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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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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표적인 유교 경전으로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이 담긴 어록이다. 편찬자와 편찬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논어(論語)》라는 서명(書名)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뜻이다. 현행본은 〈학이(學而)〉에서 〈요왈(堯曰)〉에 이르는 20편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편의 첫머리를 따서 편명(篇名)을 붙였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에는 《제논어(齊論語)》·《노논어(魯論語)》·《고논어(古論語)》 등 세 가지 논어가 통행하였는데, 서한(西漢) 말에 《노논어》를 중심으로 최초의 교정본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 지금 전해지는 《논어》이다.

2. 저자

(1)성명:공구(孔丘)(공자(孔子)). 공자의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B.C. 551년이라는 설(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과 B.C. 552년이라는 설(《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 있다. 《논어》에는 공자의 언행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저자는 그 문하 제자들인 복상(卜商)(B.C. 507~B.C. 420?), 염옹(冉雍)(B.C. 522~?), 언언(言偃)(?~?), 증삼(曾參)(B.C. 505~B.C. 435), 악정자춘(樂正子春)(?~?), 민손(閔損)(?~?), 공급(孔伋)(B.C. 483?~B.C. 402?) 등으로 추정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2)자(字)·별호(別號):공자의 자는 중니(仲尼)이다. 복상(卜商)의 자는 자하(子夏), 염옹(冉雍)의 자는 중궁(仲弓), 언언(言偃)의 자는 자유(子游), 증삼(曾參)의 자는 자여(子輿), 민손(閔損)의 자는 자건(子騫), 공급(孔伋)의 자는 자사(子思)이다.
(3)출생지역:공자는 춘추시대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鄹邑)(현 중국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에서 출생하였다. 중궁은 노나라, 자유는 오(吳)나라, 자사는 노나라, 민자건은 노나라, 자하는 위(衛)나라 또는 진(晉)나라 온(溫) 출신이다.
(4)주요활동과 생애
공자의 조상은 은(殷) 왕실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 즉, 은나라가 망한 뒤 주공(周公)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인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微子) 계(啓)를 송(宋)나라에 봉했다. 송나라의 제6대 양공(煬公) 희(熙)에게는 아들 불보하(弗父何)가 있었는데, 그가 공자의 조상이다. 그 뒤로 송나라의 10대 대공(戴公)부터 무공(武公)·선공(宣公)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재상 정고보(正考父)가 있었는데, 그 아들 공보가(孔父嘉)가 송나라의 정쟁에 휘말려 피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목금보(子木金父)가 송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옮겨와 살면서, 공보가의 ‘공’자를 따서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자목금보의 고손자(高孫子)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인데, 하급 무사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공자는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 숙량흘이 돌아갔으므로 그 뒤로는 매우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다. 19세 때 노나라의 위리(委吏)(창고의 물건을 관장하는 낮은 관직) 벼슬을 하였고, 그 해에 기관씨(丌官氏) 집안 딸에게 장가들어 다음 해에 아들 리(鯉)를 낳았다. 21세에는 승전리(乘田吏)(가축을 기르는 낮은 관직, 《사기(史記)》에는 사직리(司職吏)라 함)가 되었다. 24세에 어머니 안징재가 돌아갔다. 51세에 노나라 중도재(中都宰)라는 벼슬에 올랐으며, 이어서 사공(司空)에 임명되고, 다음 해에는 사구(司寇)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제나라에서 정공(定公)과 계환자(季桓子)에게 악무에 능한 미녀를 보내자, 정공 등은 이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공자는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모든 벼슬을 버리고 55세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나라를 찾아서 국외로 떠났다. 그 뒤 노나라로 되돌아오기까지 13년 동안 공자는 여러 나라의 임금을 만나 도덕정치의 이념으로 설득을 하였으나 중용되지는 못하였다.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후세에 전할 전적(典籍)으로써 육경(六經)을 편정(編定)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후세 사람들에게 교육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불행은 계속되었다. 69세 되던 해 외아들 리(鯉)가 50세의 나이로 먼저 죽었으며, 다음 해에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고 기대를 걸었던 제자 안연(顔淵)이 죽었다. 다음 해인 B.C. 481년 공자 71세 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麒麟)이 잡혔다. 기린은 예부터 어진 짐승으로서 훌륭한 임금에 의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세에 잘못 나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잡힌 기린을 보고 공자는 자신의 운명을 비춰서 슬퍼하였으며, 이 때 공자는 《춘추》를 저술하고 있었는데 이 책도 ‘서수획린(西狩獲麟)’에서 끝맺고 있다. 다음 해 B.C. 480년 공자 나이 72세에는 자로가 위(衛)나라에서 벼슬하다가 내란에 휩쓸려 비명에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겹친 불행을 겪고서 B.C. 479년 공자는 향년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제자는 3천 명이었는데, 몸소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72명이었다.
공자가 생존했던 춘추(春秋)시대는 B.C. 770년 주(周)나라가 동천(東遷)한 이후부터 진(晉)나라의 대부(大夫)인 한(韓)·위(魏)·조(趙)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춘추시대에는 최초로 철제(鐵製) 농기구가 사용되고 우경(牛耕)이 시작되는 등 경제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으며, 이러한 경제 발전은 사회구조에 변화를 가져와 은(殷)·주(周)로 대표되는 씨족 사회가 사라졌다. 한편 사회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도가 해체되고, 결국 주 왕실의 세력이 약해지자 제후들이 분립 항쟁을 되풀이하며 이른바 춘추오패(春秋五霸)라고 하는 막강한 권력과 뛰어난 능력을 패자가 등장하였다. 혼란이 가중되던 이 시기에는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위해 신분보다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여 학문·사상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하는 사상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공자 역시 당시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약했던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공자의 이상과 그 실현을 위한 노력이 집약되어 있는 책이 바로 《논어》라고 할 수 있다.
(5)주요저작:공자(孔子)는 《춘추(春秋)》를 지었고, 《시경(詩經)》을 산삭(刪削)하였으며 《서경(書經)》의 편찬 및 정리에 관여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주역》의 십익(十翼)을 지었다고 한다.

3. 서지사항

《논어》는 공자의 어록(語錄)으로써 사서(四書) 중의 하나이며, 유가(儒家) 최고의 성전(聖典)이다. 《논어》는 ① 공자의 말 ②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③ 공자가 당시 위정자들 혹은 은자(隱者)들과 나눈 대화 ④ 제자들의 말 ⑤ 제자들끼리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인데, 이 중에서도 공자의 말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자들끼리의 대화나 제자들의 말도 대개는 공자의 말씀을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다.
후한(後漢)의 반고(班固)는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논어》란 공자가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에게 응답한 것과, 제자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되 공자에게서 들은 것에 관한 말들이다. 당시 제자들이 제각기 기록해놓은 것이 있었는데, 공자께서 돌아가신 뒤에 문인(門人)들이 서로 모아 논찬(論纂)하였으므로 그것을 ‘논어’라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논어》란 공자와 관계가 있는 말[語]을, 후대에 문인들이 모아 논찬[論]하여 이룩한 책이라는 뜻이다.
《논어》라는 서명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적은 《예기(禮記)》이다. 《예기》 〈방기(坊記)〉에, “《논어》에 이르기를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도(道)를 바꾸지 않는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논어》의 편찬자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다. ① 자하(子夏)를 비롯한 70제자라는 설, ② 자하·중궁(仲弓)·자유(子游) 등이라는 설, ③ 증자(曾子)의 문인인 악정자춘(樂正子春)과 자사(子思)의 무리라는 설, ④ 증자와 유자(有子)의 문인이라는 설, ⑤ 민자건(閔子騫)의 문인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한대(漢代)의 유향(劉向)은 그의 〈별록(別錄)〉에서 공자의 제자들이 훌륭한 말씀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남조 양(梁)나라 오군(吳郡) 사람 황간(皇侃)은 《논어의소(論語義疏)》에서 공자 사후 70제자가 함께 찬록(撰錄)한 것이라고 하였다. 후한(後漢) 말기의 정현(鄭玄)은 《논어서(論語序)》에서 《논어》가 자하·중궁·자유 등의 찬정(撰定)이라고 하였으며, 진대(晉代) 부휴(傅休)의 《부자(傅子)》에서는 ‘중궁(仲弓)의 무리가 공자의 말을 추론(追論)한 것’이라고 하였고, 당대(唐代) 유종원(柳宗元)은 《논어변(論語辨)》에서, 공자와 증자의 나이 차이와 논어에서 증자와 유자만이 존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악정자춘과 자사의 무리라는 설을 제시하였다.
한편 주희(朱熹)는 《논어서설(論語序說)》에서 정자(程子)의 말이라 하면서, “《논어》는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이 두 사람만이 《논어》에서 공자와 함께 자(子)를 붙여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민자건의 문인이 편찬자라는 설은 남송(南宋)의 홍매(洪邁)이다. 그는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공자가 제자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모두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오직 민손(閔損)만은 자건이라는 자(字)로 부르고 있으므로, 《논어》는 민씨(閔氏)에게서 나온 책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 밖에 청(淸)나라 말엽 장학성(章學誠)은 《문사통의(文史通義)》 〈시교 상(詩敎上)〉에서, 《논어》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이설(異說)이 있는데, 어쨌거나 《논어》는 대략 전국시대 중기에 공자의 제자들이나 제자의 제자(再傳弟子)들이 편찬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에는 《제논어(齊論語)》, 《노논어(魯論語)》, 《고논어(古論語)》 등 세 가지 논어가 전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노논어》(혹은 《노론(魯論)》)를 보면 《노(魯)》 20편, 《전(傳)》 19편과 《노하후설(魯夏侯說)》 21편, 《노안창후설(魯安昌侯說)》 21편, 《노왕준설(魯王駿說)》 20편의 4가(家)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은 노나라 사람들이 전해온 《논어》이다. 이 《노론》 20편은 현전하는 논어의 편수와 합치된다. 제(齊)나라 사람들이 전해온 《논어》를 《제론(齊論)》이라고 하는데, 이 《제론》에 대하여는 《한서》 〈예문지〉에 《제(齊)》 22편, 《제설(齊說)》 29편의 2가(家)가 있었다고 한다. 《제논어》는 22편인데, 그 22편 중의 장구(章句)도 《노론》보다 많다고 한다. 또 《제론》에는 〈문왕(問王)〉과 〈지도(知道)〉라는 두 편이 《노론》보다 더 있는데, 《고논어》에도 이 두 편이 없다고 한다. 《고논어》는 공자의 옛 집 벽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의 《논어》이다. 《고논어》는 〈자장(子張)〉편이 두 개이므로 21편이며 《제논어》·《노논어》와 비교하면 서로 편차(編次)가 다르다. 이와 같이 《논어》는 세 종류의 형태로 달리 전해오다가 서한(西漢) 말에 장우(張禹)(?~B.C. 5)라는 사람이 《노논어》를 중심으로 최초의 교정본을 만들었는데, 지금 전해지는 《논어》는 이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동한(東漢) 이후 정현이 이를 기초로 하고 《제논어》와 《고논어》를 참고로 해서 주석을 붙였으나 지금은 없어져 집본(輯本)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 전해지는 주석서(註釋書)로는 위나라의 하안(何晏)이 쓴 《논어집해》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를 고주(古注)라고 한다. 이 《논어집해》는 양나라의 황간이 쓴 《논어의소(論語義疏)》를 통하여 후세에 전해졌다.
한편,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는 형병(邢昺)의 《논어주소》의 경문을 바탕으로 고인(古人)들의 여러 해설을 참고하여 지은 것인데, 이로부터 《논어》의 해설은 이 《논어집주》가 단연 권위를 지니게 되었고,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하던 유학이 사서(四書)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또한, 사서집주가 나온 뒤로 《논어》는 더욱 존중되고 널리 읽혀,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을 통해 보면 그 뒤로 송대에 나온 《논어》의 주해서가 10여 종이며, 원대(元代)에도 다시 10여 종이 나왔고 명대(明代)에는 30여 종이 넘고 있다. 청대(淸代)에는 더욱 많아 100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주희 이후로 유가의 경전이 오경에서 사서 중심으로 옮겨갔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논어》가 존중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원대 이후로는 과거(科擧)에 있어서도 필수과목으로 채택되어 《논어》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특히 청대에는 고증학(考證學)이 발달함에 따라 진전(陳鱣)의 《논어고훈(論語古訓)》, 반유성(潘維城)의 《논어고주집전(論語古注集箋)》, 유보남(劉寶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 등 많은 연구서가 나왔다.

4. 내용

《논어》는 일정한 체계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요약하기가 매우 어렵다. 현전하는 《논어》는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편명(篇名)은 그 편의 처음 두 글자를 딴 것이지 별다른 뜻이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이인(里仁)〉이라고 해서 마을 풍속의 인후함에 대해 다룬 편이 아니며, 〈술이(述而)〉이라고 해서 전통에 대한 계승을 주제로 다룬 편이 아니다.
《논어》 전반의 내용을 굳이 분류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개인의 인격 수양에 관련되는 교훈, ② 정치론, ③ 사회적 윤리에 관련되는 교훈, ④ 제자 또는 당시 인물들과 질문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한 문답, ⑤ 제자들 간의 대화와 문답, ⑥ 고인이나 문인, 혹은 당시 인물들에 대한 비평, ⑦ 은자(隱者)들의 공자에 대한 평, ⑧ 철학론, ⑨ 공자 자신의 술회 및 일상생활과 공자에 대한 제자들의 존숭과 찬미 등이다.
현전하는 《논어》는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 〈이인(里仁)〉, 〈공야장(公冶長)〉, 〈옹야(雍也)〉, 〈술이(述而)〉, 〈태백(泰伯)〉, 〈자한(子罕)〉, 〈향당(鄕黨)〉, 〈선진(先進)〉, 〈안연(顔淵)〉, 〈자로(子路)〉, 〈헌문(憲問)〉,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양화(陽貨)〉, 〈미자(微子)〉, 〈자장(子張)〉, 〈요왈(堯曰)〉 총 20편으로 되어 있다. 각 편의 내용은 일관된 주제로 서술한 것이 아니므로 편차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기 어렵다. 다만 주희가 《논어집주》에서 언급한 각 편의 중심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학이〉는 근본에 힘쓰는 일을 기록한 것으로 배우는 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팔일〉은 예악의 일을 논하였다. 〈공야장〉과 〈옹야〉는 옛날과 지금의 인물에 대한 현부(賢否)와 득실(得失)을 평론했으니, 격물(格物)과 궁리(窮理)의 한 가지이다. 〈술이〉는 성인(聖人)이 자신을 겸손히 하고 남을 가르친 말과 그 용모와 행동의 실제를 기록한 것이 많다. 〈향당〉은 공자 평소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을 문인들이 모두 살펴보고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원래는 1장(章)이었으나 주희가 17절로 나누었다. 〈선진〉은 제자(第子)의 현부(賢否)를 논평한 것이 많다. 〈계씨〉는 혹자들은 《제논어》라고 한다. 〈미자〉는 성현의 출처(出處)에 대한 기록이 많다. 〈자장〉은 모두 제자들의 말을 기록한 것인데, 자하의 말이 많고 자공이 그 다음이다. 공자의 문하에 안자 이하로는 자공이 가장 영특하고, 증자 이하로는 자하가 가장 독실하므로 특별히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5. 가치와 영향

《논어》는 오늘날 중국인의 사상과 문화 및 역사, 나아가 동양의 사상과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 유교경전이다. 또한 21세기 중국의 눈부신 경제적 발전 역시 《논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부각됨에 따라 세계에서도 《논어》의 핵심 내용에 주목을 하고 있다. 유럽에 《논어》가 처음 알려진 것은 16세기 말엽 스페인 J.G.de Mendoca가 《중국대제국사(Historia del Gran Reyno dela Chinas)》에서 공자와 《논어》를 소개하면서부터이다. 최초의 완전한 번역은, 1687년 Philipp Couplee와 Prospero Intorcetta, Christiani Herdricht, Francisci Rougemont 네 사람이 《대학》·《중용》·《논어》의 라틴어역(譯)에다 《공자전(孔子傳) 》까지 붙여 《중국의 철인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란 책을 낸 것이 그것이었다. 1885년에는 프랑스인 선교사 꾸브뢰르(S. Couvreur)가 사서를 번역했는데 이것은 중국고전의 뛰어난 유럽어 번역 중 하나라고 일컬어진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1938년 영국인 아더 웰리(Arthur Waley)의 《논어》 번역이 심화된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서구적인 번역으로서 알려졌다.
《논어》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인도주의(人道主義) 사상과 자각자율(自覺自律)의 도덕설(道德說)을 제시한 공자학단(孔子學團)의 활동이 잘 묘사된 책이며, 모든 내용이 인생 경험의 깊은 영지(英智)의 결정(結晶)으로 음미할수록 가치가 있는 교훈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따라서 《논어》는 한 개인의 저작이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논어》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및 동남아의 전통 사상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 《논어》가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였다. 682년 국학이 체계를 갖추었을 때 《논어》를 가르쳤으며, 그 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로 인재를 선발할 때도 《논어》는 필수 과목이었다. 설총이 “방언(方言)으로 구경(九經)을 풀이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와 권근(權近)이 《논어》에 토를 달았다. 조선시대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 전문기관을 설치해 경전의 음해(音解)를 찬하게 하였다. 세조 때에는 구결을 정했고 성종 때에 유숭조(柳崇祖)가 《언해구두(諺解口讀)》를 찬집하였다. 선조는 이것이 미비하다 하여 1581년(선조 14) 이이(李珥)에게 명해 사서와 오경의 언해를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사서는 1593년에 이이의 손으로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 이들 언해는 불완전한 번역이었으나 순한문본과 함께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논어의 첫 간행은 문종(文宗) 10년(1056)의 일로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논어》를 포함한 비각소장(祕閣所藏)의 제경전을 여러 학원(學院)에 나누어두게 하고, 각각 한권씩 찍어냈다고 한다. 이어 인종(仁宗) 12년(1134)에는 이것을 지방의 여러 학관에 나누어주었다. 조선 후기에는 대체로 주희의 해석이 절대적인 권위를 구축한 가운데 주희의 해석에만 매몰되지 않은 주석들도 저술되었다. 이황(李滉)은 《논어》의 훈석(訓釋)을 모으고 제자들과의 문답을 채록해 《논어석의(論語釋義)》를 지었고, 이익(李瀷)이 《논어질서(論語疾書)》, 박세당(朴世堂)이 《논어사변록(論語思辨錄)》,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지었다.

6. 참고사항

(1)명언
• “군자는 근본을 힘쓰니, 근본이 확립되면 도가 생겨난다. 효와 공손함은 그 인(仁)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학이(學而)〉
•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위정(爲政)〉
• “자기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자로(子路)〉
(2)색인어:공자(孔子), 인(仁), 덕치(德治), 정명(正名), 안연(顏淵), 자로(子路), 자공(子貢), 증자(曾子), 자사(子思), 자유(子游), 자하(子夏), 민자건(閔子騫), 중궁(仲弓), 염유(冉有).
(3)참고문헌
• 論語集註大全(朱憙 集註, 胡廣 等 奉勅編, 內閣, 純祖20)
• 論語正義(劉寶楠 著, 高流水 點校, 中華書局)
• 懸吐完譯 論語集註(성백효 譯註, 傳統文化硏究會)
• 論語講設(이기동 譯解,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論語徵(오규 소라이 지음, 임옥균‧임태홍‧함현찬 공역, 소명출판)
• 論語(유교문화연구소 옮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함현찬】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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