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공桓公이 帥諸侯以伐초楚하되 次於형陘而不進하고 以待초楚人之變이니라
초楚使굴완屈完如師하니 환공桓公陳諸侯之師하고 與之乘而觀之니라
굴완屈完見제齊之盛하고 懼而求盟하니 諸侯之師 成列而未試也니라
知戰之不必勝이요 而戰勝之利는 不過服초楚며 全師之功이 大於克敵이라
진晉문공文公이 以諸侯遇초楚于성복城濮하니 초楚人請戰하니라
문공文公思
초楚人之惠
하여 退而避之
한대 軍吏皆諫
이어늘 구범咎犯曰 我退而
초楚還
이면 我將何求
오
使문공文公退而자옥子玉止면 則문공文公之服초楚도 亦與제齊환공桓等無戰勝之功矣리라
故로 환공桓문공文之兵은 非不得已不戰이니 此其所以全師保國하여 無敵於諸侯者也니라
其後
에 진秦목공穆公은 東平
진晉亂
하고 西伐諸
융적戎하며 하니 皆有伯者之風矣
니라
然
이나 하니 나 而不能東征諸夏
하여 以終成伯業
이니라
장왕莊王使
신주申舟제齊하되 命無假道於
송宋하니 신주舟知必死
나 而
장왕王不聽
이라 송宋人殺之
하니라
兵一不義하여 而幾至於狼狽하니 不能與환공桓문공文齒온 而況其下者哉아
오패五伯의 우열優劣을 또한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병계兵戒〉에 또한 “군란軍亂의 괴수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은 부득이해서 〈군사로써〉 천하天下에 해독을 끼친다.”라고 하였다.
오패五伯 중에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이 가장 훌륭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용병用兵을 보건대, 모두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환공桓公이 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 초楚나라를 정벌하되 형陘 땅에 주둔하여 진격하지 않고 초楚나라 사람의 태도 변화를 기다렸다.
초楚나라가 굴완屈完을 사자로 삼아 제후諸侯들의 군대에 가게 하였더니, 환공桓公은 〈군대의 위용을 보이기 위하여〉 제후諸侯들의 군대를 진열해놓고 굴완屈完과 함께 수레를 타고 사열하였다.
굴완屈完이 제齊나라 군대의 성대함을 보고 두려워서 동맹을 요구하니, 제후諸侯들의 군대는 진열만 하고 시험해보지는 못하였다.
환공桓公은 퇴각하여 소릉召陵에 머물면서 초楚나라와 동맹을 맺고 떠났다.
어찌 초楚나라와 일전을 겨룰 만한 실력이 없었겠는가?
싸워도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고, 전승戰勝의 이익은 고작 초楚나라를 복종시키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과 군사를 보전하는 공이 적을 이기는 것보다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싸우지 않고 초楚나라를 굴복시키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진晉 문공文公이 제후諸侯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楚나라 군대를 성복城濮에서 만났더니, 초楚나라 사람이 싸우기를 청하였다.
문공文公이 초楚나라 사람의 은혜를 생각하여 퇴각해서 90리를 피하려고 하자, 군리軍吏들이 모두 간諫하거늘, 구범咎犯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가 물러나 초楚나라 군대가 돌아간다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구하겠소?
만일 초楚나라 군대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임금은 물러갔는데 신하가 쳐들어오는 것이라 잘못은 초楚나라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군대가 물러났으나 초楚나라 군대가 중지하지 않으니, 드디어 초楚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자옥子玉을 살해하였다.
가사 문공文公이 물러나고 자옥子玉이 중지하였더라면 문공文公이 초楚나라를 굴복시킨 것 또한 제齊 환공桓公이 싸움 없이 승리한 공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의 군대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싸우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군대를 보전하고 나라를 보위하여 제후諸侯 중에 적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송宋 양공襄公에 이르러서는 나라는 작고 덕德은 천박하면서 제후의 맹주가 될 것을 〈초楚나라에〉 요구하였으며, 주邾나라와 증鄫나라의 임금을 능멸 학대하고 정鄭나라를 정벌함으로써 초楚나라를 노하게 하여 군사가 패하고 몸이 죽기에 바빴으니, 비록 패자伯者의 이름을 훔쳤으나 실질적으로는 아니었다.
그 뒤에 진秦 목공穆公은 동쪽으로 진晉나라의 난亂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여러 융적戎狄을 정벌하였으며, 초楚 장왕莊王은 진陳나라를 치고 정鄭나라에 들어가서 나라를 빼앗으나 취하지 않았으니, 모두 패자伯者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그러나 목공穆公은 기자杞子의 계략을 듣고서 건숙蹇叔의 의견을 물리치고 맹명孟明을 써서 천 리를 행군하여 정鄭나라를 습격하다가 효산殽山에서 군대가 패멸하였으니, 비록 과실을 뉘우쳐 스스로 맹세하는 말을 비록 《서경書經》 〈주서周書〉에 열서列書하였으나, 능히 동쪽으로 제하諸夏를 정벌하여 백업伯業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장왕莊王은 신주申舟로 하여금 제齊나라에 빙문聘問하게 하면서 송宋나라에게 길을 빌지 말도록 명령하였으니, 신주申舟는 자기가 반드시 죽을 줄을 알았지만 장왕莊王이 신주申舟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는지라 결국 송宋나라 사람이 신주申舟를 죽였다.
장왕莊王은 신주申舟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군대를 동원하여 송宋나라를 쳤고, 송宋나라를 포위한 지 아홉 달 만에 송宋나라와 맹약을 체결하고 송宋나라를 떠났다.
그리하여 비록 송宋나라를 잘 복종시켰다는 이름을 들었지만, 군자君子는 ‘이것은 길을 빌지 않은 군대였다.’고 하였다.
제齊 영공靈公과 초楚 영왕靈王이 한 일을 장왕莊王 또한 하였으니, 어떻게 패자伯者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군대를 운용함에 있어서 한 번 도의道義를 행하지 아니하여 거의 낭패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제齊 환공桓公‧진晉 문공文公과 함께 나란히 비교할 수 없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자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