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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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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7. 오패五伯(五霸)에 대한
優劣 亦見於此矣니라
오패五伯우열優劣을 또한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병계兵戒〉에 또한 “군란軍亂의 괴수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은 부득이해서 〈군사로써〉 천하天下에 해독을 끼친다.”라고 하였다.
五伯 桓文爲盛이니라
오패五伯 중에 환공桓公 문공文公이 가장 훌륭하였다.
이나 觀其用兵컨대 皆出於不得已니라
그러나 그들의 용병用兵을 보건대, 모두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桓公 帥諸侯以伐楚하되 次於陘而不進하고 以待楚人之變이니라
환공桓公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정벌하되 땅에 주둔하여 진격하지 않고 나라 사람의 태도 변화를 기다렸다.
楚使屈完如師하니 桓公陳諸侯之師하고 與之乘而觀之니라
나라가 굴완屈完을 사자로 삼아 제후諸侯들의 군대에 가게 하였더니, 환공桓公은 〈군대의 위용을 보이기 위하여〉 제후諸侯들의 군대를 진열해놓고 굴완屈完과 함께 수레를 타고 사열하였다.
屈完見齊之盛하고 懼而求盟하니 諸侯之師 成列而未試也니라
굴완屈完나라 군대의 성대함을 보고 두려워서 동맹을 요구하니, 제후諸侯들의 군대는 진열만 하고 시험해보지는 못하였다.
환공桓公은 퇴각하여 소릉召陵에 머물면서 나라와 동맹을 맺고 떠났다.
夫豈不能一戰哉
어찌 나라와 일전을 겨룰 만한 실력이 없었겠는가?
知戰之不必勝이요 而戰勝之利 不過服楚 全師之功 大於克敵이라
싸워도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고, 전승戰勝의 이익은 고작 나라를 복종시키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과 군사를 보전하는 공이 적을 이기는 것보다 크다는 것을 알았다.
以不戰服楚而不吝也니라
그러므로 싸우지 않고 나라를 굴복시키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晉文公 以諸侯遇楚于城濮하니 楚人請戰하니라
문공文公제후諸侯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 군대를 성복城濮에서 만났더니, 나라 사람이 싸우기를 청하였다.
文公思楚人之惠하여 退而避之한대 軍吏皆諫이어늘 咎犯曰 我退而楚還이면 我將何求
문공文公나라 사람의 은혜를 생각하여 퇴각해서 90리를 피하려고 하자, 군리軍吏들이 모두 하거늘, 구범咎犯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가 물러나 나라 군대가 돌아간다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구하겠소?
만일 나라 군대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임금은 물러갔는데 신하가 쳐들어오는 것이라 잘못은 나라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군대가 물러났으나 나라 군대가 중지하지 않으니, 드디어 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자옥子玉을 살해하였다.
使文公退而子玉止 則文公之服楚 亦與齊桓等無戰勝之功矣리라
가사 문공文公이 물러나고 자옥子玉이 중지하였더라면 문공文公나라를 굴복시킨 것 또한 환공桓公이 싸움 없이 승리한 공과 같았을 것이다.
桓文之兵 非不得已不戰이니 此其所以全師保國하여 無敵於諸侯者也니라
그러므로 환공桓公 문공文公의 군대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싸우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군대를 보전하고 나라를 보위하여 제후諸侯 중에 적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양공襄公에 이르러서는 나라는 작고 은 천박하면서 제후의 맹주가 될 것을 〈나라에〉 요구하였으며, 나라와 나라의 임금을 능멸 학대하고 나라를 정벌함으로써 나라를 노하게 하여 군사가 패하고 몸이 죽기에 바빴으니, 비록 패자伯者의 이름을 훔쳤으나 실질적으로는 아니었다.
其後 秦穆公 東平晉亂하고 西伐諸戎하며 하니 皆有伯者之風矣니라
그 뒤에 목공穆公은 동쪽으로 나라의 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여러 융적戎狄을 정벌하였으며, 장왕莊王나라를 치고 나라에 들어가서 나라를 빼앗으나 취하지 않았으니, 모두 패자伯者풍도風度가 있었다.
그러나 목공穆公기자杞子의 계략을 듣고서 건숙蹇叔의 의견을 물리치고 맹명孟明을 써서 천 리를 행군하여 나라를 습격하다가 효산殽山에서 군대가 패멸하였으니, 비록 과실을 뉘우쳐 스스로 맹세하는 말을 비록 《서경書經》 〈주서周書〉에 열서列書하였으나, 능히 동쪽으로 제하諸夏를 정벌하여 백업伯業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莊王使申舟하되 命無假道於宋하니 舟知必死 而王不聽이라 宋人殺之하니라
장왕莊王신주申舟로 하여금 나라에 빙문聘問하게 하면서 나라에게 길을 빌지 말도록 명령하였으니, 신주申舟는 자기가 반드시 죽을 줄을 알았지만 장왕莊王신주申舟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는지라 결국 나라 사람이 신주申舟를 죽였다.
장왕莊王신주申舟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군대를 동원하여 나라를 쳤고, 나라를 포위한 지 아홉 달 만에 나라와 맹약을 체결하고 나라를 떠났다.
雖號能服宋이나이나 君子以爲此라하니라
그리하여 비록 나라를 잘 복종시켰다는 이름을 들었지만, 군자君子는 ‘이것은 길을 빌지 않은 군대였다.’고 하였다.
王亦爲之하니 而尙何以爲伯乎
영공靈公 영왕靈王이 한 일을 장왕莊王 또한 하였으니, 어떻게 패자伯者가 될 수 있었겠는가?
嗚呼
아!
皆賢君也니라
이 두 임금은 모두 어진 임금이었다.
兵一不義하여 而幾至於狼狽하니 不能與桓文齒 而況其下者哉
그런데 군대를 운용함에 있어서 한 번 도의道義를 행하지 아니하여 거의 낭패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환공桓公 문공文公과 함께 나란히 비교할 수 없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자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역주
역주1 五伯論 : 本文의 논술 요지는 齊 桓公과 晉 文公은 五霸 중에 賢者라고 칭할 수 있고, 宋 襄王과 楚 莊王은 不義한 군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齊 桓公과 晉 文公에게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欒城集》에는 本文의 標題가 〈五伯〉로 되어 있다.
역주2 : 패
역주3 兵戒亦云 無爲戎首 : ‘無爲戎首’는 《禮記》 〈檀弓 下〉에 “穆公이 묻기를 ‘옛 임금을 위하여 〈나라를 떠나 외국에 있는 신하가〉 돌아와 服을 입는 것이 옛날의 예법입니까?’라고 하니, 子思가 답하기를 ‘옛날의 군자는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禮로써 맞아들이고, 사람을 물리칠 때에도 禮로써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옛 임금을 위하여 돌아와 服을 입는 禮가 있었으나, 지금의 군자는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마치 장차 무릎 위에 올려놓아 더욱 높이 추켜올리려고 하는 것처럼 하고, 사람을 물리칠 때에는 마치 장차 깊은 못에 떨어뜨려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寇亂의 괴수가 되지 않는 것[無爲戎首]만도 또한 착하지 않습니까? 또 어찌 돌아와 옛 임금의 服을 입게 하는 禮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란 말이 보인다.
여기서는 마치 〈兵戒〉에 있는 것처럼 인용하여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역주4 易曰 聖人不得已而毒天下也 : 《周易》 師卦 彖辭에 “군사로써 천하에 해독을 끼치나 백성들이 따른다.[以此毒天下 而民從之]”란 말이 보인다.
역주5 桓公帥諸侯以伐楚……與之盟而去之 : 《春秋左氏傳》 僖公 4년에 “齊나라 임금(齊 桓公)이 諸侯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蔡나라를 침략했다. 蔡나라가 무너지자, 그 길로 楚나라를 정벌하니, 楚나라 임금이 사신을 시켜 諸侯들의 군대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북해에 있고 나는 남해에 있어 멀리 떨어져 있거니, ……뜻밖에 당신네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管仲이 대답하기를 ‘……너희 楚나라가 바칠 苞茅(띠풀의 일종으로, 술을 거르는 데 씀)를 헌상하지 않아 천자가 제사를 지낼 때에 바치지를 못하여 술을 거르지를 못하고 있다. 우리 임금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옛날 周 昭王이 남쪽으로 순수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는데, 우리 임금은 또한 그 이유를 묻는 바이다.’라고 하니, 楚나라 사자는 대답하기를 ‘공물을 바치지 않은 것은 우리 임금님의 죄라, 감히 바치지 않겠습니까마는, 昭王이 돌아가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와는 관계가 없으니, 그 이유를 漢水가에다 물어보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諸侯들의 군대는 진격하여 楚나라 陘 땅에 주둔했다. 楚나라 임금이 大夫 屈完을 사자로 삼아 제후들의 군대에게 보내어 강화할 뜻을 전했다.
그래서 諸侯들의 군대는 퇴각하여 召陵에 머물면서 齊나라 임금은 〈군대의 위용을 보여 楚나라로 하여금 자진 굴복하게 하려고〉 諸侯들의 군대를 진열하여 놓고, 屈完과 같이 사열하였다.
그때 齊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諸侯들이 쳐들어온 것은 나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선군 이래의 우호를 계속하고자 함이오. 그러니 楚나라에서도 諸侯들과 같이 우호를 맺음이 어떠하오?’라고 하였다. 이에 屈完이 대답하기를 ‘임금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우리 楚나라를 도와주시니, 우리 임금을 諸侯 안에 넣어주신다면 이야말로 우리 임금님의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齊나라 임금은 말하기를 ‘이런 대군으로써 싸우면 누가 능히 대적할 수 있으며, 이런 대군으로써 城을 공격하면 어느 성이라고 이기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니, 屈完은 대답하기를 ‘임금님께서 만일 德으로써 諸侯를 다스리시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임금님께서 만일 힘으로써 다스리신다면 우리 楚나라부터 方城山에 성을 쌓고 漢水에 연못을 만들고 싸우겠습니다. 그런다면 비록 많은 군사들일지라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屈完은 마침내 여러 諸侯들과 동맹을 맺었다.”라고 하였으니, 蘇轍의 이 부분의 말은 《春秋左氏傳》과 출입이 있다.
역주6 晉文公……遂以破楚而殺子玉 : 《春秋左氏傳》 僖公 28년에 의하면 “晉 文公이 諸侯들의 군사를 거느리고 宋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楚나라 子玉(成得臣)과 교전하였는데, 晉 文公이 일찍이 出亡했을 때 楚나라가 그를 禮遇하고 또한 그를 秦나라로 들여보내 준 일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일부러 퇴각하려고 하였다.
이때 軍吏가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의 군대를 피하여 퇴각하는 것은 치욕입니다. 게다가 楚나라 군대는 지쳐 있습니다. 어째서 퇴각하려 합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子犯이 말하기를 ‘군대란 정당한 도에 처해 있을 때가 사기 왕성한 것이고 부정할 때가 피로한 것이니, 어찌 오래 싸웠다고만 지치는 것이겠소. 그리고 전에 楚나라의 은혜를 받지 않았다면 오늘날 晉나라 임금님이 되시지 못했을 것이오. 3일간의 갈 거리 90리를 물러나 楚나라 군대와의 싸움을 피하는 것이 전의 은혜를 갚는 방법이오. 은혜를 배반하여 약속을 어기고 楚나라의 적국인 宋나라를 지키면 우리는 올바르지 않고 楚나라는 옳으며, 또한 楚나라 군대는 원래 배불리 먹어 楚나라 군대가 피로하다고 말할 수는 없소. 만일 우리 군대가 물러나 楚나라 군대가 돌아간다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구하겠소? 만일 楚나라 군대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임금은 물러갔는데 신하가 쳐들어오는 것이라 잘못은 楚나라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90리를 물러났다. 그래서 楚나라 군대는 정지하려 했으나 子玉은 불가하다고 했다.”란 말이 보인다.
《春秋左氏傳》 僖公 23년에 의하면 대략 “重耳가 국외에서 19년간 망명생활을 할 때에는 狐偃‧趙衰‧顚頡‧魏武子‧司空季子 같은 賢臣이 따라다녔고, 重耳를 지지한 나라는 秦나라 외에 楚나라도 있었다. 楚王이 일찍이 重耳에게 묻기를 ‘귀국하여 군왕이 되면 무엇으로 楚나라에 보답하겠는가?’라고 하니, 重耳는 무슨 물건을 주겠다는 응답은 전연 하지 않고, 다만 ‘만약 임금의 은혜로 내가 晉나라로 들어가서 왕이 된 뒤에 불행하게도 우리 晉나라와 귀하의 楚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中原에서 싸우게 된다면 나는 임금님과 싸움을 피하여 90리를 후퇴하겠습니다. 그래도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경우는 왼손으로는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활통을 가지고 달리면서 결전할 각오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子玉(成得臣)이 重耳를 죽이자고 말했으나 楚王은 말하기를 ‘晉 公子는 도량이 넓고 검소하며 꾸밈은 있으나 예의가 분명하며, 그 從者들도 엄숙하고 관대하며 충성스럽고 능력이 있다. 이와 반대로 晉 惠公은 친한 자가 없고 국내외에서 모두 그를 미워하고 있다. 내가 듣건대, 姬姓을 가진 諸侯 중에 唐叔의 후손국인 晉나라가 최후까지 남는다고 했다. 이는 바야흐로 晉 公子 重耳에 의해서 晉나라가 흥기한다는 것이리라. 하늘이 重耳를 도와 晉나라를 일으키려고 하는데, 누가 그것을 망치겠는가? 하늘을 거스르면 반드시 큰 재앙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重耳를 秦나라로 보냈고, 秦나라에서는 重耳를 감싸서 귀국시켰다.”라고 한다.
역주7 三舍 : 30里가 1舍이므로, 3舍는 90里를 이른다.
역주8 至宋襄公……兵敗身死之不暇 : 《春秋左氏傳》 僖公 19년에 의하면 “宋 襄公은 邾 文公으로 하여금 鄫나라 임금을 사로잡아 次睢의 社에 희생물로 바치게 하여 그것으로 東夷를 복종시키려고 했다.
宋나라 司馬 子魚(公子 目夷)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말‧소‧양‧돼지‧개‧닭 등 六畜은 서로 희생으로 쓰지 않았고, 작은 제사에는 큰 희생물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감히 사람을 희생으로 쓸 수야 있겠습니까? 제사란 사람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고 백성은 신을 제사 지내는 주인입니다. 만일 사람을 희생으로 바친다면 어느 귀신이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齊 桓公은 망한 세 나라를 보존시켜 제후들을 복종시켰는데도 의로운 사람들은 오히려 박덕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임금님께서는 한 번 제후들을 규합했을 뿐, 滕나라와 鄫나라의 두 임금을 사로잡아 또 그들을 애매한 귀신에게 희생으로 바치려고 하십니다. 그러니 앞으로 霸者가 되려고 해도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냥 죽게 해두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한다.
僖公 21년에 의하면 “宋나라 사람이 鹿上에서 동맹을 맺고 그것으로 제후의 맹주가 될 것을 楚나라에 요구하자 楚나라는 그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僖公 22년에 의하면, 宋 襄公이 鄭나라를 정벌하니, 楚나라 사람이 宋나라를 정벌하여 鄭나라를 구원하였는데, 宋 襄公이 楚나라 군대와 泓 땅에서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고, 襄公은 다리를 다쳐 僖公 23년에 죽었다고 한다.
역주9 楚莊王……得而不取 : 《春秋左氏傳》 宣公 11년에 의하면 “陳나라 夏徵舒가 일찍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자칭 임금이라 했기 때문에 楚 莊王은 陳나라를 쳐서 夏徵舒를 죽였고, 뒤에 다시 陳나라를 봉하였다.”고 한다.
역주10 穆公聽杞子之計……覆師於殽 : 《春秋左氏傳》 僖公 32년에 “杞子가 鄭나라로부터 秦나라에 보고하기를 ‘鄭나라가 나로 하여금 鄭나라의 北門을 지키게 하였으니 만일 몰래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면 鄭나라를 빼앗을 수 있다.’라고 했다.
이에 秦 穆公이 그 일의 가부를 大夫 蹇叔에게 물어보았더니, 蹇叔이 대답하기를 ‘군대를 수고롭게 하여 먼 나라를 치는 것은 좋은 계획이 아닙니다. 군대가 번거로워 힘이 빠졌는데, 먼 나라[鄭] 임금이 이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면, 이보다 좋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군사의 행동을 鄭나라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수고를 해도 공을 세울 곳이 없으면 반드시 배반하는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가는 길이 천 리나 되니 누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라고 했으나, 穆公은 그 의견을 물리치고 孟明(百里孟明視)‧西乞(西乞術)‧白乙(白乙丙)을 장수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게 하였고, 이듬해에 秦나라 군대는 결국 殽山에서 鄭나라를 구원하는 晉나라 군대에게 격파당했다.”란 말이 보인다.
역주11 雖悔過自誓列於周書 : 《書經》 〈周書〉에 있는 〈秦誓〉가 바로 秦 穆公이 이 일에 대한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맹세한 말이다.
역주12 : 곧 聘問이니, 여기서는 諸侯와 諸侯 사이에 使者를 보내 방문함을 가리킨다.
역주13 莊王使申舟聘齊……與之盟而去之 : 《春秋左氏傳》 宣公 14년에 “楚 莊王이 申舟(申無畏)로 하여금 齊나라에 聘問(禮를 갖추어 訪問함)하게 하면서 ‘宋나라에게 길을 빌지 말라.’고 하고, 또 公子 馮으로 하여금 晉나라에 聘問하게 하면서도 ‘鄭나라에게 길을 빌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申舟는 文公 10년 宋나라의 孟諸에서 사냥할 때 宋나라에서 미움을 샀기 때문에, 楚 莊王에게 ‘鄭나라는 사리에 밝지만, 宋나라는 어둡습니다. 晉나라로 가는 使者는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지만, 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莊王은 ‘宋나라에서 너를 죽인다면 내가 그들을 쳐서 보복하여 주겠다.’고 하였다.……
申舟가 宋나라에 이르자 宋나라 사람들이 가로막았다. 이때 宋나라 大夫 華元은 ‘우리나라를 지나가면서 길을 빈다는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를 자기 나라의 영토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자기 나라의 영토로 생각하는 것은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것과 같다. 楚나라의 使者를 죽인다면 반드시 우리나라를 칠 것이다. 우리나라를 친다면 또한 멸망하게 될 것이니, 멸망하기는 마찬가지다.’라고 하고, 그를 죽여버렸다. 莊王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다.……9월에 莊王은 宋나라를 포위하였다.”란 말이 보인다.
宣公 15년에 “楚나라 군대가 장차 宋나라를 떠나려고 하였다. 그러자 申犀(申舟의 아들)는 莊王의 말[馬]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저희 아버지 毋畏는 죽을 줄을 알면서도 감히 왕명을 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약속을 저버리시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으므로, 莊王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때 申叔時는 莊王의 마부 노릇을 하고 있다가, ‘宋나라의 교외에 집을 짓고 그곳으로 되돌아가 밭을 갈면서 지구전을 꾀한다면 宋나라는 틀림없이 楚나라의 명령을 들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의 말을 따랐다. 宋나라 사람들은 두려워한 나머지 華元에게 명하여 밤중에 몰래 楚나라의 陣中에 숨어들게 하였다.
華元은 楚나라 장수 司馬 子反(公子側)의 寢床에 올라가서 그를 일으키고, ‘저희 임금께서 저를 사자로 보내어 우리나라의 괴로운 상태를 호소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식량이 떨어져 자식들을 서로 바꾸어 먹고 땔감이 없어서 죽은 사람의 뼈를 쪼개서 불을 피웁니다. 비록 그렇지만 城下의 맹약은 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이 있더라도 따를 수가 없습니다. 30리만 물러나주신다면 오직 명령하시는 대로 듣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子反은 두려워서 그와 맹약하고, 莊王에게 보고하여 30리를 물러났다. 그리하여 宋나라는 楚나라와 화평하게 되었다.”란 말이 보인다.
역주14 不假道之師 : 길을 빌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물었다는 말이다.
역주15 齊靈公楚靈王之所爲 : 자세한 내용은 미상이다.
역주16 二君 : 여기서는 秦 穆公과 楚 莊王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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