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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3)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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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4. 유로재遺老齋에 대한 기문
有老人之旨니라
노인老人의 의취가 담겨 있다.
庚辰之冬 하여 客於潁川하니 思歸而不能이니라
경진년(1100) 겨울에 내가 성은聖恩을 입고 남쪽 지방에서 돌아와 영천潁川(潁昌)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였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지만 되지 않았다.
諸子憂之曰 父母老矣어늘 而居室未完하니 吾儕之責也라하고 則相與卜築하여 五年而有成이니라
여러 자식들이 걱정하기를 “부모께서 늙으셨는데 거실居室이 완전하지 못하니, 이것은 우리들의 책임이다.”라고 하고는 서로 더불어 터를 잡아 집을 지어 5년 만에 완성하였다.
其南修竹古栢 蕭然如野人之家니라
그 남쪽에 긴 대나무와 묵은 잣나무가 청정淸靜한 경관을 이루어 마치 야인野人의 집과 같았다.
乃闢其四楹하고 加明窓曲檻하여 爲燕居之齋니라
대청 앞에 네 기둥을 세운 다음 창문을 내고 난간을 만들어서 한가히 거처할 재실齋室을 만들었다.
齋成 求所以名之커늘 予曰 予潁濱遺老也 盍以遺老名之리오
재실이 이루어짐에 재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구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영빈유로潁濱遺老니 어찌 ‘유로遺老’로 명명하지 않겠느냐?
汝曹志之하라
너희들은 기억하라.”고 하였다.
予幼從事於詩書하니 凡世人之所能 茫然不知也니라
나는 어려서부터 시서詩書에 종사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잘하는 일은 까마득히 모른다.
年二十有三 朝廷方求直言하니 有以予應詔者니라
23세 때에 조정朝廷에서 직언直言을 구하는 과거를 실시하자, 나더러 과거에 응시하라고 권하는 자가 있었다.
予采道路之言하여之秘하고 自謂必以此獲罪러니 而有司果以爲不遜한대 上獨不許曰 吾以直言求士하고 士以直言告我니라
나는 〈과거 응시에서〉 도로에서 얻어들은 말을 가지고 궁액宮掖의 비밀을 논하고서 ‘반드시 이 문제로 죄를 얻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더니 유사有司가 과연 불손不遜하다고 지적하였는데, 께서만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씀하기를 “나는 직언直言으로써 선비를 구하고 선비는 직언直言으로써 나에게 고하였다.
今而黜之하면 天下其謂我何리오하시니 宰相不得已하니라
그런데 지금 그를 폐출한다면 천하 사람들이 나를 무어라 하겠는가?”라고 하시니, 재상宰相은 부득이 하제下第(下等)에 두었다.
自是流落 凡二十餘年이니라
이로부터 유락流落하기를 20여 년이나 하였다.
하니 凡有所言이면 多聽納者하고 하니라
선후宣后임조臨朝함에 미쳐 나를 선발하여 우사간右司諫으로 삼았는데, 건의하면 많이 들어주셨고, 나는 5년이 채 안 되어서 조정에 참여하여 국정國政을 들었다.
蓋予之者再 皆古人所希有니라
나는 임금에게 신임을 받은 적이 두 차례나 있었으니, 모두 옛날 사람이 드물게 겪은 일이었다.
이나 其間與世俗相從 事之不如意者 十常六七이니 雖號爲得志 而實不然이니라
그러나 그 사이 세속世俗과 상종함에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않은 것이 10에 6, 7이었으니, 비록 뜻을 얻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予聞之하니 樂莫善於如意 而憂莫慘於不如意라하니라
나는 들으니 “즐거움은 뜻처럼 잘되는 것만 한 것이 없고, 걱정은 뜻처럼 안 되는 비참한 것만 한 것이 없다.”고 한다.
今予退居一室之間하여 杜門却掃하고 不與物接이니라
지금 나는 집 한 채의 작은 공간으로 물러와 살면서 문을 닫아 빈객을 사절하고 외물과 접촉하지 않았다.
心之所可 未嘗不行하고 心所不可 未嘗不止니라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일은 행하지 않은 적이 없고, 마음에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은 중지하지 않은 적이 없다.
行止未嘗少不如意하니 則予平生之樂 未有善於今日者也니라
행하고 중지하는 것이 조금도 뜻처럼 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내 평생의 즐거움이 오늘날보다 좋은 적이 없었다.
汝曹志之하여 學道而求寡過 如予今日之處遺老齋可也니라
너희들은 기억하여 를 배워 허물이 적어지기를 구하는 것을 내가 오늘날 유로재遺老齋에 거처하는 것과 같이하면 옳을 것이다.
역주
역주1 遺老齋記 : 《蘇潁濱年表》에 의하면, 元符(宋 哲宗의 연호) 3년(1100) 11월 조에 “田土가 潁昌府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 와서 살았다.[有田潁昌府 因往居焉]”고 하였다. 또 政和(宋 徽宗의 연호) 2년(1112) 9월 조에 “이달 壬午日에 中大夫 轍이 太中大夫로 전직해서 致仕하였다. 轍이 潁昌에 산 지 13년이 되었다. 潁昌은 왕래하는 길의 요충지에 있다. 蘇轍은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서 저서로 낙을 삼았다. 賓客을 사절하고 입으로는 時事를 말하지 않았으며, 뜻에 느끼는 바가 있으면 詩로 나타냈으니, 사람들이 그 틈새를 엿볼 수 없었다.[是月壬午 中大夫轍轉太中大夫致仕 轍居潁昌十三年 潁昌當往來之衝 轍杜門深居 著書以爲樂 謝却賓客 絶口不談時事 意有所感 一寓於詩 人莫能窺其際]”고 하였다. 그러니 遺老齋의 건립은 응당 이때에 있었을 것이다.
역주2 予蒙恩歸自南荒 : 《宋史》에 의하면 “元符 3년 정월에 哲宗이 승하하고 徽宗이 즉위하여 大赦令을 내렸는데, 이때 蘇轍은 岳州로 謫所를 옮겼다. 11월에 또 太中大夫를 제수받고 提擧鳳翔府上淸宮으로 있다가 이내 벼슬을 내놓고 潁昌府에 가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역주3 宮掖 : 宮殿과 같다.
역주4 寘之下第 : 가장 낮은 등급을 매김을 가리킨다. 《宋史》 〈蘇轍傳〉에서는 이 일에 대하여 “蘇轍은 19세 때에 형 蘇軾과 함께 進士科에 올랐고, 또 策制擧에도 함께 응시하였다. 仁宗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蘇轍은 仁宗이 정무에 나태해질까 염려하였고, 따라서 得失에 대해 심한 말을 하였으며, 禁廷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절실하게 말하였다. 策文이 들어감에 蘇轍은 ‘반드시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考官 司馬光이 제3등으로 합격시키려고 하니, 范鎭은 곤란하게 여겼고, 蔡襄은 말하기를 ‘나는 三司使입니다. 司會의 말을 나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감히 원망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고, 오직 考官 胡宿만이 〈蘇轍이 주장한 對策의 말이〉 불손하다고 하여 폐출시킬 것을 청하자, 仁宗은 ‘直言을 해달라고 사람을 불러놓고서 直言을 했다 하여 사람을 버린다면 천하 사람들이 나를 뭐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宰相이 부득이 蘇轍을 下等에 두어서 商州軍事推官으로 제수하였다.”고 적고 있다.
역주5 及宣后臨朝 擢爲右司諫 : 宣后는 곧 宣仁高后이다. 哲宗이 즉위했을 때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宣仁高后가 垂簾聽政하였다.
‘擢爲右司諫’은 선발하여 右司諫으로 삼음을 가리키는데, 元豐 8년(1085) 10월에 蘇轍을 右司諫으로 삼았다.
역주6 不五年而與聞國政 : 蘇轍이 元祐 원년(1086)에는 中書舍人, 元祐 2년 11월에는 戶部侍郞, 元祐 4년에는 翰林學士, 知制誥, 元祐 5년에는 龍圖閣直學士, 御史中丞을 지냈다.
역주7 遭遇 : 마음 맞는 임금에게 신임을 받는 일을 가리킨다.
역주8 : 張伯行은 《唐宋八大家文鈔》에서 “潁濱(蘇轍)이 만년에 이 遺老齋로 물러가서 종일 묵묵히 앉아 있고, 남과 만나지 않은 지 거의 10년이나 되었으니, 응당 터득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이른바 ‘한밤중에 옷을 떨쳐입고 일어나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妙道’의 극치를 가리킨 것인데, 秘藏하고 남에게 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朱子가 ‘蘇氏는 사람을 속였다.’라고 한 것은 말하지 않은 것으로 속였기 때문이다. 아! 터득한 것은 그 의미가 어디 있는가?[潁濱晩歲退去此齋 終日黙坐 不與人相見者幾十年 宜其有所得矣 乃所謂五鼓振衣 何思何慮者 遂指以爲道 妙而秘不告人 故朱子謂蘇氏之誣人 以其不言者誣之也 噫彼其所得 意何有哉]”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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