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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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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대 중엽에 원매(袁枚)가 지은 시문(詩文) 합집이다. 원매는 성령파(性靈派)의 영수로 시뿐만 아니라 고문(古文)과 변려문(騈儷文)에까지 두루 능하였다. 조익(趙翼), 장사전(蔣士銓)과 ‘건가삼대가(乾嘉三大家)’로 불리고 조익, 장문도(張問陶)와 ‘성령파삼대가(性靈派三大家)’로도 병칭되었다. 변문팔대가(騈文八大家)에 속하여 기윤(紀昀)과 함께 ‘남원북기(南袁北紀)’로 불렸다.

2. 저자

(1) 성명:원매(袁枚)(1716~1797)
(2) 자(字)·별호(別號):자(字)는 자재(子才), 호(號)는 간재(簡齋) 또는 존재(存齋)이며 자호(自號)는 창산거사(倉山居士)와 수원노인(隨園老人).
(3) 출생지역:절강(浙江) 전당(錢塘)(현 항주시(杭州市)).
(4) 주요활동과 생애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고모와 스승 사옥찬(史玉瓚), 왕교하(王交河), 양승무(楊繩武)의 가르침을 받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1736년 건륭(乾隆) 원년(元年) 21세에 계림(桂林)에 있는 숙부 원홍(袁鴻)을 찾아갔다가 광서순무(廣西巡撫) 김홍(金鉷)의 눈에 들어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에 추천되었으나 떨어졌다. 1738년에 순천향시(順天鄕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진사(進士)가 되어 한림원서길사(翰林院庶吉士)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겨울에 왕씨(王氏)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742년에 만주어 성적이 나빠 산관(散館) 시험에서 탈락하고 율수지현(溧水知縣)으로 발령되었다. 이후로 약 7년 동안 줄곧 강포(江浦), 술양(沭陽), 강녕(江寧) 등지를 옮겨 다니며 지현(知縣)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748년 강령직조(江寧織造) 수혁덕(隋赫德)의 정원이었던 수직조원(隋織造園)을 사서 수원(隨園)이라 이름 지었다. 1749년 33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수원으로 돌아왔다. 1752년에 양강총독(兩江總督) 윤계선(尹繼善)의 추천으로 섬서(陝西)의 관리로 발탁되었으나 부친의 작고로 채 1년이 되지 않아 사퇴하였다. 이후 원매는 소주(蘇州), 항주(杭州), 양주(揚州) 등 강남(江南)의 사교공간을 오가며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각계각층의 인물들, 즉 고위관료에서부터 박학홍사과 및 과거 동기생, 염상, 양주팔괴(揚州八怪), 과거시험 수험생, 젊은 학자들, 포의(布衣) 그리고 여성 시인 등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교류를 벌이며 재야 문단의 영수로 거듭나게 되었다. 1797년 가경(嘉慶) 2년에 82세로 생애를 마쳤다.
(5) 주요저작
《소창산방시집(小倉山房詩集)》 37권, 《소창산방시집보유(小倉山房詩集補遺)》 2권, 《소창산방문집(小倉山房文集)》 35권, 《수원시화(隨園詩話)》 16권, 《수원시화보유(隨園詩話補遺)》 10권, 변문집(騈文集) 《소창산방외집(小倉山房外集)》 8권, 고증서(考證書) 《수원수필(隨園隨筆)》 28권, 지괴소설(志怪小說) 《자불어(子不語)》 24권, 《속자불어(續子不語)》 10권, 팔고문집(八股文集) 《원태사고(袁太史稿)》, 《소창산방척독(小倉山房尺牘)》 10권, 《척외여언(牘外餘言)》, 음식서 《수원식단(隨園食單)》, 《속동인집(續同人集)》 14류, 《팔십수언(八十壽言)》 6권 등을 지었다. 시와 고문은 물론 시화, 변려문, 고증서, 지괴소설, 팔고문, 척독, 음식서 등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3. 서지사항

1745년 강령지현(江寧知縣)으로 있던 시절에 《쌍류헌시문집(雙柳軒詩文集)》 2권을 편찬하였으나 이후 작품에 불만을 품고 태워버려 많이 유실되었다. 1775년에 시문집 《수원전집(隨園全集)》을 편찬하였는데 시집과 문집이 각 30권이었다. 1790년에 시문집을 각각 32권으로 증보하였다. 1796년(가경(嘉慶) 원년)에 황근포(黃菫浦) 선생의 《사과장고(詞科掌故)》에 원매의 시가 많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따로 정리하여 《보유(補遺)》 2권을 만들고 문집도 35권으로 늘렸다. 건륭수원각본(乾隆隨園刻本) 《소창산방집》은 시집 32권과 문집 32권으로 되어 있고 가경초수원각본(嘉慶初隨園刻本) 《소창산방집》은 시집 39권과 문집 35권으로 되어 있다.
《소창산방시집》은 정집(正集) 37권과 보유(補遺) 2권으로 이루어졌다. 1736년 21세부터 82세까지 지은 작품이 시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각 권마다 고시(古詩)와 근체시(近體詩)가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전체 작품은 모두 4480여 수에 달한다. 《소창산방문집》은 정집(正集) 24권, 속문집(續文集) 11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약 440여 편의 문장이 실려 있다. 문장의 형식에 따라 부잡저(賦雜著), 신도비(神道碑), 묘지(墓志), 전(傳), 행장(行狀), 서(書), 서(序), 기(記), 제문(祭文), 논(論), 설변의(設辨疑), 명책문해(銘策問解)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4. 내용
원매는 내용상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제약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이 담긴 진실한 감성과 개성적 표현에 중점을 두며 개인적 취향, 수집벽, 소소한 일상생활, 가족, 친구, 여행, 산수 등을 소재로 다뤘다. 또한 증답시, 교유시를 많이 지었는데 이는 강남도시의 사교장에서 맺은 교유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성령파라는 문인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만년에는 천태산(天台山), 황산(黃山), 계림(桂林), 무이산(武夷山) 등의 원거리 여행을 즐기며 기유(紀遊)와 산수(山水) 관련 시문을 많이 지었다. 고시와 근체시에 모두 능하였는데 특히 근체시에 대한 평가가 높았다. 대표작으로 〈방원유산논시(倣元遺山論詩)〉, 〈영전(詠錢)〉, 〈독서(讀書)〉, 〈낙화(落花)〉, 〈자제(自題)〉, 〈도연명유음주이십수여천성불음고반지작불음주이십수(陶淵明有飮酒二十首余天性不飮故反之作不飮酒二十首)〉, 〈대일가(對日歌)〉, 〈서소견(書所見)〉, 〈곡삼매오십운(哭三妹五十韻)〉, 〈간매(看梅)〉, 〈추창(推窓)〉, 〈수서정야좌(水西亭夜坐)〉, 〈관대용추작가(觀大龍湫作歌)〉, 〈제지기시(諸知己詩)〉 등이 있다.
원매는 고문에서부터 변려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글쓰기 능력을 선보이면서도 특히 고문의 본래 모습을 강조하며 송대 주자학과 청대 고증학적 요인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기본적으로 시처럼 개인의 ‘성정’을 표출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번다한 수식을 피하고 간결하고 명확한 주제 전달에 힘썼다. 주요 내용은 격조파 시론에 대한 비판, 시문에 끼친 고증적 태도 비판, 문단의 파벌주의 비판, 진실한 감정과 개인의 욕망에 대한 긍정, 여러 인물들의 개성과 특기에 대한 표현 등이다. 대표작으로는 〈여정즙원서(與程蕺園書)〉, 〈답윤사촌서(答尹似村書)〉, 〈하남원시서(何南園詩序)〉, 〈답심대종백논시서(答沈大宗伯論詩書)〉, 〈송유론(宋儒論)〉, 〈답우인모논문서(答友人某論文書)〉, 〈소호헌기(所好軒記)〉, 〈유여산황애우우기(遊廬山黃崖遇雨記)〉, 〈여설수어서(與薛壽魚書)〉, 〈주자왕소여전(廚者王小余傳)〉 등이 있다.
5. 가치와 영향
원매는 사상적으로 주자학에 반대하고 육경(六經)을 시문(詩文)의 근본으로 삼았다. ‘시는 관대하고 문장은 엄격하게 지어야 한다(詩寬文嚴)’고 하며 시는 성인이 지은 것이 아니므로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문장은 성인이 지은 것이므로 함부로 지을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원매는 개인의 ‘성령(性靈)’을 내세운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창작을 강조하며 애정시를 긍정하였다. 이를 통해 명대(明代) 전후칠자(前後七子) 이후 심각해진 모의 풍조와 당(唐)과 송(宋)으로 나뉘는 파벌주의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교화적 기능을 강조하고 형식을 강조하였던 심덕잠(沈德潛)의 격조설(格調說)과 고증적 태도를 작시에 반영한 옹방강(翁方綱)의 기리설(肌理說)을 비판하며 이러한 시대적 제약에서 벗어나 천부적 재능을 통한 자유로운 창작에 임할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문장에 있어서는 당대(唐代)의 한유(韓愈)만큼이나 고문(古文)의 회복을 강조하며 변려어(騈儷語), 이학어(理學語), 도가어(道家語), 불가어(佛家語), 척독문(尺牘文), 사부어(詞賦語), 고증적 어투 및 지나친 수식어의 사용에 반대하며 문장의 쇄신에 앞장섰다.
원매의 명성은 당시 청조를 뛰어넘어 주변국까지 알려졌다. 조선에서는 이덕무(李德懋)(1741~1793), 유득공(柳得恭)(1748~1807), 박제가(朴齊家)(1750~1806), 이서구(李書九)(1754~1825) 등의 ‘사가(四家)’가 영향을 받았다. 이덕무는 《청비록(淸脾錄)》에서 원매를 당대 제일가는 재사(才士)로 손꼽고 그의 회고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박제가는 4차례의 연행으로 청조의 문물을 직접 접하면서 성령파가 청대 시단을 주도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원매의 제자였던 장문도(張問陶)(1764-1814) 등과 교류하였다. 이외에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옹방강(翁方綱)(1733-1818)의 영향으로 고증적인 시를 많이 지었으면서도 일면 신운설(神韻說)의 병폐를 지적하며 성령시파를 수용하였다. 일본에서는 에도 후기에 절충시파(折衷詩派)의 라이 산요(賴山陽)(1780-1832) 등에게 영향을 주어 일본 내에서 종당(宗唐)과 종송(宗宋)을 주장한 복고파를 비판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원매의 시문은 청조와 조선, 일본에 전해지면서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글쓰기와 개인의 주체적 성장에 기여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나는 일찍이 시를 살필 때는 관대하게 하고 문장을 살필 때는 엄격하게 하였다. 이는 어째서인가? 시는 마음속의 뜻을 말하여 고된 일을 하는 자나 그리움에 빠진 여인이나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시경(詩經)》에 수록된 300편의 시는 배운 자가 지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이 구절만 있고 제목은 없어도 모아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고문을 지은 사람은 성인이었다. 성인의 문장인데 사람들에게 가벼이 허락하는 것은 성인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육경(六經)》은 문장의 시초이다.[枚嘗核詩寬而核文嚴 何則 詩言志 勞人思婦 都可以言 三百篇不盡學者作也 後之人雖有句無篇 尙可采錄 若夫始爲古文者 聖人也 聖人之文而輕許人 是誣聖也 六經 文之始也]” 《소창산방문집(小倉山房文集)》 권19 〈여소후암태수론두다촌문서(與邵厚菴太守論杜茶村文書)〉
• “시는 사람의 성정이다. 가까이 신변에서 취하면 충분하다. 그 말이 마음을 동요시키고 그 아름다움이 시선을 빼앗으며 그 맛이 입에 맞고 그 소리가 귀를 흥겹게 하면 곧 뛰어난 시이다.[詩者 人之性情也 近取諸身而足矣 其言動心 其色奪目 其味適口 其音悅耳 便是佳詩]” 《수원시화보유(隨園詩話補遺)》 권1, 1.
• “성정과 경험은 사람마다 나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므로 고인을 모방하여 답습하거나 고인을 경외하여 얽매여서는 안 된다.[至於性情遭際 人人有我在焉 不可貌古人而襲之 畏古人而拘之也]” 《소창산방문집(小倉山房文集)》 권17 〈답심대종백논시서(答沈大宗伯論詩書)〉
• “무릇 시는 이른 바 唐, 宋이란 것이 없다. 당, 송은 한 시대의 국호일 뿐이므로 시와 상관이 없다. 시란 저마다 인간의 성정일 뿐이므로 당, 송과 상관이 없다.[夫詩 無所謂唐宋也 唐宋者 一代之國號耳 與詩無與也 詩者 各人之性情耳 與唐宋無與也]” 《소창산방문집(小倉山房文集)》 권17 〈답시란타논시서(答施蘭坨論詩書)〉
(2) 색인어:원매(袁枚), 성령파(性靈派), 소창산방시집(小倉山房詩集), 소창산방문집(小倉山房文集), 성정(性情), 심덕잠(沈德潛), 격조설(格調說), 옹방강(翁方綱), 기리설(肌理說)
(3) 참고문헌
• 袁枚詩選(최일의, 문이재)
• 袁枚散文集(백광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 袁枚詩學理論硏究(최일의. 서울대 박사논문)
• 18세기 강남 도시 문예장과 袁枚의 글쓰기(홍혜진, 서울대 박사논문)
• 袁枚評傳(王英志, 南京大學出版社)
• 袁枚全集(王英志, 江蘇古籍出版社)
• 袁枚年譜新編(鄭幸, 上海世紀出版集團)
• 淸詩史(嚴迪昌, 浙江古籍出版社)
【홍혜진】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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