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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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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범수范睢승상 其所以利者少하고 而害者多니라
위염魏冉之專으로 忘其舊勳而逐之可也어니와 而幷逐하여 使소왕昭王以子絶母 不已甚乎
선태후宣太后之於 非有之惡也니라
무강武姜장양왕莊襄 猶不可絶이온범수勇絶之하니 獨不愧
범수백기白起而用하여 使民怨於內하고 兵折於外하니 曾不若위염魏冉之一二니라
以予觀之컨대 범수范睢채택蔡澤 自爲身謀取경상卿相可耳 未見有益於니라


22. 범수‧채택
범수范睢나라의 승상丞相이 되었을 적에 나라를 이롭게 한 일은 적고 나라를 해롭게 한 일은 많았다.
위염魏冉전횡專橫 때문에 그의 훈적勳績을 잊고 〈관외關外로〉 쫓아낸 것은 괜찮지만, 아울러 선태후宣太后까지 쫓아내서 소왕昭王으로 하여금 아들로서 어머니와의 정을 끊게 한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태후宣太后나라에 있어서 나라 무강武姜이나 장양왕莊襄王후비后妃와 같은 악적惡迹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라 무강武姜장양왕莊襄王후비后妃도 오히려 끊게 할 수 없었는데, 범수范睢가 용감하게 끊게 하였으니, 유독 영고숙潁考叔모초茅焦에게 부끄럽지 않았는가?
범수范睢나라의 정사를 맡아서는 백기白起를 죽이고 왕계王稽정안평鄭安平을 등용하여 안에서 백성들은 원망하고 밖에서 군사들은 좌절하게 하였으니, 위염魏冉의 10분의 1, 2만도 못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범수范睢채택蔡澤은 자신을 위하여 꾀를 짜내 경상卿相을 취한 것은 괜찮았으나 나라를 이롭게 한 것은 보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范睢蔡澤 : 范睢(?~B.C. 255)는 范且라고도 하는데, 전국시대 秦나라의 大臣이다. 원래 楚나라 사람으로 자는 叔이며 口辯이 뛰어났다. 어떤 일로 인하여 무함을 받아 魏나라 丞相인 魏齊에게 매를 맞아 갈비뼈와 이가 부러졌다. 그는 거짓으로 죽은 체하여 위험에서 벗어나서 이름을 張祿으로 바꾸고 秦나라에 들어가서 昭襄王에게 유세하고 穰侯(魏冉)를 설득해서 黨與를 조직하고 독자적으로 모든 일을 결정하였다.
昭襄王은 太后를 폐하고 穰侯의 印章을 거두어 范睢를 丞相으로 삼았다. 范睢는 승상으로 있는 동안 山東의 6國에 대하여 멀리 있는 나라와 교제하고 가까이 있는 나라를 공격할 것[遠交近功]을 주장하여 각각 격파하였다. 長平의 전쟁 이후에는 趙나라를 친 일로 원한을 품어 名將 白起를 죽이고 親信한 鄭安平을 대신 장군으로 삼았는데, 鄭安平이 趙나라에 항복하자, 范睢는 불안하여 병을 핑계로 丞相을 사직하였다.
蔡澤은 전국시대 秦나라 大臣이다. 원래 燕나라 사람으로 변론이 뛰어나서 다년간 유세하였으나 중용되지 못하였다.
뒤에 范睢가 趙나라를 도모하다가 실패한 일로 불안해한다는 소식을 듣고 秦나라로 달려가 기회를 타서 이해관계를 진술하고 范睢에게 사퇴할 것을 권하니, 范睢는 결국 병을 핑계로 蔡澤을 추천하여 丞相을 대신하게 하였다. 蔡澤은 秦나라에서 丞相을 한 지 몇 달 만에 讒言을 받아 병을 핑계로 丞相을 사직하였으며, 綱成君에 봉해졌다. 자세한 것은 《史記》 〈范睢蔡澤列傳》에 보인다.
이 글은 《古史》 〈范睢蔡澤列傳 제26》에서 篇目으로 취한 것이다.
역주2 宣太后 : 芈八子(?~B.C. 265)이다. 《史記》 〈穰侯列傳〉 등에 의하면 “芈八子는 秦 惠文王의 妃이자 昭襄王의 어머니로, 楚나라 公族 출신이다. 昭襄王이 즉위할 때 나이 19세였다. 그녀는 異父弟인 魏冉의 지지에 의해 朝政을 攝理하고 季君(公子壯)의 亂을 평정하였으며, 同父弟인 芈戎을 봉하여 華陽君으로 삼고, 昭襄王의 同母弟 두 사람을 高陵君과 涇陽君으로 삼아 親黨을 이루었는데, 范睢가 丞相이 됨에 이르러 魏冉이 放逐을 당하니 失勢하였다.”고 한다.
역주3 鄭武姜莊襄后 : 武姜은 鄭 武公의 아내이자 莊公의 어머니인데, 작은아들 共叔段을 편애하여 그의 포악을 조장하고 鄭나라를 전복하는 내란에 참여하였다.
《春秋左氏傳》 隱公 원년에 “처음에 鄭 武公은 申나라로부터 부인을 맞이하니 武姜이라 하였다. 그녀가 莊公과 共叔段을 낳았다. 형인 莊公은 난산으로 태어나 어머니 姜氏를 놀라게 했으므로 姜氏는 莊公을 미워하고 동생인 共叔段을 사랑해서 대를 계승시키고자 자주 武公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武公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윽고 莊公이 즉위하자 姜氏는 共叔段을 위하여 京이란 곳을 요청하여 그곳에 살게 하였다.……共叔段이 무기를 수선하고 兵車를 갖추어 장차 鄭나라를 습격하려 하는데, 姜氏가 안내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하는 내용이 보인다.
莊襄后는 《史記》 〈呂不韋列傳〉 등에 의하면 “먼저 呂不韋의 姬妾이 되었다가 뒤에 秦 莊襄王의 부인이자 始皇의 모친이 되었다. 莊襄王이 집정한 지 3년 만에 죽으니, 궁실에서 음란하여 먼저 呂不韋와 사통하고 뒤에 嫪毐와 사통하여 아울러 아들 둘을 낳았고, 뒤에 또 음모하여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역주4 潁考叔茅焦 : 潁考叔은 鄭나라 大夫로 일찍이 꾀를 내어 鄭 莊公으로 하여금 그 어머니 武姜과 和好하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隱公 원년에 “결국 莊公은 어머니 姜氏를 城潁이란 땅에다 가두어두고 맹세하기를 ‘황천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이윽고 후회하고 있었다. 이때 潁考叔이란 자가 潁谷 땅의 封人으로 있었는데, 이런 소식을 듣고 莊公에게 어떤 물건을 바쳤다. 莊公은 답례로 潁考叔에게 음식을 하사했다. 潁考叔은 그 음식을 먹으면서 일부러 고기를 남겨놓았다.
莊公이 그 이유를 물으니, ‘저에게는 어머니가 계신데 늘 저희들이 먹는 음식을 잡수셨지, 이런 임금님의 국은 잡수어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음식을 어머니께 드리려 합니다.’라고 潁考叔이 대답했다. 이에 莊公은 ‘자네에게는 어머니가 있어 가져다가 드릴 수가 있으나, 아! 나에게는 어머니가 안 계시도다.’라고 하였다. 潁考叔이 묻기를 ‘어째서 그러시는지 감히 여쭙겠습니다.’ 하자, 莊公은 그 까닭을 말하면서 또 후회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潁考叔은 대답하기를 ‘임금님께서는 어째서 걱정을 하십니까? 만일 땅을 파서 황천에 이르러 지하도에서 만나보신다면 누가 먼저의 맹세를 깼다고 말하겠습니까?’라고 하므로, 莊公은 그의 말을 따랐다.”란 내용이 보인다.
茅焦는 《說苑》 〈正諫〉에 의하면 “秦 始皇 때 사람이다. 秦나라 太后가 嫪毐와 사통하고 몰래 모의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일이 발각되자 始皇이 嫪毐를 車裂刑에 처하고 太后를 萯陽宮으로 옮기고 나서 영을 내리기를 ‘감히 太后의 일로 諫하는 자는 죽일 것이다.’ 하고, 전후로 간하는 사람 27명을 죽였다. 이때 齊나라 賓客인 茅焦가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 諫하여 이해를 가지고 설득시켰다. 그러자 始皇은 깨닫고 茅焦를 仲父로 삼고 따라서 上卿으로 삼았다.”고 한다.
역주5 王稽鄭安平 : 두 사람은 다 魏나라 사람인데, 范睢를 구제하여 秦나라에 들어가게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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