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之賢君
이 不如商之多
언마는 而其久於商者
니 其故何也
오
故
로 其道本於
하고 하여 使民之父子相愛
하고 兄弟相悅
하여 以無犯上難制之氣
하고 行其至柔之道
하여 以揉天下之戾心
하고 而去其剛毅果敢之志
니라
故
로 其享天下至久
언마는 而
하고 하여 卒於廢爲
하니 何者
오
嘗試求之詩書컨대 詩之寬緩而和柔와 書之委曲而繁重者는 舉皆周也니라
而商人之詩는 駿發而嚴厲하고 其書는 簡潔而明肅하니 以爲商人之風俗이 蓋在乎此矣니라
夫惟天下有剛强不屈之俗也라 故로 其後世에 有以自振於衰微니라
蓋物之强者는 易以折이요 而柔忍者는 可以久存이니라
柔者
는 可以久存
이나 而常困於
하고 强者
는 易以折
이나 而其末也
엔 乃可以有所立
이니라
聖人之慮天下는 亦有所就而已요 不能使之無弊也니라
使之能久而不能强이요 能以自振而不能以及遠이니 此二者는 存乎其後世之賢與不賢矣니라
夫尊賢尚功은 則近于强하고 親親尊尊은 則近于弱이니라
蓋商之政은 近於齊하고 而周公之所以治周者는 其所以治魯也니라
予竊疑
컨대 商書曰
이라하니 則商之政
은 未必一於猛也
니라
按禮記컨대 雖有商人先刑罰而後에 爵禄之言이나 要之多雜於漢儒附會之言이니 而未必聖人之至者니라
且周自平王以後로 一變而爲春秋요 再變而爲戰國이나 而周天子 特懸空名於上者 五百餘年이니라
蓋其列國이 各擅土地甲兵而不能相一이나 而其所不敢屠周者는 斯則文武禮敎之遺澤이 在焉耳니라
然이나 以齊魯譬之는 其迹은 若近이나 而其情은 不可考矣니라
이 문장은 마치 천마天馬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고, 식견識見 또한 깊이 도달하였다.
상商나라가 천하天下를 보유한 기간은 30세世요, 주周나라가 천하天下를 보유한 기간은 37세世이며, 상商나라가 이미 쇠락衰落한 뒤에 다시 일으킨 임금은 다섯 명이었고, 주周나라가 이미 쇠락衰落한 뒤에 다시 일으킨 임금은 선왕宣王 한 사람뿐이었다.
상商나라는 어진 임금이 많았으니 마땅히 나라를 누리는 세대世代 수가 주周나라를 넘었어야 했다.
주周나라의 어진 임금이 상商나라의 많은 것만 못하였는데도 상商나라보다 오래 누린 기간이 수백 년이 되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주공周公이 천하天下를 다스릴 적에는 문장文章과 번다한 예禮를 제정하는 일을 힘쓰고, 억센 백성을 부드럽게 길들였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를 다스리는 법칙은 존자尊者를 높이고, 친자親者를 친애하고, 노인을 귀하게 여기고, 어린이를 사랑함으로써 백성들의 부자父子가 서로 사랑하고, 형제兄弟가 서로 화목하여 윗사람을 침범해 제어하기 어려운 기풍이 없게 하고, 지극히 부드러운 도리를 행함으로써 천하天下의 불순한 인심을 순하게 하고, 강의剛毅하고 과감果敢한 민지民志를 제거하는 데에 근본을 두었다.
그러므로 나라를 누린 지 지극히 오래였건만, 〈주周 왕실王室이 쇠약해지자〉 제후諸侯가 내지內地를 침범하고 주周 왕실王室의 군대가 진작되지 못하여 결국은 피폐해서 지극히 약한 나라가 되었으니, 그 원인이 무엇인가?
관후寬厚하고 온화溫和하고 평이平易한 치국治國의 법칙은 오래 지속시킬 수는 있으나 강强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상商나라 사람이 어떻게 천하天下를 다스렸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볼 수가 없다.
시험 삼아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찾아보았더니, 시詩 중에 관완寬緩하고 화유和柔한 것과 서書 중에 위곡委曲하고 번중繁重한 것들은 전부 주조周朝의 시가詩歌와 문헌文獻이었다.
상商나라 사람들의 시詩는 준발駿發하면서 엄려嚴厲하고 서書는 간결簡潔하면서 명숙明肅하였으니, 상商나라 사람들의 풍속風俗이 대개 이것과 상관이 있었던 것이다.
천하天下에 굴하지 않는 강강剛强한 습속이 있었기 때문에 후세後世에 자력으로 쇠미衰微 중에서 진작하였다.
그러나 패敗할 때에 접어들어서는 한번 발산하면 다시는 수습할 수가 없었다.
대개 사물의 강强한 것은 쉽게 꺾어지고, 유柔한 것은 오래 존재할 수가 있다.
반면에 유柔한 것은 오래 존재할 수 있지만 항상 이기지 못할 강자에게 곤욕을 치러야 하고, 강强한 것은 쉽게 꺾어지지만 최후에는 자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래서 상商나라는 장구하지 못하고, 주周나라는 진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성인聖人이 천하天下를 염려함에 있어서는 또한 천하가 좋은 쪽으로 나아가게 했을 따름이고, 폐단이 없게 하지는 못하였다.
오래 지속하게 할 수는 있어도 강하게 할 수는 없었으며, 자력으로 진작하게 할 수는 있어도 장원하게 미쳐가게 할 수는 없었으니, 이 두 가지는 후세 군주君主가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에 달려 있을 뿐이다.
태공太公이 제齊나라에 봉해졌을 때 어진 사람을 존중하고 무공武功을 숭상하니, 주공周公이 “후세後世에 반드시 찬시簒弑할 신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공周公이 노魯나라를 다스릴 때에 친자親者를 친애하고 존자尊者를 존중하니, 태공太公이 “후세後世에 점점 쇠약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어진 이를 존중하고 무공武功을 숭상하는 것은 강强에 가깝고, 친자親者를 친애하고 존자尊者를 존중하는 것은 약弱에 가깝다.
결국에 제齊나라에는 전씨田氏의 화禍가 있었고, 노魯나라 사람들은 맹주盟主의 명령에 시달렸다.
대개 상商나라의 정치는 제齊나라에 가깝고, 주공周公이 주周나라를 다스린 방법은 바로 노魯나라를 다스린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제齊나라는 강强하고 노魯나라는 약弱하였으며, 노魯나라는 망亡하지 않고 제齊나라는 망亡하게 된 것이다.
자유子由는 “상商나라의 정치 방법은 엄중嚴重함을 숭상하였다.
그러므로 나라를 누린 것이 주周나라의 800년에 미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의심컨대, 〈상서商書〉에 “사나움을 대신하되 너그러움으로 했다.”라고 하였으니, 상商나라의 정치는 반드시 맹학猛虐으로 일관하지 않았다.
《예기禮記》를 상고하면, 비록 “상商나라 사람은 형벌刑罰을 먼저 베푼 뒤에 작록爵禄을 행했다.”라는 말이 있지만, 결국은 한유漢儒의 부회附會한 말이 많이 섞여 있으니, 반드시 성인聖人의 지극한 논지가 못 된다.
또 주周나라는 평왕平王 이후로 한 번 변하여 춘추春秋시대가 되고 두 번 변하여 전국戰國시대가 되었지만, 주周나라 천자天子는 다만 공명空名만을 위에 달아둔 지 500여 년이 되었다.
대개 열국列國이 각각 토지土地와 갑병甲兵을 마음대로 하여 서로 통일할 수 없었으나, 그들이 감히 주周나라를 무찌르지 못한 것은 바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베푼 예교禮敎의 유택遺澤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商나라의 역년 600년은 일찍이 천자天子의 자격으로 제후諸侯에 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상商나라의 역년은 비록 주周나라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 실적은 주周나라를 앞섰다.
그러나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를 가지고 비유한 것은 그 형적은 가까운 것 같지만, 그 실정은 상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