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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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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사조제(謝肇淛)(1567~1642)가 풍물(風物)과 장고(掌故)의 여러 사항을 해설하고 전체를 천(天)․지(地)․인(人)․물(物)․사(事)의 5부로 나누어 유서(類書)의 외형을 지닌 필기(筆記)이다.

2. 저자

(1) 성명:사조제(謝肇淛)(1567~1642)
(2) 자(字)·별호(別號):자는 재항(在杭), 호는 무림(武林), 소초재주인(小草齋主人). 만호(晚號)는 산수노인(山水勞人)이다.
(3) 출생지역:원적은 복건(福建) 장낙(長樂)(현 복건성(福建省) 장낙현(長樂縣)). 절강(浙江) 전당(錢塘)(지금의 절강성 항주(杭州)) 출생.
(4) 주요활동과 생애
사조제는 이른 나이에 서통(徐熥), 서발(徐)𤊹, 조학전(曹學佺) 등과 결사(結社)했다. 원굉도(袁宏道)와도 교유하여, 원굉도로부터 《금병매(金甁梅)》를 빌리고는 오랫동안 돌려주지 않은 일화가 있다. 26세 되던 만력(萬曆) 20년(1592) 임진과(壬辰科)의 진사로, 호주추관(湖州推官)을 시작으로 남경형부(南京刑部), 병부주사(兵部主事), 공부둔전사주사(工部屯田司主事), 도수사낭중(都水司郞中), 운남포정사사(雲南布政使司), 좌참정(左參政)을 지냈다. 천계(天啓) 원년(1621) 광서안찰사(廣西按察使)에 임명되고, 광서좌포정사(廣西左布政使)에 이르렀다. 원주부(袁州府) 평향현(萍郷縣)(현재의 강서성(江西省) 의춘시(宜春市))에서 죽었는데, 묘는 복건성에 지금도 있다.
(5) 주요저작:《전략(滇略)》․《북하기(北河紀)》․《문해피섭(文海披涉)》․《주여(麈餘)》 등 20여 종을 저술하였는데, 그 가운데 《오잡조》가 가장 유명하다.

3. 서지사항

《오잡조》는 만력(萬暦) 44년(1616) 반응지(潘膺祉)의 여위관(如韋館)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하지만 요동(遼東)의 여진(女眞)이 뒷날 명(明)나라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청(淸)나라 때 군기처(軍機處)에 의해 파기(破棄)되었다. 오히려 일본인이 사제조의 저술을 좋아하여, 《오잡조》․《문해피섭》․《주여(麈餘)》를 모두 판각했고, 그것이 중국으로 거꾸로 수입되었다. 즉, 일본에서는 1661년(일본 간분(寛文) 원년)에 판각되어 널리 읽혔으며,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도 《오잡조》로부터 90조항이 인용되어 있다. 1959년 중화서국(中華書局) 상해편집소(上海編輯所)에서 상해도서관장(上海圖書館藏) 명(明)나라 반응지(潘膺祉) 여위관(如韋館) 각본(刻本)에 근거하여 점교(點校) 출판(出版)하였다. 이후 상해서점출판사(上海書店出版社)에서 상해도서관 소장본을 저본으로 교점(校點)을 다시 해서 간행하였다.

4. 내용

《오잡조》는 모두 16권으로, 천(天)․지(地)․인(人)․물(物)․사(事)의 5부로 나누었다. 권1-2 천분(天部), 권3-4 지부(地部), 권5-8 인부(人部), 권9-12 물부(物部), 권13一16 사부(事部)로 이루어져 있고, 그 뒤에 발(跋)과 부록(附錄)이 있다. 제목의 ‘조(組)’자는 《이아(爾雅)》에서 나온 글자로, 갖가지 색채를 취하여 베를 짠다는 뜻이다. 당나라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와 이름이 유사해서 ‘五雜俎’라고 잘못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五雜俎’는 고악부(古樂府)의 이름이다. 삼언(三言)으로 된 구(句) 여섯을 한 수로 하고, 머리의 구로 편(篇) 이름을 삼는 형식이다. 바로 “오잡조(五雜俎) 강두초(岡頭草) 왕부환(往復還) 거마도(車馬道) 불확이(不獲已) 인장로(人將老)”라는 노래이다.
사조제는 독서에서 얻은 지식을 위주로 사항을 정리하고, 국사나 역사에 대해 고증한 내용도 적었다. 《오잡조(五雜組)》의 서문은 이유정(李維楨)이 작성하였는데, ‘오잡조’라는 제목의 의미를 천발하고, 이 책은 잡가(雜家)라고 지목할 수도 있지만 유가(儒傢)라고 일컬어도 무방하다고 논평하였다. 이유정의 서문은 아래와 같다.
“‘오잡조’의 시(詩)는 삼언(三言)이니, 대개 시의 한 체(體)일 따름이거늘 수부(水部) 사재항(謝在杭)이 책을 저술하여 그것을 취해 이름으로 삼았다. 어째서 ‘오(五)’라고 칭하였는가? 그 설은 오부(五部)로 나뉘어 천(天)․지(地)․인(人)․물(物)․사(事)라고 하였으니, 곧 說의 類이다. 어째서 잡(雜)이라고 칭하였는가? 《역(易)》에 〈잡괘전(雜卦傳)〉이 있어 ‘물(物)이 서로 뒤섞이므로 문(文)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나, 잡물찬덕(雜物撰德)하고 시(是)와 비(非)를 변별하니, 곧 설(說)의 지(旨)이다. 천수(天數)는 오(五)이고 지수(地數)도 오(五)라서, 하도(河圖)와 낙수(洛書)는 오(五)를 중수(中數)로 삼았다. 우주가 지극히 커서 음(陰)과 양(陽)이 서로 갈아들어 품물(品物)이 유형(流形)하여 변화(變化)가 일정한 방소가 없이 무궁하되, 요컨대 오(五)에서 벗어나지 않아, 오행(五行)이 뒤섞여서 시(時)를 이루고 오색(五色)이 뒤섞여서 장(章)을 이루며 오성(五聲)이 뒤섞여서 낙(樂)을 이루고 오미(五味)가 뒤섞여서 음식을 이룬다. 《예(禮)》에 이르길, ‘인(人)이란 것은 천지(天地)의 심(心)이요 오행(五行)의 단(端)이니, 음식을 먹고 소리를 구별하고 색이 있는 것을 입고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두 오(五)를 기약하고 있으므로 뒤섞어서 오(五)에 연계한 것이다.
《이아》에 ‘윤(綸)은 푸른 실로 된 끈[綸] 같고, 조(組)는 땋은 실[組] 같으니 동해(東海)에서 난다.’라고 하였다. 실을 짜는 사람이 이것을 본받아서 오채(五采)를 섞고 차서를 매겨, 혹은 새인(璽印)에 수실로 묶거나 혹은 면영(冕纓)을 만들거나 혹은 집비(執轡)의 형상으로 하고, 혹은 〈간모(干旄)〉를 노래하기도 하며, 혹은 연망(連網)을 드리우기도 하며 혹은 현훈(玄纁)에 화협시키기도 한다. 입공(入貢)에 혹은 현주순기(玄朱純綦), 온변둥위(縕辨等威)하고, 혹은 장이(丈二)로 방뢰(方外)를 진무(鎭撫)하여 경위(經緯)가 착종(錯綜)하고 물색(物色)이 선명(鮮明)하여 상하(上下)에 달하여 영식(榮飾)으로 삼는다.
사재항은 동해 출신으로 다문(多文)으로 풍부하므로 뒤섞어서 연계하여 조(組)로 만든 것이다. 지난날 유향(劉向)의 《칠략(七略)》은 모두 십가(十家)의 제자(諸子)를 서술하였고,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도 그것을 인습하여, 유(儒)․도(道)․음양(陰陽)․법(法)․명(名)․묵(墨)․종횡(縱橫)․소설(小說)․농(農)의 밖에 잡가(雜家)를 두었다. 그 책은 대개 의관(議官)에게서 나와서, 음양(陰陽)․묵(墨)을 아우르고 명(名)․법(法)을 합하여 국체(國體)에 이러한 것이 있음을 알고 왕치(王治)가 관통하지 않음이 없음을 보였다. 소설가(小說家)는 패관(稗官)에서 나와, 가담항어(街談巷語)와 도청도설(道聽塗說)의 것이 만들었으니, 잡가와 소설가의 둘이 서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반고는 말하기를 ‘볼만한 것은 구가(九家)이다.’라고 하였으니, 소설을 내쫓으려고 뜻한 것이다. 후대에 소설이 극성하여 그 가운데는 없는 것이 없게 되어, 소설이 잡가와 서로 비슷하게 되었다. 사재항의 이 편은 구류(九流)를 총괄하여 내었으니, 천하(天下)의 지색(至賾)으로서 혐오할 수 없으니, 잡가라고 지목하여도 옳다. 용문(龍門)(사마천(司馬遷))이 육가(六家)를 거론하여 유(儒)를 음양(陰陽)의 다음에 두었으니, 본말을 아주 잃어버렸다. 난대(蘭臺)(반고(班固))는 유(儒)를 으뜸으로 두었으되, 비판하는 사람들은 예문(藝文)과 병렬한 것을 잘못이라고 여긴다. 옛말에 이르길, ‘천지인(天地人)을 통관하는 것을 유(儒)라 한다.’라고 하였다. 사재항의 이 편은 삼재(三才)를 아울러서 활용하였으므로 유가(儒家)라고 지목하여도 옳다. 내가 일찍이 책 이름에 ‘오색선(五色線)’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소언(小言)이 첨첨(詹詹)할 따름이거늘 세상에서 전송(傳誦)하지만, 사재항의 광대(廣大)하고 실비(悉備)하여 사람의 몽부(蒙覆)를 계발하여 사람의 의지(意智)에 보탬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나은가? 친구 반방개(潘方凱)가 보고서 좋아하여 감히 장막 안에 비밀스럽게 보관할 수가 없어서 빨리 기궐(剞劂)(판각)에 부쳐 천하 사람들과 함께 보물로 삼고자 한다.”

5. 가치와 영향

《오잡조》는 서적의 내용과 견문의 사실들을 토대로 잡다한 사항들을 추출하고 논증했다. 검증할 수 없는 사항도 많다. 하지만 명나라 말 《삼재도회(三才圖會)》도 인용할 만큼 후대의 유서에 영향을 끼쳤다. 청대의 초기 필기잡록류에서도 이 책을 인용하여 사실을 점검하고 논증한 것이 있다. 왕사진(王士禛)도 《지북우담(池北偶談)》에서 이 책으로부터 여귀(女鬼)가 신원(申冤)을 청구한 기이한 일을 인용했다. 《오잡조》는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 책을 인용했다.
이를테면 《성호사설》 권2 〈천지문(天地門)〉 ‘사여성(四餘星)’ 조에서 《오잡조》를 인용해서, “천문지(天文志)에는 사여성의 말이 없는데, 술가(術家)에서는 ‘사여성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 하니, 그것은 사여성은 하늘에서 찾아볼 수 없으므로 억지로 말을 만든 것이다. 만약 보이는 것이 없으면 아무리 술수(術數)를 하는 사람이라도 무엇을 가지고 알겠는가?”라고 했다. 또 《성호사설》 권9 인사문(人事門) ‘지고(地窖)’에서는 “사조제(謝肇淛)는 ‘지교(地窖)가 연경(燕京)에도 있기는 하나 진(秦)․진(晉)처럼 많이 있지는 않다. 진(秦)․진(晉)은 땅이 건조하여 썩지 않고 그 흙이 굳건하여 무너지지 않으며, 제(齊)나라 이남으로는 잘 되지 아니한다.’ 하였거니와, 삼진(三晉)은 부가(富家)들이 곡식 수만 석씩을 수장하지만 다 교(窖)에다 집어넣고 봉하는데 십수 년을 저장해도 썩지 않는 것이 있다. 대개 수(隋) 나라의 낙구(洛口)․회락(回洛)을 보면 그 설이 징험된다.”라고 했다.
영조․정조 연간의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 권56 〈앙엽기(盎葉記)3〉 ‘고려왕관(高麗王冠)’ 조에서 《오잡조》의 “지금 내수(內竪)의 모자 모양은 고려 왕관의 제도이다. 국초(國初)에 고려가 굴복하지 않자, 태조(太祖)가 비밀리 사람을 보내어 그 왕관을 엿보아다 만들어서 여러 내수들에게 다 그 관을 쓰게 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사신이 왔을 때에 그 내수들을 가리켜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모두 너희 임금과 같은 무리들이다. 너희 임금이 그래도 항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사자(使者)가 돌아와 그 말을 하자 드디어 정삭(正朔)을 받들었다.”라고 한 설을 인용하고, 이 사실은 《명사(明史)》 〈조선전(朝鮮傳)〉에 실려 있지 않으며, 반드시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의심했다. 그리고 《삼재도회(三才圖會)》에 명(明)나라 환관이 쓴 모자가 실려 있는데 우리나라 사모(紗帽)와 같지 않으니 대개 양쪽에 꽂는 날개가 없다고 하여 그 사조제의 설을 반박했다. 순조 연간의 남인 학자 윤기(尹愭)는 〈협리한화(峽裏閒話)〉(1815년, 75세 때 처가인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찬술)에서 《오잡조》의 설을 여러 차례 인용했다. 그리고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오잡조》를 130회 인용했다고 한다. 고전간행회본 권41에서 《오잡조》의 「재이고변증설(災異考辨證說)」을 전재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오잡조》는 성리학을 비판하는 한편, 마테오 리치의 자연관이나 천주교 이론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 진보적 독서인들이 서양 자연관이나 천주교 교리에 접하는 하나의 창구가 되었을 것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서남의 해외 여러 번국 가운데 마팔아(馬八兒)와 구람(俱藍) 두 나라가 가장 크고 가장 멀다. 천주(泉州)에서부터 그 나라까지 약 10만리로, 원나라 때 한번 통교하여 와서 조공했는데, 그 얻은 것을 계산하면 허비한 것의 백분의 일도 보상할 수가 없다. 우리 명나라 조정에서는 서번(西蕃)(티벳)·천방(天方)(아라비아)·묵덕나(默德那)(메이나)가 가장 멀다. 대개 현장(玄奘)이 불경을 취해 온 땅으로, 불국(佛國)(인도)이라고 전해 온다. 그 불경은 36장(藏) 3,600여 권으로, 그 서체는 전서(篆書)·초서(草書)·해서(楷書)의 세 서법이 있었다. 지금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이것을 사용하는 곳이 많다. 또한 천주국(天主國)이 불국의 서쪽에 있어, 그 나라의 사람은 문(文)과 이(理)에 통하여, 학문이 있고 행동이 우아하여 중국과 차이가 없다. 이마두(琍瑪竇)란 자가 있어서, 그 나라에서 왔다. 불국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와서, 4년 만에 비로소 광동(廣東)의 경계에 이르렀다. 그 교는 천주를 숭봉하는데, 역시 유교의 공자, 석교(불교)의 석가와 같다. 그 서적에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있어, 왕왕 유교와 서로 계발하며, 불교·노교의 일체 허무의 설에 대해서는 모두 깊이 비난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양주(楊朱)의 학으로부터 도망한 부류일 따름이다. 이마두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저 불교라는 것은 우리 천주의 교리를 훔쳐다가, 윤회응보의 설을 더하여 세상을 미혹시키는 것이다. 우리 교는 삼기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다만 사람들이 선을 행하길 바랄 뿐이다. 선하면 천당으로 올라가고 악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 영구히 참회(懺悔)·도탈(度脫)이 없고, 영구히 윤회도 없으며, 또한 면벽하여 고행할 필요도 없고 사람 사이를 떠나서 출가할 필요도 없다. 매일 행하는 것은 선을 닦는 일이 아닌 것이 없다.’ 나는 그 설이 유학에 가깝고 세속 사람을 권면하는 것이 상당히 친절(간절)하여, 불교가 툭하면 황홀(恍惚)하거나 지리(支離)한 말로 범용한 속인들을 우롱하든가 놀래키든가 하는 것과 다른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 천주상은 곧 한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이 아주 기이하여, 옛날 일컫던 인수용신(人首龍身)과 같다. 남들과 말할 때에는 고분고분하여 예를 갖추고, 변설은 물으면 끊임 없이 말하여, 이역 중에도 사람이 있다고 할 만하다. 뒤에 경사(북경)에서 죽었다. 그 제자가 방적아(龐迪峩)(Diego de Pantoja,1571-1618)이다.[西南海外諸蕃 馬八兒俱藍二國最大而最遠 自泉州至其國約十萬里 元時曾一通之而來朝貢 計其所得不足償所費之百一也 國朝西蕃天方默德那最遠 蓋玄奘取經之地 相傳佛國也 其經有三十六藏 三千六百餘卷 其書有篆草楷三法 今西洋諸國多用之 又有天主國 更在佛國之西 其人通文理 儒雅與中國無別 有琍瑪竇者 自其國來 經佛國而東 四年方至廣東界 其教崇奉天主 亦猶儒之孔子 釋之釋迦也 其書有天主實義 往往與儒教互相發 而於佛老一切虛無苦空之說皆深詆之 是亦逃揚之類耳 琍瑪竇常言彼佛教者竊吾天主之教 而加以輪回報應之說以惑世者也 吾教一無所事 只是欲人爲善而已 善則登天堂 惡則墮地獄 永無懺度 永無輪回 亦不須面壁苦行 離人出家 日用所行 莫非修善也 余甚喜其說爲近於儒 而勸世較爲親切 不似釋氏動以恍惚支離之語愚駭庸俗也 其天主像乃一女身 形狀甚異 若古所稱人首龍身者 與人言 恂恂有禮 詞辯扣之不竭 異域中亦可謂有人也已 後竟卒於京師 其徒曰龐迪峩]” 《오잡조》 권4 〈지부(地部)2〉
• “인간의 구복의 욕망은 어찌 늘 충족되겠는가? 부귀의 때에는 맛난 것을 궁극에까지 추구하여, 폭식하고 낭비하기를 과도하게 하지만, 한번 재난에 맞닥뜨리면 명아주나 콩을 구하여 허기를 채우려 하여도 그러지를 못한다. 석호(石虎)(후조(後趙)의 군주)는 찐 떡을 먹을 때 반드시 말린 대추, 호도, 박속을 심(속)으로 삼아 터질 정도로 만들고서야 바야흐로 먹었다. 하지만 염민(冉閔)에게 지위를 빼앗기고 유폐되자, 터지지 않는 떡이라도 좋으니 하고 생각하지만 손에 넣을 방도가 없었다. 당나라 낙양의 귀족 자제들은 음식을 들 때 반드시 연탄으로 끓이게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연기가 나와 싫어했다. 그러다가 난리가 나고 굶주리게ㄷ 되자, 탈곡한 현미로 만든 밥을 사서 먹었으나, 그 맛은 팔진미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이 어찌 먹고 마시는 것이 전에는 부귀했지만 뒤에는 천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그 당시에 정호(精好)한 것을 고르고 골랐으므로 걸핏하면 조악하여 삼킬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탕하고 방일한 성품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가 남방의 유복한 집 자제들을 보면, 일단 강보(아기 포대기)를 벗어나면 반드시 달고 부드럽고 따스하고 연한 고기를 골라서 소나 양의 젓으로 조리하며, 그 위를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지만, 질병이 자연히 적지 않다. 북방의 영야는 흙으로 만든 캉(炕)에 누워, 보리밥을 먹으며 십여 세가 되도록 술이나 고기의 맛을 알지 못하되, 몸이 아주 강건하고 장대하다. 또 한 단계 하층의 이를테면 걸식하는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굶주림과 추위를 겪으며 하루에 한 닢 동전이면 그 배를 채운다. 인생이 어찌 항구한가? 다행히 부귀한 경우에 처하여,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때때로 굶주림과 추위를 생각하여 과분하게 되지 않도록 하여, 품물은 정세한 것 조잡한 것, 아름다운 것 추악한 것을 가리지 말고,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편안히 여겨, 흉중에서 이것 저것 선택하는 것이 없으면, 이 또한 동심인성(마음을 움직이고 본성을 참아내게 함)의 일단이다. 소자첨(蘇子瞻)(소식(蘇軾)) 형제가 남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오주부(梧州部) 등현(藤縣)(지금의 광서성 장족자치구에 속한 지역)에서 서로 만나, 떡을 샀는데, 조악하여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황문시랑(黄門侍郞)이었던 아우 소철(蘇轍)은 젓가락을 놓고 탄식했으나, 소자첨은 이미 다 먹은 뒤였다. 소동파 형제의 학력과 식견의 우열은 죄다 여기에서 판정할 수가 있다. 나는 평소 음식의 일 때문에 남을 꾸짖은 적이 없으며, 만일 먹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무리하게라도 들도록 했다. 관리 생활 중에도 특히 이 계율을 지켰다. 그래서 늘상 처자식에게 이 계율을 들려주고 있지만, 그들이 이 취지를 반드시 충분하게 이해고 있는 것은 아니다.[人之口腹 何常之有 富貴之時 窮極滋味 暴殄過當 一過禍敗 求藜藿充飢而不可得 石虎食蒸餠 必以乾棗枣胡桃瓤爲心 使坼裂方食 及爲冉閔所簒 幽廢 思其不裂者而無從之 唐東洛貴家子弟 飮食必用煉炭所炊 不爾便嫌烟氣 及其亂離飢餓 市脫粟飯食之 不啻八珍 此豈口腹貴於前而賤於後哉 彼其當時所爲揀擇精好 動以爲粗惡而不能下咽者 皆其驕奢淫佚之性使然 非天生而然也 吾見南方膏粱子弟 一離襁褓 必擇甘毳溫柔 調以酥酪 恐傷其胃 而疾病亦自不少 北方嬰兒 卧土炕 啖麥飯 十餘歲不知酒肉 而强壯自如 又下一等 若乞丐之子 生即受凍忍餓 日一文錢 便果其腹 人生何常 幸而處富貴 有赢餘時 時思及凍餒 無令過分 物無精粗美惡 隨遇而安 無有選擇於胸中 此亦動心忍性之一端也 子瞻兄弟南遷 相遇梧藤間 市餠 粗不可食 黄門置筋而嘆 子瞻已盡之矣 二蘇之學力識見 優劣皆於是卜之 吾生平未嘗以飮食呵責人 其有不堪 更强爲進 至於宦中 尤持此戒 每每以語妻孥 然未必知此旨也]” 《오잡조》 권11 〈물부(物部)3〉
(2) 색인어:오잡조(五雜組), 유서(類書), 필기(筆記), 사조제(謝肇淛), 구류(九流), 잡가(雜家)
(3) 참고문헌
• 《한국한문기초학사》(심경호, 태학사, 2012)
• 《五雜組》(岩城秀夫 譯注, 東洋文庫 605․610․617․623․629․633․640․646, 平凡社, 1996.9~1998.12).
• 〈五雑俎研究〉(蔡景康, 《廈門大学学報・哲社版》, 1996年 第2期)

【심경호】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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