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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1)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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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2.
02. 에 대한
此文 如天馬行空이요 而識見 亦深到니라
이 문장은 마치 천마天馬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고, 식견識見 또한 깊이 도달하였다.
나라가 천하天下를 보유한 기간은 30요, 나라가 천하天下를 보유한 기간은 37이며, 나라가 이미 쇠락衰落한 뒤에 다시 일으킨 임금은 다섯 명이었고, 나라가 이미 쇠락衰落한 뒤에 다시 일으킨 임금은 선왕宣王 한 사람뿐이었다.
夫商之多賢君하니 宜若其世之過於周니라
나라는 어진 임금이 많았으니 마땅히 나라를 누리는 세대世代 수가 나라를 넘었어야 했다.
周之賢君 不如商之多언마는 而其久於商者 其故何也
나라의 어진 임금이 나라의 많은 것만 못하였는데도 나라보다 오래 누린 기간이 수백 년이 되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고 和柔馴擾剛强之民하니라
주공周公천하天下를 다스릴 적에는 문장文章과 번다한 를 제정하는 일을 힘쓰고, 억센 백성을 부드럽게 길들였다.
其道本於하고 하여 使民之父子相愛하고 兄弟相悅하여 以無犯上難制之氣하고 行其至柔之道하여 以揉天下之戾心하고 而去其剛毅果敢之志니라
그러므로 그의 나라를 다스리는 법칙은 존자尊者를 높이고, 친자親者를 친애하고, 노인을 귀하게 여기고, 어린이를 사랑함으로써 백성들의 부자父子가 서로 사랑하고, 형제兄弟가 서로 화목하여 윗사람을 침범해 제어하기 어려운 기풍이 없게 하고, 지극히 부드러운 도리를 행함으로써 천하天下의 불순한 인심을 순하게 하고, 강의剛毅하고 과감果敢민지民志를 제거하는 데에 근본을 두었다.
其享天下至久언마는하고 하여 卒於廢爲하니 何者
그러므로 나라를 누린 지 지극히 오래였건만, 〈 왕실王室이 쇠약해지자〉 제후諸侯내지內地를 침범하고 왕실王室의 군대가 진작되지 못하여 결국은 피폐해서 지극히 약한 나라가 되었으니, 그 원인이 무엇인가?
優柔和易 可以爲久 而不可以爲强也일새니라
관후寬厚하고 온화溫和하고 평이平易치국治國의 법칙은 오래 지속시킬 수는 있으나 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若夫商人之所以爲天下者 不可復見矣니라
나라 사람이 어떻게 천하天下를 다스렸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볼 수가 없다.
嘗試求之詩書컨대 詩之寬緩而和柔 書之委曲而繁重者 舉皆周也니라
시험 삼아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찾아보았더니, 중에 관완寬緩하고 화유和柔한 것과 중에 위곡委曲하고 번중繁重한 것들은 전부 주조周朝시가詩歌문헌文獻이었다.
而商人之詩 駿發而嚴厲하고 其書 簡潔而明肅하니 以爲商人之風俗 蓋在乎此矣니라
나라 사람들의 준발駿發하면서 엄려嚴厲하고 간결簡潔하면서 명숙明肅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의 풍속風俗이 대개 이것과 상관이 있었던 것이다.
夫惟天下有剛强不屈之俗也 其後世 有以自振於衰微니라
천하天下에 굴하지 않는 강강剛强한 습속이 있었기 때문에 후세後世에 자력으로 쇠미衰微 중에서 진작하였다.
이나 至其敗也 一散而不可復止니라
그러나 할 때에 접어들어서는 한번 발산하면 다시는 수습할 수가 없었다.
蓋物之强者 易以折이요 而柔忍者 可以久存이니라
대개 사물의 한 것은 쉽게 꺾어지고, 한 것은 오래 존재할 수가 있다.
柔者 可以久存이나 而常困於하고 强者 易以折이나 而其末也 乃可以有所立이니라
반면에 한 것은 오래 존재할 수 있지만 항상 이기지 못할 강자에게 곤욕을 치러야 하고, 한 것은 쉽게 꺾어지지만 최후에는 자립할 수 있는 것이다.
此商之所以不長이요 而周之所以不振也니라
이래서 나라는 장구하지 못하고, 나라는 진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嗚呼
아!
聖人之慮天下 亦有所就而已 不能使之無弊也니라
성인聖人천하天下를 염려함에 있어서는 또한 천하가 좋은 쪽으로 나아가게 했을 따름이고, 폐단이 없게 하지는 못하였다.
使之能久而不能强이요 能以自振而不能以及遠이니 此二者 存乎其後世之賢與不賢矣니라
오래 지속하게 할 수는 있어도 강하게 할 수는 없었으며, 자력으로 진작하게 할 수는 있어도 장원하게 미쳐가게 할 수는 없었으니, 이 두 가지는 후세 군주君主가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에 달려 있을 뿐이다.
태공太公나라에 봉해졌을 때 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무공武功을 숭상하니, 주공周公이 “후세後世에 반드시 찬시簒弑할 신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공周公나라를 다스릴 때에 친자親者를 친애하고 존자尊者를 존중하니, 태공太公이 “후세後世에 점점 쇠약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夫尊賢尚功 則近于强하고 親親尊尊 則近于弱이니라
대개 어진 이를 존중하고 무공武功을 숭상하는 것은 에 가깝고, 친자親者를 친애하고 존자尊者를 존중하는 것은 에 가깝다.
終之齊有하고이니라
결국에 나라에는 전씨田氏가 있었고, 나라 사람들은 맹주盟主의 명령에 시달렸다.
蓋商之政 近於齊하고 而周公之所以治周者 其所以治魯也니라
대개 나라의 정치는 나라에 가깝고, 주공周公나라를 다스린 방법은 바로 나라를 다스린 방법이었다.
齊强而魯弱하고 魯未亡而齊亡也
그러므로 나라는 하고 나라는 하였으며, 나라는 하지 않고 나라는 하게 된 것이다.
子由謂商之治尚嚴이라
자유子由는 “나라의 정치 방법은 엄중嚴重함을 숭상하였다.
其享國不及周之八百이라하니라
그러므로 나라를 누린 것이 나라의 800년에 미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予竊疑컨대 商書曰 이라하니 則商之政 未必一於猛也니라
나는 의심컨대, 〈상서商書〉에 “사나움을 대신하되 너그러움으로 했다.”라고 하였으니, 나라의 정치는 반드시 맹학猛虐으로 일관하지 않았다.
按禮記컨대 雖有商人先刑罰而後 爵禄之言이나 要之多雜於漢儒附會之言이니 而未必聖人之至者니라
예기禮記》를 상고하면, 비록 “나라 사람은 형벌刑罰을 먼저 베푼 뒤에 작록爵禄을 행했다.”라는 말이 있지만, 결국은 한유漢儒부회附會한 말이 많이 섞여 있으니, 반드시 성인聖人의 지극한 논지가 못 된다.
且周自平王以後 一變而爲春秋 再變而爲戰國이나 而周天子 特懸空名於上者 五百餘年이니라
나라는 평왕平王 이후로 한 번 변하여 춘추春秋시대가 되고 두 번 변하여 전국戰國시대가 되었지만, 나라 천자天子는 다만 공명空名만을 위에 달아둔 지 500여 년이 되었다.
蓋其列國 各擅土地甲兵而不能相一이나 而其所不敢屠周者 斯則文武禮敎之遺澤 在焉耳니라
대개 열국列國이 각각 토지土地갑병甲兵을 마음대로 하여 서로 통일할 수 없었으나, 그들이 감히 나라를 무찌르지 못한 것은 바로 문왕文王무왕武王이 베푼 예교禮敎유택遺澤이 있었기 때문이다.
商之六百 未嘗不以天子臨諸侯也
나라의 역년 600년은 일찍이 천자天子의 자격으로 제후諸侯에 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商之曆 雖不及周 而其實過之니라
그러므로 나라의 역년은 비록 나라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 실적은 나라를 앞섰다.
이나 以齊魯譬之 其迹 若近이나 而其情 不可考矣니라
그러나 나라와 나라를 가지고 비유한 것은 그 형적은 가까운 것 같지만, 그 실정은 상고할 수 없다.
역주
역주1 商論 : 이 〈商論〉 또한 소싯적 작품일 것인데, 《欒城集》에 실려 있는 商論과 출입이 비교적 크다.
역주2 商之有天下者 三十世 : 成湯이 夏나라를 멸하고 나서 국호를 ‘商’이라 하고 亳에 도읍을 세웠다. 盤庚이 도읍을 殷으로 옮기고 국호를 ‘殷’이라 하였다. 成湯으로부터 시작되고 紂에 이르러 周 武王에게 멸망되었는데, 30世에 걸쳐 나라를 보유하였고, 통치한 君主는 총 30명이었다.
역주3 周之世三十有七 : 周나라를 세운 武王으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赧王에 이르기까지 37명의 君主가 周나라를 통치하였다.
역주4 商之旣衰而復興者 五王 : 《史記》 〈殷本紀〉에 의하면, 殷나라는 雍己 때에 衰落한 것을 太戊가 다시 일으켰고, 河亶甲 때에 쇠락한 것을 祖乙이 다시 일으켰고, 陽甲 때에 쇠락한 것을 盤庚이 다시 일으켰고, 小辛과 小乙 때에 쇠락한 것을 武丁과 祖庚이 다시 일으켰다.
역주5 周之旣衰而復興者 宣王一人而已 : 《史記》 〈周本紀〉에 의하면, 周나라는 懿王 때부터 쇠락하기 시작하여 孝王‧夷王‧厲王을 거치는 동안에 더욱 衰敗하였는데, 宣王이 召公과 周公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으켰다.
역주6 乃數百歲 : 商나라가 지속된 역년은 645년, 周나라가 지속된 역년은 820년이니, 後者가 165년 더 많다.
역주7 蓋周公之治天下 : 周公은 周 武王의 아우로서 武王을 도와 周나라를 세웠고, 武王이 죽고 成王이 어리자 攝政하였다.
역주8 : 《欒城集》에는 ‘爲’로 되어 있다.
역주9 文章 : 여기서는 禮樂制度 등을 가리킨다.
역주10 務以文章繁縟之禮 : 繁多한 禮樂制度를 제정한 일을 가리킨다. 周公이 《周禮》를 지었다고 전한다.
역주11 尊尊而親親 : 《禮記》 〈喪服小記〉에 “親者(父母)를 親愛하고 尊者(祖宗)를 높이며, 웃어른들(兄과 旁親)을 어른으로 받들고, 남녀의 분별을 두는 것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중에 큰 것이다.[親親 尊尊 長長 男女之有別 人道之大者]”라고 보이니, 곧 이 구절은 친족의 질서관계를 가리킨 것이다.
역주12 貴老而慈幼 : 《禮記》 〈祭義〉에 “先王이 天下를 다스리는 법칙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덕이 있는 자를 귀하게 여기고, 귀한 자를 귀하게 여기고, 노인을 귀하게 여기고,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先王이 天下를 정하는 법칙이다.[先王之所以治天下者五 貴有德 貴貴 貴老 敬長 慈幼 此五者 先王之所以定天下]”라고 보이니, 곧 이 구절은 사회도덕을 가리킨 것이다.
역주13 諸侯內侵 : 《史記》 〈周本紀〉에 의하면, 平王 때부터 周 王室이 衰微하기 시작하여 楚‧秦‧梁 등 諸侯國이 선후로 周나라를 攻伐하였다.
역주14 京師不振 : 京師는 王師이니, 곧 周 王室의 군대가 振作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역주15 至弱之國 : 周나라의 후기에는 諸侯國의 攻伐에 대하여 조금도 저항능력이 없는 지극히 약한 王室로 전락하였다.
역주16 不勝 : 弱이 强을 이길 수 없음을 가리킨다.
역주17 太公封于齊……後世寢衰矣 : 《漢書》 〈地理志〉에 “옛날 太公이 처음 齊나라에 봉해지자, 周公이 ‘어떻게 齊나라를 다스리는고?’라고 물으니, 太公이 ‘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武功을 숭상한다.’라고 하자, 周公이 ‘후세에 반드시 簒弑할 신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뒤 29世 만에 强臣 田和에게 멸망되었다. 周公이 처음 魯나라에 봉해지자, 太公이 ‘어떻게 魯나라를 다스리는고?’라고 하자, 周公이 ‘尊者를 존중하고 親者를 친애한다.’라고 하니, 太公이 ‘후세에 점점 쇠약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魯나라는 文公 이후로 정권이 公室을 떠나 大夫에게로 넘어가서, 季氏가 昭公을 쫓아냈으며, 公室은 점점 미약해져서 34世 만에 楚나라에게 멸망되었다.”라고 하였다.
역주18 田氏之禍 : 춘추시대 陳나라 공자 陳完이 齊나라에 망명하여 桓公 밑에서 벼슬하면서 陳氏를 田氏로 바꾸었는데, 그의 후손이 점점 장성해져서 卿大夫가 되었고, 그의 9세손인 田和에 이르러서는 끝내 姜氏의 齊나라를 차지하였다.
역주19 魯人困於盟主之令 : 춘추시대에 齊나라가 자주 魯나라를 攻伐하였다. 齊나라가 諸侯의 군사를 會盟할 때에는 항상 盟主가 되었으니, 곧 魯나라 사람들이 항상 齊나라의 명령에 시달림당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20 嗚呼라 聖人之慮天下………니라 : 孫琮의 《山曉閣選宋大家蘇潁濱全集》에는 “‘强한 것은 꺾이기 쉽고 柔한 것은 오래 존재한다.’는 말은 物理에 입각해서 國祚를 단정한 것이니, 또한 다 맞지 않는 말인 것 같지만, 바로 子由가 한 말이니, 반드시 맞는 말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商나라는 賢君이 많았지만 世代가 짧았고, 周나라는 賢君이 적었지만 曆年이 길었다.’는 것으로 말을 일으켰고, 이하에서는 ‘周나라는 和柔로써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로 나라를 長久히 누린 이유를 보였으며, 자연스럽게 商나라를 끌어냈고, 商나라의 풍속은 《詩》와 《書》에서 보여주었다. 또한 편리한 쪽으로 의론을 전개해 나가 物理上에 이르러서 商나라가 장구하지 못한 까닭과 周나라가 진작하지 못한 까닭을 분해하였고, 후면에서는 단지 治齊와 治魯의 强弱‧久近을 가지고 끝을 맺었다. 篇中에서 《詩》와 《書》를 추구한 一段은 바로 實論이다. 商나라 전후는 모두 客을 끌어와서 서로 비추었고, 客을 끌어온 곳의 意思는 곧 商나라에 집중시켰으니, 이 때문에 다른 의론으로 옮겨갈 수가 없었다.[强者易折 柔者久存 就物理以斷國祚 似亦有未盡然者 乃自子由說來 則可信以爲必然 起言商之賢君多而世促 周之賢君少而曆長 以下將周以和柔爲治 見得長久之由 順勢帶出商來而商之風俗 則于詩書見之 又就便推開到物上 分解商之不長 周之不振之故 後面只以治齊 治魯之强弱久近 閑閑收煞 篇中惟求之詩書一段 是實論 商前后 都是引客來相形 其引客處意思 却注着商上 所以移作他論不得]”라고 비평하였다.
역주21 代虐以寬 : 《書經》 〈尙書 伊訓〉에 “우리 商王이 聖武를 펴서 드러내어 사나움을 대신하되 너그러움으로 하니, 백성들이 믿고 그리워하였다.[惟我商王 布昭聖武 代虐以寬 兆民允懷]”라고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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