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高帝之入
진秦에 이나 兵不血刃
하고 而
하니 此天也
요 非人也
니라
진秦之亡也
에 竝起
하여 하니 진秦遣
장한章邯 出兵擊之
하니라
진秦雖
나 而其兵方彊
하고 諸侯雖銳
나 而皆烏合之衆
이니 其不敵
진秦明矣
니라
然
이나 諸侯皆起於
군도群盜하여 不習
하고 하여 하니 不知
진秦之未可攻也
니라
於是
에 장한章邯一出
하여 而殺
주장周章하고 破
진섭陳涉하고 하니라
後乃與항량項梁遇하여 苦戰再三하고 然後破之하니라
항우羽願與패공沛公西入관중關하니 회왕懷王諸老將皆曰 항우項羽爲人이 慓悍猾賊이라 嘗攻양성襄城에 양성襄城無噍類요 所過無不殘滅이니이다
진秦父兄苦其主久矣니 誠得長者往하여 無侵暴면 宜可下니이다하니 卒不許항우項羽而遣패공沛公하니라
패공沛公方入관중關에 而항우項羽已至하북河北하여 與장한章邯相持니라
然이나 非장한邯항우羽相持於하북河北이면 패공沛公亦不能成功이니라
或問장한章邯假令不過하북河北이면 고제高帝能入진秦乎아하면 자유子由以장한邯提兵擊盜니 則當時老將健卒已虛라 관중關中似亦有見이라하리라
然이나 覽觀진기秦紀本末이면 몽의蒙氏兄弟誅而將陷矣요 아방궁阿房之아방궁宮과 驪山之葬에 而百姓怨矣요 諸公자영子及이사李斯坐法死에 而骨肉大臣不附矣요 至於조고趙高之夷와 자영子嬰之立하여는 上下岌岌矣니라
이 또한 자유子由가 홀로 그 은미한 뜻을 꿰뚫어본 곳이다.
고제高帝가 진秦나라 땅에 들어감에 무관武關에서 한 번 싸웠지만, 군사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함양咸陽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늘이 한 것이고, 사람이 한 것이 아니었다.
진秦나라가 망해가자 제후諸侯들이 아울러 일어나서 앞을 다투어 관중關中에 들어가니, 진秦나라가 장한章邯을 파견, 군사를 내어 공격하였다.
진秦나라는 비록 무도無道하였지만 군사는 바야흐로 강성하였고, 제후諸侯는 비록 기세는 날랬지만 모두 오합지졸烏合之卒이므로 진秦나라를 대적할 수 없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제후諸侯들은 모두 군도群盜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병세兵勢를 익히지 않았고 군현郡縣를 억압하고 짓밟아 쾌승快勝하는 일에 길들여져 있었으므로 진秦나라는 공격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장한章邯이 한 번 출격하여 주장周章(陳涉의 부장部將)을 죽이고 진섭陳涉을 깨뜨리고 위구魏咎를 항복시키고 전담田儋을 죽였다.
병봉兵鋒이 이르는 곳에 마치 여우와 토끼를 사냥하듯 하여 모두 힘들이지 않고 평정하였다.
뒤에 장한章邯이 항량項梁과 만나 두세 차례 고전苦戰 끝에 깨뜨렸다.
항량項梁이 비록 죽었지만 진秦나라의 예봉도 약간 꺾었다.
그러나 장한章邯은 ‘초지楚地의 제장諸將은 다시 염려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이에 황하黃河를 건너가 북쪽으로 조趙나라를 공격하였다.
장한章邯이 이미 북쪽으로 감에 진秦나라는 안이 텅 비었다.
이에 이르러 진秦나라를 비로소 칠 수 있었거늘, 고제高帝가 바로 그 틈을 탔다.
이는 바로 병법兵法에 이른바 “실實을 피하여 허虛를 친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천명天命으로 된 것이지, 사람의 꾀로 된 것은 아니리라.
항량項梁이 죽음에 초楚 회왕懷王이 송의宋義와 항우項羽를 보내 조趙나라를 구하였다.
항우項羽가 패공沛公과 함께 서쪽으로 관중關中에 들어가기를 원하니, 회왕懷王의 여러 노장老將들이 모두 말하기를 “항우項羽는 사람 됨됨이가 표한慓悍한 활적猾賊이라 일찍이 양성襄城을 침에 양성襄城에 남아난 사람이 없었고, 그가 지나는 곳에는 잔살殘殺되고 파멸破滅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또 초楚나라의 군사는 자주 나아가 공취攻取한 것이 많이 있었고, 전에 진왕陳王(陳涉)과 항량項梁은 다 패하였습니다.
그러니 다시 장자長者를 보내 인의仁義를 베풀 생각을 가지고 서쪽으로 가서 진秦나라의 부형父兄들에게 고유告喩하는 것만 못합니다.
진秦나라의 부형父兄들은 그 주군主君에게 괴로움을 당한 지 오래니, 진실로 장자長者를 얻어 그가 가서 침포侵暴하는 일이 없으면 응당 항복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회왕懷王은 결국 항우項羽의 소청을 허락하지 않고 패공沛公을 보냈던 것이다.
패공沛公이 바야흐로 관중關中에 들어감에 항우項羽는 이미 하북河北에 이르러 장한章邯과 함께 서로 견지하고 있었다.
장한章邯은 비록 군사를 돌려 진秦나라를 구하려고 하였지만 형세상 할 수가 없었다.
회왕懷王이 패공沛公을 보낸 것은 본래 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한章邯과 항우項羽가 하북河北에서 서로 견하지 않았다면 패공沛公 또한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천명天命으로 된 것이지, 사람의 꾀로 된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어떤 이가 “장한章邯이 가령 하북河北에 가지 않았더라면 고제高帝가 진秦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자유子由는 “장한章邯이 군사를 이끌고 도적을 치러 갔으니, 당시 노장老將과 건졸健卒이 이미 비어 있었는지라 관중關中을 또한 엿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으리라.
그러나 〈진기秦紀〉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몽씨蒙氏 형제兄弟(蒙恬과 몽의蒙毅)가 〈조고趙高의 무함을 받아〉 죽임을 당함에 진秦나라가 장차 무너지게 되어 있었고, 호화스런 아방궁阿房宮과 사치스런 여산장驪山葬에 대해 백성들이 이미 원망을 품게 되었고, 여러 공자公子와 이사李斯가 법에 걸려 죽음에 골육대신骨肉大臣들이 붙따르지 않았고, 조고趙高의 삼족三族이 멸하고 자영子嬰이 왕위에 섬에 이르러서는 상하上下가 위급하였다.
고제高帝가 진秦나라 땅에 들어간 것은 비유하자면 돌을 계란에 던지는 것과 같았는데, 또 무엇을 의심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