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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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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사보주(楚辭補註)》는 북송(北宋)의 홍흥조(洪興祖(1070~1135))가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를 중심으로 그 잘못된 주석을 바로잡고 보완해서 만든 책이다. 그래서 책 제목에 보주(補註)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총 17권이다.

2. 저자

(1) 성명:홍흥조(洪興祖(1090~1155))
(2) 자(字)・호(號):자는 경선(慶善), 호는 연당(練塘)이다.
(3) 출생지역:진강(鎮江) 단양(丹陽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단양현(丹陽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어린 시절에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을 정독하고 성리학의 도리를 깊이 깨달았다. 송(宋) 휘종(徽宗) 정화(政和) 8년(1118)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처음에는 호주(湖州)의 사조(士曹)였다가 후에 선교랑(宣教郎)으로 교체되었다. 건염(建炎) 3년(1129) 봄, 고종(高宗)이 양주(揚州)에 주재하고 있을 때 비서성(秘書省) 정자(正字)로 불려가 도서 및 전적 교정을 담당하였고, 후에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옮겨졌다. 당시 금(金)나라 병사들이 이미 서주를 격파하자, 홍흥조가 상소하여 “인심을 수습하고 책략을 받아들여 민정(民情)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의 위엄을 장려해야 한다.”라고 아뢰었고 또 “나라를 재건하되 (藝祖)를 법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논했으며 “널리 현인들의 언로를 열고 기울어진 국가에 대한 마음을 부추켜 세워야 한다.”라고 진언하여 고종의 칭송을 받았다.
소흥(紹興) 4년(1134), 가부낭관(駕部郎官)으로 옮겼다. 이해 봄 소주(蘇州)와 호주(湖州)의 지진과 가뭄으로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는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조정에서는 구제책을 내놓지 않자, 홍흥조는 조정이 기강을 잃었다고 상소하여 간사한 재상 진회(秦檜) 등에게 미움을 받는다. 얼마 되지 않아 광덕군(廣德軍(지금의 안휘성(安徽省)))으로 부임하자마자 황폐해진 민생을 구제하고 폐단을 개혁하여, 백성들을 이끌고 비탈을 파서 600여 곳의 못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가뭄 피해가 꺾이자 백성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후 제점강동형옥(提點江東刑獄)・지진주(知晋州)가 되었다. 재임 중 진부(陳旉)의 《농서(農書)》 후서(後序)를 썼다. 당시 진주는 송나라와 금나라가 교전하는 요청지로 모든 것이 황폐하고 만신창이가 되고 온갖 일이 폐해졌다. 홍흥조는 수차례에 걸쳐 민세를 감면해 주고 난민을 안무(按撫)하며, 백성들을 동원하여 황무지를 7만여 묘(畝)나 개간하여 재난을 구제하였는데 홍흥조는 이 일로 조정에 원한을 사게 되었다. 오래지않아 그는 지요주(知饒州)로 옮겨 갔다. 진회(秦檜)의 눈 밖에 나서 소주(昭州)로 쫓겨났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5) 주요저작:《주역통의(周易通義)》, 《좌역고이(左易考異)》, 《고금역총지(古今易總志)》, 《논어설(論語說)》, 《좌씨통해(左氏通解)》, 《고경서찬(考經序贊)》, 《노장본지(老莊本旨)》, 《초사보주》, 《초사고이(楚辭考異)》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홍흥조는 남송(南宋)의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자기의 애국사상과 유가적 의리관으로 우국애민 사상을 토로하기 위해 《초사보주》를 짓게 되었다. 홍흥조는 왕일의 《초사장구》로부터 남송대까지 초사에 대한 연구서들을 종합하여 《초사보주》를 완성하였다.
남송 진진순(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 의하면, 홍흥조는 소식(蘇軾(1037~1101))의 《초사(楚辭)》 10권 등 15종 이상의 참교본(參校本)을 구하여 《초사장구》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여 먼저 《초사보주》를 집필하고, 다음에 요정휘(姚廷輝) 본(本)을 얻어 《초사고이》를 지어 고본(古本) 《초사석문(楚辭釋文)》의 뒤에 붙였으며, 뒤에 구양수(歐陽修)(1007~1072) 등의 판본을 얻어 다시 《초사고이》의 부족한 점을 보충했다고 한다. 원래 《초사고이》는 《초사석문》의 뒤에 붙은 형태였는데, 후인이 《초사고이》의 내용을 《초사보주》 속에 분산, 편입시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초사보주》 17권의 대표적 판본으로 명번각송본(明翻刻宋本), 명초본(明鈔本), 청초(淸初)의 급고각본(汲古閣本)이 있는데, 규장각 소장본은 상해(上海)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급고각본을 저본으로 하여 《사부비요(四部備要)》 집부(集部)로 1920~1935년에 출간한 것이다. 다른 판본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본과 명번각송본을 저본으로 한 《사부총간(四部叢刊)》본이 있다.
홍흥조는 초사보주 외에 《초사고이》 1권을 썼다. 《직재서록해제》에 따르면 《초사고이》는 원래 단행본이었으나 지금은 《초사보주》의 ‘보왈(補曰)’ 앞으로 흩어져 삽입되었다. 또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 따르면 《초사보주》의 원래 자서(自序)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산일되었다. 현존하는 선본으로는 급고각 중간 송본(宋本) 17권과 비교적 통용되는 《사부비요》본이 있으며, 1957년에 중화서국에서 이를 중쇄하였고 1980년대에는 신판 배인본이 나왔다.

4. 내용

《초사》는 유향(劉向(B.C. 77~B.C. 6))이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충신 굴원(屈原 (B.C. 340~278))의 이소(離騷)와 25편의 부(賦) 및 후인의 작품에 자작 1편을 덧붙여 편집한 것으로, 후한(後漢)의 왕일이 본서의 사장(辭章)을 고정(考定)・주석(註釋)하여 《초사장구》 16권을 지었다. 현존하는 것은 굴원의 〈이소(離騷)〉, 〈구가(九歌)〉(〈동황태일(東皇太一)〉, 〈운중군(雲中君)〉, 〈상군(湘君)〉, 〈상부인(湘夫人)〉, 〈대사명(大司命)〉, 〈소사명(少司命)〉, 〈동군(東君)〉, 〈하백(河伯)〉, 〈산귀(山鬼)〉, 〈국상(國殤)〉, 〈예혼(禮魂)〉), 〈천문(天問)〉, 〈구장(九章)〉(〈석송(惜誦)〉, 〈섭강(涉江)〉, 〈애영(哀郢)〉, 〈추사(抽思)〉, 〈회사(懷沙)〉, 〈사미인(思美人)〉, 〈석왕일(惜往日)〉, 〈귤송(橘頌)〉, 〈비회풍(悲回風)〉), 〈원유(遠遊)〉, 〈복거(卜居)〉, 〈어부(漁父)〉, 송옥(宋玉)의 〈구변(九辯)〉, 〈초혼(招魂)〉, 굴원 또는 경차(景差)의 〈대초(大招)〉, 〈석서(惜誓)〉, 회남소산(淮南小山)의 〈초은사(招隱士)〉, 동방삭(東方朔)의 〈칠간(七諫)〉, 엄기(嚴忌)의 〈애시명(哀時命)〉, 왕포(王褒)의 〈구회(九懷)〉, 유향의 〈구탄(九歎)〉의 16권과 이외에 왕일의 〈구사(九思)〉를 더하여 17권이다. 홍흥조의 《초사보주》는 굴원의 초사 25편을 중심으로 왕일의 《초사장구》를 보정한 작품이다.
이 책의 첫머리에 ‘목록(目錄)’이 있는데, 그 체례는 왕일의 《초사장구》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이소경〉 뒤에 왕일의 서문 외에 반고(班固(32~92))의 〈이소찬서(離騷贊序)〉 2편이 《초사장구》에서는 〈천문〉, 〈구탄〉의 뒤에 있으며, 유협(劉勰(464?~520?))의 〈변소(辨騷)〉가 실려 있는 점이 다르다. 권1은 〈이소경〉, 권2는 〈구가〉, 권3은 〈천문〉, 권4는 〈구장〉, 권5는 〈원유〉, 권6은 〈복거〉, 권7은 〈어부〉인데, 이상은 굴원이 지은 것이다. 권8은 송옥의 〈구변〉, 권9는 송옥의 〈초혼〉, 권10은 굴원 혹은 경차의 〈대초〉, 권11은 가의(賈誼)의 〈석서〉, 권12는 회남소산의 〈초은사〉, 권13은 동방삭의 〈칠간〉, 권14는 엄기의 〈애시명〉, 권15는 왕포의 〈구회〉, 권16은 유향의 〈구탄〉, 권17은 왕일의 〈구사〉이다. 각 권의 목차 아래에 《초사석문》의 원권(原卷) 차례를 덧붙이고 있다. 즉 ‘〈구장〉제사(第四)’ 아래에 ‘《석문(釋文)》제오(第五)’라는 식으로 주를 달고 있다. 권1의 본문 앞에는 수당(隋唐)이래 초사연구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한 저자의 서문이 있다.
본문은 초사 원문, 왕일의 《장구》, 《초사고이》를 차례대로 싣고, 그 뒤에 ‘보왈(補曰)’이라하여 ‘보주(補注)’를 싣고 있다. 보주에서는 왕일이 주를 달지 않은 부분이나 주를 달았으나 상세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중점적으로 보충하고 있다
그 체례는 먼저 왕일의 주를 열거하고 다시 ‘보왈’을 달아 자신의 견해를 자세히 서술한 것으로, 왕일 주의 상세하지 않는 것을 보충하는 한편 왕일의 잘못을 바로잡은 것이다. 보주에는 명물(名物)의 훈고 외에도 역사 설화, 신화이야기 등을 상당히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다. 또한 《초사장구》는 전적을 인용할 때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의 인용은 반드시 출처를 밝히고 있다.

5. 가치와 영향

홍흥조의 《초사보주》 전체를 종합해 보면, 비록 착오가 있더라도 태도가 신중하고 변별이 정밀하여 《사고전서총목》에서는 “《초사》 여러 주석본 중에서 특히 뛰어난 선본”이라고 하였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온 뒤 《초사장구》의 단행본은 점점 뜸해졌다. 홍흥조는 유가의 사상에 기초하여 우국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왕일의 《초사장구》와 주희의 《초사집주》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그의 유가적 입장에서 초사를 주석한 것은 후일 주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이소》는 詞賦의 비조이니, 후세사람들이 이를 지음에 지극히 반듯하여 직각자를 더할 것이 없고 지극히 둥글어 그림쇠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離騷爲詞賦之祖 後人爲之 如至方不能加矩 至圓不能過規矣]” 《초사보주(楚辭補註)》 〈이소경(離騷經)〉
• “사마천이 〈굴원전〉을 지어 ‘그 문장은 간략하고 그 문사는 은미하며 그 뜻은 깨뜻하고 그 행실은 청렴하며 그 문장은 작은 것을 말하였으나 가리키는 바는 매우 크고 비유한 것은 비근하나 의미한 바는 심원하다. 그 뜻이 깨끗하였기에 일컬은 물건이 향기로웠고, 그 행실이 청렴하였기에 죽어도 소홀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더러움을 씻고, 속세의 바깥으로 빠져나와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니, 진흙 속에서도 깨끗하며 더러워지지 않았다. 이러한 지조로 헤아리건대 해와 달과도 빛을 다툴 만하다.’고 하였으니, 그를 깊이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太史公作傳 以爲其文約 其辭微 其志絜 其行廉 其稱文小而其指極大 舉類邇而見義遠 其志絜 故其稱物芳 其行廉 故死而不容自疏 濯淖污泥之中 以浮游塵埃之外 推此志也 雖與日月爭光可也 斯可謂深知己者]” 《초사보주》 〈이소경〉
(2) 색인어:초사(楚辭), 홍흥조(洪興祖), 굴원(屈原), 초사고이(楚辭考異), 초사보주(楚辭補注).
(3) 참고문헌
• 《초사보주》 해제(강민호, 규장각)
• 〈홍흥조의 굴소관(屈騷觀)고〉(박영환, 《중국어문학》 32)
• 〈朝鮮士人들의 ‘楚辭’ 受容과 그 美意識〉(신두환, 《漢文學論集》 30집)

【신두환】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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