庚辰之冬
에 하여 客於
영천潁川하니 思歸而不能
이니라
諸子憂之曰 父母老矣어늘 而居室未完하니 吾儕之責也라하고 則相與卜築하여 五年而有成이니라
齋成에 求所以名之커늘 予曰 予영빈유로潁濱遺老也라 盍以영빈유로遺老名之리오
予幼從事於詩書하니 凡世人之所能은 茫然不知也니라
予采道路之言
하여 論
之秘
하고 自謂必以此獲罪
러니 而
유사有司果以爲不遜
한대 上獨不許曰 吾以直言求士
하고 士以直言告我
니라
今而黜之
하면 天下其謂我何
리오하시니 재상宰相不得已
하니라
然이나 其間與世俗相從에 事之不如意者 十常六七이니 雖號爲得志나 而實不然이니라
予聞之하니 樂莫善於如意요 而憂莫慘於不如意라하니라
今予退居一室之間하여 杜門却掃하고 不與物接이니라
心之所可는 未嘗不行하고 心所不可는 未嘗不止니라
行止未嘗少不如意하니 則予平生之樂이 未有善於今日者也니라
汝曹志之
하여 學道而求寡過
를 如予今日之處遺老齋可也
니라
경진년(1100) 겨울에 내가 성은聖恩을 입고 남쪽 지방에서 돌아와 영천潁川(潁昌)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였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지만 되지 않았다.
여러 자식들이 걱정하기를 “부모께서 늙으셨는데 거실居室이 완전하지 못하니, 이것은 우리들의 책임이다.”라고 하고는 서로 더불어 터를 잡아 집을 지어 5년 만에 완성하였다.
그 남쪽에 긴 대나무와 묵은 잣나무가 청정淸靜한 경관을 이루어 마치 야인野人의 집과 같았다.
대청 앞에 네 기둥을 세운 다음 창문을 내고 난간을 만들어서 한가히 거처할 재실齋室을 만들었다.
재실이 이루어짐에 재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구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영빈유로潁濱遺老니 어찌 ‘유로遺老’로 명명하지 않겠느냐?
나는 어려서부터 시서詩書에 종사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잘하는 일은 까마득히 모른다.
23세 때에 조정朝廷에서 직언直言을 구하는 과거를 실시하자, 나더러 과거에 응시하라고 권하는 자가 있었다.
나는 〈과거 응시에서〉 도로에서 얻어들은 말을 가지고 궁액宮掖의 비밀을 논하고서 ‘반드시 이 문제로 죄를 얻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더니 유사有司가 과연 불손不遜하다고 지적하였는데, 상上께서만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씀하기를 “나는 직언直言으로써 선비를 구하고 선비는 직언直言으로써 나에게 고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를 폐출한다면 천하 사람들이 나를 무어라 하겠는가?”라고 하시니, 재상宰相은 부득이 하제下第(下等)에 두었다.
이로부터 유락流落하기를 20여 년이나 하였다.
선후宣后가 임조臨朝함에 미쳐 나를 선발하여 우사간右司諫으로 삼았는데, 건의하면 많이 들어주셨고, 나는 5년이 채 안 되어서 조정에 참여하여 국정國政을 들었다.
나는 임금에게 신임을 받은 적이 두 차례나 있었으니, 모두 옛날 사람이 드물게 겪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 세속世俗과 상종함에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않은 것이 10에 6, 7이었으니, 비록 뜻을 얻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들으니 “즐거움은 뜻처럼 잘되는 것만 한 것이 없고, 걱정은 뜻처럼 안 되는 비참한 것만 한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금 나는 집 한 채의 작은 공간으로 물러와 살면서 문을 닫아 빈객을 사절하고 외물과 접촉하지 않았다.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일은 행하지 않은 적이 없고, 마음에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은 중지하지 않은 적이 없다.
행하고 중지하는 것이 조금도 뜻처럼 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내 평생의 즐거움이 오늘날보다 좋은 적이 없었다.
너희들은 기억하여 도道를 배워 허물이 적어지기를 구하는 것을 내가 오늘날 유로재遺老齋에 거처하는 것과 같이하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