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而至
凡數百年之間而後
에 得志於天下
하니 其成功甚難
이나 而享天下之利至緩也
니라
然
이나 하걸桀은주紂旣滅
에 收天下朝諸侯
하여 自處於天子之尊
하니 而下無不服之志
요 에 而天下遂定
이니 蓋其用力亦甚易而無勞也
니라
至於
진秦한漢之際
하여는 其英雄豪傑之士
가 逐天下之利
하되 唯恐不及
하고 而開天下之
하되 惟恐其後之也
니라
若夫五代
는 其事雖不足道
나 然
이나 觀其帝王
이면 起於
하여 海內
하고 戰勝攻取
언만 而
에 天下
하여 遠者不過數十歲
니라
蓋嘗聞之
컨대 하여 虐用其民
하니 而天下叛
하고 이라하니 此二者
는 君子之所以不疑於其間也
로되 而
과 與
는 皆以英武特異之姿
로 據天下
태반太半之地
하고 나 然
이나 終以敗亂而不可解
니 此其勢必有以自取之也
니라
蓋
후당唐후한漢之亂
은 始於功臣
하고 而
후진晉之亂
은 始於
하니 皆以其易取天下之過也
니라
이니라 破
之兵
하고 而
후진後에 天下定於
후진晉이니라 發南征之議
하고 而
후진後에 天下定於
후한漢이니라
故로 후당唐滅於후진晉하고 후진晉亂於흉노匈奴하고 而후한漢亡於후주周니라
蓋功臣
은 負其創業之勳
하고 而
흉노匈奴는 恃其
하여 以要天子
하니 聽之則不可以久安
이요 而誅之則足以召天下之亂
이니라
故
로 하고 하고 하니 而
후주周人不服
하여 以及於禍
니라
彼其初엔 無功臣無흉노匈奴면 則不興이나 而功臣흉노匈奴가 卒起而滅之니라
故로 古之聖人은 有可以取天下之資而不用하고 有可以乘天下之勢而不顧하며 撫循其民하여 以待天下之自至하니 此非以爲苟仁而已矣요 誠以爲天下之不可以易取也니라
無所不爲而就天下니 天下旣安而不之改면 則非長久之計也요 改之而不顧면 此必有以忤天下之心者矣니라
하고 且告以
진晉國之亂
은 將有所立於公子
라하니 중이重耳再拜而辭
하고 亦不敢當也
니라
至於이오夷吾하여는 聞召而起하되 以분양汾陽之田百萬으로 命이극里克하고 以부채負蔡之田七十萬으로 命비정丕鄭하고 而奉진秦以하외河外列城五나
唯其不求入而人入之니 無賂於內外하고 而其勢可以自入이니
其後
에 起於
풍패豐沛之間
하여 從天下武勇之士入
하여 以誅暴
진秦降
하니라
僥倖於一時之利면 則必將有百歲不已之患이니 此所謂不及遠也니라
雖然이나 古帝王之起自匹夫하여 而定天下也는 易하고 及其身爲天子하여 能立綱陳紀하고 深謀曲慮하여 而垂萬世之業也는 難이니라
눈에 보이는 가까운 이익을 탐하면 반드시 먼 훗날 걱정거리가 있게 된다.
어찌 제왕帝王이 천하天下를 취하는 일만 그렇겠는가?
옛날에 상商나라와 주周나라가 일어남은 직稷과 설契에서 시작하여 수백 년을 내려와 탕湯과 무武에 이르러서야 천하天下에 뜻을 이루었으니, 그 공을 이루는 것은 매우 어려웠지만 천하天下의 이익을 누리는 기간은 지극히 오래갔다.
그러나 하걸夏桀과 은주殷紂가 이미 멸망하자, 천하天下를 거두고 제후諸侯를 조회시키며 스스로 천자天子의 높은 지위에 처하니, 아래에서 복종하지 않을 뜻을 가진 자가 없었고, 한 명의 필부匹夫를 베자 천하天下가 드디어 안정되었으니, 아마 그 힘쓰는 일 또한 워낙 쉬워서 수고로움이 없었을 것이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교차 지점에 이르러서는 영웅호걸英雄豪傑의 인사들이 천하天下의 이익을 쫒아가되 행여 미치지 못할세라 염려하였고, 천하天下의 화란禍亂을 전개하되 행여 뒤질세라 두려워하였다.
대택향大澤鄕에서 나 보란 듯이 뽐내는 뜻으로 팔짓을 하니 천하天下의 인사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향응響應하였고, 하루 정도의 짧은 기간을 싸워서 천 리나 되는 땅을 개척하였으니, 천하天下를 취득한 것이 이처럼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天下가 일단 평정되자 군신君臣의 명분이 이미 밝혀졌고, 해내海內를 나누어 여러 장수들을 왕으로 앉혔으니, 장차 무궁하게 전하여 백세百世토록 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건만, 몇 해 사이에 공신功臣과 대국大國의 배반자가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났으니, 어찌 그리도 천하를 취하기는 쉬웠고 천하를 지키기는 어려웠을까?
오대五代의 전란 시기와 같은 것은 그 일들을 비록 족히 말할 것이 못 되지만, 그 제왕帝王들을 살펴보면 필부匹夫에서 일어나서 해내海內를 매질하고 전승戰勝하여 천하를 취득하였건만, 후량後梁 이후로 채 백 년도 못 되어서 천하天下의 제왕帝王이 다섯 번이나 바뀌어 오래 천하를 가진 자도 수십 년을 넘지 못하였다.
그 지려智慮가 끝내는 후세後世에 미치기에 부족하였으니 이 또한 매우 괴상하게 여길 만한 일이로다.
일찍이 듣건대, 후량後梁이 망함은 부자父子, 형제兄弟가 서로 도멸屠滅하여 그 백성들을 포학하게 이용하니 천하天下가 배반해서였고, 후주後周가 망함은 마침 성인聖人이 일어남을 만나서 자립할 수 없어서였다고 하니, 이 두 나라의 경우는 군자君子가 그 망한 점에 대해 의심할 나위가 없겠지만, 후당後唐의 장종莊宗‧명종明宗과 후진後晉‧후한後漢의 고조高祖는 모두 영무英武하고 특이特異한 자질로 천하天下의 태반太半 땅을 차지하였고, 그 자손子孫에 이르러서도 재력材力과 지용智勇 또한 모두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으나 끝내 패란敗亂으로 헤어날 수 없었으니, 이는 그 형세에 반드시 자초한 모종의 결과가 있었을 것이다.
대개 후당後唐과 후한後漢의 난亂은 공신功臣에게서 시작되었고, 후진後晉의 난亂은 융적戎狄에게서 시작되었으니, 모두 천하天下를 너무도 쉽게 취한 탓이었다.
장종莊宗의 난亂은 후진後晉 고조高祖가 군사를 이끌고 이문夷門으로 달려가게 되고, 그 뒤에 천하天下가 명종明宗에게 정착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고, 후당後唐의 망함은 흉노匈奴가 장경달張敬達의 군사를 깨뜨리게 되고, 그 뒤에 천하天下가 후진後晉에 정착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흉노匈奴의 화禍는 후주後周 고조高祖가 남쪽을 정벌할 대책을 발의하게 되고, 그 뒤에 천하天下가 후한後漢에 정착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므로 후당後唐은 후진後晉에게 멸망되었고, 후진後晉은 흉노匈奴에게 난亂을 당하였고, 후한後漢은 후주後周에게 망하였다.
대개 공신功臣은 창업創業의 공훈을 자부하고, 흉노匈奴는 후당後唐의 군대를 패배시킨 공로를 믿고서 천자天子를 협박하였으니, 그들의 청을 들어준다면 오래 편안함을 누릴 수 없고, 그들을 베어 죽인다면 족히 천하의 난亂을 초래할 것이다.
한 명의 공신功臣을 죽이니 천하天下가 모두 일어나서 반항하였다.
그러므로 후당後唐은 후진後晉 고조高祖의 권한을 빼앗다가 망하였고, 후진後晉은 흉노匈奴의 화친和親을 끊었다가 멸망하였고, 후한後漢은 양빈楊邠과 사조史肇를 베어 죽이니 후주後周 사람들이 신복하지 않아 화禍에 미쳤다.
저들이 처음에는 공신功臣과 흉노匈奴가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지만, 결국은 공신功臣과 흉노匈奴가 일어나서 멸망시켰다.
그러므로 예전 성인聖人은 천하天下를 취할 수 있는 자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천하天下를 취할 수 있는 형세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서, 오직 백성들을 어루만져 천하의 인심이 자발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니, 이는 구차스럽게 인仁을 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정말로 천하天下는 쉽게 취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오대五代 적에는〉 천하天下를 구하려고 하면서 쉽게 얻는 방법으로 구하였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천하를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지 못할 바가 없었다.
하지 못할 바가 없이 하여 천하를 취득하였으니, 천하天下가 이미 안정되었는데도 〈천하를 유지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천하를 장구長久히 유지하는 계책이 아니고, 고치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 진晉 헌공獻公이 이미 죽고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적翟 땅에 있었는데, 이극里克이 해제奚齊와 탁자卓子(悼子)를 죽이고 중이重耳를 불렀으나 중이重耳는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
진왕秦王이 공자公子 집縶을 시켜 가서 백성을 위무慰撫하게 하고, 또 진晉나라의 난亂은 장차 공자公子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고하니, 중이重耳은 재배再拜하여 사례하고 또한 감히 나서지 않았다.
이오夷吾의 경우에는 부름을 받고 일어서되, 〈자기가 진晉나라로 들어가는 일을 잘 주선할 수 있도록〉 이극里克에게는 분양汾陽의 농지 백만百萬을 뇌물로 주겠다고 약속하고, 비정丕鄭에게는 부채負蔡의 농지 칠십만七十萬을 뇌물로 주겠다고 약속하고, 진秦나라에게는 하외河外의 열성列城 다섯을 뇌물로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미 진晉나라로 들어오고 나서는 국내외 사람에게 뇌물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가 하면, 이극里克과 비정丕鄭을 죽이고 군사를 보내 진秦나라와 관계를 끊었다가 군사가 패하자 자신은 사로잡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뒤에 문공文公이 서서히 일어나서 수습하니, 대신大臣은 안에서 문공文公을 지원하고,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는 밖에서 문공文公을 추대하였으며, 문공文公이 이미 진晉나라로 돌아와서는 제후諸侯에게 패자霸者가 되었다.
입국을 구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입국하게 하였으니 국내외에 뇌물을 주지 않고도 그 형세상 스스로 입국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공文公은 진晉나라로 돌아와서 후환이 없었던 것이다.
그 뒤에 유계劉季가 풍패豐沛의 사이에서 일어나 천하天下의 무용武勇한 군사를 따라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서 포악暴惡한 진秦나라를 토벌하여 자영子嬰을 항복시켰다.
이때에 공功이 제후諸侯 중에 으뜸이었으니, 그 형세는 결국 제왕帝王에 이를 수 있었다.
이것은 모두 패공沛公이 스스로 한 것이고, 여러 장수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적項籍(項羽)을 고릉固陵까지 추격했다가 군사가 패함에 여러 장수들이 이르지 않자 이에 수천 리의 땅을 떼어서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에게 주었지만, 이 두 사람은 결국 그 공을 자부하고 배반하여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천하天下를 취할 때는 일시의 이익을 요행히 바라서는 안 된다.
일시의 이익을 요행히 바란다면 반드시 장차 백세토록 그치지 않을 화환禍患이 있을 것이니, 이는 이른바 ‘멀리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옛적에 제왕帝王이 필부匹夫로부터 일어나서 천하天下를 평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몸이 천자天子가 됨에 미쳐 능히 기강紀綱을 세우고 모려謀慮를 깊이 하여 만세萬世의 업業을 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