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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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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은 당(唐)나라 한유(韓愈)(768~842)의 시문집이다. 한유는 등주(鄧州) 남양(南陽)(현 하남성(河南省) 맹주(孟州)) 사람인데, 스스로 군망(郡望)을 창려(昌黎)라고 하였기 때문에 세칭 한창려(韓昌黎) 혹은 창려 선생이라고 하였다. 또한 죽은 후 문(文)의 시호를 받았으므로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불렀다. 한유는 고문부흥운동을 일으켜 후세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시에서도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작품을 남겨 명성이 높은데다가, 불교가 성행하던 시대에 유교를 부흥시킨 공로가 있다고 평가되었으므로, 그의 시문은 널리 읽혔다. 장경(長慶) 4년(824) 한유의 사위이자 문인인 이한(李漢)이 한유의 시문 총 716편을 40권으로 편찬하여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을 만든 이후, 한유의 문집으로 여러 판본과 주석본이 속속 나왔다. 남송의 주희(朱熹)는 한유의 문집을 교감하여 《한문고이(韓文考異)》를 이루었는데, 같은 남송의 왕백대(王伯大)가 이것과 음석(音釋)을 정문(正文) 속에 부기한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 40권, 《집전(集傳)》 1권, 《외집(外集)》 10권, 《유문(遺文)》 1권을 간행하였다. 조선 세종(世宗) 때 집현전에서는 왕명을 받아 주희의 《한문고이》와 위중거(魏仲擧)의 《오백가주음변창려집(五百家註音辯昌黎集)》, 한순(韓醇)의 《신간훈고당창려선생문집(新刊訓詁唐昌黎先生文集)》 등을 참조하여 새로 《주문공교창려선생문집(朱文公校昌黎先生文集)》을 간행하였다.

2. 저자

(1)성명:한유(韓愈)(768~842)
(2)자(字)·별호(別號):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관직이 이부시랑(吏部侍郎)에 이르렀으므로 한이부(韓吏部)라고도 불렸다. 그는 등주(鄧州) 남양(南陽)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군망(郡望)을 창려(昌黎)라 하였다.
(3)출생지역:등주(鄧州) 남양(南陽)(현 하남성(河南省) 맹주시(孟州市))
(4)주요활동 및 생애
한유는 당나라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사대부이다.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14세 때 형을 잃은 후, 형수 정씨(鄭氏)의 손에서 자랐다. 정원(貞元) 8년(792)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변주(汴州) 감찰추관(觀察推官)‚ 사문박사(四門博士)‚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다. 관중(關中)에 큰 가뭄이 나서 요역과 세금의 감면을 상소했다가 권신귀족들의 미움을 받아 양산령(陽山令)으로 좌천되었다. 헌종(憲宗) 때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었다가, 비부낭중(比部郎中)‚ 사관수찬(史官修撰)으로 승진하였다. 재상 배도(裵度)를 좇아 회서(淮西)의 오원제(吳元濟)를 평정하고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승진하였다.
원화(元和) 13년(818) 봉상(鳳翔)(현 섬서성(陝西省)) 법문사(法門寺)의 불사리를 30년마다 개장(開帳)할 때 공양(供養)하면 이익이 있다고 하여, 당시의 황제 헌종(憲宗)이 장안(長安)의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이듬해 원화 14년(819) 한유는 이에 반대하여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극간(極諌)하였다가 황제의 역린(逆鱗)에 거슬려 조주(潮州)(현 광동성(廣東省))의 자사(刺史)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원주(袁州)의 자사가 되었다. 다음 해 820년, 헌종이 붕어하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다시 징소되어 국자좨주(國子祭酒)에 임명되었다. 그 후 병부시랑(兵部侍郎)·이부시랑(吏部侍郎)을 역임하고, 경조윤(京兆尹) 즉 지경조부사(知京兆府事)를 역임하고, 824년에 57세로 타계하였다.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다. 관직이 이부시랑에 이르렀으므로 한이부(韓吏部)라고도 불렸다.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구당서(舊唐書)》 권160과 《신당서(新唐書)》 권176에 입전(立傳)되어 있다.
(5)주요저작:〈논불골표(論佛骨表)〉, 〈원도(原道)〉, 〈원훼(原毁)〉, 〈사설(師說)〉, 〈진학해(進學解)〉, 〈모영전(毛潁傳)〉, 〈송궁문(送窮文)〉, 〈잡설(雜說)〉,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 〈제정부인문(祭鄭夫人文)〉,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敍)〉, 〈오자왕승복전(圬者王丞福傳)〉,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장경 4년(824) 한유의 사위이자 문인인 이한(李漢)은 한유의 시문 총 716편을 40권으로 편찬하여 《창려선생집》을 만들었다. 이후의 판본과 주석본은 이것을 근거로 하여 유문(遺文)을 첨가하고 글자를 교정하는 한편 주석을 달았다. 남송 순희(淳熙) 16년(1189)에 방숭경(方崧卿)은 한유 문집의 여러 판본들을 대상으로 원문에 대해 고이(考異)와 교감(校勘)을 하여 원문과 별도로 《한집거정(韓集擧正)》 10권을 엮어 남안(南安)에서 판각하였다. 이후 경원(慶元) 연간(1195~1200)에 주희는 방숭경의 《한집거정》을 대상으로 변증을 행하고 방숭경이 교감하지 못한 내용을 보완하여 《한문고이》 10권을 만들었다. 방본(方本)과 마찬가지로 본집과는 별도로 10권을 편찬하였다. 얼마 후 왕백대(王伯大)(왕유경(王留畊))는 《한문고이》를 한유 문집의 정문(正文) 속에 나누어 집어넣고 음석(音釋)을 더하여 《주문공교창려선생집》 40권‚ 《집전》 1권‚ 《외집》 10권‚ 《유문》 1권을 편찬하여 남검주(南劍州)에서 판각하였다. 남송 말 이후, 원·명·청에 이르기까지 한유 문집의 판각본이 다량으로 출현하였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이 왕백대본(王伯大本)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한편 한유 문집의 주석본도 많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위중거의 《신간오백가주음변창려선생집》과 요영중(廖瑩中)(?~1275)의 세채당(世彩堂) 주(注)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다. 위중거의 주석본은 송나라 때 이루어진 여러 주석들을 모아놓은 집주본(集注本)이되, 각 주석들의 내용을 비판 없이 그대로 수록하였다. 이에 비해 남송 도종(度宗)의 함순(咸淳) 연간(1265~1274)에 이루어진 요영중세채당본(廖瑩中世彩堂本)은 위중거의 《오백가주(五百家注)》에 기초하되 기존의 주석들을 선별하고 새로운 주석을 함께 수록하고, 《오백가주》 이후에 나온 《한문고이(韓文考異)》를 참고하여 교정된 정문을 사용하였다. 요영중세채당본은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지만,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1573~1620)에 서시태(徐時泰)가 중각하면서 크게 성행하였다. 단 요영중은 남송의 간신 가사도(價似道)의 문객이었으므로, 서시태는 그의 이름과 간기, 세채당이라는 판원(板元)을 삭제하였다. 이것이 《동아당창려선생집(東雅堂昌黎先生集)》으로, 줄여서 동아당본(東雅堂本)이라고 한다.
한편 조선에서는 세종 원년(1419)에 진주(晉州)에서 위중거의 《오백가주음변창려집(五百家註音辯昌黎集)》을 간행하였는데, 현재 《외집》만 전한다. 세종 20년(1438)에는 최만리(崔萬理)·김빈(金鑌)·이영서(李永瑞)·조수(趙須) 등 집현전 학사들이 왕명을 받아 새로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을 엮어, 그것을 활자로 간행하였다. 이 신편 《주문공교창려선생집》은 주희의 《한문고이》, 위중거의 《오백가주음변창려집》, 한순의 《신간훈고당창려선생문집》 등을 참조해서 기왕의 주석을 선별 수록하되, 《한문고이》와 《오백가주음변창려선생집》의 주는 거의 그대로 수록하였으며, 목차도 기왕의 중국 서적을 그대로 따랐다. 이 책은 명종·선조 연간에 갑인자혼보자(甲寅字混補字)로 간행되고, 뒤에 정판되었으며, 다시 경진자(庚辰字)(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로 간행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 훈련도감자(訓鍊都監字)(경오자(庚午字))로 복간되었다. 훈련도감자본의 권말에는 이항복(李恒福)의 발문이 있고, 간행에 참여한 김수(金睟), 이정귀(李廷龜), 정사호(鄭賜湖)의 이름과 각수(刻手)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4. 내용

한유의 문집 《창려선생집》의 내용을, 왕백대의 《주문공교창려선생집》 40권‚ 《집전》 1권‚ 《외집》 10권‚ 《유문》 1권에 의거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권1은 〈감이조부(感二鳥賦)〉 등 부(賦) 4수와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 등 고시(古詩) 32수. 권2는 〈북극일수증이관(北極一首贈李觀)〉 등 고시(古詩) 27수, 권3은 〈하지수(河之水)〉 등 고시 30수, 권4는 〈유생시(劉生詩)〉 등 고시 34수, 권5는 〈신묘년설(辛卯年雪)〉 등 고시 33수, 권6은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 등 고시 26수, 권7은 〈운후기최이십육승공(雪後寄崔二十六丞公)〉 등 고시 28수. 권8은 〈성남연구(城南聯句)〉 등 연구(聯句) 11수. 권9는 〈제초소왕묘(題楚昭王廟)〉·〈견흥(遣興)〉 등 율시(律詩) 85수, 권10은 〈송이상서부양팔음(送李尙書赴襄陽八韻)〉·〈화두상공태청궁(和杜相公太淸宮)〉 등 율시 80수.
권11은 〈원도(原道)〉·〈독문자(讀墨子)〉 등 잡저(雜著) 12편, 권12는 〈획린해(獲麟解)〉·〈백이송(伯夷頌)〉 등 잡저 17편, 권13은 〈자산불훼향교송(子産不毁鄕校頌)〉·〈과두서후기(科斗書後記)〉 등 잡저 12편, 권14는 〈혼주계당시(鄆州溪堂詩)〉 등 잡저 20편, 〈여이비서논소공불세서(與李秘書論小功不稅書)〉 등 서(書) 3편. 권15는 〈여맹동야서(與孟東野書)〉 등 서(書) 8편과 〈위분사낭관상정상서상공계(爲分司郎官上鄭尙書相公啓)〉 등 계(啓) 2편. 권16은 〈상재상서(上宰相書)〉·〈여이고서(與李皐書)〉 등 서(書) 11편, 권17은 〈상장복야서(上張僕射書)〉·〈여사부능원외서(與祠部陸員外書)〉 등 서(書) 11편, 권18은 〈여경서절도사서(與京西節度使書)〉·〈답윤시어서(答允侍御書)〉 등 서(書) 10편. 권19는 〈여정상공서(與鄭相公書)〉 등 7편의 서(書)와 〈송육흡주시서(送陸歙州詩序)〉 등 9편의 서(序). 권20는 〈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송유주이단공서(送幽州李端公序)〉 등 서(序) 13편, 권21은 〈송장도사서(送張道士序)〉·〈석정연구시서(石鼎聯句詩序)〉 등 서(序) 14편. 권22은 〈제전횡묘문(祭田橫墓文)〉·〈구양생애사(歐陽生哀辭)〉 등 애사제문(哀辭祭文) 14수. 권23는 〈원주제신문(袁州祭神文)〉·〈제유자후문(祭柳子厚文)〉 등 제문 22수. 권24는 〈이원빈묘명(李元賓墓銘)〉 등 비지(碑誌) 9편, 권25은 〈등봉현위려은묘지명(登封縣尉盧殷墓誌銘)〉 등 비지 10편, 권26에는 〈당조산대부증사훈원외랑공군묘지명(唐朝散大夫贈司勳員外郞孔君墓誌銘)〉 등 비지 6편, 권27은 〈유통군비(劉統軍碑)〉 등 비지 3편, 권28은 〈조성왕비(曺成王碑)〉 등 비지 5편, 권29는 〈장요선생묘지(貞曜先生墓誌)〉 등 비지 5편, 권30은 〈당고감찰어사위부군묘지명(唐故監察御史衛府君墓誌銘)〉 등 비지 6편, 권31은 〈남해신묘비(南海神廟碑)〉 등 비지 4편, 권32는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 등 비지 5편, 권33은 〈초국부인묘지명(楚國夫人墓誌銘)〉 등 비지 5편, 권34는 〈남양번소술묘지명(南陽樊紹述墓誌銘)〉 등 비지 7편, 권35는 〈유모묘명(乳母墓銘)〉 등 비지 6편. 권36은 〈예연명(瘞硯銘)〉 등 잡문(雜文) 4편, 권37은 〈증태부동공행장(贈太傅董公行狀)〉·〈전중물경장(錢重物輕狀)〉 등 장(狀) 8편. 권38은 〈위위상공양관표(爲韋相公讓官表)〉 등 표 14편, 권39는 〈논불골표(論佛骨表)〉 등 표 15편, 권40은 〈논공규치사장(論孔戣致仕狀)〉 등 장(狀) 11편.
《외집(外集)》 권1은 〈명수부(明水賦)〉·〈고한가(苦寒歌)〉 등 부와 시 6편과 〈청천현종묘의(請遷玄宗廟議)〉의 글. 권2는 〈상가활주서(上賈滑州書)〉 등 서(書) 5편. 권3은 〈송변주감군구문진서(送汴州監軍俱文珍序)〉 등 2편. 권4는 〈통해(通解)〉 등 6편. 권5는 〈제최호부시낭제(除崔戶部侍郞制)〉 등 7편. 권6~10은 한유가 찬한 《순종실록(順宗實錄)》 5권.
유문(遺文)은 연구(聯句) 〈유소사연구(有所思聯句)〉 등 3편. 유시(遺詩)는 〈동두위심유존사불우(同竇韋尋劉尊師不遇)〉·〈지상서(池上絮)〉 등 12편. 이 외에 기(記) 1편, 서(書) 1편, 계(啓) 1편, 장(狀) 4편, 소(疏) 1편, 제명(題名) 7편이 더 있다.
전(傳)은 《신당서(新唐書)》 〈열전(列傳)〉을 전재하였다. 또 조덕(趙德)의 〈문록서(文錄序)〉, 구양수(歐陽脩)의 〈기구본한문후(記舊本韓文後)〉,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를 수록하였다.
한유는 시에서도 중당 때 백거이와 맞서는 일파를 형성하여, 맹교(孟郊)·장적(張籍)·이하(李賀)·왕건(王建)·가도(賈島) 등의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하지만 한유는 역시 고문 부흥의 공로자로서 더 기억된다. 한유는 〈여풍숙논문서(與馮宿論文書)〉에서 ‘고문’이란 말을 사용하고, 자기의 고문이 속하문자(俗下文字)와 달라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속하문자란 전고와 미사여구를 구사하고 어휘의 뜻을 모호하게 사용하는 변체의 글, 곧 변문(변려문)을 가리킨다. 당나라 때는 제고(制誥)·표장(表章)·서계(書啓)와 같은 공용 문체에 변문을 사용했는데, 한유는 그런 문체를 속하문자로 규정하고 그것과 상대되는 문체를 고문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한유는 옛 도를 배우려면 그 사(辭)에 통해야 한다고 보아, 도와 사를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했다. 〈제애사후(題哀辭後)〉에서 한유는, 고문이란 구두(句讀)가 지금과 맞지 않는 문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합하고 옛 도를 지향하는 문장이라고 했다.
한유는 〈원도(原道)〉에서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이 이것을 공자에게 전하고, 공자는 맹가(孟軻)에게 전했다. 맹가가 죽자 이것을 전할 수 없게 되었다.[文武周公傳之孔子 孔子傳之孟軻 孟軻死 不得其傳焉]”라고 하여, 한·위·육조 이래 끊어진 맹자의 정신을 부활시킬 목적으로 문장을 짓는다고 밝혔다. 한유는 정통유학의 계승자로 자임하여 도통(道統)과 문통(文統)을 주장했다. 한유는 〈답진생서(答陳生書)〉에서 “옛 도에 뜻을 두고 있으나 그 언사(言辭)도 아주 좋아한다.[愈之志 在古道 又甚好其言詞]”라고 했는데, 그 ‘언사’란 〈답이익서(答李翊書)〉에서 제창한 삼대·양한의 책이다. 단 한유는 언사 자체의 미학을 망각하지 않았다. 또한 문학의 전도(傳道) 기능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의 창작 과정에서 현실 생활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인식했다.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서 한유는 소리와 말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 동기는 불평(不平) 때문이라 하고, 과거의 많은 저명한 문학가들을 ‘잘 울음을 운 자[선명자(善鳴者)]’라 칭하여, 현실 속의 좌절과 고통이 오히려 훌륭한 문학을 낳는 동기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유는 현실의 경험 속에서 생성되는 사상과 감정을 중시했다. 곧 〈답울지생서(答尉遲生書)〉에서 “문이라는 것은 필시 실질을 인간의 속에 지니고 있는 것이니, 군자는 그 실질을 중시하는 법이다.[夫所謂文者 必有諸其中 是故君子愼其實]”라고 했다. ‘실(實)’은 작가의 도덕 수양, ‘중(中)’은 사상·감정·인식을 뜻한다. 단 주희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한유가 올바른 도를 터득했지만 작문에 시간을 빼앗긴 탓에 경륜의 실무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조선의 정약용(丁若鏞)도 〈한문공휘변평(韓文公諱辨評)〉에서, 한유의 〈휘변(諱辨)〉이 사실 분석이 소략하다고 비판하고, 한유가 〈모영전(毛潁傳)〉에서 “시초점(莁)을 쳐서 하늘과 인문의 조짐을 얻었다.[筮之得天與人文之兆]”라고 한 것은 거북점[卜]을 쳐서 조짐을 얻고 시초점을 쳐서 괘(卦)를 얻는 사실과 배치된다고 지적한 후, “문장에 뜻을 둔 자는 벼슬을 구하는 데만 힘쓰기 때문에 이따금 이처럼 경전(經典)에 소략한 실수를 범한다.[志在文章者 漁獵爲務 故其疎於經傳 往往如此]”라고 했다.
비판이 없지는 않았지만, 한유는 주지주의의 실험적 시풍과 현실에 밀착한 사색을 담아낸 산문 명작을 《창려선생집》에 남겼다.

5. 가치와 영향

한유는 번진(藩鎭)의 할거(割據)를 반대하고‚ 공맹(孔孟)의 도통(道統)을 고취하였으며, 유종원과 함께 고문운동을 창도하였다. 육조 이래 변려문의 노정한 형식주의를 극복하고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유교적 문학관을 확립하였으며, 그러면서도 ‘불평즉명(不平則鳴)’의 현실주의 정신과 참신한 실험적 태도를 추동하여 후세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한유의 문장은 중국만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서도 문장의 모범으로 추앙되었다.
앞서 보았듯이 조선에서는 세종 원년(1419)에 진주에서 위중거의 《오백가주음변창려집》을 간행하고, 세종 20년(1438)에는 집현전 학사들이 왕명에 따라 《주문공교창려선생집》을 새로 편찬하고 활자로 간행했다. 조선 후기에도 한유의 산문은 고문의 으뜸으로 추종되었다. 강박(姜樸)(1690~1742)은 책문 〈문창려집(問昌黎集)〉에서 한유의 여러 글에 대해 결처(欠處)와 착처(錯處)를 비판하면서도 결국 한유는 이단을 배척하고 문체를 반정(反正)한 공이 있으므로, 문풍을 크게 변화시키려면 한유를 본받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 뒤 정조는 당송팔가문을 고문 정종(正宗)으로서 제시하기 위해, 어정(御定)의 《팔자백선(八子百選)》과 《팔가수권(八家手圈)》을 간행하여 반포했다. 근기남인학파의 우파에 속하는 안정복(安鼎福)(1712~1791)도 《팔가백선(八家百選)》을 엮었다.

6. 참고사항

(1)명언
• “대개 사물이 평형을 얻지 못할 때에는 음을 낸다. 소리가 없는 초목도 바람이 흔들면 음을 내고, 소리가 없는 물도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면 음을 낸다. 거품을 일으키는 것은 부딪혀서 그렇고, 쏴 흘러 떨어지는 것은 담 쌓아 막기 때문이며, 들끓어 일어나는 것은 불로 데우기 때문에 그렇다. 소리가 없는 금속이나 돌도 때리면 음을 낸다. 인간의 말의 경우도 그렇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있기에 비로소 말이 나온다. 노래하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이고, 우는 것은 슬픔이 있어서이다. 입에서 나오는 모든 음이란 모두 평형을 얻지 못함이 있기 때문이로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 草木之無聲 風搖之鳴 水之無聲 風蕩之鳴 其躍也或激之 其趨也或梗之 其沸也或炙之 金石之無聲 或擊之鳴 人之於言也亦然 有不得已者而後言 其歌也有思 其哭也有懷 凡出乎口而爲聲者 其皆有不平者乎]”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
(2)색인어:한유(韓愈), 한창려(韓昌黎), 한이부(韓吏部), 한문공(韓文公),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고문(古文),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3)참고문헌
• 韓昌黎文集校注(韓愈 原著, 馬其昶 校注, 馬茂元 整理, 中國古典文學叢書, 上海古籍出版社)
• 韓愈(清水茂 譯注, 中國詩人選集 第11卷, 岩波書店)
• 韓愈(原田憲雄 譯·解說, 漢詩大系 第11卷, 集英社)
• 韓愈(清水茂 譯注, 世界古典文學全集 第30卷A·B, 筑摩書房)
• 韓愈(星川清孝 譯注, 白石眞子 編, 唐宋八大家文讀本, 新釋漢文大系, 明治書院)
• 〈宣祖·光海君朝의 韓愈文과 史記 硏鑽에 관하여 -韓愈文과 《史纂》의 懸吐와 註解를 중심으로-〉(심경호, 《季刊書誌學報》제17호)
• 한국한문기초학사3(심경호, 태학사)
• 唐宋八大家文抄 韓愈(鄭太鉉, 전통문화연구회)
【심경호】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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