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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3)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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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欲覽天下都邑沃饒之地하여 於以擇使興利하니 甚爲有見이요 而行文 如輕風細浪하니 柔婉可愛니라
古者建都立邑 相其丘陵原隰하여 而利其水泉之道하고 通其所無而導其所有하여 使民日取而不盡하니 安居於中而無慕於外利하고 各安其土樂其業하여 無來去遷徙之心이니이다
膏腴之鄕 民不加多하고 而貧瘠之處 民不加少하여 天下之戶 平均若一하니 皆足以供其郡縣之役使而無所困乏이니이다
蓋今天下所謂通都大邑 十里之城 萬户之郭 其陰陽向背
與其山林原隰之勢 陂池泉水之利 皆以來 所謂創置摹畵
使足以衣食其民而無乏絶者也니이다
臣嘗讀 登高望遠하여 以求其可居之地 與其可用之物 莫不詳悉而曲盡이니이다
曰 篤공류公劉 逝彼백천百泉하여 瞻彼漙原하고 乃陟하여 乃覯于京이로다하고
공류公劉 旣溥旣長이어늘 旣景乃岡하여 相其陰陽하며 觀其流泉이로다하고
공류公劉斯館하여위수爲亂하고 取礪取鍜로다하니
夫古之君子 居於其邦 其欲知民之所利與器用之所出 蓋如此其詳也니이다
導之有方하고 而取之有法이면 則其民豐樂饒足하여 老死而無憾이리니이다
及行天下 覽其山林之所生 與其民之所有하니 往往與古不類니이다
夫自以北 한수漢水之側 三代之時 列國數十이니이다
人都於형주荊州하니 其在戰國 最爲强大하여 外抗군만群蠻하고 內禦하며 常以其兵橫於天下니이다
計其所 安肯用瘠鹵墝埆之地리잇가
而當今自之北으로 至於之間 平田萬里언만 農夫逃散하여 不生五榖하니 荊棘布野而地至肥壤하고 泉源陂澤之迹 迤邐猶在니이다
其民不知水耕之利하고장리長吏又不以爲意하니 一遇水旱하면 民乏菜茹니이다
往者因其死喪流亡으로 廢縣罷鎭者 蓋往往是矣니이다
臣聞善爲政者 不用甲兵하고 不斥疆界하며 興利除害하고 敎民稼穡하여 收斂倍稱하고 而獲兼地之福이라하나이다
今者擧千里之地 廢之爲墟하여 以養禽獸하되 而不甚顧惜하니 此與私割地以予人何異리잇가
嘗聞之於野人컨대오대五代以來 天下喪亂하여 驅民爲兵하니당주등주여주채주之間 故陂舊隄 遂以堙廢而不治라하나이다
이니 其間猶未甚遠也니이다
蓋修敗補缺 或亦旬月之故耳 而獨患爲吏者 莫以爲事니이다
若夫허주許州 非有대강大江之衝이요 而每年盛夏 衆水決溢이언만 無以救禦 是以 民常苦饑而不樂其俗이니이다
절도사使歲輒被水而五榖不熟이면 則其當時軍旅之費 종묘宗廟朝廷之用 將何以供之리잇가
此豈非近世之弊 因循不治하여 以至此哉잇가
이나 此乃特臣之所見이요
而天下之廣 又安能備知리잇가
蓋嘗以爲 方今之患 生於太怯하여 而成於牽俗이니이다
太怯則見利而不敢爲하고 牽俗則自顧而愛其身이니이다
夫是以 天下之事 擧皆不成이니 而何獨在此리잇가
臣欲破其牽俗之風하고 而壯其太怯之氣니이다
意凡天下貧窶破散之郡縣 使皆擇善事能幹之人하여 而往爲之長하고 因其去也 而天子親諭以此하고 使得稍久於其任이니이다
何者잇가 此非難辦之事
是以 不待非常之才而後能濟니이다
惟其弛放怠惰 是以至此 今誠少嚴其事하여 使爲吏者 知上之屬意於此하면 十歲之後 臣以爲此必爲富壤之區 而方今天下重征之處 亦可漸減하여 而取諸此矣리니이다
여주채주장강한수之間以來百戰之國이라 世用鋒鏑하니 大略當世之承平者 什特二三이요 而吏於其土者 或不得其人與久其任而重其權이라
是以 田野不闢하여 而多曠土遺利니라 소씨蘇氏父子 往往注心於此니라


03. 백성을 위하는 정치에 대한 책문策文 8
천하의 도읍을 세웠던 비옥한 땅을 관찰하여 그곳을 골라서 흥리興利를 하게 하려고 하였으니, 매우 안목이 있었고, 행문行文이 솔솔 부는 바람과 잔잔하게 이는 물결과 같으니, 그 유순한 자태가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다.
옛날 도읍을 세울 때에는 구릉丘陵원습原隰을 관찰하여 수천水泉의 길을 편리하게 만들었으며, 없는 물품은 조달하고 있는 물품은 유통시켜 백성들이 날마다 취해 써도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백성들은 그 도읍 안에서 편하게 살면서 도읍 밖의 것들을 흠모하지 않고 각각 그 땅을 편안히 여기고 그 직업을 즐겨 왔다 갔다 이사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질이 비옥한 고을은 인구가 더 늘어나지 않고, 토질이 척박한 곳은 인구가 더 줄지 아니하여 천하의 호구가 하나같이 균등하였으니, 모두 족히 그 군현郡縣역사役使를 이바지하여 곤핍困乏한 바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소위 ‘통도대읍通都大邑’은 10리에 뻗친 내성內城만호萬戶를 감싼 외곽外郭의 그 음양陰陽향배向背,
그리고 산림山林원습原隰의 형세, 피지陂池천수泉水의 이로운 것들은 모두 이래 소위 ‘창치創置, 모화摹畵’한 것이니,
백성들로 하여금 의식이 풍족하여 핍절乏絶한 생활을 하는 자가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찍이 주시周詩인 〈공류公劉〉 1을 읽어보았더니, 거기에 에서 으로 옮겨올 때에 높은 곳에 올라 먼 데를 바라보며 살 만한 땅과 쓸 수 있는 물건들을 구하는 과정을 말한 것이 너무도 자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에 “후덕하신 공류公劉께서는 저 백천百泉에 가셔서 저 넓은 언덕을 보시고 남산南山의 등성이에 오르시어 높은 언덕을 보셨도다.”라고 하고,
“후덕하신 공류公劉께서는 토지가 이미 넓고 길거늘 해의 그림자를 관찰하시고 산등성이에 올라가셔서 음지와 양지를 보시며 그 흐르는 물을 관찰하셨도다.”라고 하고,
“후덕하신 공류公劉께서는 땅에 관사를 정하사 위수渭水를 건너 가로질러 가시어 숫돌과 쇠를 취해 오셨도다.”라고 하였으니,
옛날의 군자君子는 그 나라에 거함에 백성의 편리한 바와 기용器用의 나오는 바를 알려고 한 것이 이처럼 자상하였습니다.
따라서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을 봄에 군국郡國소유所有동방東方상마桑麻어염魚鹽, 남방南方죽목竹木어도魚稻, 서방西方오곡五榖축목畜牧, 북방北方조율棗栗구마裘馬였으니, 무릇 한 지방의 소유所有는 모두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치상하는 도구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인도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취하는 데에 법도가 있었다면, 그 백성들은 풍락豐樂요족饒足하여 늙어죽어도 유감이 없었을 것입니다.
천하를 두루 다닐 때에 그 산림山林수택藪澤의 생긴 바와 그 백성의 있는 바를 관람하였더니, 이따금 옛날과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대강大江 이북으로부터 한수漢水의 부근까지는 삼대三代 때에 수십 나라가 널려 있었습니다.
나라 사람은 형주荊州에 도읍을 세웠는데, 나라는 전국戰國에 있어서 가장 강대强大하여 밖으로는 군만群蠻을 막고 안으로는 을 방어하였으며, 항상 군사로써 천하에 횡행하였습니다.
그 도읍을 세운 곳을 살펴보면 어찌 척박한 땅에 도읍을 세우려 하였겠습니까?
현재 나라의 북쪽으로부터 의 사이에 이르기까지는 평전平田이 만 리나 펼쳐졌건만 농부農夫들이 도산逃散하여 오곡五榖을 생산하지 않으니, 형극荊棘이 들을 덮은 채로 토지는 지극히 비옥하고, 천원泉源피택陂澤의 흔적이 구불구불 이어져 오히려 남아 있습니다.
백성들은 수경水耕의 이익을 알지 못하고 장리長吏는 또한 관심을 갖지 않으니, 한 번 수재水災한재旱災를 만나면 백성들은 푸성귀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과거에 백성들의 사상死喪, 유망流亡으로 인하여 을 폐지하고 을 없애는 일이 이따금 생깁니다.
은 듣건대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갑병甲兵을 사용하지 않고 강계疆界를 개척하지 않으며,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일을 제거하며, 백성에게 농사짓는 일을 가르쳐서 갑절 더 수확하고 토지의 까지 겸해서 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 리의 땅을 모두 폐허로 만들어 금수禽獸를 기르되 너무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으니, 이는 사사로이 땅을 떼어 남에게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일찍이 야지 사람에게 듣건대 ‘오대五代 이래로 천하가 상란喪亂하여 백성들을 몰아가 병정兵丁으로 삼으니 당주唐州등주鄧州여주汝州채주蔡州의 사이에 옛날의 제방이 인몰 폐기된 채 수리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오대五代에서〉 지금까지는 백여 년밖에 안 되니, 그 사이는 오히려 매우 먼 것이 아닙니다.
깨지고 손상된 곳을 보수하는 기간은 열흘이나 한 달가량 걸릴 것이지만, 다만 관리가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허주許州 같은 경우는 홍수가 범람하는 황하黃河대강大江(長江)이 부딪치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매년 한여름에 여러 물들이 터져서 넘치는 정도이건만 그것을 막지 않은지라, 이러므로 백성들이 항상 굶주림에 시달려 그 풍속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대개 허주許州제후諸侯의 옛 나라요, 무제武帝가 도읍을 세운 곳이요, 나라 절도사節度使가 다스리던 곳이니, 가사 해마다 수해를 입어 오곡五榖이 영글지 않게 하였다면 그 당시 군려軍旅의 비용과 종묘宗廟조정朝廷의 수용을 어떻게 제공하였겠습니까?
이것은 근세의 폐단이 구습舊習을 고수하고 수리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다만 의 눈에 보인 것일 뿐입니다.
천하의 넓은 곳에 있는 것들을 또한 어떻게 갖추어 알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생각하건대, 현재의 걱정거리는 너무 겁을 먹는 데에서 생겨 세속에 끌리는 바가 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너무 겁을 먹으면 이익이 되는 일을 보아도 감히 하지 못하고, 세속에 끌리면 스스로 돌아보며 그 몸을 아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천하의 일이 모두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단지 이것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니 은 세속에 끌리는 풍습을 깨뜨리고 너무 겁을 먹는 기단氣短한 사람을 씩씩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의 생각에는, 천하에 가난해서 파산破散군현郡縣에는 모두 일을 잘 처리할 재간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가서 이 되게 하고, 그들이 임지로 떠나갈 때에는 천자天子께서 친히 이런 뜻으로 유시하시며, 그 임지에 약간 오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민人民의 많음과 전야田野의 개간 상태를 살펴 적어 올리게 해서 고과考課의 자료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므로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오직 방종하고 태만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지금 진실로 그 일을 조금 엄하게 다루어 관리가 된 자로 하여금 위에서 여기에 유의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면 10년 뒤에 가서는 여기가 반드시 기름진 토양이 될 것이고, 현재 정세征稅를 무겁게 부과하는 곳도 점점 감해가면서 그 부족량을 여기에서 취할 수 있을 것으로 은 생각합니다.
여주汝州채주蔡州 그리고 장강長江한수漢水의 사이는 대개 나라 이래로 많이 싸우던 나라들이라, 대대로 무기를 사용하였으니, 대략 당세의 평안함을 계승하는 나라는 10분의 2, 3뿐이었고, 관리는 그 땅에서 적격자를 얻지 못하였거나 또는 그 재임기간을 오래 유지시키지 않았거나 그 권한을 존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므로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못하여 빈 땅과 버려진 이물利物이 많았던 것인데, 소씨蘇氏 부자父子가 이따금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


역주
역주1 民政策 八 : 《欒城應詔集》에는 篇首에 ‘臣聞’ 2字가 있다.
역주2 周詩公劉之一篇 其言自戎遷豳之際 : ‘公劉之一篇’은 《詩經》 〈大雅 公劉〉 1편을 가리킨다. 〈公劉〉 詩의 序에 대한 鄭箋에서 “公劉는 后稷의 曾孫인데, 夏나라가 처음 衰退할 때에 쫓김을 당하여 豳 땅으로 옮아갔는데, 백성을 거처시키는 데에 방법이 있었다.[公劉者 后稷之曾孫也 夏之始衰 見迫逐 遷於豳而有居民之道]”라고 밝혔다.
역주3 南岡 : 鄭箋에서는 南山의 등성이로 풀이하였다.
역주4 及觀史記貨殖列傳……北方之棗栗裘馬 : 《史記》 〈貨殖列傳〉에 “山西 지방에는 재목, 대나무, 곡물, 모시, 장식용의 털, 玉石이 풍부하고, 山東 지방에는 물고기, 소금, 옻칠, 실, 聲色이 많고, 江南 지방에는 녹나무, 가래나무, 생강, 계수나무, 금, 주석, 黃連, 丹沙, 물소, 瑇瑁, 珠璣, 齒革이 나고, 龍門과 碣石의 북쪽 지방에는 말, 소, 양, 旃裘, 筋角이 많으며, 銅과 鐵이 나는 산은 사방 천 리에 마치 바둑알이 놓이듯이 이따금씩 있으니, 이것이 그 대략이다. 모든 중국 인민이 좋아하는 바는 謠俗, 被服, 飮食 등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치상하는 기구들이었다.”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5 藪澤 : 沼澤 또는 大澤을 가리킨다.
역주6 大江 : 長江을 가리킨다.
역주7 : 京都를 가리킨다.
역주8 唐鄧汝潁陳蔡許洛 : 唐‧鄧‧汝‧潁‧陳‧蔡‧許는 모두 宋代의 州名이고, 洛은 洛陽으로 宋代의 西京이었다.
역주9 至今百有餘年 : 五代에서 宋 神宗 때까지가 백여 년이 된다.
역주10 洪河 : 홍수가 범람하는 黃河를 가리킨다.
역주11 夫許……而唐節度之所治 : ‘許’는 周代의 나라 이름인데, 뒤에 鄭나라에게 멸망되었다. 그러므로 ‘諸侯의 옛 나라’라고 한 것이다. ‘魏武’는 곧 魏 武帝 曹操를 가리키고, 曹操의 魏나라는 도읍을 許昌에 세웠으니, 바로 許州의 소재지인 것이다. 唐나라는 일찍이 許에 節度使를 설치하였다.
역주12 察其人民多田野闢者 書以爲課 : 관리가 다스리는 郡縣의 인구가 많고 田野가 개간된 것을 살펴 적어 올리게 해서, 관리의 정치적 치적을 고찰하는 考課의 자료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13 <주석명/> : 孫琮은 《山曉閣選宋大家蘇潁濱全集》에서 “황무지를 개간할 책임이 長吏(官長)에게 있다는 것이 바로 1편의 主意이다. 妙味는 다음과 같은 문단에 있다.
前幅에서는 옛날 지력을 다 활용하던 것을 끌어와서 오늘날 지력을 다 활용하지 못한 것을 반사시켰고, 後幅에서는 천하에서 지력을 잘 활용하지 못한 데까지 확대해 가서 唐‧鄧 諸郡이 지력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을 드러내 보였다. 前後를 통하여 두 번 확대해 적었으니, 氣局이 문득 전개되었다.
중간에서는 公劉의 詩와 〈貨殖列傳〉을 인용하여 과거의 沃饒한 光景이 완연하게 눈에 보이도록 적었다. 荊은 楚의 옛 도읍지였고 許는 옛날의 건국 지역이었던 것까지를 말하여, 오늘날의 耗弊 情形이 惻然히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드러냈다.
끝에 가서는 풍속에 끌리는 것을 깨뜨리고 몹시 겁먹는 마음을 씩씩하게 가지게 하려고 하면서, 재간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오래 재임시키게 할 것을 가지고 本旨를 맺었다.
이는 참으로 經術을 가지고 經濟를 잘 표출한 것이니, 子由가 시대의 어려운 문제에 留意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훌륭한 제도는 쉽게 터득하지 못했을 것이다.[開墾荒蕪 責在長吏 是一篇主意 妙于前幅歷引古之能盡地利者 反照今日不能盡地利 後幅推廣到天下不能盡地利 形起唐鄧諸郡不能盡地利 前後兩番寫得闊大 氣局便爾舒展 中間引公劉之詩 貨殖之傳 寫得昔日沃饒光景宛然在目 至言荊爲楚之舊都 許爲古之建國 形出今日耗弊情形惻然傷心 末欲破其牽俗 壯其太怯 而以擇材干 久任使 結出本旨 此眞能以經術出爲經濟者 非子由留意時艱 未易得此偉制也]”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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