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하고 獨與幼子
소과過로 負擔渡海
하여 하되 而華屋玉食之念
을 不存於胸中
이니라
平生無所嗜好요 以圖史爲園囿하고 文章爲鼓吹러니 至此하여는 亦皆罷去하고 獨喜爲詩하니 精深華妙하여 不見老人衰憊之氣니라
是時
에 이러니 書來告曰 古之詩人
은 有擬古之作矣
나 未有追和古人者也
니라
吾於시詩人에 無所甚好요 獨好도연명淵明之시詩니라
도연명淵明作시詩不多나 然이나 其시詩質而實綺하고 癯而實腴하니 自조식曹유곤劉포조鮑사영운謝이백李두보杜諸人이 皆莫及也니라
吾前後和其詩 凡百數十篇이니 至其得意하여는 自謂不甚愧도연명淵明이니라
今將集而幷錄之하여 以遺後之君子하노니 子爲我志之하라
도연명淵明臨終에 疏告도엄儼等하되 吾少而窮苦하여 每以家貧으로 東西遊走하니 性剛才拙하여 與物多忤니라
自量爲己 必貽俗患하고 黽俛辭世하여 使汝等幼而飢寒이니라하니 도연명淵明此語는 蓋實錄也니라
吾今眞有此病이나 而不蚤自知하고 半生出仕하여 以犯世患하니 此所以深服도연명淵明하여 欲以晩節師範其萬一也라하니라
이언만 而
하고 乃欲以
에 自託於
도연명淵明하니 其誰肯信之
리오
雖然이나 자첨子瞻之仕는 其出入進退를 猶可考也니 後之君자첨子는 其必有以處之矣리라
하노라하시고 라하시니 區區之迹
은 蓋未足以論士也
니라
철轍少而無師하고 자첨子瞻旣冠而學成하니 先君命철轍師焉하시니라
자첨子瞻嘗稱철轍詩有古人之風이나 自以爲不若也니라
然
이나 自其斥居
로 其學日進
이 沛然如川之方至
니라
其詩比두자미杜子美이태백李太白爲有餘라 遂與도연명淵明比니라
철轍雖馳驟從之나 常出其後하고 其和도연명淵明도 철轍繼之者 亦一二焉이니라
소성紹聖四年二月二十九日
해강海康성남城南동재東齋引
하노라
06. 자첨子瞻이 도연명陶淵明의 시집詩集에 화답한 시에 대한 서문
글은 유의하지 않고 적은 것이지만, 신통력이 스스로 발휘되었다.
동파선생東坡先生이 담이儋耳에 적거謫居함에 나부산羅浮山 아래에 가솔을 남겨두고, 다만 어린 아들 소과蘇過와 더불어 짐을 지고 바다를 건너 〈담주儋州에 이르러서〉 띠와 대를 엮어 집을 덮고 살며 날마다 나물과 토란을 먹되, 화려한 집에 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은 아예 흉중에 가지지 않았다.
평소 즐기는 바가 없고 도사圖史로 원유園囿를 삼고 문장文章으로 고취鼓吹를 삼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그것마저 또한 다 없애버리고 단지 시詩 짓기만을 좋아하였는데, 뜻이 정밀하고 깊으며 문사文辭가 화려하고 교묘하여 노인의 쇠약하고 피곤한 기색을 전연 보지 못하겠다.
이때에 철轍 또한 해강海康에 폄적貶謫되었는데, 자첨子瞻이 편지를 보내와 고하기를 “옛날 시인詩人 중에 의고작擬古作을 한 이는 있어도 고인古人을 추화追和한 이는 없었다.
고인古人을 추화追和한 것은 동파東坡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시인詩人에 있어서 매우 좋아하는 바가 없고 다만 도연명陶淵明의 시詩을 좋아할 뿐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작시作詩가 많지는 않지만, 그 시詩는 질박하나 실은 기려綺麗하고, 고고枯槁하나 실은 풍부하니 조식曹植, 유곤劉琨, 포조鮑照, 사영운謝靈運, 이백李白, 두보杜甫 이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전후로 그 시에 화운和韻한 것이 백 수십 편이 되는데, 그 득의得意한 것에 있어서는 도연명陶淵明에 몹시 부끄럽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제 장차 시집을 편찬할 때 아울러 그 화운시도 기록하여 후세의 군자들에게 남겨주려고 하니, 자네는 나를 위해 서문을 써주게.
그러나 내가 도연명陶淵明에 대하여 어찌 단지 그 시만 좋아하겠는가?
그 사람 됨됨이에 대하여 실은 느끼는 바가 있느니라.
도연명陶淵明이 임종시에 그 아들 도엄陶儼 등에게 고하기를 ‘나는 소시에 궁고窮苦하여 매번 집이 가난한 이유로 동쪽 서쪽을 전전하였는데, 성질은 강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남과 더불어 맞지 않은 점이 많았다.
내 몸 자체가 반드시 속환俗患을 끼칠 것이라 스스로 생각하고 힘써 세상을 사절하여 너희들을 어린 나이에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했다.’고 하였으니, 도연명陶淵明의 이 말은 실록實錄이다.
나는 지금 참으로 이런 병통을 가졌으나 일찌감치 스스로 알지 못하고 반평생 출사하여 세환世患을 범하였으니, 이래서 도연명陶淵明을 깊이 심복하여 만절晩節에 그의 만분의 일이라도 본받고자 하노라.”고 하였다.
도연명陶淵明은 5두斗의 요미料米를 위하여 한 번 띠를 띠고 향리鄕里의 소인小人을 뵈려 하지 않았거늘, 자첨子瞻은 30여 년 동안 출사出仕하다가 옥리獄吏에게 곤욕을 당했으되 끝내 고치지 않아 대난大難에 빠졌고, 상유桑楡의 말경末景에 스스로 도연명陶淵明에 의탁하니 그것을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자첨子瞻의 출사出仕는 그 출입出入과 진퇴進退를 오히려 상고할 만하니, 후세의 군자들은 반드시 처분함이 있을 것이다.
공자孔子는 “나는 옛것을 서술해 전할 뿐 창작을 하지 않으며, 그대로 믿고 옛것을 좋아하는 것을 옛날 노팽老彭과 가만히 견주어본다.”고 하셨고, 맹자孟子는 “증자曾子와 자사子思는 도道가 같다.”고 하셨으니, 구구한 행적은 족히 선비를 논할 것이 못 된다.
철轍은 어려서 스승이 없었고, 자첨子瞻은 이미 관례冠禮를 올리고 나서 학문이 이루어지니, 선군先君(蘇洵)께서 철轍에게 명하여 〈자첨子瞻을〉 스승으로 받들게 하셨다.
자첨子瞻은 일찍이 철轍의 시詩에 고인古人의 풍風이 있다고 칭찬하였지만, 나는 그와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첨子瞻은〉 동파東坡로 물러가 살면서부터 그 학문이 날로 진취되는 속도가 마치 급히 흐르는 냇물과 같았다.
그 시詩는 두자미杜子美(杜甫)와 이태백李太白(李白)에게 비유해도 남음이 있는지라, 드디어 도연명陶淵明과 비견하였다.
철轍은 비록 달려가 따랐지만 항상 그 뒤에 나갔고, 그 도연명陶淵明의 시詩에 화운和韻한 것도 철轍이 계승한 것이 또한 한두 수가 된다.
소성紹聖 4년 2월 29일 해강海康 성남城南 동재東齋에서 서문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