欲覽天下都邑沃饒之地하여 於以擇使興利하니 甚爲有見이요 而行文이 如輕風細浪하니 柔婉可愛니라
古者建都立邑은 相其丘陵原隰하여 而利其水泉之道하고 通其所無而導其所有하여 使民日取而不盡하니 安居於中而無慕於外利하고 各安其土樂其業하여 無來去遷徙之心이니이다
膏腴之鄕은 民不加多하고 而貧瘠之處는 民不加少하여 天下之戶 平均若一하니 皆足以供其郡縣之役使而無所困乏이니이다
蓋今天下所謂通都大邑은 十里之城과 萬户之郭의 其陰陽向背와
與其山林原隰之勢와 陂池泉水之利 皆진秦한漢以來 所謂創置摹畵니
臣嘗讀
에 登高望遠
하여 以求其可居之地
와 與其可用之物
이 莫不詳悉而曲盡
이니이다
其
시詩曰 篤
공류公劉 逝彼
백천百泉하여 瞻彼漙原
하고 乃陟
하여 乃覯于京
이로다하고
篤공류公劉는 旣溥旣長이어늘 旣景乃岡하여 相其陰陽하며 觀其流泉이로다하고
篤공류公劉는 于빈豳斯館하여 涉위수渭爲亂하고 取礪取鍜로다하니
夫古之君子는 居於其邦에 其欲知民之所利與器用之所出이 蓋如此其詳也니이다
니 則凡一
동방方之所有
는 皆可以備養生送死之具
니이다
導之有方하고 而取之有法이면 則其民豐樂饒足하여 老死而無憾이리니이다
及行天下
에 覽其山林
之所生
과 與其民之所有
하니 往往與古不類
니이다
夫自
以北
한수漢水之側
은 三代之時
에 列國數十
이니이다
초楚人都於형주荊州하니 其在戰國에 最爲强大하여 外抗군만群蠻하고 內禦진秦진晉하며 常以其兵橫於天下니이다
而當今自
초楚之北
으로 至於
之間
은 平田萬里
언만 農夫逃散
하여 不生五榖
하니 荊棘布野而地至肥壤
하고 泉源陂澤之迹
이 迤邐猶在
니이다
其民不知水耕之利하고 而장리長吏又不以爲意하니 一遇水旱하면 民乏菜茹니이다
往者因其死喪流亡으로 廢縣罷鎭者 蓋往往是矣니이다
臣聞善爲政者는 不用甲兵하고 不斥疆界하며 興利除害하고 敎民稼穡하여 收斂倍稱하고 而獲兼地之福이라하나이다
今者擧千里之地를 廢之爲墟하여 以養禽獸하되 而不甚顧惜하니 此與私割地以予人何異리잇가
嘗聞之於野人컨대 自오대五代以來로 天下喪亂하여 驅民爲兵하니 而당주唐등주鄧여주汝채주蔡之間에 故陂舊隄 遂以堙廢而不治라하나이다
蓋修敗補缺은 或亦旬月之故耳나 而獨患爲吏者 莫以爲事니이다
若夫
허주許州는 非有
대강大江之衝
이요 而每年盛夏
에 衆水決溢
이언만 無以救禦
라 是以
로 民常苦饑而不樂其俗
이니이다
니 절도사使歲輒被水而五榖不熟
이면 則其當時軍旅之費
와 종묘宗廟朝廷之用
을 將何以供之
리잇가
蓋嘗以爲 方今之患은 生於太怯하여 而成於牽俗이니이다
太怯則見利而不敢爲하고 牽俗則自顧而愛其身이니이다
夫是以로 天下之事 擧皆不成이니 而何獨在此리잇가
意凡天下貧窶破散之郡縣은 使皆擇善事能幹之人하여 而往爲之長하고 因其去也에 而天子親諭以此하고 使得稍久於其任이니이다
惟其弛放怠惰
라 是以至此
니 今誠少嚴其事
하여 使爲吏者
로 知上之屬意於此
하면 十歲之後
엔 臣以爲此必爲富壤之區
요 而方今天下重征之處
도 亦可漸減
하여 而取諸此矣
리니이다
여주汝채주蔡장강江한수漢之間은 蓋진秦以來百戰之國이라 世用鋒鏑하니 大略當世之承平者는 什特二三이요 而吏於其土者에 或不得其人與久其任而重其權이라
是以로 田野不闢하여 而多曠土遺利니라 소씨蘇氏父子 往往注心於此니라
03. 백성을 위하는 정치에 대한 책문策文 8
천하의 도읍을 세웠던 비옥한 땅을 관찰하여 그곳을 골라서 흥리興利를 하게 하려고 하였으니, 매우 안목이 있었고, 행문行文이 솔솔 부는 바람과 잔잔하게 이는 물결과 같으니, 그 유순한 자태가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다.
옛날 도읍을 세울 때에는 구릉丘陵과 원습原隰을 관찰하여 수천水泉의 길을 편리하게 만들었으며, 없는 물품은 조달하고 있는 물품은 유통시켜 백성들이 날마다 취해 써도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백성들은 그 도읍 안에서 편하게 살면서 도읍 밖의 것들을 흠모하지 않고 각각 그 땅을 편안히 여기고 그 직업을 즐겨 왔다 갔다 이사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질이 비옥한 고을은 인구가 더 늘어나지 않고, 토질이 척박한 곳은 인구가 더 줄지 아니하여 천하의 호구가 하나같이 균등하였으니, 모두 족히 그 군현郡縣의 역사役使를 이바지하여 곤핍困乏한 바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소위 ‘통도대읍通都大邑’은 10리에 뻗친 내성內城과 만호萬戶를 감싼 외곽外郭의 그 음양陰陽과 향배向背,
그리고 산림山林과 원습原隰의 형세, 피지陂池와 천수泉水의 이로운 것들은 모두 진秦‧한漢 이래 소위 ‘창치創置, 모화摹畵’한 것이니,
백성들로 하여금 의식이 풍족하여 핍절乏絶한 생활을 하는 자가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臣이 일찍이 주시周詩인 〈공류公劉〉 1편篇을 읽어보았더니, 거기에 융戎에서 빈豳으로 옮겨올 때에 높은 곳에 올라 먼 데를 바라보며 살 만한 땅과 쓸 수 있는 물건들을 구하는 과정을 말한 것이 너무도 자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 시詩에 “후덕하신 공류公劉께서는 저 백천百泉에 가셔서 저 넓은 언덕을 보시고 남산南山의 등성이에 오르시어 높은 언덕을 보셨도다.”라고 하고,
“후덕하신 공류公劉께서는 토지가 이미 넓고 길거늘 해의 그림자를 관찰하시고 산등성이에 올라가셔서 음지와 양지를 보시며 그 흐르는 물을 관찰하셨도다.”라고 하고,
“후덕하신 공류公劉께서는 빈豳 땅에 관사를 정하사 위수渭水를 건너 가로질러 가시어 숫돌과 쇠를 취해 오셨도다.”라고 하였으니,
옛날의 군자君子는 그 나라에 거함에 백성의 편리한 바와 기용器用의 나오는 바를 알려고 한 것이 이처럼 자상하였습니다.
따라서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을 봄에 군국郡國의 소유所有는 동방東方의 상마桑麻와 어염魚鹽, 남방南方의 죽목竹木과 어도魚稻, 서방西方의 오곡五榖과 축목畜牧, 북방北方의 조율棗栗과 구마裘馬였으니, 무릇 한 지방의 소유所有는 모두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치상하는 도구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인도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취하는 데에 법도가 있었다면, 그 백성들은 풍락豐樂이 요족饒足하여 늙어죽어도 유감이 없었을 것입니다.
천하를 두루 다닐 때에 그 산림山林과 수택藪澤의 생긴 바와 그 백성의 있는 바를 관람하였더니, 이따금 옛날과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대강大江 이북으로부터 한수漢水의 부근까지는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 때에 수십 나라가 널려 있었습니다.
초楚나라 사람은 형주荊州에 도읍을 세웠는데, 초楚나라는 전국戰國에 있어서 가장 강대强大하여 밖으로는 군만群蠻을 막고 안으로는 진秦‧진晉을 방어하였으며, 항상 군사로써 천하에 횡행하였습니다.
그 도읍을 세운 곳을 살펴보면 어찌 척박한 땅에 도읍을 세우려 하였겠습니까?
현재 초楚나라의 북쪽으로부터 당唐‧등鄧‧여汝‧영潁‧진陳‧채蔡‧허許‧낙洛의 사이에 이르기까지는 평전平田이 만 리나 펼쳐졌건만 농부農夫들이 도산逃散하여 오곡五榖을 생산하지 않으니, 형극荊棘이 들을 덮은 채로 토지는 지극히 비옥하고, 천원泉源과 피택陂澤의 흔적이 구불구불 이어져 오히려 남아 있습니다.
백성들은 수경水耕의 이익을 알지 못하고 장리長吏는 또한 관심을 갖지 않으니, 한 번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만나면 백성들은 푸성귀도 제대로 먹지 못합니다.
과거에 백성들의 사상死喪, 유망流亡으로 인하여 현縣을 폐지하고 진鎭을 없애는 일이 이따금 생깁니다.
신臣은 듣건대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갑병甲兵을 사용하지 않고 강계疆界를 개척하지 않으며,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일을 제거하며, 백성에게 농사짓는 일을 가르쳐서 갑절 더 수확하고 토지의 복福까지 겸해서 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 리의 땅을 모두 폐허로 만들어 금수禽獸를 기르되 너무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으니, 이는 사사로이 땅을 떼어 남에게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일찍이 야지 사람에게 듣건대 ‘오대五代 이래로 천하가 상란喪亂하여 백성들을 몰아가 병정兵丁으로 삼으니 당주唐州‧등주鄧州‧여주汝州‧채주蔡州의 사이에 옛날의 제방이 인몰 폐기된 채 수리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오대五代에서〉 지금까지는 백여 년밖에 안 되니, 그 사이는 오히려 매우 먼 것이 아닙니다.
깨지고 손상된 곳을 보수하는 기간은 열흘이나 한 달가량 걸릴 것이지만, 다만 관리가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허주許州 같은 경우는 홍수가 범람하는 황하黃河나 대강大江(長江)이 부딪치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매년 한여름에 여러 물들이 터져서 넘치는 정도이건만 그것을 막지 않은지라, 이러므로 백성들이 항상 굶주림에 시달려 그 풍속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대개 허주許州는 제후諸侯의 옛 나라요, 위魏 무제武帝가 도읍을 세운 곳이요, 당唐나라 절도사節度使가 다스리던 곳이니, 가사 해마다 수해를 입어 오곡五榖이 영글지 않게 하였다면 그 당시 군려軍旅의 비용과 종묘宗廟‧조정朝廷의 수용을 어떻게 제공하였겠습니까?
이것은 근세의 폐단이 구습舊習을 고수하고 수리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다만 신臣의 눈에 보인 것일 뿐입니다.
천하의 넓은 곳에 있는 것들을 또한 어떻게 갖추어 알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생각하건대, 현재의 걱정거리는 너무 겁을 먹는 데에서 생겨 세속에 끌리는 바가 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너무 겁을 먹으면 이익이 되는 일을 보아도 감히 하지 못하고, 세속에 끌리면 스스로 돌아보며 그 몸을 아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천하의 일이 모두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단지 이것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니 신臣은 세속에 끌리는 풍습을 깨뜨리고 너무 겁을 먹는 기단氣短한 사람을 씩씩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臣의 생각에는, 천하에 가난해서 파산破散된 군현郡縣에는 모두 일을 잘 처리할 재간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가서 장長이 되게 하고, 그들이 임지로 떠나갈 때에는 천자天子께서 친히 이런 뜻으로 유시하시며, 그 임지에 약간 오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민人民의 많음과 전야田野의 개간 상태를 살펴 적어 올리게 해서 고과考課의 자료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므로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오직 방종하고 태만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지금 진실로 그 일을 조금 엄하게 다루어 관리가 된 자로 하여금 위에서 여기에 유의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면 10년 뒤에 가서는 여기가 반드시 기름진 토양이 될 것이고, 현재 정세征稅를 무겁게 부과하는 곳도 점점 감해가면서 그 부족량을 여기에서 취할 수 있을 것으로 신臣은 생각합니다.
여주汝州와 채주蔡州 그리고 장강長江과 한수漢水의 사이는 대개 진秦나라 이래로 많이 싸우던 나라들이라, 대대로 무기를 사용하였으니, 대략 당세의 평안함을 계승하는 나라는 10분의 2, 3뿐이었고, 관리는 그 땅에서 적격자를 얻지 못하였거나 또는 그 재임기간을 오래 유지시키지 않았거나 그 권한을 존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므로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못하여 빈 땅과 버려진 이물利物이 많았던 것인데, 소씨蘇氏 부자父子가 이따금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