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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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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무제武帝에 대한
典刑之言
전형적인 말이다.
天下利害不難知也니라
천하天下이해관계利害關係는 알기 어렵지 않다.
士大夫하여 高不하고 下不爲利所怵者 類能知之니라
사대부士大夫심기心氣평정平定하여 위로는 명의名義현혹眩惑되지 않고 아래로는 이익에 유혹되지 않을 경우 대체로 알 수 있는 것이다.
人主生於深宮하니 其聞天下事至鮮矣니라
임금은 깊고 그윽한 궁중에서 출생하니, 천하의 일에 대해 들은 것이 지극히 드물다.
知其一하고 不達其二하며 見其利하고 不覩其害하니 而好名貪利之臣 이면 則利害之實亂矣니라
그래서 그 하나만을 알고 그 둘은 통달하지 못하며, 그 이로운 것만을 보고 그 해로운 것은 보지 못하니, 명예를 좋아하고 이익을 탐하는 신하가 임금이 애호愛好하는 정상을 탐구하여 아직 싹트지 않은 악념惡念을 맞아 유도해서 을 하도록 만든다면 이해利害의 실상이 어지러울 것이다.
漢武帝卽位三年 年未二十이니라
무제武帝는 즉위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나이 아직 20세가 못 되었다.
閩越擧兵圍東甌하니 東甌告急하니라
민월閩越이 군사를 일으켜 동구東甌를 포위하니 동구東甌가 다급함을 고하였다.
帝問太尉田蚡하니 蚡曰 越人相攻 其常事耳 又數反覆하니 不足煩中國往救니이다하니라
무제武帝태위太尉 전분田蚡에게 처리방법을 물으니, 전분田蚡이 아뢰기를 ‘‘월인越人이 서로 공격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일 뿐이고 또 자주 반복하니, 족히 중국이 번거롭게 가서 구제할 것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帝使嚴助難蚡曰 特患力不能救 德不能覆어니와 誠能이면 何故棄之
그러자 무제武帝엄조嚴助를 시켜서 전분田蚡을 힐난하기를 “다만 구제할 수 있는 힘이 없고 입힐 수 있는 덕이 없는 것이 걱정일 뿐이지, 참으로 능력이 있다면 왜 버리겠는가?
小國以窮困來告急이어늘 天子不救 尙何所愬리오하니라
소국小國궁곤窮困하므로 와서 다급함을 고하는데, 천자天子가 구제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호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무제武帝전분田蚡의 의론을 따르지 않고 엄조嚴助로 하여금 절월節鉞을 가지고 회계會稽의 군사를 징발해서 구제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남월南越정토征討하고 조선朝鮮을 정벌하고 서남이西南夷를 치니 병혁兵革사이四夷에 가해졌다.
王恢 請擊之하고 御史大夫韓安國 請許其和하니 帝從安國議矣니라
2년 후에 흉노匈奴화친和親을 청하자, 대행大行 왕회王恢는 치기를 청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화친和親을 허락하도록 청하니, 무제武帝한안국韓安國의 의론을 따랐다.
明年 馬邑聶壹 因恢言 匈奴初和親이라 親信邊이니 可誘以利致之하고 伏兵襲擊 必破之道也니이다하니
이듬해에 마읍호馬邑豪 섭일聶壹왕회王恢를 통하여 말하기를 “흉노匈奴가 처음에 화친和親을 했으므로 친신親信한 편이니, 이익으로 유인해 오게 하고 군사를 매복했다가 습격襲擊하면 반드시 깨뜨릴 수 있는 방도입니다.”라고 하자,
帝使公卿議之한대 安國恢 往反議甚苦하니라
무제武帝공경公卿들로 하여금 대책을 의논하게 하니, 한안국韓安國왕회王恢는 매우 고생스럽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帝從恢議하고 使聶壹賣馬邑城以誘單于언만 單于覺之而去하니 兵出無功이니라
무제武帝왕회王恢의 의논을 따르고 섭일聶壹을 시켜서 마읍성馬邑城을 팔아 선우單于를 유인했건만, 선우單于가 알아차리고 가버렸으므로 군사가 나가서 공을 세운 것이 없었다.
이로부터 흉노匈奴변경邊境을 침범하여 무제武帝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편안한 해가 없었으니, 천하天下가 거의 대란大亂에 이르렀다.
田蚡韓安國 皆知其非하여 不能自伸이니라
이 두 가지는 전분田蚡한안국韓安國이 모두 그 잘못을 알았지만, 말 잘하는 사람에게 곤궁을 당하여 자기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武帝志求功名하여 不究利害之實하고 而遽從之니라
무제武帝는 오직 공명功名을 구하는 데만 뜻을 두어 이해利害의 실상을 구명하지 않은 채 얼른 따랐다.
及其晩歲 禍災竝起하여 外則耗散하고 하니 雖悔過自咎 而事已不救矣니라
만년에 가서는 천화天禍인재人災가 아울러 일어나 밖으로는 검수黔首모산耗散하고 안으로는 골육骨肉이 서로 죽였으니, 비록 허물을 뉘우치고 자책을 하였지만 일이 이미 구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엄조嚴助회남淮南통교通交했기 때문에 장탕張湯이 그를 논죄하여 죽였고, 왕회王恢흉노匈奴를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시 기시棄市되었다.
二人皆罪不至死언만 而不免大戮 豈非首禍致罪하여 天之所不赦故耶
두 사람은 다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건만 대륙大戮을 면치 못한 것은 맨 처음 화란禍亂을 발의함으로써 죄를 지은 것이어서 하늘이 용서하지 못할 바가 어찌 아니었겠는가?
역주
역주1 漢武帝論 : 漢 武帝는 劉徹로 景帝의 아들인데, 文帝와 景帝의 유업을 이어받아 대내적으로는 정치‧경제 개혁을 실행하고, 儒術을 높이고 百家를 배척하고 太學를 세워 五經博士를 두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군사를 이용하여 강토를 개척하는 등 재위 54년 동안에 前漢의 군사‧정치‧경제‧문화의 전성시대를 이룩하였다. 다만 神仙을 믿고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征斂을 무겁게 부과하고 형벌을 엄하게 집행하고 해마다 用兵함으로써 海內가 虛耗하고 인구가 반이나 줄게 하였다.
《欒城集》에는 本文의 標題가 〈漢武帝〉로 되어 있다.
역주2 心平而氣定 : 心氣가 平定하여 主觀을 가지지 않고 持論이 공정함을 가리킨다.
역주3 爲名所眩 : 표면의 名義에 현혹됨을 가리킨다.
역주4 探其情而逢其惡 : 帝王이 愛好하는 정상을 탐구하여 아직 싹트지 않은 惡念을 迎合하여 인도해서 惡을 하게 함을 가리킨다. ‘逢其惡’은 완곡하게 맞아서 살살 유도하여 惡을 하게 한다는 말이다.
역주5 漢武帝卽位三年……而使助持節發會稽兵救之 : 《漢書》 〈嚴助傳〉에 의하면 “建元 3년(B.C. 138)에 閩越이 군사를 일으켜 東甌를 포위하니, 東甌가 漢에 다급함을 고해왔다.
이때 武帝는 나이 아직 20세가 못 되었는데, 太尉 田蚡에게 처리방법을 물었더니, 田蚡은 ‘越人이 서로 공격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일 뿐이고 또 자주 반복하니, 족히 중국이 번거롭게 가서 구제할 것이 못 됩니다. 秦나라 때부터 버리고 붙이지 않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嚴助가 田蚡을 힐난하기를 ‘다만 구제할 수 있는 힘이 없고 입힐 수 있는 덕이 없는 것이 걱정일 뿐이지, 참으로 능력이 있다면 왜 버리겠는가? 또 秦나라는 咸陽 전체를 버렸지, 어찌 越만을 버렸겠는가? 지금 小國이 窮困하므로 와서 급함을 고하는데, 天子가 구제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호소하겠는가? 또 어떻게 萬國을 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武帝가 말하기를 ‘太尉는 족히 더불어 계책을 할 수 없다. 내가 갓 즉위하였으니, 虎符를 내어 郡國에서 군사를 징발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고는 이에 嚴助를 보내 節鉞을 가지고 會稽에서 군사를 징발하니, 會稽守가 거절하고 징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嚴助가 한 司馬를 참수하여 의지를 보이고는 결국 군사를 징발하여 배로 가서 東甌를 구제하였는데, 미처 당도하기 전에 閩越이 군사를 이끌고 가버렸다.”라고 한다.
역주6 自是……加於四夷矣 : 《漢書》 〈西南夷兩越朝鮮傳〉에 의하면 “武帝가 먼저 韓千秋를 시켜서 南越을 치게 하였지만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러자 元鼎 5년에 다시 路博德을 伏波將軍으로 삼아 군사 10만 명을 이끌고 가서 치게 하여 南越을 평정하였다. 元封 2년에 樓船將軍 楊僕 등에게 군사 5만 명을 주어 보내 朝鮮을 쳐서 眞番‧臨屯‧樂浪‧玄菟의 4郡을 평정하였고, 뒤에 또 郭昌‧衛廣 등이 西南夷를 평정하여 益州郡으로 삼았다.”고 한다.
역주7 後二年……帝從安國議矣 : 《漢書》 〈韓安國傳〉에 의하면 “建元 5년에 匈奴가 和親을 청하였다. 武帝가 그 議題를 내려보내자, 大行 王恢는 ‘匈奴는 和親을 하더라도 오래가지 않아서 곧 약속을 위배할 것이니, 군사를 일으켜 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고, 御史 韓安國은 ‘그 땅을 얻더라도 족히 넓지 못하고, 그 민중을 소유하더라도 족히 강하지 못합니다. 상고 때부터 匈奴를 屬國으로 하지 않았으니, 수천 리를 가서 이익을 다툰다면 사세가 반드시 위태로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중론이 대부분 韓安國을 따랐으므로 이에 武帝가 和親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역주8 大行 : 벼슬 이름으로, 곧 大行人이다. 직무는 天子와 諸侯 사이의 교제에 관한 禮典을 맡았다.
역주9 : 여기서는 帥와 같다.
역주10 明年……天下幾至大亂 : 《漢書》 〈韓安國傳〉과 〈匈奴傳〉에 의하면 “馬邑帥 聶壹이 王恢를 통해 策略을 조정에 전달하고는 거짓으로 도망해 匈奴에 들어가서 單于에게 말하기를 ‘나는 馬邑令丞을 베어 城으로써 항복시키고 그 재물을 다 얻을 수 있다.’ 하자, 單于가 믿고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10만 騎兵을 이끌고 오니, 漢나라가 군사 30만을 馬邑 곁에 있는 골짝에 매복하였다. 單于는 牛羊이 들판에 펼쳐 있으나 거두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괴상히 여기어 雁門尉吏를 찌르니 尉吏가 두려워서 漢나라의 謀策을 모두 고백하자, 單于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으므로 漢나라는 소득이 없었다. 이로부터 匈奴는 和親을 끊고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고 한다.
역주11 此二者 : 閩越을 치는 일과 馬邑을 치는 일을 가리킨다.
역주12 迫於利口 : 말 잘하고 변론 잘하는 사람에게 곤궁을 당함을 가리킨다.
역주13 黔首 : 庶民을 가리킨다.
역주14 內則骨肉相賊殺 : 《漢書》 〈武帝紀〉에 의하면 “征和 2년(B.C. 91)에 諸邑公主와 陽石公主가 모두 巫蠱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고, 같은 해에 江充 등이 太子宮 안에서 저주하는 흉물을 발굴하자, 太子와 衛皇后가 공모하여 江充을 참수하는 등 장안이 크게 어지러워 죽은 사람이 수만이 되었다. 사후에는 皇后와 太子가 자살하였고, 太子의 3남 1녀가 모두 살해당했다.”고 한다.
역주15 嚴助以交通淮南 張湯論殺之 : 《漢書》 〈嚴助傳〉에 의하면 “武帝가 南越을 정벌하니, 淮南王 劉安이 글을 올려 간언을 하였고, 南越을 항복시킨 뒤에는 嚴助가 왕명을 받들고 가서 淮南王을 효유하니, 淮南王은 사죄하고 嚴助와 우의를 맺었다. 뒤에 淮南王이 來朝하여 嚴助에게 후한 뇌물을 주기도 하였다.
淮南王이 반역할 때에 가서는 그 사건이 嚴助에게 연루되었는데, 武帝는 그의 죄를 경감하여 誅殺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廷尉 張湯이 諫諍하여 ‘嚴助는 禁門을 출입하는 腹心의 신하로서 이와 같이 밖으로 諸侯와 私交하였으니, 誅殺하지 않으면 뒤에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결국 嚴助는 斬首당했다.”고 한다.
역주16 王恢以不擊匈奴 亦坐棄市 : 《史記》 〈韓長孺傳〉과 《漢書》 〈韓安國傳〉에 의하면 “馬邑의 전쟁에서 漢나라 군사가 공을 세운 것이 없자, 武帝는 王恢가 單于의 輜重을 치지 않은 것에 노하여 하옥시켰다. 그리고 武帝는 ‘王恢가 맨 처음 馬邑의 일을 발의하였으니, 輜重을 쳐서 오히려 士大夫의 마음을 위로했어야 했다. 그러니 誅殺하지 않으면 천하에 사죄할 수 없다.’고 하니, 王恢는 그 말을 듣고 자살하였다.”고 하였는데, 蘇轍이 ‘王恢는 棄市되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棄市’는 참수하여 시체를 거리에 버리는 극형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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