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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3)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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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文不着意 而神理自鑄니라
하고 獨與幼子소과 負擔渡海하여 하되 而華屋玉食之念 不存於胸中이니라
平生無所嗜好 以圖史爲園囿하고 文章爲鼓吹러니 至此하여는 亦皆罷去하고 獨喜爲詩하니 精深華妙하여 不見老人衰憊之氣니라
是時 이러니 書來告曰 古之詩人 有擬古之作矣 未有追和古人者也니라
追和古人 則始於동파東坡니라
吾於 無所甚好 獨好도연명淵明니라
도연명淵明不多이나質而實綺하고 癯而實腴하니조식유곤포조사영운이백두보諸人 皆莫及也니라
吾前後和其詩 凡百數十篇이니 至其得意하여는 自謂不甚愧도연명淵明이니라
今將集而幷錄之하여 以遺後之君子하노니 子爲我志之하라
이나 吾於도연명淵明 豈特好其詩也哉
如其爲人 實有感焉이니라
도연명淵明臨終 疏告도엄하되 吾少而窮苦하여 每以家貧으로 東西遊走하니 性剛才拙하여 與物多忤니라
自量爲己 必貽俗患하고 黽俛辭世하여 使汝等幼而飢寒이니라하니 도연명淵明此語 蓋實錄也니라
吾今眞有此病이나 而不蚤自知하고 半生出仕하여 以犯世患하니 此所以深服도연명淵明하여 欲以晩節師範其萬一也라하니라
嗟夫
雖然이나 자첨子瞻之仕 其出入進退 猶可考也 後之君자첨 其必有以處之矣리라
少而無師하고 자첨子瞻旣冠而學成하니 先君命師焉하시니라
자첨子瞻嘗稱詩有古人之風이나 自以爲不若也니라
이나 自其斥居 其學日進 沛然如川之方至니라
其詩比두자미杜子美이태백李太白爲有餘 遂與도연명淵明니라
雖馳驟從之 常出其後하고 其和도연명淵明 繼之者 亦一二焉이니라
소성紹聖四年二月二十九日 해강海康성남城南동재東齋하노라


06. 자첨子瞻도연명陶淵明시집詩集에 화답한 시에 대한 서문
글은 유의하지 않고 적은 것이지만, 신통력이 스스로 발휘되었다.
동파선생東坡先生담이儋耳적거謫居함에 나부산羅浮山 아래에 가솔을 남겨두고, 다만 어린 아들 소과蘇過와 더불어 짐을 지고 바다를 건너 〈담주儋州에 이르러서〉 띠와 대를 엮어 집을 덮고 살며 날마다 나물과 토란을 먹되, 화려한 집에 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은 아예 흉중에 가지지 않았다.
평소 즐기는 바가 없고 도사圖史원유園囿를 삼고 문장文章으로 고취鼓吹를 삼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그것마저 또한 다 없애버리고 단지 짓기만을 좋아하였는데, 뜻이 정밀하고 깊으며 문사文辭가 화려하고 교묘하여 노인의 쇠약하고 피곤한 기색을 전연 보지 못하겠다.
이때에 또한 해강海康폄적貶謫되었는데, 자첨子瞻이 편지를 보내와 고하기를 “옛날 시인詩人 중에 의고작擬古作을 한 이는 있어도 고인古人추화追和한 이는 없었다.
고인古人추화追和한 것은 동파東坡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시인詩人에 있어서 매우 좋아하는 바가 없고 다만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할 뿐이다.
도연명陶淵明작시作詩가 많지는 않지만, 그 는 질박하나 실은 기려綺麗하고, 고고枯槁하나 실은 풍부하니 조식曹植, 유곤劉琨, 포조鮑照, 사영운謝靈運, 이백李白, 두보杜甫 이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전후로 그 시에 화운和韻한 것이 백 수십 편이 되는데, 그 득의得意한 것에 있어서는 도연명陶淵明에 몹시 부끄럽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제 장차 시집을 편찬할 때 아울러 그 화운시도 기록하여 후세의 군자들에게 남겨주려고 하니, 자네는 나를 위해 서문을 써주게.
그러나 내가 도연명陶淵明에 대하여 어찌 단지 그 시만 좋아하겠는가?
그 사람 됨됨이에 대하여 실은 느끼는 바가 있느니라.
도연명陶淵明이 임종시에 그 아들 도엄陶儼 등에게 고하기를 ‘나는 소시에 궁고窮苦하여 매번 집이 가난한 이유로 동쪽 서쪽을 전전하였는데, 성질은 강하고 재주는 졸렬하여 남과 더불어 맞지 않은 점이 많았다.
내 몸 자체가 반드시 속환俗患을 끼칠 것이라 스스로 생각하고 힘써 세상을 사절하여 너희들을 어린 나이에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했다.’고 하였으니, 도연명陶淵明의 이 말은 실록實錄이다.
나는 지금 참으로 이런 병통을 가졌으나 일찌감치 스스로 알지 못하고 반평생 출사하여 세환世患을 범하였으니, 이래서 도연명陶淵明을 깊이 심복하여 만절晩節에 그의 만분의 일이라도 본받고자 하노라.”고 하였다.
아!
도연명陶淵明은 5요미料米를 위하여 한 번 띠를 띠고 향리鄕里소인小人을 뵈려 하지 않았거늘, 자첨子瞻은 30여 년 동안 출사出仕하다가 옥리獄吏에게 곤욕을 당했으되 끝내 고치지 않아 대난大難에 빠졌고, 상유桑楡말경末景에 스스로 도연명陶淵明에 의탁하니 그것을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자첨子瞻출사出仕는 그 출입出入진퇴進退를 오히려 상고할 만하니, 후세의 군자들은 반드시 처분함이 있을 것이다.
공자孔子는 “나는 옛것을 서술해 전할 뿐 창작을 하지 않으며, 그대로 믿고 옛것을 좋아하는 것을 옛날 노팽老彭과 가만히 견주어본다.”고 하셨고, 맹자孟子는 “증자曾子자사子思가 같다.”고 하셨으니, 구구한 행적은 족히 선비를 논할 것이 못 된다.
은 어려서 스승이 없었고, 자첨子瞻은 이미 관례冠禮를 올리고 나서 학문이 이루어지니, 선군先君(蘇洵)께서 에게 명하여 〈자첨子瞻을〉 스승으로 받들게 하셨다.
자첨子瞻은 일찍이 고인古人이 있다고 칭찬하였지만, 나는 그와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첨子瞻은〉 동파東坡로 물러가 살면서부터 그 학문이 날로 진취되는 속도가 마치 급히 흐르는 냇물과 같았다.
두자미杜子美(杜甫)와 이태백李太白(李白)에게 비유해도 남음이 있는지라, 드디어 도연명陶淵明과 비견하였다.
은 비록 달려가 따랐지만 항상 그 뒤에 나갔고, 그 도연명陶淵明화운和韻한 것도 이 계승한 것이 또한 한두 수가 된다.
소성紹聖 4년 2월 29일 해강海康 성남城南 동재東齋에서 서문을 쓰다.


역주
역주1 子瞻和陶淵明詩集引 : 子瞻은 蘇軾의 字이다. 和陶詩는 蘇軾으로부터 시작되었고, 蘇軾이 揚州에 있을 때 지은 〈和飲酒二十詩〉가 또 ‘和陶淵明飲酒二十詩’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 〈二十詩〉는 뒤에 蘇轍, 晁補之, 張耒도 서로 이어서 和韻을 남겠다.
蘇軾은 〈和飲酒二十詩〉에 이어 嶺南에 貶謫되었을 때에도 계속 陶詩에 화답한 것이 백여 편이나 되었는데, 儋州에 있을 때 스스로 한 시집을 편성하고 아울러 아우 蘇轍에게 서문을 지어달라고 청하였으니, 이 서문이 바로 그것이다.
역주2 東坡先生 謫居儋耳 : 宋 哲宗 紹聖 4년(1097) 4월에 蘇軾이 재차 폄직을 당해 昌化軍에 안치되었다. 儋耳는 儋州를 가리킨다.
역주3 置家羅浮之下 : 蘇軾은 紹聖 원년(1094)에 폄직을 당해 建昌軍司馬로 나가 惠州에 안치되었다. 이곳에서 朝廷이 元祐舊臣은 종신토록 사면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京師로 돌아갈 가망이 없자, 紹聖 3년에 白鶴峯에 땅 몇 畝를 사서 그곳에 가솔을 남겨두었다.
역주4 葺茅竹而居之 日啗蒣芋 : 蘇軾은 儋州에 있을 때 程天侔에게 준 편지에서 “여기는 식사에 육류가 없고, 아파도 약이 없고, 거처에 방이 없고, 나가도 벗이 없고, 겨울에 숯이 없고, 여름에 寒泉이 없소이다. 그저 토란을 먹고 물을 마시며 著書로 낙을 삼소이다.”란 말을 하고 있다.
역주5 轍亦遷海康 : 紹聖 연간에 蘇轍은 蘇軾의 일에 연루되어 또한 폄직되어 海康으로 나갔다.
역주6 淵明不肯爲五斗米一束帶見鄕里小人 : 蕭統의 〈陶淵明傳〉에 의하면 “晉 安帝 義熙 원년(405) 8월에 陶淵明이 彭澤令이 되었는데, 연말에 郡에서 보낸 督郵가 이르자, 縣吏가 ‘띠를 띠고 뵈옵시오.’라고 하니, 陶淵明이 탄식하기를 ‘내가 어찌 5斗의 料米를 위하여 鄕里의 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즉일로 인끈을 풀어 관직을 버리고 떠나면서 〈歸去來辭〉를 지었다.”고 한다.
역주7 子瞻出仕三十餘年……以陷于大難 : 紹聖 원년 4월에 章惇, 呂惠卿, 曾布, 蔡京 등이 蘇軾이 起草한 制誥가 “先帝를 譏刺했다.”는 죄명을 씌워서 端明殿學士와 翰林殿侍讀學士의 官銜을 철회하고 英州知州로 貶降시켰으며, 그 후 또 한 달 안에 세 차례 官等을 떨어뜨려 建昌軍司馬로 貶降하여 惠州에 안치시켰고, 3년 후에 재차 폄직하여 琼州로 보냈다.
역주8 桑楡之末景 : 桑楡는 해가 떨어지는 곳이니, 곧 晩年을 비유한다.
역주9 孔子曰……竊比於我老彭 : 《論語》 〈述而〉에 보인다.
역주10 孟子曰 曾子子思同道 : 《孟子》 〈離婁 下〉에 보인다. 曾子는 武城에 있을 때에 적이 침입하자 피난을 떠났고, 적이 물러가자 돌아온 사실이 있었고, 子思는 衛나라에 있을 때에 적이 이르자 혹자가 피난을 떠나도록 권하니, 子思는 ‘만일 내가 떠나면 임금은 누구와 함께 지키겠는가?’라고 하고 떠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그래서 맹자는 “曾子와 子思는 道가 같다(처지를 바꾸면 똑같이 했을 것이다).”고 한 것이다.
역주11 東坡 : 地名이다. 蘇軾은 元豐 2년(1079)에 言官 何正臣, 舒亶, 李定의 무함을 받아 하옥되었고, 출옥된 뒤에는 水部員外郞 黃州團練副使 명의로 黃州에 貶謫되었고, 元豐 5년에는 東坡를 수리하였고, 그 후에 곧 東坡를 자호로 하였다.
역주12 <주석명/> : 張伯行은 《唐宋八大家文鈔》에서 “東坡의 〈和淵明詩〉는 陶淵明의 사람됨을 매우 景慕한 것이다. 陶淵明은 道가 있는 선비라, 그 詩가 천연적이어서 미칠 수가 없다. 내가 東坡의 和韻詩를 읽어보니 바로 東坡의 本色을 드러낸 것이라, 각각 그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潁濱의 이 서문은 또한 東坡의 性情과 面目을 그려낸 것이다.[東坡和淵明詩 甚景慕淵明之爲人 淵明有道之士 其詩天然不可及 余讀東坡所和詩 仍是東坡本色 蓋各有其佳處耳 潁濱此序 又寫得東坡性情面目出]”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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