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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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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서대전(四書大全)》은 명나라 영락황제(永樂皇帝)의 명을 받아 호광(胡廣) 등이 편찬한 사서(四書)의 주석서이다.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과 함께 흔히 ‘3부대전(三部大全)’이라 불린다. 《대학장구대전(大學章句大全)》,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논어장구대전(論語集註大全)》, 《맹자장구대전(孟子集註大全)》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연각사고전서목록(文淵閣四庫全書目錄)》에는 총 40卷이라고 하였으며,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와 《명사(明史) 예문지(藝文志)》에는 36卷이라고 하였다.

2. 편자

(1) 성명:호광(胡廣)(1369~1418)
(2) 字·別號:자는 광대(光大), 호는 황암(晃庵),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3) 출생지역:명(明)나라 길수(吉水)(現 강서성(江西省) 길안(吉安) 길수현(吉水縣)) 사람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건문(建文) 2년(1400) 전시(殿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에 올랐다. 이후 시강(侍講)에 발탁되었고 영락(永樂) 5년(1407)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오른 뒤 문연각 대학사(文淵閣大學士)로 승진하였다. 영락제(永樂帝)를 북벌 정책에 따라 두 차례 북정(北征)에 참여하였다. 영락제의 명을 받들어 《사서대전(四書大全)》 등의 편수를 주관하였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는 자신의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시해하고 황제에 즉위하였기에 명분과 정통성에 있어 불안하였다. 건문제의 측근이었던 방효유(方孝孺)를 회유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지만 방효유는 황제 칙서 작성을 거절하였다. 격노한 영락제는 1만여 명에 달하는 무수한 지식인을 학살하였고, 자신의 비윤리적인 행위와 정통성을 확보하여 지배체제를 공고히 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유가 문헌 편찬사업을 추진하였다. 영락제는 부왕 홍무제(洪武帝)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한림원(翰林院)을 내각(內閣) 기무(機務)의 중심으로 삼고, 수찬(修撰) 호광, 편수(編修) 양영(楊榮)(1371~1440), 양사기(楊士奇)(1365~1444), 김유자(金幼孜)(1368~1431), 호엄(胡儼)(1361~1443) 등을 발탁하고, 해진(解縉)(1369~1415)과 황진(黃震)을 문연각에 입직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였다. 영락 12년인 1414년 11월에 조서를 내려 호광 등으로 하여금 3부대전을 편찬할 것을 명하여 이듬해 1415년 9월에 완성되자, 예부(禮部)로 하여금 간행하여 천하에 반포토록 하였다. 이후로 영락제는 과거에서 주소(注疏)를 폐하고 사용하지 않아, 《사서대전》은 관학(官學)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호광은 영락 16년(1418)에 세상을 떠났다.
(5) 주요 편찬서
《주역대전(周易大全)》, 《서전대전(書傳大全)》, 《시경대전(詩經大全)》, 《예기대전(禮記大全)》, 《춘추대전(春秋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등

3. 서지사항 특징

《사서대전》의 구성은 대개 주자의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에 의거하여 독법(讀法) 및 《혹문(或問)》을 보충해 넣는데, 체제는 다소 각각이다. 다만 제일 많이 통행되는 문연각사고전서목록》의 40권 체제를 기준으로 보자면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 〈사서집주대전범례(四書集注大全凡例)〉, 《대학장구대전》, 〈독대학법(讀大學法)〉, 《대학혹문(大學或問)》, 〈독론논어맹자법(讀論語孟子法)〉, 〈논어집주서설(論語集注序說)〉, 《논어집주대전》 20권, 〈맹자집주서설(孟子集注序說)〉, 《맹자집주대전》 14권, 〈중용장구서〉, 〈독중용법(讀中庸法)〉, 《중용장구대전》, 《중용혹문(中庸或問)》 순으로 되어있고, 《공자문화대전(孔子文化大全)》 본은 〈대학장구서〉, 〈사서집주대전범례〉, 《대학장구대전》, 〈독대학법〉, 《대학혹문》, 〈중용장구서〉, 〈독중용법〉, 《중용장구대전》, 《중용혹문》, 〈독논어맹자법〉, 〈논어집주서설〉, 《논어집주대전》 20권, 〈맹자집주서설〉, 《맹자집주대전》 14권 순으로 되어 있어 편차가 같지 않다.
《사서대전》에 참여한 학자는 약 42명으로, 호광, 김유자, 소시중(蕭時中), 진순(陳循), 주술(周述), 여학기(余學夔), 도순(涂順), 오가정(吳嘉靜), 주침(周忱), 왕선(王選), 왕복원(王復原), 부주(傅舟), 두관(杜觀), 안경수(顏敬守), 팽자비(彭子斐), 오여경(吳餘慶), 안영(楊榮), 진전(陳全), 임지(林誌), 이정(李貞), 진경저(陳景著), 황수생(黃壽生), 진용(陳用), 황약중(黃約仲), 홍순(洪順), 진도잠(陳道潛), 황복(黃福), 왕섬(王暹), 진수(陳璲), 왕우(王羽), 동모(童謨), 오복(吳福), 침승(沈升), 장창(章敞), 오신(吾紳), 증진(曾振), 유계안(留季安), 송염(宋琰), 진경종(陳敬宗), 허경헌(許敬軒), 유영청(劉永清), 왕진(王璡), 조우동(趙友同), 진제(陳濟), 황상(黃裳), 단민(段民), 양면(楊勉), 료사경(廖思敬), 유삼오(劉三吾) 등이다.

4. 내용

주자의 《사서집주》가 나온 이래 진덕수(陳德秀)의 《사서집편(四書集編)》, 축수(祝洙)의 《사서부록(四書附錄)》, 채모(蔡模)의 《사서집소(四書集疏)》, 吳眞子의 《사서집성(四書集成)》, 진력(陳櫟)의 《사서발명(四書發明)》, 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 예사의(倪士毅)의 《사서집석(四書輯釋)》 등이 세상에 나왔다. 영락제는 이러한 제가들의 주석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편찬하라고 명했던 것인데, 주로 예사의의 《사서집석》에 의거한 점이 많았다.
《사서대전》에 인용된 학자들은 약 106명으로, 정현(鄭玄), 공영달(孔穎達),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소옹(邵雍), 여대림(呂大臨), 윤돈(尹焞), 사량좌(謝良佐), 유작(游酢), 후중량(侯仲良), 양시(楊時), 호원(胡瑗), 범조우(范祖禹), 소식(蘇軾), 임지기(林之奇), 호인(胡寅), 이종언(羅從彥), 정형(程逈), 이동(李侗), 육구연(陸九淵), 여조겸(呂祖謙), 장식(張栻), 진부량(陳傅良), 이형(李衡), 육전(陸佃), 진순(陳淳), 황간(黃榦), 보광(輔廣), 반병(潘柄), 채연(蔡淵), 채침(蔡沈), 채모(蔡模), 진공석(陳孔碩), 조씨(趙氏), 진식(陳埴), 호영(胡泳), 정남승(鄭南升), 섭하손(葉賀孫), 황사의(黃士毅), 조순손(趙順孫), 홍흥조(洪興祖), 장구성(張九成), 등명아(鄧名亞), 진덕수(眞德秀), 섭몽득(葉夢得), 소갑(邵甲), 곽충후(郭忠厚), 원보(袁甫), 장정견(張庭堅), 항안세(項安世), 정씨(程氏), 예씨(倪氏), 고원상(顧元常), 이도전(李道傳), 동창이씨(東窻李氏), 릉양이씨(陵陽李氏), 진지유(陳知柔), 진용지(陳用之), 담유인(譚惟寅), 하몽귀(何夢貴), 안씨(晏氏), 반시거(潘時舉), 정여해(鄭汝諧), 왕염(王炎), 설씨(薛氏), 구양겸지(歐陽謙之), 제갈태(諸葛泰), 주조의(朱祖義), 주신(朱伸), 호차염(胡次焱), 장팽로(張彭老), 황연(黃淵), 선씨(宣氏), 왕정직(汪廷直), 장호고(張好古), 장옥연(張玉淵), 왕회(王回), 요로(饒魯), 노효손(盧孝孫), 정약용(程若庸), 류팽수(劉彭壽), 왕동(王侗), 심의재(沈毅齋), 사방득(謝枋得), 제몽룡(齊夢龍), 형병(邢昺), 방우진(方逢辰), 김이상(金履祥), 풍의(馮椅), 황중원(黃仲元), 웅화(熊禾), 오호(吳浩), 오우(吳迂), 이정옹(李靖翁), 추계우(鄒季友), 왕염창(汪炎昶), 허형(許衡), 오징(吳澄), 구양현(歐陽玄), 호병문(胡炳文), 진력(陳櫟), 장존중(張存中), 예사의(倪士毅), 허겸(許謙) 등이다.

5. 가치와 영향

세종대왕이 등극하던 해인 1419년(세종1) 12월 7일에 바로 《사서대전》이 조선에 들어왔는데, 이는 간행된 지 불과 4년 만이다.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1395~1458), 찬성 정역(鄭易), 형조참판 홍여방(洪汝方) 등이 북경에 사신 갔을 때 영락제가 그림과 함께 3부대전을 하사하였던 것이다. 이는 국가적 공식 요청에 의해 전래된 것이라기보다 영락제가 사사로이 경녕군에게 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세종대왕은 1426년(세종8)과 1433년(세종15)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사서대전》을 수입하였다. 먼저 2차 전래는 명나라에서 온 칙사 윤봉(尹鳳)이 귀국하는 편에 세종대왕이 공식적으로 요청해놓고 김시우(金時遇)가 1426년에 수령해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3차 전래는 조선에서 젊은 인재의 중국 유학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선덕제(宣德帝)가 완곡하게 거절하는 한편 위로성 선물 형식으로 보내온 것이다.
《사서대전》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간행 유포된 것은 1426년에 들여온 판본부터이다. 세종대왕은 《사서대전》을 유포시키기 위해 전국의 감영에 나누어주고 각 도에서 그 판본을 저본으로 판각하게 하였다. 그 결과 1429년 4월에 강원감영에서 《사서대전》 50건을 인출하여 조정에 올렸다. 조선시대 간행된 《사서대전》은 이 책을 저본으로 한 복각본이나 중간본이 가장 자주 간행되었고 유통되었다.
그러나 대전본은 황제의 칙찬(勅撰)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어 설선(薛瑄)(1389~1464)이나 고염무(顧炎武)(1613~1682) 등에 의해 통렬히 비판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선조에게 주자의 본의를 모르고 찬수(撰修)한 지점이 많고 선유의 논의와 어긋나는 곳도 많다고 지적한 이래 송시열(宋時烈)(1607~1689), 김창협(金昌協)(1651~1708) 등 많은 학자들이 대전본 소주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주자의 원의를 훼손치 않고 복원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성리대전(性理大全)》과 《사서대전(四書大全)》ㆍ《오경대전(五經大全)》은 중국의 여러 선비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찬술(撰述)한 글로서, 선유(先儒)의 여러 학설을 채집하여 이를 절충한 것이므로 실로 이학(理學)의 연원(淵源)이니, 학자들이 마땅히 먼저 강구(講究)해야 될 것이다.[性理大全及四書五經大全, 中朝諸儒承命撰述之書, 採輯先儒諸說而折衷之, 實理學之淵源, 學者當先講究者也] 《세종실록(世宗實錄)》 17년 10월 25일 2번째 기사
• 영락 황제(永樂皇帝)가 《사서대전(四書大全)》ㆍ《오경대전(五經大全)》 및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는데, 주자(朱子)의 뜻을 모르고 찬수(撰修)한 것이 많고, 《시(詩)》ㆍ《서(書)》ㆍ《논어(論語)》의 집주는 선유(先儒)의 논의와 어긋나는 곳도 많이 있습니다.[永樂皇帝命撰集四書五經及性理大全 則不知朱子之意 而撰修處 多有之 詩書論語輯註與先儒之論乖戾處 亦多有之] 《선조실록(宣祖實錄)》 2년 4월 19일 1번째 기사
• “마음이 홀로 아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 몸이 홀로 거처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指心所獨知而言 非指身所獨居而言]” 《大學章句大全》 전6장 ‘愼其獨’의 ‘獨’에 대한 진력(陳櫟)의 설
(2) 색인어
사서대전본(四書大全本), 사서대전(四書大全), 대전본사서(大全本四書), 영락제(永樂帝), 호광(胡廣).
(3) 참고문헌
• 孔子文化大全編輯部, 四書大全, 山東友誼書社.
• 朱熹, 《四書章句集注》, 中華書局
• 朱熹, 《四書集註章句》(欽定四庫全書薈要), 吉林出版集團有限責任公司
• 周群, 王玉琴 校注, 四書大全校注, 武漢大學出版社
• 顧宏義, 《宋代四書文獻論考》, 上海古籍出版社.

【이규필】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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