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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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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1. 곽숭도郭崇韜에 대한
所言 亦有見
말한 데에도 역시 견해가 있었다.
國無釁而後에야 可以伐人이니라
본국本國화란禍亂이 없은 연후에 남의 나라를 칠 수 있다.
冒釁以伐人이면 敵無釁則己受其災하고 敵有釁則我與敵皆斃니라
본국의 화란禍亂을 무릅쓰고 남의 나라를 치면, 에게 화란禍亂이 없을 경우는 우리가 그 재앙을 받고, 에게 화란禍亂이 있을 경우는 우리와 적이 다 죽는다.
영왕靈王은 백성들을 괴롭혀 자기 욕심을 채우고, 을 일으킬 생각을 품은 백성들을 동원해서 나라를 정벌하였으나, 나라를 요동시킬 수 없었고 기질棄疾이 〈나라를〉 공격하기를 마치 무인지경을 들어가듯이 하였으니, 영왕靈王은 결국 밖에서 죽었다.
之可攻하고 而忘齊國之旣病하니 燕師乘之하여 遂以失國이니라
민왕湣王은 탐욕이 많고 승리하기를 좋아하여 걸송桀宋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만 알고 나라가 이미 피폐한 것은 잊었으니, 나라 군사가 그 틈을 타서 결국 나라를 잃었다.
自古冒釁以攻人 其禍如此矣니라
예부터 화란禍亂을 무릅쓰고 남의 나라를 치는 경우는 그 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勇而善戰하여 與梁人夾河相攻하되 十戰九勝하여 涉河取鄆하고 不十日而克梁하니 威震諸國이니라
후당後唐 장종莊宗은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하여 후량後梁 사람과 황하黃河를 끼고 서로 공격하되 열 번 싸우면 아홉 번은 이겨 황하黃河를 건너가 운주鄆州를 취하였고, 채 10일이 안 되어서 후량後梁을 이기니 위엄이 여러 나라에 떨쳤다.
用兵 未有神速若此者也니라
오대五代용병用兵에 이처럼 신속神速한 자가 없었다.
이나 其克敵之後 하여 하고 府庫之積 罄於耳目之奉이니라
그러나 을 이긴 뒤에 짧은 안녕을 누리기 위하여 음악과 여색의 우환 속에 빠졌으니, 환관宦官영인伶人은 번갈아 정사를 어지럽히고, 부고府庫의 저축은 이목耳目공양供養에 다 없어졌다.
民怨兵怒하여 國有土崩之勢하되 而不知也니라
백성은 원망하고 군사는 하여 나라에 토붕土崩의 형세가 있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한때의 공신功臣들은 모두 돌연히 흥기興起한 군인이었으므로 안위安危의 조짐을 아는 자가 없었다.
惟樞密使郭崇韜 智勇兼人하여 知其不可하고 力言而不見聽이요 求去而不見許니라
오직 추밀사樞密使 곽숭도郭崇韜만이 지혜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서 그 일이 옳지 못함을 알고 극력 말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떠나기를 요구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中外視之仄目하니 崇韜深病之矣니라
안팎에 있는 영행佞倖들이 곽숭도郭崇韜를 보고 곁눈질을 하므로 곽숭도郭崇韜는 그것을 몹시 걱정하였다.
이때 바야흐로 땅을 치려고 하니, 곽숭도郭崇韜는 큰 공을 세워 스스로를 보전할 계획으로 삼으려고, 건의해서 위왕魏王 계급繼岌(莊宗의 장자長子)을 원수元帥로 삼고 자기는 부장副將이 되어 군사 6만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
兵不逾時하여 而克成都하고하니 料敵制勝之功 可謂盛矣니라
후당後唐의 군사는 단시일에 성도成都를 빼앗고 왕연王衍을 항복시켰으니, 적정敵情을 헤아려 전승戰勝한 공이 성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나 崇韜知蜀之易與하고 而不知唐之已亂이니라
그러나 곽숭도郭崇韜 땅은 용이하게 접수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후당後唐은 이미 어지러운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挈其良將勁兵하고 西行數千里하여 雖立大功이나이니라
어진 장수와 씩씩한 병졸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수천 리를 가서 비록 큰 공은 세웠으나, 참소로 땅에서 죽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땅을 정벌하러 간 군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적에 조재례趙在禮하삭河朔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명종明宗북정北征하였다가 결국은 조재례趙在禮와 함께 반란을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향하여 변주汴州를 빼앗고 낙양洛陽에 들어오니, 끝내 한 사람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向使西師不出이면 蜀雖未下 而京師有重兵하고 崇韜不死하며 河朔叛臣 心有所畏하여 不敢妄動이면 則莊宗不亡하고 崇韜不死리니 禍福未可知也니라
지난번에 가사 서쪽으로 군사가 나가지 않았더라면 땅은 비록 항복받지 못했더라도 경사京師에는 중병重兵이 있고 곽숭도郭崇韜는 죽지 않았을 것이며, 하삭河朔반신叛臣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 감히 망동妄動하지 않았다면 장종莊宗은 망하지 않고 곽숭도郭崇韜은 죽지 않았을 것이니, 그 화복禍福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嗟乎
아!
崇韜冒釁以伐人하되 蹈齊湣之禍하여 而以爲安하니 惜其有智而未始學也니라
곽숭도郭崇韜화란禍亂을 무릅쓰고 남을 치되 민왕湣王를 답습하여 〈스스로를〉 보전하려고 하였으니, 지혜는 있으나 당초에 배우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역주
역주1 郭崇韜論 : 郭崇韜(?~926)는 五代 後唐 사람으로 벼슬은 兵部尙書, 樞密使에 이르렀다. 後唐 同光 원년(923)에 莊宗에게 권하여 汴州를 습격하고 梁나라를 멸하게 하여 謀議로 佐功 제1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鐵券(공훈을 기록한 책)을 하사받고 侍中과 成德軍節度使를 제수받았다.
郭崇韜는 국가에 충성을 다하여 일을 당하면 간절히 간언하였기 때문에 宦官과 伶人이 用事에 불편을 느꼈다. 郭崇韜는 본래 宦官을 질시하였으므로 宦官 馬紹宏‧李從襲‧向延嗣 등이 그를 원망하여 그를 讒訴하기 시작하였다. 同光 3년에 郭崇韜는 招討使로서 魏王 李繼芨을 따라 蜀(前蜀)을 치러 나가 있었는데, 이때에 劉后는 宦官 馬彦珪를 시켜 詔書를 위조해 李繼芨에게 내려서 郭崇韜를 죽이게 하였다.
郭崇韜가 죽은 뒤에는 조정에 직언하는 忠臣이 없었으며, 따라서 李嗣源(明宗)의 반란을 초래하여 결국 王位를 李嗣源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欒城集》에는 이 글의 標題를 〈郭崇韜〉라고 하였다.
역주2 楚靈王……靈王遂死於外 : 《春秋左氏傳》 昭公 4년에는 “楚 靈王이 諸侯들을 거느리고 吳나라를 정벌하였다.……齊나라 慶封을 사로잡고 그의 가족을 모두 죽였다. 장차 慶封을 죽이려고 할 때에 椒擧가 말하기를 ‘臣이 듣건대, 「허물이 없는 자라야 남을 죽일 수 있다.[無瑕者 可以戮人]」고 했습니다.’라고 하였다.”는 말이 보이고, 昭公 5년에는 “楚 靈王은 諸侯와 東夷를 거느리고 吳나라를 정벌하였다.……吳나라가 미리 대비하였기 때문에 楚나라는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란 말이 보인다.
昭公 12년에는 “楚子(楚 靈王)가 州來로 사냥을 나가 潁尾에 駐屯하여 蕩侯‧潘子‧司馬督‧囂尹午‧陵尹喜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徐나라를 包圍하여 吳나라를 威脅하게 하고, 楚子는 乾谿에 駐屯하여 저들을 後援하였다.”란 말이 보인다.
昭公 13년에는 “楚子가 令尹으로 있을 때 大司馬 薳掩을 죽이고서 그 家産을 取하였더니, 임금으로 卽位함에 미쳐 또 薳居의 田地를 빼앗고, 또 許國의 人民을 移住시키고서 許國의 大夫 圍를 人質로 삼았다. 蔡洧는 楚王에게 寵愛를 받았더니 楚王이 蔡國을 擊滅할 때 그 아비가 〈戰亂 中에〉 죽었는데도 楚王은 그에게 國都를 衛戍하는 일에 參與하게 하고서 〈乾谿〉로 갔다.……楚나라 公子 比‧公子 黑肱‧公子 棄疾‧蔓成然‧蔡나라 朝吳가 陳‧蔡‧不羹‧許‧葉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四族의 무리에 의지해 楚나라로 쳐들어갔다.……
蔡公(棄疾)이 須務牟와 史猈를 먼저 城內로 들여보내어 正僕人의 도움을 받아 太子 祿과 公子 罷敵을 죽이게 하였다. 公子 比가 王이 되고 公子 黑肱이 令尹이 되어 魚陂에 駐屯하였다. 公子 棄疾은 司馬가 되어 먼저 王宮을 淸掃하고서, 觀從을 보내어 乾谿에 있는 靈王의 군대로 가서 드디어 〈叛亂을 일으킨 사실을〉 알리고서 ‘먼저 돌아가는 자는 祿位를 회복할 수 있지만 뒤에 돌아가는 자는 劓刑을 받을 것이다.’고 말하게 하니, 靈王의 군대가 訾梁에 이르러 흩어져 도망갔다.……여름 5월 癸亥日에 楚 靈王은 芋尹 申亥氏의 집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란 말이 보인다.
棄疾은 楚 靈王의 아우로, 公子 比를 죽이고 임금이 되니, 곧 楚 平王이다.
역주3 齊湣王……遂以失國 : 《史記》 〈田敬仲完世家〉에 의하면 “齊 湣王은 宣王의 아들로서 일찍이 韓‧魏 양국과 연합하여 선후로 楚‧秦‧燕 3국을 戰勝하고, 또한 宋나라를 정벌하여 宋王을 죽게 하였으나, 뒤에 燕‧秦‧楚‧三晉이 공모하여 齊나라를 정벌하였는데, 燕나라 장수 樂毅 등이 齊나라에 들어가니 湣王은 피살되었다.”고 한다.
역주4 桀宋 : 전국시대 宋 康王 偃을 가리킨다. 康王의 荒淫無道하기가 夏桀과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칭한 것이다. 《史記》 〈宋微子世家〉에 “偃이 스스로 서서 王이 되었는데,……술에 중독이 되어서 부인이나 신하들 중에 간언을 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쏘아 죽였다. 그래서 諸侯들은 모두 그를 ‘桀宋’이라고 하였다.”란 말이 보인다.
역주5 唐莊宗……不十日而克梁 : 《新五代史》 〈唐臣傳 郭崇韜〉에 “後唐의 莊宗은 郭崇韜의 계략을 듣고 즉일로 軍中에 令을 내려 그 家屬을 魏州로 돌려보내게 하고 나서 밤에 楊劉를 건너 鄆州로 좇아 들어가서 汴州를 습격하고 8일 만에 梁나라를 멸망시켰다.”란 말이 보인다.
역주6 唐莊宗 : 李存勖(885~926)을 가리킨다. 李存勖은 본래 西突厥 사람으로서 아버지 李克用을 이어 晉王이 되었으며, 同光 원년(923)에 帝라 칭하고 국호를 ‘唐’이라 하였는데, 史家는 ‘後唐’이라 칭한다.
역주7 五代 : 唐나라 이후의 後梁‧後唐‧後晉‧後漢‧後周를 五代라 칭하였다.
역주8 幸一日之安 : 李存勖이 나라를 세운 지 4년 만에 망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9 沈湎聲色之虞……交亂其政 : 《新五代史》 〈伶官傳〉에 “〈莊宗이 俳優를 좋아하여〉 王이 되면서부터 天子가 될 때까지 항상 俳優와 함께 뜰에서 雜戱를 하였기 때문에 伶人이 이로 말미암아 用事를 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하고, 또 “정사를 망치고 나라를 어지럽힌 자 중에는 景進‧史彦琼‧郭門高 세 사람이 최고였다.”고 하였다. 莊宗은 일찍이 景進의 말을 들어 미녀 1천 명을 뽑아 後宮에 채웠고, 伶人 세 명을 봉하여 刺史로 삼기까지 하였으나 결국 伶人 郭門高에게 시해당했다고 한다.
역주10 一時功臣……未有識安危之幾者 : 당시 功臣 중에 郭崇韜‧李嗣源‧安重誨‧周德威 같은 이와 심지어 伶人 郭門高까지도 모두 한때 名將이었다고 한다.
역주11 佞倖 : 아첨을 잘하여 君主에게 寵幸을 얻는 사람을 가리킨다.
역주12 時方欲伐蜀……而己爲之副 : 《新五代史》 〈唐臣傳 郭崇韜〉에 “明年(同光 3년)에 前蜀을 정벌하려고 大將을 선택할 일을 의논하였는데, 이때에 明宗(李嗣源)이 總管으로 있었으니 당연히 대장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郭崇韜는 참소를 입어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으므로 큰 공을 세워 스스로를 보전할 계획을 하였다. 그래서 ‘契丹이 北邊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은 總管이 아니면 막을 수 없습니다. 魏王 繼岌은 나라의 태자로서 큰 공을 세우지 못하였고, 또 親王(황제의 아들)이 元帥가 되는 것은 唐의 故事입니다.’라고 하니, 荘宗은 繼岌을 西南面行營都統으로 삼고 郭崇韜를 招討使로 삼았는데, 軍政이 모두 郭崇韜에게서 결정되었다.”라고 하였다.
역주13 王衍 : 五代 때 前蜀 王 王建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王建의 뒤를 이어 蜀主가 되었는데, 年少하여 荒淫하고 驕奢하였으며, 政事를 宦官에게 위임하였다. 後唐에 항복한 뒤에 莊王에게 살해되었다.
역주14 不免讒死于蜀 : 《新五代史》 〈唐臣傳 郭崇韜〉에 의하면 “王衍의 아우 宗弼 등은 먼저 後唐에 항복하였고, 宗弼 등은 또 蜀 땅 사람을 데리고 魏王(繼岌)을 만나보는 자리에서 郭崇韜를 蜀 땅에 留鎭시켜 주도록 청하니, 繼岌은 郭崇韜를 몹시 의심하였는데, 郭崇韜는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었다. 따라서 宦官 李從襲과 向延嗣가 ‘郭崇韜는 다른 뜻을 품었으니 魏王을 위태롭게 할까 두렵다.’고 참소하였기 때문에 劉皇后가 직접 繼岌에게 지시하여 郭崇韜를 죽이게 하였으므로, 郭崇韜는 결국 아들 셋과 함께 蜀 땅에 죽었다.”고 한다.
역주15 征蜀之兵未還……遂無一人能禦之者 : 《新五代史》 〈唐太祖家人傳 繼岌〉, 《新五代史》 〈唐本紀 莊宗 下〉, 《新五代史》 〈唐本紀 明宗〉에 의하면 “同光 4년(926) 2월 繼岌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올 때에 趙在禮가 반란을 일으켜 鄴都를 함락시키니, 成德軍節度使 李嗣源(明宗)이 가서 토벌하였고, 繼岌의 군사가 興平에 이르렀을 때에 李嗣源이 趙在禮와 合兵하여 3월에 汴州에 들어오고, 4월에 洛陽에 들어왔다.”고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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