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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3)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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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곡豪擧處 有生色可愛니라
少從士大夫讀書하고 老爲니라
하여 雖朴而博이나진사進士경사京師언만 見擧武藝者하고 心好之하니라
이라 遂棄其舊學하고 畜弓箭習騎射하여 久之業成이나 而不中第니라
하고 去遊진봉秦鳳경원涇原하니 所至 友其秀傑이니라
한존보韓存寶하여 尤與之善이니라
희령熙寧 한존보存寶하주장河州將有功하여희령하주장하주장하니 朝廷稍奇之니라
한존보存寶不習蠻事일새소곡至軍中問焉하니라
경원涇原武夫 死非所惜이나 顧妻子不免寒餓하리니 橐中有銀數百兩이나 非君莫可使遺之者라하니 소곡許諾하니라
卽變姓名하고 懷銀步行하여 往授其子하니 人無知者러라
한존보存寶 소곡逃避강회江淮이라가 會赦乃出이니라
予以鄕閭故 幼而識之하니 知其志節 緩急可託者也니라
소성紹聖 予以罪謫居균주筠州하고균주뇌주하고뇌주순주하며 予兄자첨子瞻 亦自혜주再徙창화군昌化하니라
士大夫皆諱與予兄弟遊하니 平生親友 無復相聞者니라
소곡獨慨然自미산眉山誦言하고 欲徒步訪吾兄弟하니 聞者皆笑其狂이니라
원부元符二年春正月매주梅州遺予書曰 我萬里步行見公하니 이라가 今至매주
不旬日必見이리니 死無恨矣라하니라
予驚喜曰 此非今世人이요 古之人也로다하니라
旣見 握手相泣하고 已而道平生하니 逾月不厭이니라
소곡年七十有三矣 瘦瘠多病하여 非復昔日원수元修니라
將復見자첨子瞻해남海南이어늘 予愍其老且病하여 止之曰 君意則善이나이나 自此至담주數千里 復當渡해남 非老人事也라한대
소곡曰 我自視未卽死也 公無止我하소서하니라
留之不可하여 閱其槖中하니 無數千錢이어늘
予方乏困일새 亦强資遣之니라
船行至신주하니 會有蠻隷竊其槖裝以逃라가 獲於신주新州하고 소곡從之至신주이라가 遂病死니라
予聞哭之失聲하고 恨其不用吾言이니라
이나 亦奇其不用吾言而行其志也니라
조양자趙襄子厄於진양晉陽이니라
지백智伯하니 城不沒者三版일새 縣釡而爨하고 易子而食이니라
群臣皆懈로되고공高恭不失人臣之禮니라
양자襄子 三家之危解니라
소곡於朋友之義 實無愧고공高恭언만 惜其不遇양자襄子而前遇한존보存寶하고 後遇予兄弟니라
予方雜居남이南夷하니 與之起居出入하여 蓋將終焉이니라
雖知其賢이나 尙何以發之리오
소곡有子경원군중涇原軍中이라
爲作傳하여 異日以授之니라
소곡始名이러니 及見之순주循州 改今名云이라하니라


07. 소곡巢谷에 대한 전기傳記
소곡巢谷이 호걸스럽게 거행한 행적을 서술한 부분에 광채가 나서 문장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소곡巢谷원수元修요, 그 아버지는 중세中世며, 미산현眉山縣농가農家 출신이다.
소시에 사대부士大夫를 따라 글을 읽고 노경에 향리鄕里교사校師가 되었다.
소곡巢谷은 어려서 그 아버지의 학문을 전해 받아, 비록 질박하고 소탈하였으나 경사京師에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건만, 무예武藝에 합격된 자를 보고는 마음속으로 퍽 동경하였다.
소곡巢谷은 본디 힘이 센지라, 결국 예전 학문을 버리고 활과 화살을 비축하고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익혀 오랜 시간이 걸린 뒤에 무업武業이 이루어졌으나 무과武科에 합격하지는 못하였다.
서변西邊에 날래고 용감한 무사武士가 많아 말 타고 활 쏘고 공격하고 찌르고 하는 기술이 사방에서 으뜸간다는 소문을 듣고 진봉秦鳳경원涇原 일대에 가서 놀았는데, 그가 가는 곳에선 우뚝 빼어나 걸출한 자들을 벗으로 삼았다.
한존보韓存寶란 자가 있어 그와 사이가 더욱 좋았다.
소곡巢谷이 그에게 병서兵書를 가르쳤으니, 두 사람은 서로 더불어 금석金石처럼 단단한 교우가 되었다.
희령熙寧 연간에 한존보韓存寶하주장河州將이 되어 을 세워서 ‘희하명장熙河名將’이라 불리니, 조정朝廷에서 약간 기특하게 여겼다.
때마침 노주瀘州만이蠻夷 걸제乞弟가 변경에서 소란을 피웠으나 제군諸郡이 제재하지 못하니, 이에 한존보韓存寶에게 명을 내려서 출병出兵하여 그를 치게 하였다.
그런데 한존보韓存寶만이蠻夷의 일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곡巢谷군중軍中으로 맞아 와서 만이蠻夷를 칠 방법을 물었다.
한존보韓存寶가 죄를 얻어 장차 체포되어 감에 반드시 죽을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소곡巢谷에게 이르기를
“나는 경원涇原 무부武夫이므로 죽어도 애석할 것 없지만, 돌아보건대 처자妻子가 춥고 배고픔을 면치 못할 것이니, 전대 속에 수백 냥이 있으나 그대가 아니면 보내서 줄 만한 사람이 없소.”라고 하니, 소곡巢谷은 그의 부탁을 허락하였다.
즉시 변성명變姓名하고서 을 품고 보행步行으로 가서 그 아들에게 전해주었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존보韓存寶가 죽음에 소곡巢谷강회江淮 사이로 도피하였다가, 때마침 사면되어 나왔다.
나는 그와 고향이 같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이인데, 그의 지절志節은 위급할 때에 어려운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내가 조정에 있을 때에 소곡巢谷향리鄕里에서 부침浮沈하였으므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소성紹聖 초년에 나는 죄를 받아 균주筠州적거謫居하였고, 균주筠州에서 뇌주雷州로 옮겨갔고, 뇌주雷州에서 순주循州로 옮겨갔으며, 나의 형 자첨子瞻(蘇軾)도 혜주惠州로부터 재차 폄직되어 창화군昌化郡으로 옮겨갔다.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우리 형제와 종유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평소 친하던 벗도 다시 찾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소곡巢谷만이 개연慨然미산眉山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말하고 도보徒步로 우리 형제를 찾아보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를 미치광이라고 비웃었다.
원부元符 2년 봄 정월에 소곡巢谷매주梅州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지금 만릿길을 걸어서 을 보러 가노라니 잘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지금 매주梅州에 이르렀소이다.
열흘이 채 안 되어서 반드시 을 보게 되리니, 죽어도 한이 없겠소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지금 세상 사람이 아니고, 옛날의 사람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미 만나봄에 손을 잡고 서로 울었고, 그러고 나서 평소 〈쌓인 회포를〉 이야기 하노라니 한 달이 넘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이때에 소곡巢谷의 나이 73세였으니, 수척瘦瘠하고 병이 많아서 다시 예전의 원수元修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장차 다시 자첨子瞻해남海南으로 보러 가려 하거늘, 나는 그가 늙고 병든 것을 민망히 여겨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생각은 좋지만, 여기서 담주儋州까지는 수천 리인데다가 다시 바다를 건너야 하니,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라고 하였다.
소곡巢谷은 말하기를 “나는 자신을 돌아보건대 곧 죽을 사람이 아니니, 은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만류할 수 없어서 그의 행장을 열어보았더니 수천 도 없었다.
당시 나도 곤궁한 형편이므로 근근이 노자를 마련해서 보냈다.
그가 탄 배가 신주新州에 이르자, 마침 만예蠻隷가 있어 그의 행장을 훔쳐 도망치다가 신주新州에서 잡혔고, 소곡巢谷은 그를 쫓아 신주新州에 이르렀다가 드디어 병들어 죽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하다가 실성하고 그가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하였다.
그러나 또한 그가 나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뜻을 행한 것을 기특히 여긴다.
옛날에 조양자趙襄子진양晉陽에서 곤액을 당했다.
지백智伯(知伯)이 나라와 나라의 군대를 인솔하여 물을 터서 포위를 하니, 이 잠기지 않은 면적이 겨우 3(24尺)이었기 때문에 솥을 매달아놓고 밥을 짓고,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다.
이때에 〈나라〉 신하들은 모두 나태하였으나, 오직 고공高恭만은 인신人臣를 잃지 않았다.
양자襄子장맹담張孟談의 계략을 씀에 삼가三家(韓‧)의 위험이 풀렸다.
신하들에게 을 줄 때에 고공高恭을 우선으로 하니, 장맹담張孟談이 말하기를 “진양晉陽에 오직 고공高恭만이 공로가 없었는데 어찌 우선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양자襄子가 말하기를 “진양晉陽에 다른 신하들은 모두 나태하였으나, 오직 고공高恭만은 인신人臣를 잃지 않았으니, 이래서 내가 우선으로 하노라.”고 하였다.
소곡巢谷붕우朋友의 의리에 있어서 실로 고공高恭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였건만, 그가 양자襄子를 만나지 못한 채 앞에서는 한존보韓存寶를 만나고 뒤에서는 우리 형제를 만난 것이 애석하다.
나는 지금 남이南夷에 섞여 살고 있으니 남이南夷와 어울려 기거起居하고 출입出入하며 한평생을 마치려고 한다.
그러니 비록 소곡巢谷의 어짊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발휘시킬 수 있겠는가?
들으니 “소곡巢谷에게 아들 이란 자가 있어 지금 경원군중涇原軍中에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을 지어서 후일에 에게 전해주려고 한다.
소곡巢谷의 처음 이름은 이었는데, 순주循州에서 볼 때에는 지금의 이름인 ‘’으로 고쳤다고 한다.


역주
역주1 巢谷傳 : 《蘇潁濱年表》 元符 2년(1099)의 기록에 “巢谷이란 자가 있어 眉山으로부터 徒步로 蘇轍을 循州에서 찾아보고, 또 장차 蘇軾을 海南에서 만나보러 가다가 新州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3세였는데, 蘇轍이 傳을 지었다.[有巢谷者 自眉山徒步訪轍於循州 又將見軾於海南 行止新州而卒 年七十三 轍爲之傳]”란 것이 바로 이 글이다.
역주2 巢谷……眉山農家也 : 《宋史》 〈卓行 巢谷〉에는 “巢谷은 初名이 穀, 字가 元修, 眉州 眉山 사람이다.[巢谷初名穀 字元修 眉州眉山人]”로 되어 있고, ‘父中世’는 ‘父中谷’으로 되어 있다.
역주3 里校師 : 鄕里 學校의 塾師를 가리킨다.
역주4 谷幼傳父學 : 《宋史》 〈卓行 巢谷〉에는 “아버지 中谷이 그 학문을 전했다.[父中谷 傳其學]”로 되어 있다.
역주5 見擧武藝者……谷素多力 : 《宋史》 〈卓行 巢谷〉에는 “巢谷은 본디 힘이 세었으므로 武藝에 합격된 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퍽 동경하였다.[谷素多力 見擧武藝者 心好之]”로 되어 있다.
역주6 聞西邊多驍勇……爲四方冠 : 《宋史》 〈卓行 巢谷〉에는 “西邊에 날래고 용감한 武士가 많은 것이 사방에서 으뜸간다는 소문을 들었다.[聞西邊多驍勇 爲四方冠]”라고 되어 있다.
역주7 有韓存寶者……二人相與爲金石交 : 《宋史》 〈卓行 巢谷〉에는 “韓存寶와 서로 사이가 더욱 좋아서 그에게 兵書를 가르쳤다.[與韓存寶尤相善 敎之兵書]”라고 되어 있다.
역주8 會瀘州蠻乞弟擾邊……乃命存寶出兵討之 : 《宋史》 〈瀘州蠻傳〉에 “乞弟가 드디어 訛와 더불어 諸部를 침범하자,……涇原副總管 韓存寶에게 詔書를 내려 그를 치게 하니, 韓存寶가 乞弟 등을 불러서 작전을 펼쳐 56村과 13囤을 소탕하였다. 그러자 蠻夷가 항복을 청하여 토지를 납입하고 賦租를 바치기를 원하였으므로 이에 조서를 내려 군대를 철수했다.”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9 及存寶得罪……自料必死 : 《宋史》 〈瀘州蠻傳〉에 의하면 “元豐 3년(1080)에 乞弟가 또 반란을 일으키자, 韓存寶를 불러 三將兵 1만 8천 명을 통솔하고 乞弟를 치게 하였으나 韓存寶는 겁이 나서 진격하지 못했는데, 乞弟는 韓存寶가 무서워서 거짓 항복하였다. 韓存寶는 그를 믿고 군대를 휴식시켰다. 그 뒤 조정에서는 環慶副總管 林廣으로 韓存寶를 대신하고, 韓存寶에게 머뭇거린 죄를 적용하여 誅斬했다고 한다.
역주10 予之在朝……未嘗一見 : 《宋史》 〈卓行 巢谷〉에는 “蘇軾이 黃州에 謫居할 때 巢谷과 同鄕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따라서 그와 더불어 놀았다. 蘇軾과 그 아우 蘇轍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巢谷이 鄕里에 浮沈했기 때문에 한 번도 찾아와 보지 못했다.[蘇軾謫黃州 與谷同鄕 幼而識之 因與之遊 及軾與弟轍在朝 谷浮沈里中 未嘗一來相見]”라고 적고 있다.
역주11 不自意全 : 《宋史》 〈卓行 巢谷〉에는 ‘不意自全’으로 적고 있다.
역주12 決水圍之 : 《戰國策》 〈趙策〉에는 “晉陽을 포위하고 물을 대다.[圍晉陽而水之]”라고 되어 있다.
역주13 張孟談計 : 張孟談의 反間計를 이른다. 《戰國策》 〈趙策〉에 나온다. 張孟談은 몰래 韓나라와 魏나라의 두 임금을 만나 “들으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脣亡則齒寒]’ 합니다. 지금 知伯(智伯)이 당신네 두 나라 군대를 인솔하여 우리 趙나라를 치고 있으니, 趙나라는 망할 것입니다. 우리 趙나라가 망하고 나면 두 임금의 나라가 다음 차례가 됩니다.”라고 설득시켜서 결국 韓나라와 魏나라 두 임금은 知伯을 배반하고 韓나라, 魏나라, 趙나라가 同盟하여 晉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고 한다.
역주14 昔趙襄子厄於晉陽……吾是以先之 : 이 사건이 《戰國策》 〈趙策〉과 《史記》 〈趙世家〉에 보이는데, 글이 서로 조금씩 다르다. 趙襄子는 趙簡子의 아들로 이름은 無恤이다. 簡子가 죽자 無恤이 즉위하였으니, 이가 바로 襄子이다. 趙襄子 23년(B.C. 453)에 晉 大夫 智伯(知伯)이 晉나라, 韓나라, 魏나라 군대를 인솔하여 趙나라를 치니, 趙襄子는 晉陽에서 곤액을 입었다. ‘皆懈’가 《史記》에는 ‘皆有外心’으로 되어 있고, ‘高恭’이 《史記》에는 ‘高共’으로, ‘張孟談’이 《史記》에는 ‘張孟同’으로 되어 있다.
역주15 <주석명/> : 張伯行은 《唐宋八大家文鈔》에서 “巢谷의 意趣는 매우 높았고, 潁濱이 그를 위해 傳을 지어 그 사람의 행적이 묻히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은 후하게 베푸는 도리이다. 그 문장의 짜임새가 살아서 움직이니, 윤택을 가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답다.[巢谷意趣甚高 潁濱爲之作傳 以不沒其人 此厚道也 其敍次生動 不用粉澤自佳]”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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