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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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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蓋天心之所付予 人心之所歸向 其在태종太宗者審矣니라
至立太子 고조高祖以長立건성建成하니 건성建成當之不辭하니라
건성建成不足言也 其咎在고조高祖니라
중종中宗예종睿宗하고예종睿宗長子으로 爲太子矣니라
임치왕臨淄以兵入討하고 예종睿宗踐祚하니室復安이니라
又將以長立하니 辭曰 時平이면 先長嫡이요 國亂이면 先有功이니이다
不如此 必且有難이니 敢以死請이니이다하니 예종睿宗從之하니라
태종太宗之賢으로 而不免於爭奪이니라
현종玄宗之賢 不逮태종太宗이나 而晏然受命하니之讓 賢於人遠矣니라
吾嘗論之컨대 고조高祖예종睿宗 皆中主也니라
其欲立長 非專其私也 以爲立嫡以長 古今之正義也니라
謂之正義而不敢違 胡不考之前世乎
誠天命之所在 而吾無心焉이면 亂何自生이리오
雖然이나 하니 亦畏亂故耳니라
廢長而立少 雖聖賢猶難之니라
현종玄宗兄弟相安하여 終身無間言焉하니 蓋古今一人而已니라


04. 고조高祖에 대한
고조高祖태원太原에서 일어났는데, 그 모사는 태종太宗에게서 나왔고, 여러 아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장안長安를 정복하고 군도群盜를 제거함에 천하天下가 통일되었으니, 그 또한 태종太宗에게서 나왔다.
대개 천의天意부여附與인심人心귀향歸向태종太宗에게 있음이 분명하였다.
태자太子를 세울 때에 가서 고조高祖장자長子란 이유로 건성建成태자太子로 세우니, 건성建成은 편안히 접수하고 사양하지 않았다.
이에 형제兄弟들이 시의猜疑하고 이간離間하여 끝내는 대란大亂에 이르렀다.
무릇 건성建成은 족히 말할 것이 못 되고, 그 허물은 고조高祖에게 있다.
그 뒤 무씨武氏중종中宗을 폐위시켜 예종睿宗을 세우고, 예종睿宗장자長子 으로 태자太子를 삼았다.
중종中宗복위復位됨에 예종睿宗부자父子는 모두 의 신분으로 황궁皇宮을 나와 도로 자기의 주택으로 갔다.
위씨韋氏임치왕臨淄王(玄宗)이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서 토평討平하고 예종睿宗이 즉위하니 나라의 왕실王室이 다시 안정되었다.
적장嫡長이기 때문에 태자太子로 세우려고 하니, 이 겸양하기를 “태평할 때에는 적장嫡長을 우선으로 해야겠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에는 공이 있는 이를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아니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니, 감히 죽음으로써 청합니다.”라고 하니, 예종睿宗이 그 청을 따랐다.
그 뒤에 임치왕臨淄王의 위치가 정해졌다.
태종太宗의 어짊으로도 쟁탈爭奪을 면하지 못하였다.
현종玄宗의 어짊이 태종太宗에 미치지 못했지만 편안히 을 받았으니, 의 겸양은 어느 사람보다 월등한 것이었다.
나는 논하건대, 고조高祖예종睿宗은 모두 중등의 재덕才德을 가진 군주君主였다.
그들이 장자長子를 세우려고 했던 것은 오로지 사심私心으로 한 것이 아니고, 적자嫡子를 왕으로 세울 경우는 먼저 연장자를 세우는 것이 고금의 공정하고 정당한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당한 도리라고 여겨 감히 어기지 않았으니, 어찌 전대前代를 상고하지 않았겠는가?
태왕太王태백太伯(泰伯)과 중옹仲雍(仲虞)을 놓아두고 계력季歷을 세웠고, 문왕文王백읍고伯邑考를 놓아두고 무왕武王을 세웠으니, 나라가 이로써 흥기興起하였다.
진실로 천명天命이 있는 바에 내가 사심私心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 어디로부터 생기겠는가?
그러나 태백太伯나라로 도망하여 왕계王季를 피하였으니, 또한 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장자長子를 폐하고 소자少子를 세우는 것은 비록 성현聖賢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어렵게 여겼다.
현종玄宗형제兄弟는 서로 편안함을 누리고 종신토록 이간하는 말이 없었으니, 아마 고금을 통하여 단 한 사람뿐이었을 것이다.


역주
역주1 唐高祖論 : 唐 高祖는 唐 王朝를 세운 李淵(566~635)을 가리킨다.
《欒城集》에는 本文의 標題가 〈唐高祖〉로 되어 있다.
역주2 唐高祖起太原 其謀發於太宗 : 《舊唐書》 〈高祖本紀〉에 의하면 “大業(隋 煬帝의 연호) 13년(617)에 李淵이 太原留守로 있었는데, 群賊이 蜂起하여 江都가 杜絶되자, 太宗이 晉陽令 劉文靜과 모의하여 義兵을 일으키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역주3 諸子 : 여러 皇子. 여기서는 建成과 元吉 등을 가리킨다.
역주4 及克長安……其功亦出於太宗 : 《舊唐書》 〈太祖本紀〉에 의하면 “太宗이 帝라고 僭稱한 薛仁杲를 격파하여 항복시키니 隴右가 평정되었고, 劉武周와 宋金剛을 격파하여 그들이 突厥로 도망하니 幷州가 평정되었고, 竇建德을 격파하여 사로잡으니 河北이 다 평정되었고, 王世忠이 東都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니 河南이 평정되었고, 漢東王이라 僭稱한 竇建德의 部將 劉黑闥을 격파하였다.”고 한다.
역주5 至立太子……卒至大亂 : 《舊唐書》 〈高祖二十二子 隱太子建成列傳〉에 의하면 “建成(隱太子)은 太穆皇后의 소생이고 太宗의 同母兄이다. 唐 高祖 武德 元年(618)에 太子가 되고, 太宗은 秦王이 되고, 元吉은 齊王이 되었다.
처음에 太宗의 功業이 날로 성대하자, 高祖는 사적으로 太子를 삼았다. 建成이 그것을 알고 齊王 元吉과 함께 몰래 亂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高祖로 하여금 內禪을 하지 못하게 하고, 모의하여 太宗을 독살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後宮이 太宗을 참소하자 高祖가 疑惑하니, 太宗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武德 9년(626)에 元吉이 군사를 거느리고 突厥을 막았는데, 군사가 모인 것을 인하여 장차 建成과 함께 擧事하기로 하였다. 이때 太宗이 建成을 죽이고 尉遲敬德이 元吉을 죽이니, 建成의 군사가 敗散하였다.”고 한다.
역주6 其後武氏之亂……爲太子矣 : 《舊唐書》 〈睿宗本紀〉에 의하면 “唐 中宗 嗣聖 원년(684)에 則天武后가 臨朝하여 中宗을 폐위시켜 廬陵王으로 삼고 豫王을 세워 皇帝로 삼고는 그대로 臨朝하여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였다.”고 하고, 《舊唐書》 〈睿宗諸子讓皇帝憲列傳〉에 의하면 “讓皇帝는 본명이 成器인데, 睿宗의 長子이다. 처음에 永平郡王으로 봉했다가 睿宗 文明 원년에 皇太子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 6세였다.”고 한다.
역주7 武氏之亂 : 武則天이 自立하여 황제의 직권을 대행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8 及中宗之復……皆以王就第 : 《舊唐書》 〈睿宗本紀〉에 의하면 “聖歷 원년(698)에 中宗이 房陵으로부터 돌아왔다. 睿宗이 자주 병을 핑계로 臨朝하지 않고 中宗에게 讓位할 것을 청하니, 則天武后가 드디어 中宗을 皇太子로 삼고 睿宗을 相王으로 삼았다.”고 한다. 즉 中宗이 즉위하여 睿宗의 長子 李憲은 蔡王으로 봉하고, 둘째 李撝는 衡陽郡王으로 삼고, 셋째 李隆基는 臨淄王으로 삼고, 넷째 李范은 巴陵郡王으로 삼고, 다섯째 李業은 彭城郡王으로 삼았던 것이다.
역주9 韋氏之亂……睿宗踐祚 : 《舊唐書》 〈睿宗本紀〉에 “景龍 4년(710)에 中宗이 죽자 韋庶人이 臨朝하여 그 黨을 끌어 써서 政柄을 나누어 가졌고, 玄宗의 명망이 본래 높은 것을 꺼려서 몰래 危害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자 臨淄王이 太平公主의 아들 薛宗簡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北軍에 들어가서 여러 韋氏와 武氏의 黨與를 모두 誅殺했다.”고 하였다. 당시 中宗의 아들 少帝가 在位하였는데, 韋氏가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였다. 韋氏의 亂을 평정한 뒤에는 少帝가 遜位하여 睿宗이 皇帝의 자리에 올랐다.
역주10 韋氏之亂 : 韋氏는 中宗의 皇后가 되어 中宗이 즉위한 뒤에 武則天의 故事를 행하려고 한 일을 가리킨다. 그는 誅殺당한 뒤에 庶人으로 貶下되었다.
역주11 又將以長立憲……臨淄之位定 : 《舊唐書》 〈睿宗諸子讓皇帝憲列傳〉에 “睿宗이 즉위하였고,……이때 儲貳(太子)를 세워야 했는데, 成器가 嫡長이었지만, 玄宗에게 韋氏를 討平한 功이 있었기 때문에 오래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成器가 사양하기를 ‘儲副(太子)는 천하의 公器입니다. 태평할 때에는 嫡長을 우선으로 해야겠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에는 공이 있는 이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만일 알맞음을 잃는다면 海內가 실망하므로 社稷의 福이 아니니, 臣은 지금 감히 죽음으로써 청합니다.’라고 하고 여러 날을 涕泣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이때 諸王과 公卿도 ‘平王(玄宗을 처음에 平王에 봉했음)에게 社稷의 大功이 있으니 응당 儲位에 올라야 한다.’고 했다. 睿宗은 成器의 뜻을 가상히 여겨 이에 그 청을 허락했다.”고 하였다.
역주12 太王捨太伯仲雍而立季歷 : 《史記》 〈周本紀〉에 “古公에게 長子인 太伯(泰伯)과 次子인 虞仲(仲雍)이 있었다. 太姜이 少子 季歷을 낳으니, 季歷이 太任에게 장가들었는데, 모두 賢夫人이었고, 昌(周 文王)을 낳으니, 성스럽고 단아한 자질이 있었다. 古公이 말하기를 ‘우리 세대에 응당 흥기할 자가 있을 것이니 그는 昌인저.’ 했다.”라고 하였다. 뒤에 文王은 古公을 太王으로, 季歷을 王季로 추존하였다.
역주13 文王捨伯邑考而立武王 : 《史記》 〈周本紀〉에 “西伯이 서거하자 太子 發이 즉위하였으니, 이가 바로 武王이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史記》 〈管蔡世家〉에 “武王의 同母兄弟가 10명이었고, 모친 太姒는 文王의 正妃였다. 그 長子는 伯邑考, 次子는 武王 發인데,……오직 發과 旦(周公)만이 어질어 좌우에서 文王을 보필하였다. 그러므로 伯邑考를 놓아두고 發을 세워 太子로 삼았다.”란 말이 보인다.
역주14 太伯奔吳以避王季 : 《史記》 〈周本紀〉에 “長子인 太伯과 虞仲은 古公이 季歷을 세워 昌에게 전해지도록 하려는 것을 알고, 이에 두 사람은 荊蠻으로 도망가서 文身을 하고 斷髮을 함으로써 季歷에게 양보하였다.”란 말이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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