按민자閔子所以不仕계씨季氏로 爲一篇柱민자子하니 其言亦有見이니라
越明年
에 政修事治
하니 邦之耋老 相與來告曰 此邦之舊
에 有如
민자閔子而不
하니 豈不大闕
이리잇가
信
이면 其可以緩
이리잇가하고 於是
에 鳩工爲祠堂
하고 且使春秋修其
하니라
堂成
에 具
焉
하여 籩豆有列
하고 儐相有位
하니 百年之廢 一日而擧
니라
有言曰 惟夫子生於亂世하사 周流齊노魯송宋위衛之間하여 無所不仕하시고
재아宰我仕제齊하고 자공子貢염유冉有자유子游仕노魯하고 계로季路仕위衛하고 자하子夏仕위魏니라
然
이나 에 獨
중궁仲弓嘗爲
계씨季氏宰
하고 其上三人
은 皆未嘗仕
니라
且以夫子之賢으로도 猶不以仕爲汚也어늘 而三子之不仕 獨何歟아하니라
望之茫洋하여 不知其邊이요 卽之汗漫하여 不測其深이니 其舟如蔽天之山하고 其帆如浮空之雲然後에야 履風濤而不僨하고 觸蛟蜃而不讋이니라
若夫以江河之舟楫
으로 而跨
동해東海之
이면 則亦十里而返
하고 百里而溺
이니 不足以經萬里之害矣
니라
方주왕조周之衰에 禮樂崩弛하여 天下大壞하니 而有欲救之는 譬如涉海有甚焉者니라
諸子之汲汲而忘返은 蓋亦有陋舟而將試焉이니 則亦隨其力之所及而已矣니라
若夫三子는 願爲夫子而未能이요 下顧諸子而以爲不足爲也니 是以로 止而有待니라
라하니 吾於三子
에 亦云
이라한대 衆曰 然
이라하니라
상고하건대, 민자閔子가 계씨季氏에게 벼슬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1편篇의 기둥으로 삼았으니, 그 말에 또한 소견이 있었다.
역성歷城의 동쪽 5리쯤 되는 지점에 구묘丘墓가 있으니 ‘민자閔子의 묘墓’라고 한다.
분묘墳墓만 있을 뿐, 사당을 짓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본지 사람들이 안녕하지 못하였다.
지방 관원이 사당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희령熙寧 7년(1074)에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복양濮陽 이공李公이 와서 제남濟南을 다스렸다.
그 다음 해에 정사政事가 잘 다스려지니, 본지의 노인들이 몰려와서 고하기를 “이 지방은 옛날에 민자閔子 같은 분이 계셨는데 묘식廟食을 하지 못하니, 어찌 큰 결점이 아니겠습니까?
공公께서 모르신 모양인데, 참으로 아신다면 어찌 정칙整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확실한 일이면 어찌 느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공인工人을 모아 사당祠堂을 짓고 또한 춘추春秋로 정례적인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사당祠堂이 완성됨에 삼헌례三獻禮를 갖추어 제물祭物을 담은 변두籩豆가 차례로 배열되고, 제사 때 행례行禮를 맡은 빈상儐相이 질서 있게 제자리에 늘어서니, 백 년간 폐지되었던 사당제사가 하루 사이에 거행되었다.
학사學士 대부大夫가 제례祭禮를 행하는 것을 사당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감탄하며 눈물을 흘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직 부자夫子(孔子)께서는 난세亂世에 태어나셔서 노魯나라, 송宋나라, 위衛나라 사이를 두루 다니시며 벼슬하지 않으신 곳이 없었고,
그 제자 중에 고등 제자도 모두 여러 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니,
재아宰我는 제齊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자공子貢과 염유冉有와 자유子游는 노魯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계로季路는 위衛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자하子夏는 위魏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그러나 덕행德行으로 칭해진 네 사람 중에서 오직 중궁仲弓만이 일찍이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이 되었고, 그 위 세 사람은 모두 일찍부터 벼슬을 하지 않았다.
계씨季氏가 일찍이 민자閔子를 비읍費邑의 읍장으로 삼으려고 하자, 민자閔子는 사양하기를 ‘만일 다시 나에게 온다면, 나는 반드시 문수汶水가에 가서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부자夫子의 어짊으로도 오히려 벼슬을 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았거늘, 세 사람이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은 유독 무엇 때문이었을까?”라고 하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응답하는 자가 나서서 말하기를 “당신은 동해東海에 가보지 못했소?
바라보면 아득하여 그 가를 알 수 없고, 근접하면 넘쳐흘러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선박이 하늘을 덮은 산과 같고 돛대가 공중에 뜬 구름과 같은 연후에야 풍도風濤를 타고 가도 넘어지지 않고 교신蛟蜃을 대질러도 겁나지 않습니다.
만일 강하江河를 떠다니는 주즙舟楫으로 동해東海의 험난한 파도를 건넌다면 10리를 가다가 되돌아오고, 백 리를 가다가 침몰하기 마련이니, 족히 만 리의 험한 바다를 항해하지 못합니다.
주왕조周王朝가 쇠퇴함에 예악禮樂이 무너져 천하天下가 크게 파괴되었으니, 그것을 구제하려는 것은 비유하자면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으면서 더 심함이 있는 것입니다.
당시 부자夫子께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벼슬을 하신 것은 그 주즙舟楫이 족히 믿음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제자들이 벼슬에 급급하여 돌아오기를 잊은 것은 대개 누주陋舟를 가지고 장차 시험하려는 것이었으니, 또한 그 힘이 미치는 바를 따랐을 뿐입니다.
세 사람 같은 경우는 우러러 부자夫子가 되기를 원하면 되지 못하고, 아래로 여러 제자들을 돌아보면 족히 할 것이 못 된다고 여겼으니, 이러므로 중지하고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부자夫子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세상에서 유하혜柳下惠를 배우는 자로서는 노魯나라에 홀로 사는 남자만 한 이가 있지 못하다.’라고 하셨으니, 나는 세 사람에 대하여 또한 그렇게 말합니다.”라고 하자, 여러 사람들도 “옳소.”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