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병길丙吉爲
승상相에 흉노匈奴嘗入
운중雲中대군代郡한대 병길吉使
하여 條其兵食之有無
와 與
장리將吏之才否
하고 하여 指揮遂定
이라하나이다
蓋事之在官을 必見於書하되 其始無不具者는 獨患多而易忘이요 久而易滅이언만 數十歲之後에 人亡而書散하니 其不可考者多矣니이다
國朝
정위丁謂等
이 因之
하여 爲
四書
하되 網羅一時出內之計
니이다
首尾八十餘年
을 本末相授
하니 得以居今而知昔
하고 參酌同異
하여 因時施宜
니이다 此前人作書之本意也
니이다
臣以不佞
으로 하여 上承
之餘業
하고 親覩
之新政
하니 時事之變易
과 財賦之
를 可得而言也
니이다
謹按
創業之始
엔 海內分裂
하여 租賦之入
이 不能半今世
니이다
然而宗室尙鮮하고 諸王不過數人하며 仕者寡少하여 自朝廷郡縣히 皆不能備官이니이다
用此三者라 故로 能奮於不足之中하여 而綽然常若有餘니이다
及其列國
하여는 相屬於道
하니 府
경복내고庫充塞
하고 創
경복내고景福內庫入畜金幣
하여 爲殄寇之策
하고 이니이다
群臣稱頌功德
하여 不知所以裁之者
하니 於是
에 請
이니이다
祀
분음汾陰하고 禮
박지亳社
하니 所至
에 費以鉅萬
이요 而
상청上淸소응昭應숭희崇禧경령景靈之宮
이 相繼而起
하니 累世之積
이 糜耗多矣
니이다
하사 淸心省事
하여 以幸天下
나 然而民物蕃庶 未復其舊
하고 而
이니이다
雖間出內藏之積하여 以求紓民이나 而四方騷然하여 民不安其居矣니이다
其後西戎旣平이나 而已益之兵을 不復遂汰하고 加以宗子蕃衍하여 充牣宮邸하고 官吏冗積하여 貟溢於位하니 財之不贍이 爲日久矣니이다
하여 忿流弊之委積
하고 閔財力之傷耗
하여 覽政之初
에 爲富國彊兵之計
언만 하고 니이다
繼以南征교지交趾하고 西討탁발拓跋하니 用兵之費가 一日千金이니이다
今二聖臨御
에 方恭默無爲
하고 求民之疾苦而療之
하사 나 而
서하西夏不賓
하고 水旱繼作
하니 凡國之用度 大率多於前世
니이다
蓋盈之必溢하고 而成之必毁는 物理之至니 有不可逃者니이다
內建百官과 外列郡縣은 至於한漢당唐에도 因而行之하고 卒不能改니이다
한漢문제文帝는 恭儉寡欲하고 專務以德化民하니 民富而國治를 後世莫及이니이다
진晉무제武帝는 削平오吳촉蜀하고 任賢使能하며 容受直言하니 有明主之風이나 然而亡不旋踵이니이다
今二聖之治는 安而静하고 仁而恕하여 德積於世하니 진秦수隋之憂는 臣無所措心矣니이다
然而空匱之極에 法度不立하니 雖無한漢진晉强臣敵國之患이나 而數年之後엔 國用曠竭하리니 臣恐未可安枕而卧也니이다
凡會計之實은 取원풍元豐之八年하고 而其爲别有五하니 一曰收支요 二曰民賦요 三曰課入이요 四曰儲運이요 五曰經費니이다
五者旣具然後에 著之以見在하고 列之以通表하니 而天下之大計를 可以畵地而談也니이다
若夫
之積
과 與天下
은 非昔三司所領
이면 則不入會計
하고 將著之他書
하여 以備觀覽焉
이니이다
03. 원우元祐 연간에 작성한 《회계록會計錄》에 대한 서문
이것은 바로 자유子由가 경국經國의 솜씨를 보인 글이니, 모름지기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신臣은 들으니, 한漢 고조高祖가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에 소하蕭何가 진秦나라 도적圖籍을 입수하여 사방四方의 영허盈虛와 강약强弱의 실상을 두루 파악하였으니, 고조高祖는 그것에 힘입어 천하를 병탄하였고, 병길丙吉이 승상丞相이 되었을 때에 흉노匈奴가 운중雲中과 대군代郡에 침입하였거늘, 병길丙吉은 동조東曹로 하여금 변방상황에 대한 기록을 상고하여 그 병식兵食의 유무有無와 장리將吏의 재부才否를 자세하게 분별해놓게 하고서 느긋하게 대처하여 지휘체계가 드디어 정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옛날 사람이 유악帷幄 속에서 주책籌策을 운용하여(謀策을 구상하여) 천 리 밖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오로지 도적圖籍의 공功이었습니다.
대개 관官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반드시 문서에 나타내되 그 처음에 단단히 구비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은, 오로지 사건이 많아서 잊기 쉽고 오래가면 민멸하기 쉬울 것을 걱정한 것이지만, 수십 년 뒤에 사람은 죽고 문서는 흩어지니, 상고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당唐나라 때에는 이길보李吉甫가 처음 원화元和 연간의 국계國計를 문서로 기록하되 크고 작은 것들을 총 망라하여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국조國朝(宋朝)에서는 삼사사三司使 정위丁謂 등이 〈이길보李吉甫의 것을〉 인습 계승하여 경덕景德‧황우皇祐‧치평治平‧희령熙寧 연간의 네 문서를 작성하되 한때의 수지계산 상황을 총망라하였습니다.
수미首尾로 80여 년 동안 시종여일하게 서로 전해주었으니, 유사有司가 현재에 처해서 과거의 재정수지 상황을 파악하고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참작하여 때에 따라 알맞게 시행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이전 사람이 문서를 작성한 본뜻입니다.
신臣은 어질지 못한 인격으로 원풍元豐의 남긴 업적業績을 계승하고 이성二聖의 신정新政을 직접 보았으니, 시사時事의 변역變易과 재부財賦의 등모登耗를 말할 수 있습니다.
삼가 상고하건데, 예조황제藝祖皇帝께서 창업創業하신 시초에는 해내海內가 분열分裂하여 조부租賦의 수입이 지금 세대의 반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실宗室이 아직 적고 제왕諸王이 몇 사람에 불과하였으며, 벼슬하는 자가 적어서 조정朝廷으로부터 군현郡縣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원을 갖출 수 없었습니다.
사졸士卒은 정련精練하여 항상 적은 숫자로 많은 숫자를 이겼습니다.
이 세 가지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부족한 속에서 떨쳐 항상 충분한 재정을 확보한 듯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열국列國이 관부欵附함에 미쳐서는 침공琛貢의 바리가 서로 길을 이으니 부고府庫가 가득 채워졌고, 경복내고景福內庫를 창건하여 금폐金幣를 들여 쌓아서 구적寇賊을 섬멸할 책략을 세웠고, 태종太宗은 이를 이어 태원太原를 쳐서 평정하였습니다.
진종眞宗은 이를 이어서 거란契丹을 회유하여 귀복歸服하게 하였습니다.
〈서하西夏와 거란契丹〉의 두 화환禍患이 이미 소멸되니, 천하가 안락安樂하여 날마다 재산이 증가하고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함평咸平‧경덕景德의 연간을 ‘태평시대太平時代’라고 호칭하였다 합니다.
군신群臣이 공덕功德을 칭송하여 재제할 줄을 몰랐으니, 이에 태산泰山을 봉하기를 청하였습니다.
분음汾陰에 제사 지내고 박지亳地의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 지내니, 촉거屬車가 이르는 곳에 거만鉅萬의 비용이 발생하였고, 상청上淸‧소응昭應‧숭희崇禧‧경령景靈의 도교道敎 궁관宮觀이 서로 이어서 세워지니, 여러 세대 동안 저축된 것이 많이 소모되었습니다.
그 뒤 소응궁昭應宮이 화재를 당했을 때에 신하들이 다시 짓자고 말했지만, 대신大臣이 짓지 못하도록 힘써 다투니 장헌태후章獻太后가 크게 감오感悟하여 드디어 천하 백성들과 더불어 휴양생식休養生息을 취하였습니다.
인종仁宗께서 인성仁聖하시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일을 덜어서 천하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였으나 백성과 물산物産의 번연蕃衍함과 성다盛多함이 예전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였고, 하적夏賊이 발동하는데도 변경에 오랫동안 방어준비가 없었다가 결국은 병정兵丁을 증원해서 적敵에 대응하고, 급하게 부세賦稅를 거두어서 병정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록 간간이 내고內庫(國庫)에 저장된 물자를 꺼내서 백성들의 부담을 완화시켰지만 사방이 소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 서융西戎이 이미 평정되었지만 이미 증원한 병정을 다시 해산시키지 않았고, 게다가 종실宗室의 자제子弟가 번연蕃衍하자 궁저宮邸를 그들먹하게 짓고, 관리官吏가 쓸데없이 적체하여 관원이 자리에 넘치니, 재정이 부족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영종英宗께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여 개연慨然히 폐해를 구제할 뜻을 가지시니, 군신群臣이 목을 빼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날로 새로워지는 정사를 거의 볼 것 같았지만 대업大業이 완수되지 못하였습니다.
신고神考(神宗)께서 세대를 계승하여 유폐流弊의 위적委積(堆積)을 분개하고 재력財力의 상모傷耗에 대해 민망히 여기시어 정무를 보시는 초기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계책을 하였지만, 유사有司가 황명皇命을 봉행할 때에 본지本旨를 잃고 비로소 청묘법青苗法과 조역법助役法을 만들어 농민農民을 병들게 하였고, 이어서 시역법市易法과 염철법鹽鐵法을 만들어 상고商賈를 곤욕스럽게 하였습니다.
재리財利가 나오는 구멍이 수백 개나 되어 삼사三司에 전속되지 않으니, 이에 재정수입이 위에서 고갈되고, 민력民力이 아래에서 궁핍하였습니다.
이어서 남쪽으로 교지交趾를 정벌하고 서쪽으로 탁발拓跋을 토벌하였으니, 용병用兵의 비용이 하루에 천금千金이나 되었습니다.
비록 내탕별장內帑别藏을 가지고 수시로 보조하였으나 나라는 역시 고달팠습니다.
지금 두 분 성군聖君께서 임어臨御하심에 바야흐로 공손한 태도로 조용히 계시며 일을 표가 나게 하지 않고 백성의 질고疾苦를 찾아 치료하시어 국가법령의 불편한 것들을 모두 폐지하고 제거해버리시니 백성들 또한 조금 휴양休養 생식生息하였지만, 서하西夏가 귀순하지 않고 수한水旱이 계속 일어나니 나라의 용도用度가 대체로 이전 세대보다 많습니다.
이때에 구제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신臣이 또한 이전 세대를 내리 살펴보건대, 가득 찬 그릇을 잘 가지고 이루어진 기업基業을 잘 지키는 일을 하는 것은 창업創業하는 군주君主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대개 가득 차면 반드시 넘치고 이루어지면 반드시 헐어지는 것은 물리物理의 필연적인 법칙이니 도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득 차고 이루어지는 사이는 덕을 가진 자가 아니면 편안하지 못하고, 법을 가진 자가 아니면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옛날 진秦나라와 수隋나라가 왕성하게 되는 데에는 법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으로 백관百官을 세운 것과 밖으로 군현郡縣을 배치한 것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행하고 끝내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秦나라와 수隋나라가〉 다 2세世 만에 망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덕이 없음을 편안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漢 문제文帝는 공손하고 검소하고 욕심이 적고 오로지 덕德으로써 백성을 교화하려 힘썼으니, 백성이 부유하고 나라가 다스려진 것을 후세에서 미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 일곱 나라가 난을 일으켜 거의 난망亂亡할 지경이었습니다.
진晉 무제武帝는 오吳나라와 촉蜀나라를 멸하고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하며 직언直言을 수용하였으니, 명주明主의 풍도가 있었으나 발꿈치를 돌이키기도 전에 망하였습니다.
자제子弟는 안에서 배반하고 강융羌戎은 밖에서 난을 일으켜 결국 나라를 잃었습니다.
〈한漢 문제文帝와 진晉 무제武帝〉 두 임금은 다 법이 없음을 오래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지금 두 분 성군聖君의 정치는 안정安靜하고 인서仁恕하여 덕德이 세상에 쌓이니, 진秦나라와 수隋나라의 걱정 같은 것에 대해서는 신臣이 염려할 바 없습니다.
그러나 재정이 너무도 모자란 판국에 법도가 제대로 서지 않고 있으니, 비록 한漢나라와 진晉나라의 강신强臣과 적국敵國의 걱정은 없을지라도 수년 후에는 국용國用이 고갈될 것이니, 신臣은 베개를 편안히 베고 눕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은 원컨대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회계會計의 실수實數는 원풍元豐 8년(1085)의 것을 취하고 거기에 별도로 다섯 항목을 두었으니, 첫째는 수지收支, 둘째는 민부民賦, 셋째는 과입課入, 넷째는 저운儲運, 다섯째는 경비經費입니다.
다섯 가지가 이미 갖추어진 뒤에야 현재의 문서로 저록著錄하고, 도표형식圖表形式으로 전부를 열기列記하였으니, 천하의 대계大計를 분명하게 구별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내장고內藏庫‧우조고右曹庫의 저장물과 천하 봉장고封樁庫의 저장물은 옛날 삼사三司에서 수령受領한 것이 아니면 회계會計에 넣지 않고 다른 문서에 저록著錄하여 관람觀覽에 대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