 安樂은 함께할 수 없음을 알고 배를 타고 齊나라로 가서 성명을 鴟夷子皮로 변경하였다고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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