雖
之賢
이 제齊所無有
나 然
이나 其所以保伯業而不失者
는 則有在也
니라
伯者之盛은 非能用兵以服諸侯之難이요 而能不用兵以服諸侯之爲難耳니라
문공文公之後에 前有지앵知罃하고 後有조무趙武하여 皆能不用兵以服諸侯하니 此진晉之所以不失伯也니라
도공悼公與초楚爭정鄭하여 三合諸侯之師하니 其勢足以擧정鄭而郤초楚니라
진晉之群臣과 중항언中行偃난염欒黶之徒 欲一戰以服초楚者 衆矣니라
도공悼公死에 평공平公立하니 평공平公非도공悼公比也니라
조무武嘗與초楚굴건屈建으로 合諸侯之대부大夫于송宋하여 以求弭兵이니라
方其未盟也
에 굴건屈建將以襲
조무武어늘 조무武與
숙향叔向謀之
한대 숙향叔向曰 以信召人
하고 而以
濟之
면 人誰與之
아
將盟에 진晉초楚爭先하니 숙향叔向又曰 諸侯歸진晉之德爾요 非歸其尸盟也니라
人將衷甲以襲我면 我亦衷甲以待之니 此勢之所必至也니라
不幸不勝이면 無可言者요 雖幸而勝이라도 진晉초楚之禍는 必自是始니라
진晉爲盟主하여 常先諸侯矣요 진晉未失諸侯언만 而초楚求先之니라
若與之爭이면 초楚必不聽이요 진晉초楚之禍도 亦必自是始니라
忍之近於弱하고 不忍近於彊이어늘 而조무武能忍之하니 진晉초楚不爭하여 而諸侯賴之니라
제齊 환공桓公은 망한 세 나라를 부흥시켜 제후諸侯들을 복속시켰으니, 그 의리가 진晉 문공文公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러나 환공桓公이 죽자 제齊나라가 어지러워졌으니, 그 뒤로는 다시 제후諸侯의 맹주盟主가 될 수 없었다.
문공文公의 자손子孫이 대대로 맹주盟主가 된 2백여 년은 춘추시대春秋時代와 기간이 같았다.
비록 양공襄公과 도공悼公 같은 현군賢君이 제齊나라에는 없었던 바이지만, 그 백업伯業을 보전하여 잃지 않은 것은 그 이유가 따로 있었다.
패자伯者의 훌륭한 점은 군대를 이용해서 제후諸侯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고, 군대를 이용하지 않고 제후諸侯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문공文公의 뒤에 앞에는 지앵知罃이 있고 뒤에는 조무趙武가 있어 모두 군대를 이용하지 않고 제후諸侯들을 복종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진晉나라가 백업伯業을 잃지 않는 이유였던 것이다.
도공悼公이 초楚나라와 더불어 정鄭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어 세 차례나 제후諸侯들의 군사를 회합하였으니, 그 형세는 족히 정鄭나라를 공격하고 초楚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다.
진晉나라의 뭇 신하와 중항언中行偃과 난염欒黶의 무리 중에 한 번 싸워서 초楚나라를 복종시키려는 자가 많았다.
오직 지앵知罃만은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용병用兵의 어려움과 승부勝負를 기필할 수 없음을 알고는 세 차례나 초楚나라와 만났으나 모두 머뭇거리고 주저하며 초楚나라와 더불어 싸우지 않았는데, 결국은 초楚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정鄭나라를 복종시켰다.
이것은 바로 지앵知罃이 군사를 이용하지 않은 공이었다.
도공悼公이 죽자 〈그 아들〉 평공平公이 즉위하였으니, 평공平公은 도공悼公에 비교할 인물이 아니었다.
조무趙武가 일찍이 초楚나라 굴건屈建과 더불어 제후諸侯들의 대부大夫를 송宋나라에서 회합하여 전쟁을 정지할 일을 요구하였다.
조무趙武는 이때에 인인仁人의 마음을 가진 것이 두 가지였다.
아직 동맹하지 않았을 때에 굴건屈建이 옷 속에다 갑옷을 감추어 입고 장차 조무趙武를 습격하려 하거늘, 조무趙武가 숙향叔向과 모의하니, 숙향叔向이 말하기를 “신용으로써 사람을 불러놓고 거짓으로써 달성하려 하면 누가 함께하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우리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조무趙武가 그 말을 따랐다.
회맹會盟이 끝날 때까지 초楚나라 군대는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동맹을 맺으려고 할 때에 진晉나라와 초楚나라가 주역主役을 다투거늘, 숙향叔向이 또 말하기를 “제후諸侯들은 진晉나라의 덕德에 귀의歸依하는 것이지, 동맹에 주역이 되었다고 귀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덕德을 힘쓰고 주역을 다투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조무趙武는 또한 그 말을 받아들여 〈초楚나라가 먼저〉 주역을 하게 하였다.
이 두 가지는 인인仁人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상대방이 장차 옷 속에다 갑옷을 감추어 입고 나를 습격하려고 한다면, 나 또한 옷 속에다 갑옷을 감추어 입고 대기하기 마련이니, 이는 형세상 반드시 이를 수 있는 일이다.
불행히 이기지 못하면 말할 것이 없고, 다행히 이긴다 하더라도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화禍는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진晉나라는 맹주盟主가 되어 항상 제후諸侯들에게 주역을 해왔고, 진晉나라가 제후諸侯들을 잃지 않은 처지인데도 초楚나라가 주역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만약 초楚나라와 주역을 다툰다면 초楚나라는 반드시 듣지 않을 것이고, 진晉나라와 초楚나라의 화禍 또한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인정상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참고 받아들이면 약자弱者에 가깝고, 못 참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강자强者에 가깝건만 조무趙武는 참고 받아들였으니, 진晉나라와 초楚나라가 다투지 않아 제후諸侯들이 그 힘을 입었다.
그러므로 나는 “조무趙武는 인인仁人의 마음을 가진 것이 두 가지였다.”라고 한 것이다.
무릇 진晉나라가 제후諸侯들을 잃지 않게 된 것과 조씨趙氏가 결국 진晉나라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춘추春秋》에서 송宋나라의 회맹會盟을 적은 것은 실제로 진晉나라를 먼저 적고 초楚나라를 뒤에 적었으니, 공자孔子께서도 역시 인정하신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