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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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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자유子由양호之滅 不如범문자范文子之釋하여 以爲外懼라하니라
愚竊謂범문자范文子處春秋列國之間하여 可爲深慮也라하니라
爲兩大之國이니 非此亡彼 則彼必圖此니라
方以妖童으로 淫虐其國이니 不以此時下之 是所謂圈虎而遺之患也니라
滅之後 양호已先무제武帝而死矣니라
君子欲以其身沒二十餘年之後 而議功爲罪 不亦過乎
予獨愛其言 足爲後世人主持盈者之戒
錄而識之하노라
善爲國者 必度其君 可與共患難하고 可與同安樂而後有爲
功成而無後憂니라
여공厲公공왕共王 人知有可乘之隙이니라
문자文子 非苟自安者也니라
하고대부大夫富而凌하니이면 則君臣不相安하여 亂之所自生也언만이니라
문자文子雖死 而免於大難하여 문자孫與國相終始니라
범려范蠡월왕越王구천句踐 反自회계산會稽하여 撫人民하고 厲甲兵하여 七年而殺오왕吳王부차夫差니라
可謂有先見之明矣니라
범문자范文子至於自殺하고 범려范蠡至於逃亡而不顧하니 何則
所全者大也니라
中原富彊하고 群臣이니라
손호孫皓以淫虐失衆하니 有亡國之釁이어늘 人習於장강長江之險하여 以爲未可取也니라
양호羊祜양양수襄陽守하여 知其不能久하고 陳可取之計하니 무제武帝納之니라
吾嘗論양호巧於 而拙於謀이라하니라
何以言之
무제武帝之爲人 好善而不擇人하고 苟安而無遠慮니라
雖賢人滿朝之流 以爲腹心이니라
使尙在하고 相持而不敢肆하여 雖爲賢君 可也니라
하며 疎賢臣하고 近小人하며무제하고이니라
所以兆亡國之禍者 不可勝數 此則滅之所從致也니라
맹자孟子曰 入則無法家拂士하고 出則無敵國外患者 國常亡이니라
양호不慮此하고 而銳於滅하니 其不若범문자范文子 遠矣니라
或曰 滅而 此天命이요 非人事也어늘양호羊祜何罪焉고하니 吾應之曰 爲國當論人事니라
使양호不爲滅之計하고 손호孫皓窮凶而死하여 更立君이면장강長江未可越也니라
旣不亡이면之君臣 厲精不懈리니不滅하고不亂也니라
不猶愈於滅而亂乎
양호之將死也 무제武帝欲使臥護諸將하니 양호曰 滅不須臣自行이나 但平之後 當勞聖慮耳리니이다
양호此言이면 蓋亦憂在平니라
憂在平어늘 而勇於滅하니 其不若범문자范文子 遠矣니라


04. 양호羊祜에 대한
자유子由는 “양호羊祜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범문자范文子가 ‘나라를 이대로 놓아두어 나라가 경계해야 할 외환外患으로 삼자.’고 한 것만 못했다.”라고 하였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건대, 범문자范文子춘추春秋 열국列國의 사이에 처하여 깊이 염려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라와 나라는 둘 다 큰 나라이기 때문에 이 나라가 저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저 나라가 반드시 이 나라를 도모할 것이다.
나라의 군주君主 요동妖童으로서 그 나라를 음학淫虐하게 다스렸으니, 나라가 이때에 그를 항복시키지 않으면 이는 이른바 “범을 길러 을 끼친다.”란 것이다.
나라가 멸망한 뒤에 가서 양호羊祜는 이미 무제武帝 앞에 죽었다.
그런데 군자君子양호羊祜가 죽은 20여 년 뒤에 공로를 의논하여 죄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또한 너무 과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홀로 그 말이 족히 후세後世 인주人主 중에 극도로 부귀를 누리는 자의 경계가 될 만함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기록해두노라.
나라를 잘 다스리는 이는 반드시 그 임금이 더불어 환난患難을 함께할 수 있는지와 더불어 안락安樂을 함께할 수 있는지를 헤아린 뒤에 작위作爲함이 있다.
그러므로 공이 이루어진 이후에 후환이 없는 것이다.
여공厲公 공왕共王과 더불어 나라를 〈자기들 편으로 만들기 위하여〉 교전할 때에 나라 사람은 나라에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에 난무자欒武子국정國政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는 군사를 내어 〈나라를〉 치고 싶어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세대에 제후들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범문자范文子는 〈나라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 “나라를 이대로 놓아두어 나라가 경계해야 할 외환外患으로 삼읍시다.”라고 청하였으나 무자武子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대저 문자文子는 구차하게 편안함을 누리려고 하는 자가 아니었다.
여공厲公은 사치하여 총신寵臣을 많이 두고, 여러 대부大夫들은 부유富裕하여 상국上國을 능멸하니, 〈전쟁에서 승리하는〉 큰 공을 세운다면 임금과 신하가 서로 편치 못하여 이 이로부터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었는데도, 〈무자武子는 ‘나라를 피해 돌아가라.’는〉 모략謀略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싸우려고〉 나아가 나라를 만났을 때에 〈문자文子는〉 오히려 나라를 피해 돌아가려고 하였고, 이미 승전하고 국내로 돌아와서는 말하기를 “이 장차 일어날 것이니 나는 기다릴 수가 없다.”라고 하고는, 그 축종祝宗으로 하여금 자기가 죽도록 빌게 하였다.
1년 후에 여공厲公삼극三郤을 죽이고 서동胥童을 세웠으며, 난서欒書서동胥童을 죽이고 여공厲公을 시해하였다.
문자文子는 비록 죽어서 대난大難을 면하였지만 자손子孫나라와 서로 운명을 같이하였다.
범려范蠡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섬길 때에 회계산會稽山으로부터 돌아와서 백성을 어루만지고 군대를 훈련시켜 7년 만에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죽였다.
범려范蠡는 승전하고〉 돌아오는 데 미쳐 국내에 이르지 못했을 때에 월왕越王안락安樂을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임을 알고서 편주扁舟를 타고 떠남으로써 결국 문종文種처럼 죽는 것을 면하였다.
두 사람 같은 경우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범문자范文子자살自殺을 하였고, 범려范蠡도망逃亡하되 뒤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왜 그랬을까?
몸을 온전하게 하려는 집념이 강했던 것이다.
무제武帝가 이미 나라의 선양禪讓을 받음에 중원中原부강富强하고 군신群臣은 〈제왕帝王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나라 손호孫皓는 음란하고 포학하여 민중을 잃었으니, 나라를 멸망시킬 징조가 있었건만, 나라 사람들은 장강長江의 험난함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나라는〉 취할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양호羊祜양양수襄陽守로 있으면서 자기가 오래 살 수 없음을 알고 나라를 취할 수 있는 계책을 진언하니, 무제武帝는 그 계책을 받아들였다.
양호羊祜는 또 왕준王濬두예杜預를 천거해서 나라를 멸한 공을 이루었으니, 후세後世에서 모두 그의 어짊을 칭찬했다.
나는 일찍이 논하기를 “양호羊祜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세운 모책은 교묘하였지만, 나라를 보위하기 위해 째낸 모책은 졸렬했다.”고 하였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무제武帝의 사람 됨됨은 한 일 하기를 즐기나 사람을 골라서 쓰지 않았고, 구차하게 목전의 안일만을 탐하고 앞으로 올 일을 헤아리는 사려는 없었다.
비록 어진 사람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나 가충賈充순욱荀勗 같은 무리가 복심腹心이 되었다.
가사 나라를 그대로 존재시키고 서로 견지하면서 감히 방사하지 아니하여 비록 현군賢君이 되었더라도 좋았다.
그런데 무제武帝나라가 망한 뒤에 여색女色황음荒淫하고 용자庸子에 눈이 가려졌으며, 현신賢臣을 소원하게 대하고 소인小人을 친근히 대하며, 무비武備를 제거하고 번국藩國을 존숭하였다.
그래서 나라를 망하게 할 의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니, 이는 바로 나라를 멸망시킨 데서 빚어진 일이었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들어와서는 법도 있는 집안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나가서는 적국敵國외환外患이 없는 경우는 나라가 항상 멸망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우환憂患에서 살고 안락安樂에서 죽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양호羊祜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에 박절하였으니, 범문자范文子만 못한 차이가 난 것이 너무도 심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나라가 멸망하고 나라가 어지러운 것은 바로 하늘이 명한 것이고 사람이 한 일이 아니거늘, 양호羊祜가 무슨 죄인고?”라고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마땅히 사람이 한 일을 논해야 한다.
가사 양호羊祜나라를 멸망시킬 계책을 세우지 않고, 손호孫皓가 극단적으로 흉악한 짓을 하다가 죽어서 나라가 다시 임금을 세웠다면 장강長江을 넘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라가 이미 망하지 않았다면 나라의 군신君臣이 정신을 가다듬어 태만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는 바로 나라는 멸망하지 않고 나라는 어지럽지 않은 것이다.
나라가 멸망하고 나라가 어지러운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양호羊祜가 죽을 때에 무제武帝양호羊祜로 하여금 누워서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게 하니, 양호羊祜가 말하기를 “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은 이 아니더라도 저절로 행해지지만, 다만 나라가 평정된 뒤에는 마땅히 성상聖上께서 근신謹愼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양호羊祜의 이와 같은 말로 미루어본다면, 아마 그의 걱정 또한 나라를 평정하는 데에 있었던 모양이다.
걱정이 나라를 평정하는 데에 있었는데도 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에 용감하였으니, 범문자范文子만 못한 차이가 난 것이 너무도 심하였다.


역주
역주1 羊祜論 : 羊祜(221~278)는 西晉의 大臣으로, 魏나라 말기에 相國從事中郞을 맡았다. 晉 武帝가 魏나라를 대신한 뒤에 羊祜와 더불어 吳나라를 멸할 계획을 하였다. 武帝 泰始 5년(269)에 尙書左僕射로 荊州軍事를 都督하고, 襄陽에 出鎭하였는데, 10년 동안 鎭에 있으면서 屯田을 개간하고 軍糧을 비축해서 일거에 吳나라를 멸할 준비를 하였다. 여러 번 출병을 청하였으나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임종시에 杜預를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다.
《欒城集》에는 이 글의 標題를 〈羊祜〉라고 하였다.
역주2 爭鄭 : 鄭나라가 자기에게 歸附하게 하려고 상대방과 교전하는 일을 가리킨다.
역주3 晉厲公與楚共王爭鄭……武子不能用 : 《春秋左氏傳》 成公 16년에 의하면 “晉 厲公 때에 鄭나라가 晉나라를 배반하고 楚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厲公이 鄭나라를 치려고 준비하니, 范文子(士燮)는 ‘만약 우리가 멋대로 하여 諸侯들이 모두 배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나라로서는 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鄭나라만이 배반한다면 晉나라의 憂患은 바로 닥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欒武子는 ‘우리 세대에 제후들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鄭나라를 쳐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에 군사를 일으키니, 楚 共王이 鄭나라를 구원하였다.
晉나라와 楚나라는 鄭나라의 鄢陵에서 만났다. 范文子가 싸우려고 하지 않자, 郤至는 ‘韓의 싸움에서 僖公 15년 惠公은 참패하여 개선하지 못하였고, 箕의 싸움에서 僖公 33년 先軫은 戰死하여 復命하지도 못하였고, 邲의 싸움에서 宣公 11년 荀伯(荀林父)은 한 번에 패하여 두 번 다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晉나라의 수치이다. 그대도 역시 先君의 事蹟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楚나라를 피한다면 또 수치를 더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文子는 ‘우리 先君이 자주 싸운 데에는 이유가 있다. 秦‧狄‧齊‧楚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强國으로 힘을 다하여 싸우지 않았다면 자손들은 쇠약해졌을 것이다. 이제 齊‧秦‧狄의 세 강국은 복종하였고, 敵은 오직 楚나라뿐이다. 오직 성인만이 나라의 안과 밖에서 우환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이 아니면 밖이 편안하더라도 반드시 안으로 걱정이 있는 법이다. 무엇 때문에 楚나라를 이대로 놓아두어 晉나라가 경계해야 할 外患으로 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欒武子는 范文子의 말을 따르지 않고 楚나라와 싸워서 활로 楚 共王의 눈을 쏘아 맞히니, 楚나라 군사가 鄢陵에서 패하였다.”고 한다.
晉 厲公은 晉 景公의 아들로 이름은 壽曼인데, 처음 즉위할 때에는 霸志가 있었으나 뒤에 無道하여 欒書‧荀偃 등 大臣에게 시해되었다. 楚 共王은 楚 莊王의 아들이다.
역주4 厲公侈而多嬖寵 : 《春秋左氏傳》 成公 17년에 “晉 厲公은 사치하여 寵臣을 많이 두었다.[晉厲公侈多外嬖]”란 말이 보이는데, 厲公이 총애한 대신 중에는 胥童‧夷陽五‧長魚矯 등이 있었는데, 모두 寵姬의 형제였다.
역주5 上國 : 춘추시대에는 諸侯國을 上國이라 일컬었다.
역주6 大功 : 여기서는 전쟁에서 大勝을 얻은 것을 가리킨다.
역주7 謀之不從 : 欒武子가 ‘楚나라를 피해 돌아가라.’는 謀略을 따르지 않은 것을 이른다.
역주8 旣勝反國曰……使其祝宗祈死 : 《春秋左氏傳》 成公 17년에 “晉나라의 范文子는 鄢陵의 싸움에서 돌아오자, 〈祭祀나 祈禱를 맡은〉 祝官에게 자기가 일찍 죽도록 빌게 하고, ‘우리 임금은 교만하고 사치하면서 적국인 楚나라를 이겼다. 이것은 하늘이 임금의 교만하고 사치한 병을 깊게 하는 것이다. 장차 화가 일어날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라면 오직 나의 죽음을 빌어서 나를 빨리 죽게 하여 화를 당하지 않게 하라. 그것이 范氏의 복이다.’라고 하였다. 6월 戊申日에 士燮(范文子)은 죽었다.”라는 말이 보인다.
역주9 逾年而厲公殺三郤……弑厲公 : 《春秋左氏傳》 成公 17년‧18년에 의하면 “晉 厲公이 鄢陵의 싸움에서 돌아온 뒤에 공을 세운 신하를 숙청하고 寵臣인 胥童‧夷陽五‧長魚矯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厲公은 胥童‧夷陽五로 하여금 甲兵 8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세 郤氏(郤錡‧郤犨‧郤至)를 죽이게 하였다. 夷陽五가 欒書와 中行偃을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厲公은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厲公이 胥童을 卿으로 삼으니, 欒書와 中行偃이 胥童을 죽였다. 成公 18년에 欒書와 中行偃은 程滑을 보내서 厲公을 시해하고 悼公을 擁立하였다.”고 한다.
역주10 范蠡事越王句踐……卒免文種之戮 : 《史記》 〈越王句踐世家〉, 〈貨殖列傳〉에 의하면 “越王 句踐이 范蠡의 계략을 따르지 않고 吳나라와 싸우다가 會稽山에서 패하였는데, 吳王 夫差는 사로잡은 越王을 놓아주었다. 越王은 국내로 돌아와 군대에 관한 일은 文種에게 위임하고 국가를 鎭撫하는 일과 백성을 어루만지는 일은 范蠡에게 맡겨서, 20여 년 만에 吳나라를 멸하여 會稽山에서 당한 수치를 갚았고, 따라서 句踐은 기세를 몰아 중국을 호령하는 霸者가 되고, 范蠡도 上將軍이 되었다.
그런데 范蠡는 大名 아래에 오래 있기 어렵고 또한 句踐은 위인이 患難은 함께할 수 있어도 安樂은 함께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배를 타고 바다로 떠갔다. 范蠡가 文種에게 편지를 전하기를 ‘越王은 목이 길고 새의 부리를 가졌으므로 患難은 함께할 수 있어도 安樂은 함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文種이 병을 핑계하고 조회하러 가지 않으니, ‘文種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참소한 사람이 있자, 越王은 文種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고 한다.
蘇轍은 “7년 만에 吳王 夫差를 죽였다.”고 하고, 《史記》에는 “20여 년 만에 吳나라를 멸하였다.”고 하였다.
역주11 二子 : 范文子와 范蠡를 가리킨다.
역주12 晉武帝旣受魏禪 : 晉 武帝는 司馬炎(236~290)이니, 司馬炎은 곧 魏 元帝의 禪讓을 받아 帝라 칭하였다.
역주13 用命 : 效命과 같은 뜻이니, 곧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帝王만을 위하여 힘을 다하는 것이다.
역주14 晉人習於長江之險……以成滅吳之功 : 《晉書》 〈羊祜列傳〉에 의하면 “晉 武帝는 吳나라를 멸망시킬 뜻을 가지고 羊祜에게 모든 군대를 통솔할 책임을 부여하고 散騎常侍와 衛將軍은 그대로 맡게 하였다. 羊祜는 吳나라를 치려면 반드시 上流의 地勢를 확보해야 된다고 생각하였고, 아울러 益州刺史 王濬을 천거하여 益州의 모든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으며, 비밀히 舟楫을 수리하게 하여 물을 따라 내려가서 吳나라를 칠 계책을 세웠다. 싸움을 준비하던 羊祜는 병이 위중해지자, 武帝에게 직접 吳나라를 칠 계책을 설명하였고, 아울러 王濬과 杜預를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다.”고 한다.
역주15 策吳 : 吳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謀劃을 가리킨다.
역주16 賈充荀勗 : 賈充은 晉 武帝 때에 侍中‧司空‧尙書令을 맡았고, 그의 딸이 太子妃와 齊王妃가 되었기 때문에 총애와 신임이 비할 데 없었다. 荀勗은 漢代 荀爽의 손자로서 晉나라 초기에 侍中‧濟北郡公‧光祿大夫 등이 되어 기밀의 일을 전담하였다.
역주17 吳亡之後……去武備 : 《晉書》 〈武帝紀〉에 의하면 “晉 武帝는 吳나라를 평정한 뒤에 政事에 태만하고 遊宴을 즐겼으며, 后妃의 戚黨을 총애하여 楊駿‧賈充‧荀勗 같은 사람을 친근히 하므로 舊臣은 專任할 수 없었다. 武帝는 만년에 惠帝가 帝位를 감당할 수 없음을 이미 알았으나 다만 惠帝의 아들 愍懷太子가 총명하기 때문에 그를 廢立할 마음이 없었다. 또한 愍懷太子가 賈后(賈充의 딸)의 소생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王佑의 계략에 따라 宗室을 널리 봉하여 要地에 있게 하였고, 또 州郡의 수비를 모두 제거했다.”고 한다.
역주18 庸子 : 재주와 지혜가 평범한 아이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晉 惠帝를 가리킨다.
역주19 藩國 : 여기서는 分封한 宗室 侯王을 가리킨다.
역주20 入則無法家拂士……而死於安樂 : 《孟子》 〈告子 下〉에 보이는데, ‘故人常生於憂患 而死於安樂’은 ‘然後 知生於憂患 而死於安樂(그런 뒤에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이라고 되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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