昔吾先君 博觀古今議論하고 而以육지陸贄爲賢하시니라
공자孔子曰 南人有言曰 人而無恒이면 不可以作巫醫라하니 善夫라
육지贄以有常之덕종德으로 而事덕종德宗之無常하니 以巫醫之明으로 而治無常之疾이니라
帝急於成功
하여 復使
이성李晟出禁衛之兵
하고 이회광李懷光擧朔方之衆
하여 五將萃於
위주魏郊
하니 而
니라
於是
에 爲之
하고 하여 空內以事外
하니 이언만 而帝不知也
니라
육지贄曰 今兩하북河회서淮西爲禍亂之首者는 獨四五凶人而已니 臣料其間必有旁遭詿誤리이다
內畜危疑而計不能止者
도 未必
處心積慮
하여 果於僭逆也
온 而況脅從之黨乎
잇가
陛下若能招懷以禮하고 悔禍以誠하여 使來者必安하고 安者必久하여 人知獲免이면 則誰願復爲惡者잇가
縱有野心難馴이라도 臣知從化者 必過半矣리이다하되 帝猶意西師可以必克하고 忽其言不用이니라
凡
절도사節度使死
면 之得士心者 皆就命
유후留後니라
선무군절도사宣武유사녕劉士寧이 以暴慢失衆하니 其將이만영李萬榮이 因其出畋하여 閉門逐之하니라
하니 육지贄曰 如
유사녕士寧之惡
은 이만영萬榮棄而違之可也
요 討而逐之可也
나 惟伺隙而簒取其位則不可
니이다
方鎭之臣은 事多專制하니 欲加之罪면 誰無辭者잇가
若절도사使傾奪之徒로 輒得其處면 則四方諸將이 無復安者矣리이다
且이만영萬榮搆亂之日에 諸郡守將은 固非其同謀也요 一城士衆도 亦未必皆其黨也니이다
方成敗逆順之勢 交戰於中에 其肯捐軀與之同惡乎잇가
今若選命賢將하고 降詔軍中하며 獎이만영萬榮撫定之功하고 別加寵任하며 褒將士輯睦之義하고 例賜恩賞하여 使衆知保安이면 則誰肯復助其亂이리잇가
然이나 其君臣之間에 異同至此하니 雖欲上下相保나 不可得矣니라
中
에 노룡盧龍諸將
이 連害帥臣
하고 最後
장강張絳殺
진행태陳行泰하니라
재상宰相이덕유李德裕以爲 하삭河朔請帥를 皆報下太速이라 故로 軍得以安이니라
旣而
오 회홀回鶻이 擾
한대 웅무군사軍使장중무張仲武가 請以本
웅무군사軍擊之
하니
이덕유德裕問知장중무仲武可用하고 言之무종武宗하여 擧以爲帥하니
장강張絳旣爲其下所殺하고 而장중무仲武遂以功名終하니라
帝歸自흥원興元하니 육지贄因事言曰 제齊환공桓公自거莒入제齊하여 伯業旣成하니 而관중管仲以不忘在거莒爲戒하니라
위衛헌공獻公自제齊還위衛하니 諸대부大夫逆諸境者 執其手而與之言하고 逆於門者는 頷之而已니라
吾以爲使
육지贄反國
하여 而爲
면 則其君臣之間
에 超然無後患
이니 然後可以言智也哉
인저
육지陸贄가 덕종德宗을 섬긴 기록은 본말이 매우 상세하다.
옛날 나의 선군先君(蘇洵)께서 고금古今의 의론문장議論文章을 널리 보시고 육지陸贄의 〈주의奏議를〉 훌륭하게 여기셨다.
내가 어려서 그의 책을 읽어보았더니, 현능賢能은 한대漢代의 가의賈誼와 서로 비교할 수 있고 문장의 상밀詳密과 단련鍛鍊은 가의賈誼보다 뛰어났다.
육지陸贄는 초년에는 종관從官으로 당唐 덕종德宗을 섬기고 노년에는 재상宰相이 되었으며, 덕종德宗을 따라 〈봉천奉天에〉 나아가 있을 때나 덕종德宗과 함께 경사京師로 돌아와 있을 때나 덕종德宗의 과실過失을 보구補救하고 나라의 위망危亡을 구제하였다.
노경에 이르러 공업功業이 완성되었지만 끝내는 배연령裴延齡의 손에 죽었으니,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남쪽 나라 사람들의 말에 ‘사람으로서 여일한 결심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원 노릇도 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좋은 말이다.
〈《주역周易》 항괘恒卦 구삼九三 효사爻辭에〉 ‘덕을 닦음에 여일한 결심이 없으면 항상 수치를 당한다.’ 했다.”라고 하였다.
육지陸贄는 여일한 덕德으로써 덕종德宗의 여일하지 못한 마음을 섬겼으니, 무당과 의원의 밝음으로써 여일치 못한 병을 다스리는 격이었다.
덕종德宗은 즉위卽位 초년初年에 명예名譽를 좋아하고 공업功業을 탐하였다.
하삭河朔(黃河 이북 지역)을 보유한 세 반란자는 부자父子가 서로 계승한 지 30년이었는데도, 덕종德宗이 장차 천하天下의 힘으로써 〈번진藩鎭 세력을〉 제압하려고 하니, 전열田悅은 놀라고 의심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주도朱滔와 왕무준王武俊이 그에 호응하였다.
덕종德宗이 마수馬燧‧이포진李抱眞‧이봉李芃 등 세 장수로 하여금 가서 그들의 칼날을 맞이하게 하니, 승부勝負의 형세가 결정되지 못하였다.
덕종德宗은 공업功業을 이루기에 급급하여 다시 이성李晟에게는 금위禁衛의 군대를 출동하게 하고, 이회광李懷光에게는 삭방朔方의 군대를 동원하게 하여 다섯 장수가 모두 위주魏州의 경내에 모이게 되니, 회서淮西 이희열李希烈이 그 기회를 타서 반란을 일으켰다.
병화兵禍가 연속되자, 고정된 부세만으로는 경비를 공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족한 공급을〉 위하여 고정된 부세 외에 관전貫錢과 가옥家屋의 간가間架에 세금을 부과하고 상고商賈에게 돈을 빌려, 경성의 부고府庫를 전부 털어서 사방의 번진藩鎭을 진공進攻하였으니, 관중關中이 이미 어지러워졌건만 덕종德宗은 그런 줄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육지陸贄가 아뢰기를 “지금 하북河北과 하남河南 그리고 회서淮西에서 화란禍亂의 우두머리가 된 자는 4, 5명의 흉악한 사람일 뿐이니, 신臣이 헤아리건대, 그 사이에는 반드시 잘못 연루된 자가 있을 것입니다.
가슴속에 의구심을 품어 반역할 계획을 중지하지 않는 자도 반드시 모두 꾸준히 생각을 짜내어 참역僭逆을 결행하는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협박을 이기지 못하여 억지로 따르는 무리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폐하陛下께서 만일 예禮로써 그들을 불러서 회유하고 성심으로써 그들에게 입힌 재화災禍를 제거하셔서, 귀순한 사람은 반드시 편안함을 누리게 하고 편안함을 누리는 사람은 반드시 지속되게 하여, 사람들이 죽음을 면할 수 있음을 안다면 누가 다시 악한 자가 되기를 원하겠습니까?
비록 길들이기 어려운 야심野心을 가진 자가 있더라도 귀화하는 자가 반드시 절반이 넘을 것임을 신臣은 압니다.”라고 하였지만, 덕종德宗은 오히려 서쪽으로 토벌하러 간 군사가 반드시 〈전열田悅‧왕무준王武俊‧주도朱滔 등을〉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겨, 육지陸贄의 말을 경시하고 쓰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경원涇原 반졸叛卒의 변變이 일어나니, 황급히 구적寇賊을 피했다가 반년 만에 경사京師로 돌아왔고, 덕종德宗 또한 늙어서 전쟁이 싫어졌다.
그래서 모든 정사를 행하되 오로지 고식지책姑息之策으로 번진藩鎭을 포용包容하고 양육養育하였다.
무릇 절도사節度使가 죽으면 장좌將佐 중에 군심軍心을 얻은 자가 모두 임명을 받아 유후留後가 되었다.
비록 찬탈簒奪을 하고 임명을 청하는 자라 하더라도 또한 만찬가지로 처리하였다.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 유사녕劉士寧이 포만暴慢한 행동으로 민심을 잃으니, 그 장수 이만영李萬榮이 〈유사녕劉士寧이〉 밖에 나가 사냥하는 틈을 타서 문을 닫고 쫓아냈다.
덕종德宗이 장차 〈이만영李萬榮을〉 절도사節度使로 임명하려고 하니, 육지陸贄가 아뢰기를 “유사녕劉士寧같이 악惡한 사람은 이만영李萬榮이 버리고 다른 데로 가는 것도 가하고 토벌하여 내쫓는 것도 가하지만, 오직 기회를 엿보아 그 〈절도사節度使〉 자리를 찬취簒取하는 것만은 불가합니다.
방진方鎭의 신하에게는 전제專制하는 일이 많으니, 그에게 죄를 가하려고 한다면 누구에겐들 〈죄를 가할〉 구실이 없겠습니까?
만일 쟁탈하는 무리로 하여금 문득 그 〈절도사節度使의〉 자리를 얻게 한다면 사방의 여러 장수들에게는 다시 편안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또 이만영李萬榮이 반란을 일으킨 날에 제군諸郡의 수장守將들은 본래 그의 동모자同謀者가 아니었고, 한 성城의 관리와 민중도 반드시 모두 그의 무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성패成敗와 역순逆順의 형세가 마음속에서 교전할 때에 누가 기꺼이 몸을 버려 그와 더불어 악惡한 일을 함께하려고 하겠습니까?
지금 만일 전선銓選을 거쳐 어진 장수를 뽑고 조서詔書를 군중軍中에 내려보내며, 이만영李萬榮이 안무安撫하고 평정平定한 공功을 포장襃獎하고 별도로 총애와 신임을 더하며, 장사將士가 화목和睦한 의리를 포장襃獎하고 의례적으로 은상恩賞을 하사하여 군중으로 하여금 보안保安을 알게 한다면 그 누가 기꺼이 다시 그 반란을 보조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만영李萬榮이 비록 발호跋扈하려고 하더라도 그 형세가 또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덕종德宗은 막 구차하게 목전의 무사안일을 탐하고 있는 터였으므로 끝내 또한 〈육지陸贄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건대, 덕종德宗은 항상 여일하지 못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앞에는 용맹스러웠으나 뒤에는 겁을 먹었고, 육지陸贄는 항상 여일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용맹스러움과 겁내는 것이 각각 그 타당함을 얻었다.
그러나 그 군신君臣의 사이에 이동異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상하上下가 서로 〈평안무사를〉 보지保持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될 수 없었다.
회창會昌 연간에 노룡盧龍의 여러 장수들이 연달아 수신帥臣을 해쳤고, 최후에는 장강張絳이 진행태陳行泰를 살해하였다.
재상宰相 이덕유李德裕는 “하삭河朔에서 장수의 임명을 청해오면 모두 빨리 서둘러 임명장을 내려보냈기 때문에 군사가 안정될 수 있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춰서 임명한다면 반드시 또 변고가 생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회홀回鶻 오개가한烏介可汗이 천덕새天德塞를 침범하자, 웅무군사雄武軍使 장중무張仲武가 본군本軍으로 회홀回鶻을 칠 것을 청하였다.
이덕유李德裕는 장중무張仲武가 쓸 만한 사람임을 물어서 알고 무종武宗에게 말하여 그를 천거해서 장수로 삼았다.
장강張絳은 이미 그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장중무張仲武는 드디어 공명功名으로 일생을 마쳤다.
이덕유李德裕의 모책謀策은 곧 육지陸贄가 썼던 옛 모책謀策이었다.
그러나 덕종德宗이 피란 나간 것은 진경陳京과 조찬趙贊 때문이었고, 육지陸贄가 쫓겨난 것은 정이程异와 배연령裴延齡 때문이었으니, 그 화禍는 모두 취렴聚斂하는 신하에게서 나왔다.
덕종德宗이 흥원興元 원년(784)에 경사京師로 돌아오니, 육지陸贄가 어떤 일을 계기로 아뢰기를 “제齊 환공桓公이 거莒나라로부터 제齊나라에 들어와서 백업伯業을 이미 이루니, 관중管仲은 ‘거莒나라에 있을 〈당시의 고생하던 일을〉 잊지 말라.’는 것을 가지고 경계하였습니다.
위衛 헌공獻公은 제齊나라에서 위衛나라로 돌아올 때에 여러 대부大夫 중에 국경 지대에서 맞이하는 자에게는 손을 잡고 말을 하고, 성문에서 맞이하는 자에게는 고개만을 끄덕였을 뿐입니다.
경계하는 마음은 잊기 쉽고 교만한 마음은 생기기 쉬우니, 제齊나라와 위衛나라의 임금은 폐하陛下의 시귀蓍龜입니다.”라고 하였다.
육지陸贄의 말이 비록 절실하였으나 덕종德宗은 끝내 고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건대, 가사 육지陸贄가 귀국하여 치이자피鴟夷子皮가 배를 타고 떠나갔듯이 하였더라면 그 임금과 신하 사이에 초연超然하여 후환後患이 없었을 것이니, 그렇게 한 연후에야 지혜로운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