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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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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9.
言東南利害之勢處 雖未當이나 而行文有法度하고 變換處 竝古人入彀處니라
하고 凌蔑하고 結怨하여 再世而亡하니 何者
地遠而民勞하여 勢不順也일새니라
월왕越王구천句踐 旣克부차夫差하고 雖號월왕이나 而實斂兵自守하여 無大征伐하고故土하여 以畀하고 遂以保國傳世하니 彼親見其害하고 知所以自監矣哉인저
蓋東南之常勢 於是可見矣리라
皆國於之墟하니 成敗之迹 無不然者니라
善用兵 或能一勝이나 而民以罷弊하여 訖於無成이니라
蓋不足數也어니와之賢 猶勉强北征이라가 失策而死하니 亦眩於其名하여 而未사안其實故耶
嗟夫
謀國如 吾有取焉이니라


09. 나라
동쪽 지역과 남쪽 지역의 이해관계를 말한 부분은 비록 타당하지 못하나 행문行文에는 법도가 있고, 변환하는 곳은 바로 옛사람의 격식에 부합한다.
나라는 만이蠻夷의 나라로서 중원中原제후국諸侯國과 더불어 맹주盟主를 다투었고, 나라와 나라를 능멸하고 나라‧나라와 원수를 맺어 2대 만에 망하였으니,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역은 멀리 떨어져 있고 백성들은 피곤에 지쳐서 정세가 순조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이미 부차夫差를 쳐서 승리하고 비록 ‘패왕伯王’이란 호칭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군대를 모아서 스스로 지키고 정벌을 중시하는 일이 없었으며, 나라의 고토故土를 나누어서 나라‧나라‧나라에게 지급하고 마침내 나라를 보전하여 후세에 전하였으니, 저 구천句踐망국亡國의 피해를 직접 보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감독해야 할 것을 알았다.
월왕越王 무강無彊에 이르러서는 합려闔閭의 지혜는 없고 부차夫差의 어리석음은 있었으니, 그 나라를 쇠잔하게 만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옛날 장왕莊王나라‧나라‧나라를 쳐서 승리하였으니, 힘이 능히 그들을 취할 수 있었지만 점유하지 않았으니, 제후諸侯들이 안심하였고 나라는 마침내 흥기하였다.
영왕靈王나라의 도성都城완구宛丘나라의 도성都城신채新蔡서불갱西不羮고성古城을 확대해서 쌓고 중하中夏(中原)를 관리 통치하여 끝없이 탐욕을 부렸으니, 자신이 직접 그 재앙을 받았다.
대개 동쪽 지역과 남쪽 지역의 일상적인 정세를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진東晉에서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라와 나라의 옛터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성패成敗의 자취가 같은 양상들이었다.
비록 환온桓溫유유劉裕처럼 용병用兵을 잘한 자도 혹 능히 한 번은 승리하였으나 백성들이 그로 인해 피폐疲弊해져서 성공 없이 끝났다.
은호殷浩유량庾亮 같은 이는 족히 헤아릴 것이 못 되거니와 사안謝安 같은 어진 이도 오히려 북정北征에 힘쓰다가 실책하여 죽었으니, 또한 명예에 눈이 멀어 실제 정황에 안주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아!
국사에 대한 모책을 채모蔡謨와 같이 한다면 나는 그에게서 취할 바가 있을 것이다.


역주
역주1 : 越은 ‘于越’이라고도 일컫는데, 건국 시조는 바로 夏代 少康의 庶子인 無余라고 전한다. 춘추시대 말엽에 항상 吳나라와 서로 싸웠고, B.C. 494년에는 吳王 夫差에게 대패하였다. 越王 句踐은 嘗膽(쓸개의 쓴맛을 맛봄)의 刻苦 끝에 B.C. 473년 吳나라를 쳐서 멸하였다. 아울러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霸主로 일컬어졌는데, 전국시대에는 국력이 쇠약하여 B.C. 306년 楚나라에게 멸망되었다.
이 글은 《古史》 卷19 〈越王句踐世家 제12〉에서 篇名으로 취하였다.
역주2 吳以蠻夷 爭盟上國 : 《史記》 〈吳太伯世家〉에 의하면, 太伯이 荊蠻으로 달아나서 吳나라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蠻夷’로 일컬었다고 한다. 上國은 춘추시대에 中原의 諸侯國을 이른 것이니, 이는 吳楚諸國과 상대해서 말한 것이다.
역주3 : 패
역주4 至王無彊……而有夫差之愚 : 《史記》 〈越王句踐世家〉에 자세히 나온다. 無彊은 越王 子侯의 아들이고, 闔閭는 ‘闔廬’라고도 하는데, 吳王 夫差의 아버지이다. 無彊은 북쪽으로 齊나라를 치고 서쪽으로 楚나라를 쳤다가 楚 威王에게 대패하여 誅殺되었다. 그러므로 ‘闔閭의 지혜는 없고 夫差의 어리석음은 있었다.’라고 한 것이다.
역주5 昔楚莊王……而楚遂以興 : 본서 권11 〈楚〉 참조.
역주6 靈王大城陳蔡不羮……則身受其咎 : 《史記》 〈楚世家〉에 자세히 보인다. 본서 권11 〈楚〉 제1문단 주 3) 참조.
역주7 自東晉以來至於陳 : 西晉이 멸망한 뒤 317년에 司馬睿가 建康에 다시 정권을 세웠으니, 史家가 이를 東晉이라 칭하였는데, 420년에 劉裕에게 멸망되었다. 陳은 南朝時代의 陳나라를 가리킨다.
역주8 桓溫劉裕 : 桓溫(312~373)은 東晉 사람으로 자는 元子이고 明帝의 사위인데, 처음 荊州刺史가 되어 蜀을 안정시키고 前秦을 공격하고 姚襄을 격파하여 위엄과 권세가 날로 왕성하였고, 벼슬이 大司馬에 이르렀으며, 用兵을 잘하고 朝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劉裕(363~422)는 南朝의 宋나라를 건립한 사람으로 자는 德輿, 小字는 寄奴인데, 桓溫이 晉나라를 찬탈할 때에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고, 이어서 南燕과 後秦을 멸하고 北府將領 劉毅와 諸葛長民 및 譙縱의 세력을 깎았으며, 420년에 帝를 칭하고 건국하여 국호를 ‘宋’이라 하였다.
역주9 殷浩庾亮 : 殷浩(?~356)는 東晉 사람으로 자는 深源인데, 弱冠 때부터 盛名이 있었고 《老子》와 《易經》을 좋아하여 風流談論者의 宗主가 되었으며, 揚州‧豫州‧徐州‧兗州‧靑州의 軍事都督으로 中原의 평정을 자기 임무로 여겼는데, 姚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자 桓溫의 중상을 받아 폐해져 庶人이 되었다. 庾亮(289~340)은 東晉 사람으로 자는 元規이며, 明穆皇后의 오빠로서 반란을 일으킨 郭黙을 討破한 뒤에 都督江荊豫益梁雍六州諸軍事와 征西將軍으로 승진되었다.
역주10 謝安 : 謝安(320~385)은 晉나라 陽夏 사람으로 자는 安石이다. 소시부터 명성이 있어 나라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會稽의 東山에서 은거하다가 뒤에 桓溫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司馬가 되었다. 이어 侍中으로 승진했을 때 孝武帝가 즉위하였다. 桓溫이 반역할 뜻을 품었으나 謝安은 王坦之와 함께 잘 대처하였고, 桓溫이 죽자, 尙書僕射와 中書令이 되었다. 苻堅이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淮水와 肥水에 주둔하니 京師가 震恐하였는데, 謝安은 征討大都督이 되어 苻堅의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이 공로로 太保로 승진되고 建昌縣公에 봉해졌으며, 뒤에 자청해서 廣陵에 出鎭하였으며, 征虜將軍으로 출정한 일도 있었다.
역주11 蔡謨 : 蔡謨(281~356)는 東晉 사람으로 자는 道明이며, 元帝 때 여러 벼슬을 거쳐 侍中에 이르렀다. 蘇峻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동원해서 토벌하였고, 난이 평정되자 그 공으로 濟陽에 봉해졌으며, 穆宗 때에는 光祿大夫가 되었다. 蔡謨는 박학다식하여 禮儀와 종묘제도를 議定하였으며, 나라를 다스리고 형세를 분석하는 데에 일정한 법도와 명석한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晉書》 〈蔡謨傳〉에 자세한 행적이 나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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