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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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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존 상태가 양호한 최고(最古)의 도서 목록지인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제자략(諸子略)〉에서는 《등석자(鄧析子)》(정확히 하면 《등석(鄧析)》이라 기재되어 있음)를 선진(先秦)시대 십가구류(十家九流) 가운데 하나인 명가(名家)의 첫머리에 배치하였고, 2편이라 소개하였다. 반고는 이에 자주(自注)를 보태어 춘추(春秋)시대 말기 정(鄭)나라 사람으로 자산(子産)((未詳)~B.C. 522)과 동시에 활약하였던 인물을 《등석자》의 저자라고 소개하였으니, 아마도 이 인물은 자산의 정치적 비판자였던 등석(鄧析)을 염두에 둔 것이라 추정된다.
반면, 현존하는 《등석자》의 내용과 주장은 형명(刑名) 즉 군주와 신하의 관계나 법술(法術)적인 방면에 치우쳐 있다. 이는 《장자(莊子)》, 《순자(荀子)》, 《열자(列子)》 그리고 《여씨춘추(呂氏春秋)》 등에 실려 있는 명가의 개창자로서 등석의 활동이나 주장(이를테면 ‘무궁(無窮)’과 ‘양가(兩可)’)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래서 청말민초(淸末民初)의 학자들(유월(兪樾), 양계초(梁啓超), 나근택(羅根澤), 오비백(伍非百), 마서륜(馬叙倫), 왕계상(王啓湘), 곽담파(郭湛波))은 현존하는 《등석자》가 반고가 소개한 그 《등석자》인가를 논구하였다. 그 결과, 반고가 본 《등석자》가 언제 없어지고 현존하는 《등석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이견을 노출하였다. 하지만 현존하는 《등석자》는 춘추 말에 활약한 등석의 작품이 아니고 등석의 이름을 빌린 후대의 위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과 현존하는 《등석자》의 두 편명인 ‘무후(無厚)’와 ‘전사(轉辭)’에는 등석의 원래 사상이 반영되어 담겨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였다.
정리하면, 반고가 본 판본의 《등석자》는 지금은 유실되었고, 현존하는 《등석자》는 등석의 이름에 위탁한 위서(僞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현 《등석자》의 두 편명인 ‘무후’와 ‘전사’에는 춘추 말에 활약한 ‘등석’의 사상이 녹아 있기에 두 편명의 탐구를 통해서 춘추 말이라는 중국철학의 여명기를 살았던 등석이 직면하였던 시대적, 철학적 문제의식을 가늠해 볼 수 있겠다.

2. 저자

(1) 성명:등석(鄧析(대략 B.C. 545~B.C. 501))
(2) 자(字)·호(號):미상(未詳)
(3) 출생지역:춘추시대 정(鄭)나라
(4) 주요활동과 생애
등석의 주요 행적은 행정가와 직업적 논변가로 압축된다. 이를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순자(荀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열자(列子)》, 《묵변서(墨辯序)》 등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춘추좌씨전》에서는 그가 정나라의 대부(大夫)를 지녔다는 것과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여씨춘추》에서는 그가 당시 정나라의 실권자 자산(子産)에게 반항했던 일과, 당시 사람들에게 송사(訟事)를 배우도록 권면한 일을 기재하고 있다. 《순자》에서는 그를 괴이한 학설과 논변을 잘 다루었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한서》와 《묵변서》에서는 그를 명가의 시조라고 소개하고 있다.
등석의 행적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것은 그의 죽음이다. 《순자》와 《여씨춘추》 그리고 《열자》 등은 모두 정나라의 자산이 그를 살해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9년에서는 정나라 사전(駟顓)이 그를 죽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란에서 더 신뢰할 만한 기록으로는 《순자》와 《여씨춘추》 그리고 《열자》의 그것보다, 《춘추좌씨전》의 그것을 꼽을 수 있다.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소공(昭公) 20년 즉 B.C. 522년에 사망한 자산이 대략 B.C. 501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등석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5) 주요저작:《등석자》

3. 서지사항

《등석자》가 《한서》 〈예문지〉에서는 명가류(名家類) 2편(篇)으로, 《수사(隋書)》 〈경적지(經籍志)〉와 《구당서(舊唐書)》 〈경적지〉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경적지〉에서는 명가류 1권(卷)으로, 《송사(宋史)》 〈예문지〉에서는 명가류 2권으로 그리고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서는 법가류(法家類) 1권으로 기재되어 있다.
현존하는 《등석자》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서충량(徐忠良)이 주역(注譯)한 《신역등석자(新譯鄧析子)》에서는 이를 5가지 견해로 분류한다. 첫째는 진(晉)나라 때 이루어졌다는 견해(나근택의 《등석자탐원(鄧析子探源)》)이다. 둘째는 수당(隋唐)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견해(왕계상의 《주진명가삼자교전(周秦名家三子校詮)》)이다. 셋째는 《열자》와 《귀곡자(鬼谷子)》 뒤에 이루어졌다는 견해(마서륜의 《등석자교록(鄧析子校錄)》)이다. 넷째는 당송(唐宋)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견해(양계초의 《한서예문지제자략고석(漢書藝文志諸子略考釋)》)이다. 다섯째는 남북조(南北朝) 때 이루어졌다는 견해(여사면(呂思勉)의 《선진학술개론(先秦學術槪論)》)이다.
정리하면, 《등석자》의 편수와 권수가 다른 것은 ‘2편’을 ‘1권’으로 보거나 ‘편’을 ‘권’으로 간주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반고가 본 《등석자》의 유실 시기는 현재 특정할 수 없다. 다만, 현 《등석자》의 판본은 양계초가 주장한 것처럼 당송 이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대 문헌까지는 《등석자》를 명가류로 분류하지만, 청대의 《사고전서총목》에서는 《등석자》를 법가류로 분류하고 있는데다가 현 《등석자》의 내용과 주장이 형명(刑名) 이론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4. 내용

현존하는 《등석자》는 ‘무후’와 ‘전사’라는 두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자집성(諸子集成)》에서는 ‘무후’ 편을 21장(章)으로, ‘전사’ 편을 17장으로 나눠서 실었다. 두 편 모두 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내용이 뒤섞여 있고 일관된 계통을 발견할 수 없다. 내용상 유사한 점은 신불해(申不害)나 한비(韓非)와 같은 법가 사상이나 황노(黃老) 사상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무후〉 1장에는 ‘천(天)의 위력 상실에 대해’, 2장에는 ‘군주의 과실 셋과 신하의 책임 넷’, 3장에는 ‘군주의 권세와 위엄’, 4장에는 ‘군주는 매사에 허정(虛靜)한 태도를 견지해야 함에 대해’, 5장에는 ‘법을 살펴 군주의 권위를 세움’, 6장에는 ‘세상을 다루는 것에 대해’, 7장에는 ‘군주가 짊어진 짐’, 8장에는 ‘호랑이를 돼지우리에서 찾을 수 없음’, 9장에는 ‘일의 성사와 형세’, 10장에는 ‘좋은 변론에 대해’, 11장에는 ‘훈련의 필요성’, 12장에는 ‘천명(天命)을 아는 것에 대해’, 13장에는 ‘함께 죽고 함께 살고’, 14장에는 ‘군주에게 요구되는 행동 넷’, 15장에는 ‘가혹한 정치에 대해’, 16장에는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자를 구별하기’, 17장에는 ‘대변(大辯)에 대해’, 18장에는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까닭’, 19장에는 ‘규구(規矩) 제정의 필요성’, 20장에는 ‘총명한 군주에 대해’, 21장에는 ‘군주의 용인술’이 담겨 있다.
〈전사〉 1장에는 ‘타인의 사정은 나의 그것과 다름에 대해’, 2장에는 ‘말을 잘함에 대해’, 3장에는 ‘군자의 합당한 말과 행동’, 4장에는 ‘신하를 채용하는 방법’, 5장에는 ‘성인(聖人)이 죽어야 대도(大盜)가 없어짐에 대해’, 6장에는 ‘수양이 미덕을 보존하는 길임에 대해’, 7장에는 ‘법 집행에 사사로움을 배제’, 8장에는 ‘마음의 안정’, 9장에는 ‘실천하기 쉬운 예(禮)와 법(法)’, 10장에는 ‘무위지치(無爲之治)’, 11장에는 ‘군주의 국사(國事) 파악에 대해’, 12장에는 ‘군주는 상과 벌로 근친(近親)과 신하 통솔’, 13장에는 ‘군주가 되는 길’, 14장에는 ‘독행지술(獨行之術)’, 15장에는 ‘난군(亂君)과 망국(亡國)’, 16장에는 ‘지자(智者)의 처신’, 17장에는 ‘세상을 보존하는 길’이 담겨 있다.

5. 가치와 영향

《등석자》의 편명인 ‘무후(無厚)’와 ‘전사(轉辭)’를 통해 공자 및 노자와 더불어 춘추시대 말기라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등석이라는 사상가의 시대적, 철학적 문제와 사명을 엿볼 수 있다. 그 시대는 상고(上古)시대로부터 내려오던 상제(上帝)와 천명(天命)이라는 지상의 준거가 무너져 내린 시대다. 등석과 공자 그리고 노자가 천명을 대신할 새로운 준거의 마련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공유했다고 할지라도, 그들 각자가 마련하여 내놓은 준거의 표는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의 이념적 차이를 보여준다. 노자가 제시한 준거는 무위(無爲)의 도(道)로서 상반상성(相反相成)하는 세계의 양면성을 통일하지만, 공자가 제시한 준거는 인(仁)이라는 보편에 기초한 예교(禮敎)와 덕치(德治)이다. 이에 반해, 송사(訟事)가 가장 다발(多發)하였던 정나라에 살면서 최초의 직업적 논변가라는 라벨이 어울리는 등석이 내놓은 준거는 ‘명변(名辯)’인데, 그의 용어로는 ‘전사(轉辭)’이다. 논쟁의 일방인 A도 옳고 그 상대인 B도 옳다고 하는 ‘양가(兩可)’ 논리로 구성된 ‘전사’는, 공자나 노자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지향을 보인다. 시비의 상대성을 여실히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등석의 준거는 공자의 그것과 구별된다. 또한 등석의 준거는 사태의 양면성을 그대로 인정할 뿐 그것을 통일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자의 그것과도 구별된다. 이처럼 공자나 노자와 구별되는 제3의 철학적 노선을 등석이 열어젖혔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등석이 공자나 노자와 달리 열어젖힌 제3의 철학적 노선에서, 우리는 등석처럼 명가의 일원으로 분류되나 공손룡(公孫龍)과 판이한 철학을 구성한 혜시(惠施)와 만나게 된다. 《순자》 여러 군데에서 혜시와 등석이 병칭(竝稱)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하늘은 사람에게 두터움이 없고, 임금은 백성에게 두터움이 없고, 아비는 자식에게 두터움이 없고, 형은 아우에게 두터움이 없다. 하늘은 해로운 기운을 물리쳐 일찍 죽는 사람을 살려낼 수 없으며 착한 백성으로 하여금 반드시 천수를 누리게 할 수 없으니, 이것이 하늘이 백성에 대하여 두터움이 없음이다.[天於人無厚也 君於民無厚也 父於子無厚也 兄於弟無厚也 天不能屛勃厲之氣 全夭折之人 使爲善之民必壽 此於民無厚也]” 《등석자》 〈무후〉 1장
• “대저 말하는 기술이란, 지혜로운 자와 대화할 때는 박식함에 의지할 것이요, 박식한 자와 대화할 때는 논변에 의지할 것이요, 논변을 잘하는 자와 대화할 때는 요점에 의지할 것이요, 귀한 자와 대화할 때는 권세에 의지할 것이요, 부유한 자와 대화할 때는 호탕함에 의지할 것이요, 가난한 자와 대화할 때는 이익에 의지할 것이요, 천한 자와 대화할 때는 겸손에 의지할 것이요, 용감한 자와 대화할 때는 과감함에 의지할 것이요, 어리석은 자와 대화할 때는 즐거움에 의지하여 대화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말하는 기술이다.[夫言之術 與智者言依於博 與博者言依於辯 與辯者言依於(安)[要] 與貴者言依於勢 與富者言依於豪 與貧者言依於利 與賤者言依於謙 與勇者言依於敢 與愚者言依於說 此言之術也]” 《등석자》 〈전사〉 2장
(2) 색인어 : 등석(鄧析), 등석자(鄧析子), 무후(無厚), 전사(轉辭), 양가(兩可).
(3) 참고문헌
• 《鄧析子》(《四庫全書(文淵閣)》 子部 法家類)
• 《鄧析子》(《諸子集成(第4册)》, 名家, 周鄧析譔, 上海世界書局)
• 《漢書》 〈藝文志〉
• 《周秦名家三子校詮》(王啓湘, 古籍出版社, 1957)
• 《先秦名學七書》(伍非百, 洪氏出版社, 1985)
• 《先秦辯學史》(郭湛波, 中華印書局, 1932)
• 《新譯鄧析子》(徐忠良 注譯, 三民書局, 1996)
• 《혜시와 공손룡의 명가 철학》(손영식, 울산대학교 출판부, 2005)
• 《등석자/윤문자/공손룡자/신자》(임동석, 동서문화사, 2011)
• 〈鄧析의 재발견:惠施 철학의 연원을 찾아서〉(김철신, 《철학연구》 제92집, 철학연구회, 2011)


【김철신】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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