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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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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處亦似 而其言以術留天下爲名 則卑矣 漸開晩宋門戶니라
人之於物 而信其自去 則人重而物輕이니라
人重而物輕이면 則物之附人也堅이니라
物之所以去人 分裂四出而不可禁者 物重而人輕也니라
古之 其取天下 非其 其守天下 非其니라
使天下自附하여 不得已而爲之이면 吾不役天下之利라도니라
夫是以 去就之權 在君而不在民이니 是之謂人重而物輕이니라
且夫吾之於人 已求而得之 則不若使之求我而後從之 已守而固之 則不若使之不忍去我而後與之니라
夫智者 或可與取天下矣 而不可與守天下 守天下 則必有大度者也니라
何者 非有大度之人이면 則常恐天下之去我하여 而以留天下 以術留天下 而天下始去之矣니라
昔者 三代之君 長遠하니 後世莫能及이니라
之亡 其弊果安在哉
失其政으로 한대獨得之地 不過千里니라
壓其衝하고 脅其肩하고 伺其北하고掉其東이니라
被甲持兵 而不得解하고 라가시황始皇然後 合而爲一이니라
見其取天下 若此其難也하고 而以爲不 則後世且復割裂하여 以爲敵國이라하니라
是以 銷名城하고 殺豪傑하고 하여 以絶天下之望이니라
其所以備慮而固守之者 甚密如此 然而海內愁苦無聊하여 莫有不忍去之意니라
是以 因民之不服하여 長呼起兵하니이니라
由此觀之컨대 豈非其重失天下而防之太過之弊歟
今夫문제之世에도 其亦見天下之久不定하고 而重失其定也니라
已盡矣 而南方未服이니라
彼亦見天下之久不定也
是以 旣得天下之衆이나 而恐其失之하고 享天下之樂이나 而懼其不久하고 立於萬民之上이나 而常有猜防不安之心하여 以爲擧世之人 皆有曩者英雄라하고 制爲嚴法峻令하여 以杜天下之變하며 하고하여 以及於하며 니라
由此觀之 則夫之所以亡者 無以異於니라
悲夫
古之聖人 修德以來天下 天下之所爲去就者 莫不在我니라
其視失天下甚輕이니라
夫惟視失天下甚輕이라 是故 其心舒緩하고 而其爲政也寬이니라
寬者 生於無憂하고 而慘急者 生於無聊耳니라
及觀 唯不忍失之 而至於亡然後에야 知聖人之爲是寬緩不速之行者 乃其所以深取天下者也니라


02. 나라에 대한
나라와 나라를 논한 곳은 역시 비슷하나, 그 말이 ‘술책을 가지고 천하를 보유했다.[以術留天下]’는 것으로 명목을 삼는 것은 격이 낮으니, 점차로 만송晩宋문호門戶(文體)를 연 셈이다.
사람이 외물에 대하여 외물이 스스로 사람에게 와서 붙좇게 하고, 외물이 스스로 사람의 곁에서 떠나가게 한다면, 사람의 존재가치가 무거워지고 외물의 존재가치가 가벼워진다.
사람의 존재가치가 무거워지고 외물의 존재가치가 가벼워진다면 외물이 사람에게 붙좇는 강도가 견실해진다.
외물이 사람의 곁을 떠나갈 때 분열하여 사방으로 나가는 것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외물의 존재가치가 무겁고 사람의 존재가치가 가볍기 때문이다.
옛날 성인聖人천하天下를 취한 것은 휘몰아 온 것이 아니고, 천하天下를 지킨 것은 강제로 보유한 것이 아니었다.
천하天下가 스스로 와서 붙좇게 하여 부득이 군주君主가 된다면 내 자신이 천하天下의 이익을 취하지 않더라도 천하天下의 이익이 스스로 이른다.
이 때문에 거취去就(進退)하는 권한은 임금에게 있고 백성에게 있지 않으니, 이것을 두고 ‘사람의 존재가치가 무겁고 외물의 존재가치가 가볍다.’고 이른 것이다.
또 내가 사람에 대하여 내가 이미 구해서 얻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에게 구한 뒤에 따르게 하는 것만 못하고, 내가 이미 지켜 굳건히 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차마 나를 버리지 않은 뒤에 함께하도록 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자가 혹 사람과 함께 천하天下를 취할 수는 있지만, 사람과 함께 천하天下를 지킬 수는 없으니, 천하天下를 지킨다면 반드시 큰 도량이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큰 도량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늘 천하天下가 나를 버릴까 싶어서 술책을 가지고 천하天下를 보유하게 되니, 술책을 가지고 천하天下를 보유함에 천하天下가 비로소 나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옛날 삼대三代의 임금들은 나라를 장원長遠하게 누렸으니 후세後世에선 그 임금들에게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라를 갑자기 멸망시킨 일은 나라와 나라만큼 빠르게 한 나라는 없었으니, 2 만에 멸망한 나라들이다.
나라와 나라의 멸망은 그 폐단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나라가 실정失政함으로부터 제후諸侯들이 용사用事하였는데, 나라만은 천 리에 불과한 산서山西의 땅을 취득하였다.
그런데 나라와 나라는 그 요충지대를 압박하고, 나라는 그 어깨 부분을 누르고, 나라와 나라는 그 북쪽 방면을 엿보고, 나라는 그 동쪽 방면을 요동시켰다.
나라 사람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갖는 일을 7 동안 풀지 못하고 촌척寸尺의 땅을 양취攘取하다가 시황始皇에 이른 연후에야 7을 합하여 통일시켰다.
나라는 천하天下를 취하기가 이처럼 어려운 일임을 알고 ‘단단히 가지지 않으면 후세에 또 분열하여 적국敵國이 될 것’이라 여겼다.
이 때문에 이름난 을 없애고 호걸豪傑을 죽이고 봉적鋒鏑을 녹여서 천하天下의 넘봄을 끊었다.
두루 고려하여 굳게 지키는 것이 이처럼 매우 주밀하였지만, 천하의 백성들이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차마 떠나지 않으려는 뜻이 없었다.
이 때문에 진승陳勝항적項籍은 백성들이 불복한 기회를 이용하여 큰 소리로 외쳐 군사를 일으키니, 각지에서 모두 〈진승陳勝항적項籍에게〉 호응하였다.
이것으로 보건대, 거듭 천하天下를 잃고 방어를 너무 과도하게 한 폐단이 어찌 아니겠는가?
지금 문제文帝의 세대 또한 천하天下가 오래 안정되지 못함을 보고서도 거듭 그 안정을 잃었다.
대개 동진東晉 이래로 유총劉聰, 석륵石勒, 모용수慕容垂, 부견苻堅, 요흥姚興, 혁련赫連과 같은 무리가 어지럽게 일어난 경우는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원씨元氏에 이르러서 병탄幷呑하고 멸취滅取하여 천하를 이미 다 보유하였지만, 남쪽 지방은 복종시키지 못하였다.
원씨元氏는 스스로 나뉘어 나라와 나라가 되었고, 나라는 나라를 아울러 나라에 넘겨주었고, 문제文帝나라를 취하고 나라를 멸하였으니, 그렇게 한 뒤에야 천하天下가 통일될 수 있었다.
문제文帝 또한 천하天下가 오래 안정되지 못함을 보았다.
그래서 이미 천하天下의 민중을 얻었으나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였고, 천하天下을 누렸으나 그것이 오래가지 못할까 두려워하였고, 만백성의 위에 군림하였으나 항상 의심하고 대비하느라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전 영웅들처럼 할거割據할 생각을 품는다고 여기고 준엄한 법령을 제정하여 천하天下을 막았으며, 모신謀臣구장舊將주멸誅滅하여 모두 없애고, 자신은 양소楊素의 손에서 죽어 큰 화환禍患이 이르게 하였으며, 끝내는 양제煬帝 때에 천하天下가 크게 혼란하여 여지없이 파괴되었는데도 구제하지 못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나라가 망한 까닭도 나라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 슬프다.
옛적 성인聖人을 닦아 천하天下 사람을 오게 하였으니, 천하天下 사람을 오게 하거나 가게 하는 요령은 모두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천하天下를 잃는 것을 보기를 매우 가볍게 여겼다.
천하를 잃는 것을 보기를 매우 가볍게 여겼는지라, 그 때문에 그 마음가짐이 느긋하고 그 정치를 하는 도량이 너그러웠다.
너그러운 마음은 걱정이 없는 데서 생기고, 조급한 마음은 열없는 데서 생긴다.
일찍이 듣건대, 나라가 흥기興起할 때에 태왕太王융적戎狄을 피하여 기산岐山으로 옮겨가니, 인민人民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서 따라가는 행렬이 기산岐山의 아래에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으니, 그 옛 나라는 상실했지만 마침내는 크게 흥기하였다고 한다.
나라와 나라가 차마 천하를 잃지 않고 싶었지만 결국은 망하게 된 것을 보고 나서야, 성인聖人이 이와 같이 마음을 느긋하게 하고 빨리 서두르지 않은 행동이 바로 천하를 깊이 취하게 된 까닭임을 알았다.


역주
역주1 隋論 : 이 〈隋論〉 역시 소싯적 작품으로 보인다. 北周의 大丞相 楊堅(隋 文帝)이 처음에 隋國公으로 襲封되었다가 얼마 안 가서 北周를 폐하고 자립하여 帝가 되어 국호를 ‘隋’라고 하였다. 隋나라의 역년은 581~618년이다.
역주2 聽其自附 : 外物이 자연히 歸附하도록 맡겨두는 것이다.
역주3 聖人 : 여기서는 도덕적 수양이 있는 帝王을 가리킨다.
역주4 驅而來之 : 강제로 천하가 자기에게 歸附하도록 하는 일이다.
역주5 劫而留之 : 강제로 천하를 보유하는 일이다.
역주6 : 여기서는 君主를 가리킨다.
역주7 天下自至 : 나라의 이익이 자연히 도달함을 누린다는 뜻이다.
역주8 : 여기서는 君主의 통제와 臣下를 부리는 策略이나 手段을 가리킨다.
역주9 享國 : 世代를 누린다는 뜻으로, 왕조가 통치하는 연대를 가리킨다.
역주10 : 갑자기. 즉 突發의 뜻이다.
역주11 未有如秦隋之速 二世而亡者也 : 秦나라의 경우는 始皇이 6國을 멸하고 中國을 통일한 다음 二世에게 전하여 漢에 멸망되었고, 隋의 경우는 文帝가 煬帝에게 전하고 恭帝에 이르러 망하였다.
역주12 諸侯用事 : 用事는 武力의 사용을 뜻하니, 곧 列國 侯王의 混戰을 가리킨다.
역주13 山西 : 여기서는 太行山 서쪽 지구를 가리킨다.
역주14 七世 : 秦나라의 孝公, 惠文王, 悼武王, 昭襄王, 孝文王, 莊襄公, 始皇의 7代를 가리킨다.
역주15 寸攘尺取 : 조금씩 諸侯의 땅을 잠식함을 가리킨다. 《史記》 〈范睢蔡澤列傳〉에 “范睢가 秦 昭王을 달래기를 ‘왕은 멀리 교접하고 가까이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한 치 땅을 얻으면 왕의 한 치 땅이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왕의 한 자의 땅입니다.’라고 했다.”는 말이 보인다.
역주16 急持 : 꼭꼭 안아 가지고 잘 지키는 일을 가리킨다.
역주17 鑄鋒鏑 : 鋒鏑은 칼과 화살촉의 兵器를 가리키니, 곧 병기를 녹이는 일이다. 《史記》 〈秦始皇本紀〉에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咸陽에 모아놓고 녹여서 鐘鐻와 金人 12개를 만들어 무게가 각각 1천 석이었는데, 모두 궁궐 안에 두었다.”라고 하였다.
역주18 陳勝項籍 : 陳勝은 秦나라 말엽 사람으로 자는 涉이다. 秦 二世 때에 吳廣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張楚를 세우고 그 왕이 되었으나, 秦나라 장수인 章邯의 군사에게 격파되어 그 부하 章賈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項籍 역시 秦나라 말엽 사람으로 자는 羽이다. 叔父인 項梁을 따라 吳中에서 起義하였고, 뒤에 스스로 봉하여 西楚霸王이 되었다.
역주19 山澤皆應 : 여기서는 각지의 백성들이 모두 陳勝과 項籍에게 호응하여 어지럽게 起義함을 비유한 말이다.
역주20 東晉 : 晉나라가 西晉과 東晉으로 나누어졌는데, 西晉은 前趙에게 멸망되었고, 瑯琊王 司馬睿가 建康에서 皇帝가 되어 江南의 땅을 보유하였으니, 역사에서 그 나라를 ‘東晉’이라고 칭하였다.
역주21 劉聰 : 前趙를 세운 北單于 劉元海의 아들이다. 孝懷帝와 孝愍帝를 사로잡고 西晉을 멸하였다.
역주22 石勒 : 前趙를 멸하고 後趙를 세웠다.
역주23 慕容垂 : 前燕 慕容皝의 다섯째 아들로 後燕을 세웠다.
역주24 苻堅 : 前秦의 君主로 16國 중에 가장 강자였는데, 뒤에 姚萇에게 멸망되었다.
역주25 姚興 : 後秦의 國君 姚萇의 아들로 뒤에 君位를 계승하였다.
역주26 赫連 : 赫連勃勃을 가리킨다. 晉나라의 劉裕가 後秦을 격파하고 그 아들 劉義眞으로 하여금 長安을 지키게 하였는데, 赫連勃勃은 劉義眞을 폐하고 長安에 들어가 帝라 칭하고 夏나라를 세웠다.
역주27 至於元氏……而南方未服 : 元氏는 北魏를 가리킨다. 北魏는 원래 拓跋氏였는데, 孝文帝(元修)에 와서 元氏로 고쳤다. 그 조부인 拓跋珪가 처음에 代王으로 칭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北魏로 고쳤다. 太平眞君 원년(440)에 북방을 통일하여 16국을 결속하였다.
역주28 : 여기서는 ‘모두’의 뜻이다.
역주29 元氏自分而爲周齊 : 北魏 말기에 孝文帝가 高歡의 핍박을 받고 關中으로 도망가서 宇文泰에게 投託하였다. 高歡은 元善을 세웠으니, 그가 바로 孝靜帝였다. 도읍을 鄴 땅으로 옮기고 洛陽 동쪽의 北魏 영토를 보유하였다. 北魏는 드디어 둘로 나누어졌다. 長安은 서쪽에 있으므로 西魏가 되고, 鄴은 동쪽에 있으므로 東魏가 된다. 뒤에 宇文泰의 아들 宇文覺은 西魏主를 폐하고 자립하여 周나라를 세웠고, 高歡의 아들 高洋은 孝靜帝를 폐하고 자립하여 齊나라를 세웠다.
역주30 周幷齊而授之隋 隋文取梁滅陳 : 《隋書》 〈高祖紀〉에 의하면 ‘北周의 靜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劉昉이 詔書를 위조하여 楊堅으로 하여금 들어가서 朝政을 총괄하게 하였는데, 그는 뒤에 靜帝의 禪讓을 받아 隋를 세웠다. 開皇 7년(587)에는 隋 文帝가 梁을 폐하고 梁主 蕭琮을 柱國으로 삼아 莒國公에 봉하였고, 開皇 9년(589)에는 賀若弼이 陳軍을 蔣山에서 패멸하고 그 장수 蕭摩訶를 사로잡았으며, 韓擒虎는 進軍해 들어가 陳主 叔寶를 사로잡으니 陳國이 평정되었다.’고 한다.
역주31 割據之懷 : 영토를 분할하여 한 지역을 점거할 생각을 갖는 것이다.
역주32 謀臣舊將 誅滅略盡 : 《隋書》 〈高帝紀〉에 “개국한 元勳과 공이 있는 여러 장수들을 죽여 없애서 생존한 자가 적었다.”란 말이 보인다.
역주33 獨死於楊素之手 : 楊素는 隋 文帝가 太子 勇을 폐하고 煬帝를 세울 때에 힘을 많이 썼으며, 벼슬은 司徒에 이르고 楚國公에 봉해졌다. 《隋書》 〈楊素傳〉에 ‘隋 文帝의 병이 위중할 때에 皇太子 楊廣이 병간호를 하고 있으면서 上(文帝)의 죽음에 대비하기 위하여 손수 편지를 써서 楊素에게 물으니, 楊素는 대비책을 적어서 太子에게 보고하였는데, 宮人이 이 보고서를 上에게 잘못 전달하니, 上이 그 보고서를 보고 크게 화를 냈고, 楊素는 또 張衡으로 하여금 文帝의 병간호를 하게 하였는데, 上이 바로 이날 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고 하였다.
역주34 大故 : 큰 禍患. 곧 煬帝가 帝位를 이어 나라를 망하게 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35 終於煬帝之際……塗地而莫之救 : 煬帝 楊廣은 文帝의 次子로서 在位 14년 동안에 밖으로는 군사를 출동시키고 안으로는 토목공사를 일으켰으므로 賦稅가 가중되고 役事가 번다하였으며, 大業 12년(616)에는 남쪽으로 江都에 순행하여 酒色에 빠져서 북쪽으로 돌아올 뜻이 없었다가 禁軍將領 宇文化及 등에 의해 軍中에서 목을 매달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역주36 周之興……喪失其舊國而卒以大興 : 太王은 곧 周 太王 古公亶父로, 周 文王의 祖父이다. 원래 豳에 살다가 戎狄의 侵逼으로 인하여 岐山으로 거처를 옮겨서 城郭을 쌓고 官吏를 두고 荒地를 개간하여 周나라가 점점 强盛해지게 하였다.
역주37 舊國 : 여기서는 원래 나라인 豳(邠과 같음)을 가리킨다.
역주38 <주석명/> : 孫琮은 《山曉閣選宋大家蘇潁濱全集》에서 “이 篇은 바로 隋나라가 천하를 지킨 것에 대한 잘못을 논하고 隋나라가 천하를 취한 것에 대한 잘못은 논하지 않았다. 한 번 논리를 일으켜 ‘聽其自附(스스로 와서 붙좇게 함)’를 말하고, 또 ‘信其自去(스스로 떠나가게 함)’를 말하였다. 아래에서 비록 두 문단을 아울러 받았으나 실은 그 ‘信其自去’의 일변을 거듭 강조하고, ‘聽其自附’는 대동해서 말한 것에 불과하였으니, 이 篇을 읽어 중반이나 후반에 이르면 그것이 저절로 보인다.
이 문장의 다른 곳은, 중간에서는 隋나라가 天下를 보기를 매우 무겁게 하였음을 말하려고 하였고, 전후에서는 모두 聖人이 天下를 보기를 매우 가볍게 하였음을 말하고서, 아울러 ‘甚重’ 1段은 범연하게 논하지 않았으며, 前幅에서는 ‘聽其自附’를 대동해서 말하고, 後幅에는 ‘信其自去’만 말하고서 아울러 ‘自附’ 1句는 대동해서 말하지 않은 점이다. 筆墨이 高妙하여 보통 문장에 우뚝 뛰어났다.[此篇是論隋守天下之失 不是論隋取天下之失 一起說聽其自附 又說信其自去 下雖幷承兩段 其實垂重信其自去一邊 聽其自附不過是帶說 讀至中後自見 此文異處 中間欲說隋視天下甚重 前後都說聖人視天下甚輕 幷不泛論一段甚重 前幅帶說聽其自附 後幅止說信其自去 幷不挽帶一句自附 筆墨高妙 絶乎常蹊]”라고 비평하였다.
徐揚貢은 “冒頭에서 ‘人重而物輕’이라고 한 것은 매우 거리가 먼 말 같았으나 終篇을 읽고 감탄하였다. 2行 내의 문단은 3節인데, 하나는 冒頭로, 또 하나는 正則으로, 다른 하나는 反則으로 하였다.
發端은 3節로 하고 아래에서 다시 두 문단을 만들어 늘려가되 ‘不役天下之利’라고 하고, ‘大度’라고 하고, ‘以術留而始去之矣’라고 하였으니, ‘物輕’의 指目이 점진적으로 도출되었다.
이미 入題해서는 秦나라와 隋나라를 아울러 제기하였는데, 秦나라의 1段은 글귀마다 隋나라를 照應하고, 隋나라의 1段은 글귀마다 秦나라를 끌어당겼다. 뒤에서는 다시 古人의 修德을 이끌어서 物이 輕하다는 說을 밝혔으니, 太王의 去邠이 바로 ‘物輕’의 증거인 것이다.
結語를 悠揚하게 함으로써 輕의 머무르지 않음이 없음을 보여 重의 떠남이 더욱 빠름을 反照하였으니, 의미가 극히 담백하고 극히 원대하였다.
대개 文定의 문장은 먼 곳이 바로 그 가까운 곳이고, 담백한 곳이 바로 그 짙은 곳이며, 또한 너그러운 곳이 바로 긴박한 곳이고, 느린 곳이 바로 빠른 곳이니, 이는 智者를 위해 말할 만한 것이다.[冒頭人重而物輕 似甚遠 讀終篇乃歎 兩行內凡三節 一冒一正一反 發端三節 下復作兩段引伸 曰不役天下之利 曰大度 曰以術留而始去之矣 物輕之指 漸引漸出 旣入題 秦隋幷提 秦一段 句句照應隋 隋一段 句句挽秦 後復引古人修德 明物所以輕之說 太王去邠 是物輕之証 結語悠揚 見輕之未嘗不留 反照重之而去愈速 極澹極遠 蓋文定之文 遠處是其近處 澹處是其濃處 且寬處是緊 徐處是疾 此可爲智者道耳]”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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