士大夫
하여 高不
하고 下不爲利所怵者 類能知之
니라
知其一
하고 不達其二
하며 見其利
하고 不覩其害
하니 而好名貪利之臣
이 이면 則利害之實亂矣
니라
무제帝問태위太尉전분田蚡하니 전분蚡曰 越人相攻은 其常事耳요 又數反覆하니 不足煩中國往救니이다하니라
무제帝使엄조嚴助難전분蚡曰 特患力不能救요 德不能覆어니와 誠能이면 何故棄之오
小國以窮困來告急이어늘 天子不救면 尙何所愬리오하니라
왕회王恢는 請擊之
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한안국韓安國은 請許其和
하니 무제帝從
한안국安國議矣
니라
明年
에 마읍호馬邑섭일聶壹이 因
왕회恢言
흉노匈奴初和親
이라 親信邊
이니 可誘以利致之
하고 伏兵襲擊
이 必破之道也
니이다하니
무제帝使公卿議之한대 한안국安國왕회恢 往反議甚苦하니라
무제帝從왕회恢議하고 使섭일聶壹賣마읍성馬邑城以誘선우單于언만 선우單于覺之而去하니 兵出無功이니라
는 전분田蚡한안국韓安國이 皆知其非
나 而
하여 不能自伸
이니라
무제武帝志求功名하여 不究利害之實하고 而遽從之니라
及其晩歲
에 禍災竝起
하여 外則
耗散
하고 하니 雖悔過自咎
나 而事已不救矣
니라
二人皆罪不至死언만 而不免大戮은 豈非首禍致罪하여 天之所不赦故耶아
천하天下의 이해관계利害關係는 알기 어렵지 않다.
사대부士大夫가 심기心氣가 평정平定하여 위로는 명의名義에 현혹眩惑되지 않고 아래로는 이익에 유혹되지 않을 경우 대체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은 깊고 그윽한 궁중에서 출생하니, 천하의 일에 대해 들은 것이 지극히 드물다.
그래서 그 하나만을 알고 그 둘은 통달하지 못하며, 그 이로운 것만을 보고 그 해로운 것은 보지 못하니, 명예를 좋아하고 이익을 탐하는 신하가 임금이 애호愛好하는 정상을 탐구하여 아직 싹트지 않은 악념惡念을 맞아 유도해서 악惡을 하도록 만든다면 이해利害의 실상이 어지러울 것이다.
한漢 무제武帝는 즉위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나이 아직 20세가 못 되었다.
민월閩越이 군사를 일으켜 동구東甌를 포위하니 동구東甌가 다급함을 고하였다.
무제武帝가 태위太尉 전분田蚡에게 처리방법을 물으니, 전분田蚡이 아뢰기를 ‘‘월인越人이 서로 공격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일 뿐이고 또 자주 반복하니, 족히 중국이 번거롭게 가서 구제할 것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무제武帝가 엄조嚴助를 시켜서 전분田蚡을 힐난하기를 “다만 구제할 수 있는 힘이 없고 입힐 수 있는 덕이 없는 것이 걱정일 뿐이지, 참으로 능력이 있다면 왜 버리겠는가?
소국小國이 궁곤窮困하므로 와서 다급함을 고하는데, 천자天子가 구제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호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무제武帝가 전분田蚡의 의론을 따르지 않고 엄조嚴助로 하여금 절월節鉞을 가지고 회계會稽의 군사를 징발해서 구제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남월南越을 정토征討하고 조선朝鮮을 정벌하고 서남이西南夷를 치니 병혁兵革의 화禍가 사이四夷에 가해졌다.
2년 후에 흉노匈奴가 화친和親을 청하자, 대행大行 왕회王恢는 치기를 청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은 화친和親을 허락하도록 청하니, 무제武帝는 한안국韓安國의 의론을 따랐다.
이듬해에 마읍호馬邑豪 섭일聶壹이 왕회王恢를 통하여 말하기를 “흉노匈奴가 처음에 화친和親을 했으므로 친신親信한 편이니, 이익으로 유인해 오게 하고 군사를 매복했다가 습격襲擊하면 반드시 깨뜨릴 수 있는 방도입니다.”라고 하자,
무제武帝가 공경公卿들로 하여금 대책을 의논하게 하니, 한안국韓安國과 왕회王恢는 매우 고생스럽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무제武帝가 왕회王恢의 의논을 따르고 섭일聶壹을 시켜서 마읍성馬邑城을 팔아 선우單于를 유인했건만, 선우單于가 알아차리고 가버렸으므로 군사가 나가서 공을 세운 것이 없었다.
이로부터 흉노匈奴가 변경邊境을 침범하여 무제武帝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편안한 해가 없었으니, 천하天下가 거의 대란大亂에 이르렀다.
이 두 가지는 전분田蚡과 한안국韓安國이 모두 그 잘못을 알았지만, 말 잘하는 사람에게 곤궁을 당하여 자기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무제武帝는 오직 공명功名을 구하는 데만 뜻을 두어 이해利害의 실상을 구명하지 않은 채 얼른 따랐다.
만년에 가서는 천화天禍와 인재人災가 아울러 일어나 밖으로는 검수黔首가 모산耗散하고 안으로는 골육骨肉이 서로 죽였으니, 비록 허물을 뉘우치고 자책을 하였지만 일이 이미 구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엄조嚴助는 회남淮南과 통교通交했기 때문에 장탕張湯이 그를 논죄하여 죽였고, 왕회王恢는 흉노匈奴를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시 기시棄市되었다.
두 사람은 다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건만 대륙大戮을 면치 못한 것은 맨 처음 화란禍亂을 발의함으로써 죄를 지은 것이어서 하늘이 용서하지 못할 바가 어찌 아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