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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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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7. 광무제光武帝에 대한
東漢之亡以宦官이요 而沖質以後 由女后稱制
동한東漢의 멸망은 환관宦官 때문이었고, 충제沖帝질제質帝 이후에는 여후女后천자天子의 일을 대행한 데서 연유하였다.
其積禍養亂 以至於此니라
그러므로 를 쌓고 을 기른 것이 이에 이르렀다.
子由以之咎光武不任大臣所致 似亦太過이나 其論亦正하니 姑錄而識之니라
자유子由가 ‘광무光武대신大臣에게 맡기지 않은 소치’라고 나무란 것은 너무 과도한 것 같지만, 그 또한 올바르니, 우선 기록해둔다.
高帝擧天下後世之重하여 屬之大臣하고 大臣亦盡其心力하여 以報之니라
고제高帝천하天下 후세後世의 중책을 모두 대신大臣에게 맡겼고, 대신大臣 또한 심력心力을 다하여 보답하였다.
그러므로 여씨呂氏에는 진평陳平주발周勃이 힘을 써서 여산呂産여록呂祿주살誅殺하고 문제文帝를 세우기를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하였다.
當是時 大臣權任之盛 하고 하니 則高帝之用人 其重如此니라
이때에 대신大臣이 마냥 권한을 부리는 것은 그 유풍遺風이 서로 전하였고, 신도가申屠嘉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등통鄧通을 불러다가 욕을 보이고 조조鼂錯를 참수하자고 의논하였으나 문제文帝경제景帝는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고제高帝의 사람 씀이 그 중요도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景武之後 此風衰矣니라
경제景帝무제武帝 이후에는 그와 같은 풍조가 쇠퇴하였다.
大臣用舍 僅如僕隷니라
대신大臣임면권任免權을 행사하는 대상은 겨우 노예奴隷 같은 정도였다.
武帝之老也 將立少主어늘 知非大臣不可하고 乃委任霍光하니 霍光之權 在諸臣右니라
무제武帝가 늙음에 장차 어린 임금을 세워야 되겠거늘, 대신大臣이 아니면 불가不可할 줄 알고 이에 곽광霍光에게 위임하니 곽광霍光의 권세가 여러 신하의 위에 놓였다.
그러므로 능히 소제昭帝를 보필하고 선제宣帝를 세우니, 천하天下에서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至於宣帝하여는 雖明察有餘 而性本忌刻하니 非張安世之謹畏 陳萬年之順從이면 鮮有能容者니라
선제宣帝로 말하면 비록 명찰력明察力은 남아났지만 성질이 본래 투기妬忌하고 각박刻薄하였으니, 장안세張安世처럼 근외謹畏한 사람과 진만년陳萬年처럼 순종順從한 사람이 아니라면 용납될 수 있는 자가 적었다.
惡楊惲蓋寬饒하고 害趙廣漢韓延壽하며 悍然無惻怛之意하니 高才之士 側足而履其朝니라
양운楊惲합관요蓋寬饒를 미워하고 조광한趙廣漢한연수韓延壽를 살해하는 등 워낙 사나워서 측은해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 높은 재주를 가진 선비들이 두려워서 감히 바로 서지 못한 채 조정에 있는 형편이었다.
하여는 朝無重臣하여 養成니라
점점 쇠미衰微해져 원제元帝성제成帝 때에 와서는 조정에 중신重臣이 없어 왕씨王氏를 양성하였다.
莽以 濟之以欺罔이나 而世無一人 敢指其非者니라
그러므로 왕망王莽이 하찮은 재식才識을 가지고 기망欺罔으로 다스렸지만, 세상에서 한 사람도 감히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없었다.
光武之興 雖文武之略 足以鼓舞一世 而不知用人之長하여 以濟其所不足이니라
광무제光武帝가 일어남엔 비록 문무文武지략智略이 족히 한 세상을 고무鼓舞하였지만, 남의 장점을 써서 자기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줄을 몰랐다.
幸而皆賢하여 權在人主
다행히 자손子孫들이 모두 어질어서 권한이 군주君主에게 있었다.
其害不見이니라
그러므로 그 가 나타나지 않았다.
화제和帝에 와서는 아직 유소幼少하여 두태후竇太后국정國政을 천단하였다.
竇憲兄弟恣橫하여 殺都鄕侯暢於朝하고 事發 請擊匈奴以自贖이니라
두헌竇憲 형제가 마음대로 횡포를 부려 도향후都鄕侯 유창劉暢조중朝中에서 죽이고 일이 발각되자 흉노匈奴를 쳐서 스스로 속사贖死하기를 청하였다.
及其成功하여는 又欲立北單于하여 以植恩固位하니라
그 일이 성공함에 미쳐서는 또 북선우北單于를 세워서 은혜를 심어 지위를 굳게 하려고 하였다.
원안袁安임외任隗는 다 삼공三公으로서 정의를 지키고 힘써 간쟁諫諍하였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는데, 다행히도 두헌竇憲역모逆謀로써 패하였다.
蓋光武不任大臣之積其弊 乃見於此니라
대개 광무제光武帝대신大臣에게 맡기지 않은 누적된 병폐가 여기서 나타난 것이다.
其後漢日以衰하여 이요 이요 大臣皆無所與니라
그 뒤 나라는 날마다 하여 급기야 염현閻顯주살誅殺하고 순제順帝를 황제로 세움은 그 환관宦官에게서 나왔고, 청하왕淸河王을 내쫓고 이고李固를 죽임은 그 일이 외척外戚에게서 이루어졌으며, 대신大臣은 모두 참여한 바가 없었다.
及其末流하여는 梁冀之害重하니 天下不能容하여 하고 하니라
말류末流에 미쳐서는 양기梁冀가 심중하자, 천하天下가 수용할 수 없어서 다시 환관宦官의 힘을 빌어서 제거하였고, 환관宦官가 극심하자 천하天下가 견딜 수 없어서 외병外兵을 불러서 제거하기까지 하였다.
外兵旣入 而東漢之祚盡矣 蓋光武不任大臣之禍 勢極於此니라
외병外兵이 이미 들어옴에 동한東漢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대개 광무제光武帝대신大臣에게 맡기지 않은 의 위험한 세태勢態가 여기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 것이다.
夫人君 不能皆賢이니 君有不能而屬之大臣 朝廷之正也니라
대개 군주君主들은 다 어질 수는 없으니, 군주君主에게 유능한 점이 없으면 대신大臣에게 맡기는 것이 조정朝廷정도正道이다.
事出於正이면 則其成多하고 其敗少니라
일이 정도正道에서 나오면 성공은 많고 실패는 적다.
歷觀古今컨대 大臣任事而禍至於不測者 必有故也니라
고금古今을 내리 보건대, 대신大臣이 일을 맡아 가 예상치 못한 지경에 이른 경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今畏忌大臣하여 而使他人得乘其隙하니 不在外戚이면 必在宦官이니라
지금 대신大臣을 두려워하고 꺼려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틈을 타게 하니, 외척外戚에 있지 않으면 반드시 환관宦官에게 있다.
外戚宦官更相屠滅하여 至以外兵繼之하니 嗚呼殆哉로다
외척外戚환관宦官이 번갈아 서로 도멸屠滅하기 때문에 외병外兵을 가지고 잇따르기까지 하니, 아! 위태롭도다.
역주
역주1 漢光武論 : 光武는 곧 高祖의 7대손이자 東漢의 창건자인 光武帝 劉秀이다.
《欒城集》에는 〈漢光武 上〉과 〈漢光武 下〉로 되어 있는데, 本文은 바로 〈漢光武 下〉를 취한 것이다.
역주2 高帝擧天下後世之重……若反覆手之易 : 《史記》 〈高祖紀〉에 “呂后가 ‘폐하께서 승천하신 뒤에 蘇相國(蕭何)이 곧 죽을 것인데, 누구로 대신할까요?’라고 물으니, 高祖는 ‘曹參이 가하다.’라고 답하였다. ‘그 다음은 누가 좋을까요?’ 하니, ‘王陵이 가하다. 그러나 조금 어리석은데, 陳平이 도울 것이다. 陳平은 지혜가 남아돈다. 그러나 단독으로 맡기기는 어렵다. 周勃은 후중하고 문식이 적다. 그러나 劉氏를 편안하게 해줄 자는 반드시 周勃일 것이니, 太尉를 시키는 것이 좋다.’라고 했다.”는 말이 보인다.
또 《史記》 〈呂太后本紀〉에 의하면 “呂祿은 上將軍이 되어 北軍을 거느리고, 呂産은 相國이 되어 南軍을 거느리고 關中을 어지럽혀 劉氏를 위태롭게 하니, 太尉 周勃이 詔書를 위조해서 北軍에 들어가니, 北軍이 모두 劉氏 편을 들어서 周勃이 드디어 北軍을 장악하였다. 丞相 陳平이 朱虛侯를 불러 周勃을 돕게 하였으므로 呂産이 未央宮에 들어가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周勃이 朱虛侯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죽이게 하였다. 이에 呂氏의 남녀를 모두 잡아서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베어 죽였다. 또 少帝‧梁王‧淮陽王‧常山王은 모두 진짜 孝惠帝의 아들이 아니라고 해서 베어 죽었다. 그리고 代王을 세워 天子로 삼으니, 이가 바로 孝文皇帝였다.”고 한다.
역주3 風流相接 : 遺風이 서로 전함을 가리킨다.
역주4 至申屠嘉……而文景不以爲忤 : 《漢書》 〈申屠嘉傳〉에 의하면 “鄧通이 文帝의 幸臣이 되어 항상 文帝의 곁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므로 申屠嘉가 鄧通을 부르자, 鄧通은 丞相府로 나와서 冠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조아려 申屠嘉에게 사죄하니, 머리가 터져서 피가 났다. 文帝는 申屠嘉가 鄧通을 욕보일 줄 알고 사람을 시켜 불러오게 해서 놓아주었다. 景帝 때에 鼂錯는 幸臣으로 用事하였다. 그는 일찍이 太上皇의 사당 담을 뚫어서 문을 냈으므로 申屠嘉가 鼂錯를 誅殺하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景帝는 ‘鼂錯가 뚫은 담은 진짜 사당 담이 아니고 바깥담이니 죄 될 것이 없다.’고 하니, 申屠嘉는 격분하여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역주5 武帝之老也……天下莫敢異議 : 《漢書》 〈霍光傳〉에 의하면 “이때 武帝가 연로하고 寵姬 鉤弋夫人 趙倢伃에게 男兒가 있었으므로 武帝는 그를 後嗣로 삼고 大臣에게 명하여 보좌하게 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여러 신하들을 살펴보니, 오직 霍光만이 중책을 맡겨 社稷을 부탁할 만하였다. 그래서 武帝는 黃門畵家로 하여금 周公이 成王을 업고 諸侯에게 조회 받는 그림을 그리게 해서 霍光에게 주었다.
뒤에 武帝가 병이 위독하자, 霍光이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만일 승천하시면 누가 嗣位에 합당할까요?’라고 물으니, 武帝는 ‘그대는 전에 그려준 그림의 뜻을 모르는가? 어린 아들을 세우고 그대가 周公의 일을 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武帝는 霍光을 봉하여 大司馬 大將軍으로 삼았고, 武帝가 서거한 뒤에 孝昭帝가 嗣位하여 나이 8세였는데, 정사가 일체 곽광에게서 결정되었다고 한다.
역주6 陵遲至於元成 : 元帝 때에는 宦官 弘恭과 石顯 등이 정치에 관여함으로써 후대에 宦官과 外戚이 서로 번갈아 정치를 하는 길을 열어놓았고, 成帝 때에는 外戚이 권력을 휘둘렀으므로 이것이 王莽이 정권을 찬탈하는 조짐이 되었다.
역주7 王氏之禍 : 王莽이 簒位한 禍를 가리킨다.
역주8 斗筲之才 : 斗는 10되, 筲는 12되 들이로 작은 그릇을 뜻하는데, 그것을 비유하여 재주와 식견이 하찮은 사람을 이른다.
역주9 子孫 : 여기서는 孝明帝, 孝章帝 등을 가리킨다.
역주10 及和帝……竇后擅朝 : 《後漢書》 〈孝和孝殤帝紀〉에 의하면 “和帝가 10세로 즉위했기 때문에 竇太后가 垂簾聽政하였다.”고 한다.
역주11 竇憲兄弟恣橫……幸而憲以逆謀敗 : 《後漢書》의 〈皇后紀〉, 〈竇憲傳〉, 〈袁安傳〉 등에 의하면 “竇太后가 垂簾聽政한 뒤에 그의 오빠 竇憲은 侍中, 동생 竇景은 虎賁中郎將, 竇景과 竇环는 中常侍가 되었다. 형제들이 모두 요직에 있었으므로 교만 방종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齊殤王子 都鄕侯 劉暢이 國喪에 조문하러 와서 竇太后에게 총애를 받으니, 竇憲은 劉暢이 총애받은 것을 시기하여 刺客을 보내 劉暢을 屯衛 속에서 살해하였다. 뒤에 일이 발각되자, 竇太后가 노하여 竇憲을 內宮에 가두었다. 竇憲은 誅殺될까 겁이 나서 匈奴를 쳐서 贖死할 것을 자청하고 北單于와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竇憲은 그 戰功을 뽐내며 北虜와 친의를 다질 생각으로 左鹿蠡王 阿佟을 北單于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때 司徒 袁安과 司空 任隗는 정의를 지키고 있었는데, 연달아 상소하여 그 일을 저지하였다. 심지어 朝堂에서 갓을 벗은 채로 諫諍하기까지 하였으나 竇太后가 듣지 않아 결국 北單于를 세우게 되었다.
뒤에 竇憲 등이 皇帝의 살해를 도모하였는데, 和帝는 몰래 그 음모를 알고는 鄧衆 등과 그들을 誅殺할 것을 숙의하여 竇憲 형제를 모두 압박하여 자살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역주12 及其誅閻顯……功出於宦官 : 《後漢書》 〈皇后紀〉와 〈宦者傳〉 등에 의하면 “順帝는 본래 安帝의 太子였는데, 閻皇后의 참소로 인하여 폐해져 濟陰王이 되었다. 安帝가 서거하자, 閻太后가 臨朝하여 오래 國政을 專制하고 싶어서 濟北惠王의 아들 北鄕侯 劉懿를 맞아다가 皇帝로 세웠다. 太后의 형제 閻顯‧閻景‧閻耀‧閻晏 등은 모두 요직을 차지하였다. 少帝가 서거하자, 閻顯 등은 濟北을 정벌하려고 하였다. 宦官 孫程‧王康 등이 江京‧劉晏‧陳達을 죽이고 閻顯 등을 사로잡아 獄에 집어넣어 誅殺하였다.”고 하였다.
역주13 黜淸河王……事成於外戚 : 《漢書》 〈皇后紀〉와 〈李固傳〉 등에 의하면 “沖帝가 帝位에 오르자, 順帝 梁皇后를 皇太后로 높였는데, 太后가 臨朝하였고, 沖帝가 서거하자, 다시 質帝를 세웠는데 太后가 계속 國政을 맡았다. 太后의 兄 大將軍 梁冀가 質帝의 총명과 지혜가 太后의 우환거리가 될까 염려하여 鴆毒으로 살해하였다. 太尉 李固가 淸河王 劉蒜이 나이가 많고 덕이 있으므로 皇帝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梁冀가 그의 妹夫인 蠡吾侯 劉志를 세우니 이가 바로 桓帝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4 及其末流……復假宦官以去之 : 《後漢書》 〈梁冀傳〉과 〈宦者傳〉 등에 의하면 “梁冀의 족속 세력이 막강하므로 百僚가 두려워서 감히 그들의 명을 어기지 못하였는데, 桓帝가 宦官 單超‧徐璜‧具瑗‧左悺‧唐衡 등과 모의해서 군사를 보내 梁冀를 포박하니, 梁冀와 그 妻 孫壽는 자살하고, 양씨와 손씨의 종친도 모두 죽었다. 사건이 끝난 뒤에 宦官 5명은 같은 날 모두 侯에 봉해졌으니, 이로부터 권력이 宦官에게 돌아가 조정이 날마다 어지러웠다.”고 하였다.
역주15 宦官之害極……至召外兵以除之 : 《後漢書》 〈何進列傳〉‧〈宦官傳〉‧〈孝靈帝紀〉 등에 의하면 “靈帝 때에 張讓‧趙忠 등이 정권을 잡으니, 그들이 있는 곳마다 사람들의 蠹害가 되었다. 少帝가 즉위한 뒤에 何太后가 천자의 일을 대행하였는데, 大將軍 何進이 袁紹의 말을 듣고 猛將과 豪傑들을 많이 부르고 아울러 군사를 이끌고 京城으로 가서 何太后를 위협하여 中官의 誅殺을 허락하게 하였다. 드디어 前將軍 董卓을 불러 關中의 上林苑에 주둔시키고, 武猛都尉 丁原으로 하여금 孟津을 불태우게 하였으며, 또한 太山王 劉匡과 東郡太守 橋瑁도 불렀다. 何進은 謀略이 누설되어 宦官에게 피살되었다. 袁紹가 군사를 동원하여 趙忠을 베어 죽이고 宦官도 포박하여 모두 베어 죽였으며, 張讓 등은 河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뒤에 董卓은 少帝를 폐위하고 또 太后와 舞陽君을 죽이니, 何氏가 드디어 망하고 漢室 또한 이로부터 敗亂하였다.”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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