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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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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卽五伯之議論
문공文公子孫 世爲盟主 二百餘年 니라
其故何也
之賢 所無有이나 其所以保伯業而不失者 則有在也니라
伯者之盛 非能用兵以服諸侯之難이요 而能不用兵以服諸侯之爲難耳니라
문공文公之後 前有지앵知罃하고 後有조무趙武하여 皆能不用兵以服諸侯하니之所以不失伯也니라
도공悼公하여 三合諸侯之師하니 其勢足以擧而郤니라
之群臣 중항언中行偃난염欒黶之徒 欲一戰以服者 衆矣니라
此則지앵知罃不用兵之功也니라
도공悼公 평공平公하니 평공平公도공悼公比也니라
이나 能屬任조무趙武니라
조무嘗與굴건屈建으로 合諸侯之대부大夫하여 以求弭兵이니라
조무趙武於此 有仁人之心 二焉이니라
方其未盟也 굴건屈建將以襲조무어늘 조무숙향叔向謀之한대 숙향叔向曰 以信召人하고 而以濟之 人誰與之
安能害我리오하니 조무從其言하니라
卒事而不敢動이니라
將盟 爭先하니 숙향叔向又曰 諸侯歸之德爾 非歸其尸盟也니라
此二者 非仁人不能이니라
何也
人將衷甲以襲我 我亦衷甲以待之 此勢之所必至也니라
不幸不勝이면 無可言者 雖幸而勝이라도 之禍 必自是始니라
爲盟主하여 常先諸侯矣 未失諸侯언만求先之니라
若與之爭이면 必不聽이요 之禍 亦必自是始니라
이나 此二者 皆人情之所不能忍也니라
忍之近於弱하고 不忍近於彊이어늘조무能忍之하니 不爭하여 而諸侯賴之니라
吾以爲조무有仁人之心 二焉이라하니라
之所以不失諸侯하고 由此故也니라


01. 지앵知罃조무趙武에 대한
오패五伯에 대한 의론議論이다.
환공桓公은 망한 세 나라를 부흥시켜 제후諸侯들을 복속시켰으니, 그 의리가 문공文公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러나 환공桓公이 죽자 나라가 어지러워졌으니, 그 뒤로는 다시 제후諸侯맹주盟主가 될 수 없었다.
문공文公자손子孫이 대대로 맹주盟主가 된 2백여 년은 춘추시대春秋時代와 기간이 같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비록 양공襄公도공悼公 같은 현군賢君나라에는 없었던 바이지만, 그 백업伯業을 보전하여 잃지 않은 것은 그 이유가 따로 있었다.
패자伯者의 훌륭한 점은 군대를 이용해서 제후諸侯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고, 군대를 이용하지 않고 제후諸侯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문공文公의 뒤에 앞에는 지앵知罃이 있고 뒤에는 조무趙武가 있어 모두 군대를 이용하지 않고 제후諸侯들을 복종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가 백업伯業을 잃지 않는 이유였던 것이다.
도공悼公나라와 더불어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어 세 차례나 제후諸侯들의 군사를 회합하였으니, 그 형세는 족히 나라를 공격하고 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다.
나라의 뭇 신하와 중항언中行偃난염欒黶의 무리 중에 한 번 싸워서 나라를 복종시키려는 자가 많았다.
오직 지앵知罃만은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용병用兵의 어려움과 승부勝負를 기필할 수 없음을 알고는 세 차례나 나라와 만났으나 모두 머뭇거리고 주저하며 나라와 더불어 싸우지 않았는데, 결국은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나라를 복종시켰다.
이것은 바로 지앵知罃이 군사를 이용하지 않은 공이었다.
도공悼公이 죽자 〈그 아들〉 평공平公이 즉위하였으니, 평공平公도공悼公에 비교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대로 조무趙武를 임용하였다.
조무趙武가 일찍이 나라 굴건屈建과 더불어 제후諸侯들의 대부大夫나라에서 회합하여 전쟁을 정지할 일을 요구하였다.
조무趙武는 이때에 인인仁人의 마음을 가진 것이 두 가지였다.
아직 동맹하지 않았을 때에 굴건屈建이 옷 속에다 갑옷을 감추어 입고 장차 조무趙武를 습격하려 하거늘, 조무趙武숙향叔向과 모의하니, 숙향叔向이 말하기를 “신용으로써 사람을 불러놓고 거짓으로써 달성하려 하면 누가 함께하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우리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조무趙武가 그 말을 따랐다.
회맹會盟이 끝날 때까지 나라 군대는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동맹을 맺으려고 할 때에 나라와 나라가 주역主役을 다투거늘, 숙향叔向이 또 말하기를 “제후諸侯들은 나라의 귀의歸依하는 것이지, 동맹에 주역이 되었다고 귀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을 힘쓰고 주역을 다투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조무趙武는 또한 그 말을 받아들여 〈나라가 먼저〉 주역을 하게 하였다.
이 두 가지는 인인仁人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 때문인가?
상대방이 장차 옷 속에다 갑옷을 감추어 입고 나를 습격하려고 한다면, 나 또한 옷 속에다 갑옷을 감추어 입고 대기하기 마련이니, 이는 형세상 반드시 이를 수 있는 일이다.
불행히 이기지 못하면 말할 것이 없고, 다행히 이긴다 하더라도 나라와 나라의 는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라는 맹주盟主가 되어 항상 제후諸侯들에게 주역을 해왔고, 나라가 제후諸侯들을 잃지 않은 처지인데도 나라가 주역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만약 나라와 주역을 다툰다면 나라는 반드시 듣지 않을 것이고, 나라와 나라의 또한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인정상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참고 받아들이면 약자弱者에 가깝고, 못 참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강자强者에 가깝건만 조무趙武는 참고 받아들였으니, 나라와 나라가 다투지 않아 제후諸侯들이 그 힘을 입었다.
그러므로 나는 “조무趙武인인仁人의 마음을 가진 것이 두 가지였다.”라고 한 것이다.
무릇 나라가 제후諸侯들을 잃지 않게 된 것과 조씨趙氏가 결국 나라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춘추春秋》에서 나라의 회맹會盟을 적은 것은 실제로 나라를 먼저 적고 나라를 뒤에 적었으니, 공자孔子께서도 역시 인정하신 것이로다.


역주
역주1 知罃趙武論 : 知罃은 晉나라 副元帥 荀首의 아들이다. 荀首가 知邑에 봉해지자 邑名을 姓으로 삼았다. 趙武는 곧 趙文子이다. 趙孟이라고도 칭하는데 춘추시대 晉나라 大夫 趙朔의 아들이다.
晉 景公이 趙氏를 討滅하자 趙武는 어머니 莊姬(晉 成公의 딸)를 따라 公宮에서 길러졌는데, 新軍將‧上軍將을 역임하고 뒤에 晉나라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역주2 齊桓公……其義多於晉文 : 《春秋左氏傳》 僖公 19년에 “齊 桓公은 망한 세 나라를 부흥시켜 제후들을 복속시켰으나 의로운 사람들은 오히려 박덕하다고 했다.[齊桓公 存三亡國 以屬諸侯 義士猶曰 薄德]”란 말이 보이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左傳杜林合注》에서는 “망한 나라를 부흥시키고 끊어진 세대를 계승시키는 뜻으로 중국의 諸侯를 聯屬했다.[以存亡繼絶之義 聯屬中國之諸侯]”고 했다.
《左傳折諸》에서는 “桓公이 망한 세 나라를 부흥시키니, 天下가 仁으로 돌아갔다.[桓公存三亡國 天下歸仁]”고 했다.
《春秋左氏傳注疏》 〈考證〉에서는 “齊 桓公이 德으로 諸侯를 聯屬하니, 諸侯가 齊 桓公에게로 돌아갔다.[齊桓以德屬諸侯 諸侯聚歸齊桓]”고 했다.
《讀春秋略記》에서는 “齊 桓公은 망한 세 나라를 부흥시켜 제후들을 복속시켰으니, 桓公만이 中夏를 撫綏할 뜻이 있었다.[齊桓公存三國 以屬諸侯 獨有撫綏中夏之意]”고 했다.
《春秋四傳質》에서는 “《春秋左氏傳》에 ‘齊 桓公은 망한 세 나라를 부흥시켜 제후들을 복속시켰다.’고 하였으니, 생각하건대, 桓公이 과시하여 그것을 끌어 자기의 공으로 삼으니, 천하의 제후들이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공으로 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傳曰 桓公 存三亡國 以屬諸侯 意者 桓公重自矜詡 引爲己功 天下諸侯畏其威 莫敢不歸功焉]”라고 했다.
또한 ‘三亡國’에 대해서는 《春秋左氏傳注疏》에서는 “魯‧衛‧邢”, 《春秋公羊傳注疏》에서는 “衛‧邢‧杞”를 꼽았다.
역주3 桓公殁而齊亂 其後不能復伯 : 《春秋左氏傳》 僖公 18년과 《史記》 〈齊太公世家〉에 의하면 “齊 桓公에게는 內寵이 많았으므로 桓公이 죽은 뒤에 寵姬의 다섯 아들들이 王位를 다투어 각각 黨을 세워 서로 공격하였고, 게다가 易牙 등이 專權하였기 때문에 齊나라는 결국 大亂이 일어나 곧장 田氏에 이르러 齊나라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桓公의 자손은 다시 霸를 칭하지 못했다.”고 한다.
역주4 與春秋相終始 : 춘추시대는 周 平王의 東遷에서부터 韓‧魏‧趙 3家가 晉나라를 분할한 때까지 295년이었다.
역주5 襄公悼公 : 襄公은 晉 文公의 아들이고, 悼公은 晉 襄公의 후손인데, 두 사람은 文公의 功業을 닦고 恩德을 베풀었으므로 文公 이후 晉나라에 두 賢君이 있게 된 셈이다.
역주6 悼公與楚爭鄭……卒以敝楚而服鄭 : 《春秋左氏傳》 襄公 등에 의하면 “晉 悼公 때에 知罃이 여러 차례 諸侯들의 군대를 모아 鄭나라를 쳤다.
襄公 9년에도 知罃은 諸侯들의 군대를 이끌어 鄭나라를 쳤고, 다음 해에는 孟獻子의 계략에 따라 鄭나라와 盟約하고 떠났으며, 襄公 9년에는 재차 諸侯들의 군대를 모아 鄭나를 쳤다. 襄公 11년에는 재차 제후들의 군사를 가지고 鄭나라를 쳤다. 이때 知罃이 楚나라의 銳鋒을 피하려고 하자, 欒黶은 ‘楚나라를 피하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며, 제후들의 군사를 모아놓고 楚나라를 피하는 것은 더더욱 수치다.’라고 하면서 進軍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뒤에 楚나라와 맹약을 하였는데, 맹약을 한 뒤에도 欒黶이 鄭나라를 칠 준비를 하자, 知罃은 ‘鄭나라를 치면 楚나라가 鄭나라를 구원한다. 楚나라와 교전하면 승리할 수 없고 제후들의 비웃음만 산다.’고 하고는 곧 군사를 철수해 돌아왔다.”고 한다.
역주7 衷甲 : 옷 속에다 갑옷을 감추어 입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8 能屬任趙武……武亦從而先之 : 《春秋左氏傳》 襄公 27년에 의하면 “晉 平公 때 趙武가 屈建과 더불어 宋나라 西門 밖에서 동맹을 맺으려고 할 적에 楚나라 사람들이 옷 속에다 갑옷을 감추어 입고 있었으므로 趙武가 그것을 걱정해서 叔向에게 알리니, 叔向은 말하기를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匹夫도 한번 불신을 행하면 옳지 않아 각기 죽음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諸侯의 卿들을 모아놓고 불신을 행하면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거짓말한 자가 무사하겠습니까? 그러니 당신은 걱정할 것이 못 됩니다. 대개 신용으로써 사람을 불러놓고 거짓으로써 달성하려 하면 반드시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우리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전쟁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제후들을 불러놓고 군대를 들어 우리를 해친다면 어찌 도리어 우리에게 많은 공로가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會盟할 때에 晉나라와 楚나라가 主役을 다투었다. 이때 叔向이 趙武에게 말하기를 ‘諸侯들은 晉나라의 德에 歸依하는 것이지, 동맹에 주역이 되었다고 귀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德을 힘쓰고 주역을 다투지 마십시오. 또한 제후들이 동맹할 때 小國이라도 반드시 동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楚나라가 晉나라를 위해서 잡다한 일을 하는 것 역시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趙武는 叔向의 말을 받아들여 楚나라로 하여금 주역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역주9 : 여기서는 虛僞를 뜻한다.
역주10 趙氏之所以卒興於晉者 : 趙氏는 晉나라의 大族으로서 晉 文公을 좇아 일어나 趙衰‧趙盾‧趙武子‧趙文子가 선후하여 정권을 잡았고, 趙文子‧韓宣子‧魏獻子의 3家에 이르러 晉나라를 나누어 가졌다.
역주11 春秋書宋之盟 實先晉而後楚 : 《春秋》에서 이때의 會盟을 기록하기를 “〈襄公 27년〉 여름에 叔孫豹가 晉나라의 趙武, 楚나라의 屈建, 蔡나라의 公孫歸生, 衛나라의 石惡, 陳나라의 孔奐, 鄭나라의 良霄, 許나라 사람, 曹나라 사람과 宋나라에서 회합하였다.[夏 叔孫豹會晉趙武楚屈建蔡公孫歸生衛石惡陳孔奐鄭良霄許人曹人于宋]”라고 하여 晉나라를 楚나라 앞에 두었다.
역주12 孔子亦許之歟 : 《春秋》는 공자가 刪定한 것이라고 전하며, 《春秋》의 기록에는 褒貶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晉나라를 먼저 기록하고 楚나라를 뒤에 기록한 것은, 바로 晉나라에 信義와 仁愛가 있었음을 贊美한 것이라고 蘇轍은 본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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