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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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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의 저서이다. 유교의 제설(諸說)과 전국시대 제자(諸子)의 설 외에 당시의 정치, 습속, 속설 등 다방면의 문제를 다루어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을 가한 책으로 총 8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한 말기에 알려지게 되어, 위진(魏晉)시대에 영향을 끼쳤다.

2. 저자

(1)성명:왕충(王充)(27~96)
(2)자(字)·별호(別號):자는 중임(仲任).
(3)출생지역:중국 회계군(會稽郡) 상우현(上虞縣)(현 절강성(浙江省) 상우시(上虞市)).
(4)주요활동과 생애
왕충의 조부인 왕범(王汎)은 전당현(錢唐縣)으로 옮겨 살면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왕몽(王蒙), 둘째 아들이 왕송(王誦)이다. 왕송이 바로 왕충의 아버지이다. 이들은 모두 협객의 삶을 살아서 정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바로잡으려고 하였고, 그 과정에 그들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심지어는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왕충의 조부 등에게 맞거나 죽은 사람들은 대개 호족(豪族)의 비호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왕충의 조부나 백부, 그리고 그 부친이 자주 이사를 다닌 것도 자신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느꼈던 호족들의 유언무언의 압력 때문이었다. 전당현에 옮겨 살면서도 이웃 사람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 다시 이들은 상우현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와중에 왕송은 왕충을 낳았다.
왕충은 후한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3년(27)에 태어나 화제(和帝) 영원(永元) 연간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선조 가운데 한 사람이 군사적 공을 세워 회계군의 양정(陽亭)에 봉해짐에 따라 회계군에 그의 가계가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왕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협객의 삶을 살았다고 알려졌는데, 왕충은 어렸을 때부터 조부나 백부, 부친과는 달랐다.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왕충은 한 번도 그들을 무시하거나 이기려고 하지 않았다. 6살 때부터 글을 배웠고, 8살 때부터는 서당에 나아가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글을 배우기 시작한 6살 이후에 왕충은 부모나 서당 선생으로부터 매질이나 꾸지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17, 18세 되던 해 왕충은 고향을 떠나 수도인 낙양으로 유학을 갔다. 태학(太學)에 들어간 왕충은 《한서(漢書)》로 유명한 반고(班固)의 아버지인 반표(班彪)를 스승으로 삼아 공부했다. 왕충은 이때 《논어(論語)》나 《상서(尙書)》 등 유학 경전들을 공부하고 매일 천 자가 넘는 글자를 암송할 정도로 영민했다고 한다. 20세 무렵 왕충은 태학을 떠나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적 사정으로 원하는 책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낙양(洛陽)의 서점가를 배회하며 닥치는 대로 읽었고 읽는 대로 암기했다. 서점가에서 그는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과학과 관련된 텍스트들을 읽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학을 비롯한 다양한 사상을 편견 없이 두루 섭렵한 결과, 왕충의 철학적 안목은 넓고 깊어졌다. 토론할 때 왕충은 항상 새로운 관점을 내놓았는데, 친구들은 왕충의 생각이 통념과는 매우 어긋나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황당해하다가도 왕충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모두 왕충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수긍했다고 한다.
건무 30년 반표가 사망했는데, 대략 이 즈음에 왕충은 낙양을 떠나 외지에서 관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하였고, 지방 관료에 머물렀다. 당시 민중들의 궁핍한 삶을 개선하려고 수차례 태수에게 진언했지만 그의 생각은 채택되지 않았다. 건초(建初) 원년(76) 50세에 왕충은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동안 쓴 글들을 정리하여 《논형》을 편찬하였다. 서기 96년, 70세의 왕충은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충이 생존했던 시기는 후한(後漢)의 광무제 때부터 화제(和帝) 영원(永元) 연간으로 이 시기는 정치적 안정기로서 문화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다양한 발전을 이루어 많은 저술이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하늘에는 합목적적 의지 활동의 능력이 있고 이것이 사람의 일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이나, 미신적 예언설인 참위설(讖緯說)이 유행하였고, 특히 이 시기의 유학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배체제 이론으로서 경학(經學)을 중심으로 극성기를 누렸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그 폭을 확장해가던 시기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왕충은 성인의 절대화에 반대하고, 덕의 체득자로서의 성인의 통치, 즉 성군(聖君)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지배계급의 견해에 대하여 만인에게 성인의 길을 개방하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생득관념이라는 생각에 반대하여 경험을, 신비에 대하여 실증을, 우연에 대하여 필연을 주장한 그의 사상은 《논형》에 잘 나타나 있다.
(5)주요저작:《논형》, 《기속(譏俗)》, 《정무(政務)》, 《양성(養性)》

3. 서지사항

논형(論衡)이란 곧 형(衡)을 논한다는 의미로, 형(衡)이란 저울에 달아서 공평하게 중량을 재는 것이다. 따라서 《논형》이란 허위지식 일체를 검토하고 비판하여 공정한 진리를 끌어내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논형》에는 당시의 주요한 철학 문제인 자연관, 지식론, 인성론, 운명론, 정치사상이 전부 포함되는데, 독창성이 풍부한 이론이 전개되었다.
《논형》의 편찬경위에 대해서는 고래로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확정된 설은 없다. 어떤 학자들은 왕충이 스스로 썼다고 주장하는 《기속(譏俗)》, 《정무(政務)》, 《양성(養性)》의 세 책이 원래의 《논형》과 합쳐서 지금의 《논형》이 되었다고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나머지 세 책은 다 없어지고 《논형》만이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 증보되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주계전(周桂鈿)은 《왕충평전(王充評傳)》에서 《논형》 각 편의 성립 연대를, 영평(永平) 전기와 영평 후기, 건초(建初), 원화(元和) 1~2년의 네 시기로 나누어 보았다. 이를 기준으로 나눈 편차는 다음과 같다.
① 영평 전기:〈문공(問孔)〉, 〈자맹(刺孟)〉, 〈비한(非韓)〉, 〈담천(談天)〉, 〈강서(講瑞)〉, 〈각녕(覺佞)〉, 〈답녕(答佞)〉, 〈상충(商蟲)〉, 〈감허(感虛)〉, 〈정재(程材)〉, 〈양지(量知)〉, 〈사단(謝短)〉, 〈효력(效力)〉.
② 영평 후기:〈난시(譋時)〉, 〈솔성(率性)〉, 〈설일(說日)〉, 〈길험(吉驗)〉, 〈누해(累害)〉, 〈조호(遭虎)〉, 〈기일(譏日)〉, 〈복서(卜筮)〉, 〈변수(辨祟)〉, 〈난세(難歲)〉, 〈힐술(詰術)〉, 〈해제(解除)〉, 〈사의(祀義)〉, 〈제의(祭意)〉.
③ 건초:〈명우(明雩)〉, 〈순고(順鼓)〉, 〈별통(別通)〉, 〈일문(佚文)〉, 〈회국(恢國)〉, 〈서허(書虛)〉, 〈변허(變虛)〉, 〈이허(異虛)〉, 〈감허(感虛)〉, 〈복허(福虛)〉, 〈화허(禍虛)〉, 〈용허(龍虛)〉, 〈뇌허(雷虛)〉, 〈도허(道虛)〉, 〈어증(語增)〉, 〈유증(儒增)〉, 〈예증(藝增)〉, 〈험부(驗符)〉, 〈초기(超奇)〉, 〈장류(狀留)〉, 〈기요(紀妖)〉, 〈언독(言毒)〉, 〈박장(薄葬)〉, 〈논사(論死)〉, 〈사위(死僞)〉, 〈정귀(訂鬼)〉, 〈제세(齊世)〉, 〈치기(治期)〉, 〈선한(宣漢)〉.
④ 원화1~2년:〈봉우(逢遇)〉, 〈명록(命祿)〉, 〈명의(命義)〉, 〈행우(幸遇)〉, 〈실지(實知)〉, 〈지실(知實)〉, 〈정현(定賢)〉, 〈견고(譴告)〉, 〈정설(正說)〉, 〈서해(書解)〉, 〈안서(案書)〉, 〈수송(須頌)〉, 〈대작(對作)〉, 〈자기(自紀)〉.

4. 내용

《논형》은 전체 85편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저작이다. 그러나 〈초치(招致)〉는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8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마지막 편인 〈자기(自紀)〉는 왕충 본인의 자서전에 해당하고, 뒤에서 두 번째 편인 〈대작(對作)〉은 《논형》이 쓰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초치〉, 〈자기〉, 〈대작〉을 제외한 나머지 82편에서 왕충의 철학적 탐구의 전모를 읽어낼 수가 있다.
《논형》의 서술 형식은 대체로 자문자답의 형식이다. 보통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로 시작해서, “이 말에 답한다.”의 형식이다. 여기에서 전자에 들어가는 내용은 주로 왕충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이거나, 다른 사람이 왕충을 비판하고 논박하는 내용이며, 후자에 들어가는 내용은 왕충이 비판하는 내용과 왕충이 반증하는 내용이다. 내용이 일관된 논리체계를 이루고 있지 않아 저작으로는 조잡한 점이 없지 않다.
이 책에서는 유교의 제설(諸說), 전국시대의 제자(諸子)의 설 이외에도 당시의 정치, 습속, 속설 등 다방면의 문제를 다루어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을 가하였다. 자연관(自然觀)에서는 대상이나 현상의 모든 범위에서 일어나는 사건 일체를 목적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방식인 하늘의 의지를 부정하여 천인감응의 신권설을 타격하고, 오행재이사상(五行災異思想)을 의심하였다. 또 사후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여, 사람의 정신 활동도 육체의 생명과 함께 물질상 생멸한다는 이론을 설명하여 환담(桓譚) 이래 무신론을 철저히 하기도 하였다.
지식론(智識論)에서는 모든 경험에 앞선 인식이 태어날 때부터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관점을 부정하였다. 학습 경험에 토대한 지식의 집적(集積)에 기초한 이성적 판단을 존중하여 당시 유행한, 이치에 맞지 않는 여러 가지 설화나 전문(傳聞)의 허망성을 폭로했다. 이것은 당시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해석학으로 변한 어용유학(御用儒學)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는데 공자나 맹자의 언행도 비판하였으므로 송대 이후 체제교학(體制敎學)에 격렬히 비난받았다.
《논형》의 내용은 비록 시대적 한계는 가지고 있었으나 비판적 정신이 풍부하여 전통사상, 특히 한나라 때 유학 속에 잠재한 허망성을 지적하고 속유(俗儒)의 신비주의적 사상, 즉 미신적 사상을 배격하였으며, 공자·맹자의 언행에 대해서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대단히 희귀한 문헌(文獻)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역대 지식계급에게 많은 지지를 받아 왔으며, 유교 교학체제가 붕괴한 근대 이후에는 《논형》의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5. 가치와 영향

《논형》의 지향점은 허위 지식 일체를 검토하고 비판하여 공정한 진리를 끌어내는 데에 있었다. 실제로 이 책은 당시의 주요한 철학 문제를 독창적인 이론으로 전개하였다. 왕충의 사상은 전통사회라는 시대적 배경 하에서는 너무나 혁신적인 것이었기에 《논형》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평가는 중국에서 봉건 시대가 종식되고 근대화의 문턱에 들어선 청나라 말기에 와서나 가능해졌다.

6. 참고사항

(1)명언
• “선하면 길함을 만나고 악하면 흉함을 만나는데, 그것은 하늘의 도가 본래 그러한 것이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善則逢吉 惡則遇凶 天道自然 非爲人也]” 〈복서(卜筮)〉
• “사람은 행동으로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고, 하늘 또한 행동에 따라 인간에게 감응하지 않는다.[夫人不能以行感天 天亦不隨行而應人]” 〈명우(明雩)〉
• “하늘의 도는 자연이며 무위이다. 하늘이 만일 인간을 꾸짖고 알려준다면 이것은 유위이지 자연이 아니다.[夫天道 自然也 無爲 如譴告人 是有爲 非自然也]” 〈견고(譴告)〉
(2)색인어:왕충(王充), 논형(論衡), 공자(孔子), 맹자(孟子), 귀신(鬼神), 복서(卜筮), 길험(吉驗).
(3)참고문헌
• 論衡(王充 著, 劉光斗 評)
• 論衡(王充 著, 顧汝璉 校)
• 論衡注釋(北經大學歷史系論衡注釋小組 編)
• 왕충-한대 유학을 비판한 철학자(임옥균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논형(論衡)(이주행 역, 소나무)

【함현찬】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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