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雖朴而博
이나 擧
진사進士경사京師언만 見擧武藝者
하고 心好之
하니라
이라 遂棄其舊學
하고 畜弓箭習騎射
하여 久之業成
이나 而不中第
니라
하고 去遊
진봉秦鳳경원涇原間
하니 所至
에 友其秀傑
이니라
희령熙寧中에 한존보存寶爲하주장河州將有功하여 號희령熙하주장河名하주장將하니 朝廷稍奇之니라
我경원涇原武夫니 死非所惜이나 顧妻子不免寒餓하리니 橐中有銀數百兩이나 非君莫可使遺之者라하니 소곡谷許諾하니라
卽變姓名하고 懷銀步行하여 往授其子하니 人無知者러라
한존보存寶死에 소곡谷逃避강회江淮間이라가 會赦乃出이니라
予以鄕閭故로 幼而識之하니 知其志節이 緩急可託者也니라
소성紹聖初에 予以罪謫居균주筠州하고 自균주筠徙뇌주雷하고 自뇌주雷徙순주循하며 予兄자첨子瞻도 亦自혜주惠再徙창화군昌化하니라
士大夫皆諱與予兄弟遊하니 平生親友 無復相聞者니라
소곡谷獨慨然自미산眉山誦言하고 欲徒步訪吾兄弟하니 聞者皆笑其狂이니라
원부元符二年春正月
에 自
매주梅州遺予書曰 我萬里步行見公
하니 이라가 今至
매주梅矣
라
旣見에 握手相泣하고 已而道平生하니 逾月不厭이니라
時소곡谷年七十有三矣니 瘦瘠多病하여 非復昔日원수元修也니라
將復見자첨子瞻於해남海南이어늘 予愍其老且病하여 止之曰 君意則善이나 然이나 自此至담주儋數千里요 復當渡해남海니 非老人事也라한대
船行至신주新하니 會有蠻隷竊其槖裝以逃라가 獲於신주新州하고 소곡谷從之至신주新이라가 遂病死니라
지백智伯率
한韓위魏하니 城不沒者三版
일새 縣釡而爨
하고 易子而食
이니라
소곡谷於朋友之義에 實無愧고공高恭者언만 惜其不遇양자襄子而前遇한존보存寶하고 後遇予兄弟니라
予方雜居남이南夷하니 與之起居出入하여 蓋將終焉이니라
소곡谷始名
곡穀이러니 及見之
순주循州엔 改今名云
이라하니라
소곡巢谷이 호걸스럽게 거행한 행적을 서술한 부분에 광채가 나서 문장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소곡巢谷은 자字가 원수元修요, 그 아버지는 중세中世며, 미산현眉山縣의 농가農家 출신이다.
소시에 사대부士大夫를 따라 글을 읽고 노경에 향리鄕里의 교사校師가 되었다.
소곡巢谷은 어려서 그 아버지의 학문을 전해 받아, 비록 질박하고 소탈하였으나 경사京師에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건만, 무예武藝에 합격된 자를 보고는 마음속으로 퍽 동경하였다.
소곡巢谷은 본디 힘이 센지라, 결국 예전 학문을 버리고 활과 화살을 비축하고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익혀 오랜 시간이 걸린 뒤에 무업武業이 이루어졌으나 무과武科에 합격하지는 못하였다.
서변西邊에 날래고 용감한 무사武士가 많아 말 타고 활 쏘고 공격하고 찌르고 하는 기술이 사방에서 으뜸간다는 소문을 듣고 진봉秦鳳과 경원涇原 일대에 가서 놀았는데, 그가 가는 곳에선 우뚝 빼어나 걸출한 자들을 벗으로 삼았다.
한존보韓存寶란 자가 있어 그와 사이가 더욱 좋았다.
소곡巢谷이 그에게 병서兵書를 가르쳤으니, 두 사람은 서로 더불어 금석金石처럼 단단한 교우가 되었다.
희령熙寧 연간에 한존보韓存寶가 하주장河州將이 되어 공功을 세워서 ‘희하명장熙河名將’이라 불리니, 조정朝廷에서 약간 기특하게 여겼다.
때마침 노주瀘州의 만이蠻夷 걸제乞弟가 변경에서 소란을 피웠으나 제군諸郡이 제재하지 못하니, 이에 한존보韓存寶에게 명을 내려서 출병出兵하여 그를 치게 하였다.
그런데 한존보韓存寶가 만이蠻夷의 일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곡巢谷을 군중軍中으로 맞아 와서 만이蠻夷를 칠 방법을 물었다.
한존보韓存寶가 죄를 얻어 장차 체포되어 감에 반드시 죽을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소곡巢谷에게 이르기를
“나는 경원涇原 무부武夫이므로 죽어도 애석할 것 없지만, 돌아보건대 처자妻子가 춥고 배고픔을 면치 못할 것이니, 전대 속에 은銀 수백 냥이 있으나 그대가 아니면 보내서 줄 만한 사람이 없소.”라고 하니, 소곡巢谷은 그의 부탁을 허락하였다.
즉시 변성명變姓名하고서 은銀을 품고 보행步行으로 가서 그 아들에게 전해주었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존보韓存寶가 죽음에 소곡巢谷은 강회江淮 사이로 도피하였다가, 때마침 사면되어 나왔다.
나는 그와 고향이 같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이인데, 그의 지절志節은 위급할 때에 어려운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내가 조정에 있을 때에 소곡巢谷은 향리鄕里에서 부침浮沈하였으므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소성紹聖 초년에 나는 죄를 받아 균주筠州에 적거謫居하였고, 균주筠州에서 뇌주雷州로 옮겨갔고, 뇌주雷州에서 순주循州로 옮겨갔으며, 나의 형 자첨子瞻(蘇軾)도 혜주惠州로부터 재차 폄직되어 창화군昌化郡으로 옮겨갔다.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우리 형제와 종유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평소 친하던 벗도 다시 찾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소곡巢谷만이 개연慨然히 미산眉山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말하고 도보徒步로 우리 형제를 찾아보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를 미치광이라고 비웃었다.
원부元符 2년 봄 정월에 소곡巢谷은 매주梅州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지금 만릿길을 걸어서 공公을 보러 가노라니 잘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지금 매주梅州에 이르렀소이다.
열흘이 채 안 되어서 반드시 공公을 보게 되리니, 죽어도 한이 없겠소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지금 세상 사람이 아니고, 옛날의 사람이로다.”라고 하였다.
이미 만나봄에 손을 잡고 서로 울었고, 그러고 나서 평소 〈쌓인 회포를〉 이야기 하노라니 한 달이 넘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이때에 소곡巢谷의 나이 73세였으니, 수척瘦瘠하고 병이 많아서 다시 예전의 원수元修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장차 다시 자첨子瞻을 해남海南으로 보러 가려 하거늘, 나는 그가 늙고 병든 것을 민망히 여겨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생각은 좋지만, 여기서 담주儋州까지는 수천 리인데다가 다시 바다를 건너야 하니,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라고 하였다.
소곡巢谷은 말하기를 “나는 자신을 돌아보건대 곧 죽을 사람이 아니니, 공公은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만류할 수 없어서 그의 행장을 열어보았더니 수천 전錢도 없었다.
당시 나도 곤궁한 형편이므로 근근이 노자를 마련해서 보냈다.
그가 탄 배가 신주新州에 이르자, 마침 만예蠻隷가 있어 그의 행장을 훔쳐 도망치다가 신주新州에서 잡혔고, 소곡巢谷은 그를 쫓아 신주新州에 이르렀다가 드디어 병들어 죽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곡哭하다가 실성하고 그가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하였다.
그러나 또한 그가 나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뜻을 행한 것을 기특히 여긴다.
옛날에 조양자趙襄子는 진양晉陽에서 곤액을 당했다.
지백智伯(知伯)이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의 군대를 인솔하여 물을 터서 포위를 하니, 성城이 잠기지 않은 면적이 겨우 3판版(24尺)이었기 때문에 솥을 매달아놓고 밥을 짓고,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다.
이때에 〈조趙나라〉 신하들은 모두 나태하였으나, 오직 고공高恭만은 인신人臣의 예禮를 잃지 않았다.
양자襄子가 장맹담張孟談의 계략을 씀에 삼가三家(韓‧위魏‧조趙)의 위험이 풀렸다.
신하들에게 상賞을 줄 때에 고공高恭을 우선으로 하니, 장맹담張孟談이 말하기를 “진양晉陽의 난難에 오직 고공高恭만이 공로가 없었는데 어찌 우선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양자襄子가 말하기를 “진양晉陽의 난難에 다른 신하들은 모두 나태하였으나, 오직 고공高恭만은 인신人臣의 예禮를 잃지 않았으니, 이래서 내가 우선으로 하노라.”고 하였다.
소곡巢谷은 붕우朋友의 의리에 있어서 실로 고공高恭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였건만, 그가 양자襄子를 만나지 못한 채 앞에서는 한존보韓存寶를 만나고 뒤에서는 우리 형제를 만난 것이 애석하다.
나는 지금 남이南夷에 섞여 살고 있으니 남이南夷와 어울려 기거起居하고 출입出入하며 한평생을 마치려고 한다.
그러니 비록 소곡巢谷의 어짊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발휘시킬 수 있겠는가?
들으니 “소곡巢谷에게 아들 몽蒙이란 자가 있어 지금 경원군중涇原軍中에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전傳을 지어서 후일에 몽蒙에게 전해주려고 한다.
소곡巢谷의 처음 이름은 곡穀이었는데, 순주循州에서 볼 때에는 지금의 이름인 ‘곡谷’으로 고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