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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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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자유子由고사古史하여 以補사기史記之遺하되 시황복희伏羲신농神農하여 下至시황始皇하니 凡若干卷이니라
予覽其傳末所論次得失하니 其言多確하고 其文旨與태사공太史公互相跌宕이니라
可誦者撮錄二十五首니라


고사古史에 대한
자유子由가 《고사古史》를 저작하여 《사기史記》의 유실遺失을 보충하되 복희伏羲신농神農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시황始皇에 이르렀는데, 약간의 이 되었다.
내가 그 의 말미에 있는 득실得失에 대한 평론을 살펴보았더니, 그 말들이 대부분 정확하였고, 그 글의 뜻도 태사공太史公과 서로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였다.
그래서 독송讀誦할 만한 글 25수를 뽑아 적었다.


역주
역주1 古史論 : 〈古史論〉의 ‘論’자는 아마 茅坤이 붙인 것 같다. 蘇轍의 《古史》 저술 시기에 대한 說은 동일하지 않다.
만년기의 저술이란 설은 〈蘇文定公諡議〉(上海古籍出版社의 《欒城集》 〈附錄〉에 수록)에 “만년엔 퇴출되어 쓰이지 않자 이에 《詩經》‧《春秋》‧《老子》의 傳을 짓고 《古史》를 지었다.[晩年黜不用 于是傳詩春秋老子 作古史]”란 말과, 《欒城後集》 〈歷代論引〉에 “나는 소시에 학문에 힘썼다.……나는 이미 장성해서 벼슬하였는데, 仕宦의 여가엔 한 번도 책 보는 일을 폐지하지 않았다. 《詩經》와 《春秋》의 傳을 짓고, 옛날의 遺文에서 聖賢의 處身과 臨事의 은미한 뜻을 터득하고는 喟然히 한숨을 내쉬었고, 따라서 先儒가 옛적에 깨닫지 못한 바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뒤에 다시 《古史》를 지었는데, 論한 바가 더욱 넓어서 대략 구비되었다고 여긴다.[予少而力學……予旣壯而仕 仕宦之餘 未嘗廢書 爲詩春秋集傳 因古之遺文 而得聖賢處身臨事之微意 喟然太息 知先儒昔有所未悟也 其後復作古史 所論益廣 以爲略備矣]”란 말이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蘇轍의 〈歷代論引〉으로 판단하면 《古史》는 마땅히 만년의 저작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소년기의 저술이란 설은 孫汝聽의 《蘇潁濱年表》에 “蘇轍이 소시에 《太史公書》(《史記》)를 읽고 내용이 소략한 것을 걱정하였다.……그래서 司馬遷의 옛 자료에 따라 위로는 《詩經》‧《書經》‧《春秋》를 보고 방징 자료는 《戰國策》 및 秦漢의 雜錄를 취하여 伏羲‧神農에서 시작해서 秦 始皇帝에 이르렀다. 本紀 7권, 世家 16권, 列傳 37권을 《古史》라고 칭하였는데, 모두 60권이다.[轍少讀太史公書 患其疏略……于是因遷之舊上觀詩書春秋 旁取戰國策 及秦漢雜錄 起伏羲神農訖秦始皇帝爲七本紀十六世家三十七列傳謂之古史 凡六十卷]”란 말과, 蘇轍의 손자 蘇籒가 편한 《欒城先生遺言》에 “공은 16살에 夏‧商‧周의 論을 지었는데, 지금 《古史》에 보인다.[公年十六 爲夏商周論 今見于古史]”란 말이 입증하고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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