兵至함곡관函谷하니 진秦人震恐하여 割地以與한韓위魏하고 僅乃得免이니라
惜其聽
하여 臨
함곡관函谷而無攻
하고 以求
초楚東國
하니 而出師之名
이 索然以盡
이니라
由此觀之면 진秦惟不遇환공桓문공文이라 是以로 橫行而莫之制耳니라
네 임금을 평한 부분은 또한 태사공太史公(四馬遷)과 더불어 문장이 일정한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제후국들이 교사狡詐의 수단을 써서 상호 침벌侵伐하였으니 그 2백여 년 동안에는 한 번도 명분이 있는 출병出兵이 없었다.
진秦 소왕昭王이 초楚 회왕懷王을 속여 유인해 와서 가두어놓고 땅을 떼어주기를 요구하였으나 제후諸侯들은 쳐다만 보고 감히 진秦나라에 대해 문책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전문田文(孟嘗君)만이 진秦나라에서 정승을 면하고 거의 벗어나지 못할 뻔하다가 제齊나라로 돌아와서 진秦 소왕昭王을 원망하였다.
이에 〈맹상군孟嘗君은〉 초楚나라를 친다는 것을 빌어 명분으로 삼고 한韓나라‧위魏나라와 더불어 진秦나라를 쳤다.
연합군이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니, 진秦나라 사람들은 벌벌 떨며 땅을 떼어서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에 주고 근근이 망국의 화환禍患을 면할 수 있었다.
산동山東 육국六國이 진秦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펼친 뒤로부터 이처럼 장렬壯烈한 적은 없었다.
무릇 군사란 정당하면 사기 왕성하고 부당하면 피로한 것이니, 명분이 있는 군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가사 전문田文이 그 위력을 잘 발휘하였더라면 이 전투에서 제齊나라는 패주霸主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는 소대蘇代의 계략計略을 들어 함곡관函谷關에 다다라 공격하지 않고 초楚나라 동국東國의 땅을 요구하였으니, 군사를 출동한 명분이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동국東國은 이미 얻지 못하고 회왕懷王은 마침내 진秦나라에서 죽었다.
이것으로 본다면 진秦나라는 다만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횡행橫行하여 〈천하에 패주霸主 노릇을 하여도〉 그것을 막을 자가 없었을 뿐이다.
대의大義를 가지고 불의不義에 굴하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