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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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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문상서고(古文尙書考)》는 염약거(閻若璩)의 고문상서 변위(辨僞)를 진일보시킨 저작이다. 아울러 저자 혜동(惠棟)은 동진(東晉) 때 출현한 고문 25편은 한대(漢代) 공벽(孔壁)에서 나온 진고문(眞古文)과는 확실하게 구별되며 정현(鄭玄)이 전한 24편이 공벽(孔壁)의 진고문이라 여겼다.

2. 저자

(1) 성명:혜동(惠棟(1697~1758))
(2) 자(字)·별호(別號):자는 정우(定宇), 호는 송애(松崖)
(3) 출생지역:강남(江南) 원화(元和)(현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
(4) 주요활동과 생애
어린시절 부친을 따라 광동(廣東) 제독학정(提督學政)에서 생활하였다. 부친 사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며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혜동 학문의 연원은 고염무(顧炎武)(1613~1682)에 닿는다. 평생 경학(經學)에 매진하면서 한유(漢儒)를 종주로 삼아 한학(漢學) 창명(倡明)에 노력하였는데, 특히 한대(漢代) 역학(易學)에 정통하였다. 또한 혜동은 건륭(乾隆)의 전성시대를 살았던 청대 한학 오파(吳派)의 창시자이다. 그의 학문은 광범위한 자료수집에 장점이 있어서 내용이 풍부하고 깊다.
(5) 주요저작
《구경고의(九經古義)》(22권), 《역한학(易漢學)》, 《맹희역(孟喜易)》(2권), 《우번역(虞翻易)》(1권), 《경방역(京房易)》(2권), 《정강성역(鄭康成易)》(1권), 《순상역(荀爽易)》(1권), 《역례(易例)》(2권), 《주역술(周易述)》(23권), 《명당대도록(明堂大道錄)》(8권), 《체설(褅說)》(2권), 《고문상서고(古文尙書考)》(2권), 《후한서보주(後漢書補注)》(24권), 《왕사정정화록훈찬(王士禎精華錄訓纂)》(24권), 《구요재필기(九曜齋筆記)》, 《송애필기(松崖筆記)》, 《송애문초(松崖文抄)》, 《제사회최(諸史薈最)》, 《죽남만록(竹南漫錄)》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고문상서고(古文尙書考)》 2권의 원고는 건륭 15년(1750) 이전에 완성되었으나 당시에는 바로 간행되지 못했다. 이후 건륭 57년(1792)에야 비로소 독경루(讀經樓)에서 판각‧간행되었는데, 이 판본은 《속수사고전서(續修四庫全書)》에 수록되었다. 그 후 《황청경해(皇淸經解)》본, 《소대총서(昭代叢書)》본, 《성오당오종(省吾堂五種)》본 등의 각본이 나왔다. 초본(抄本)으로는 청인(淸人) 이문조(李文藻)(1730~1778)의 죽인서옥(竹因書屋) 초본(抄本) 2권과 소진함(邵晉涵)(1743~1796) 발문(跋文)의 이계정(李谿亭) 초본(抄本) 2권이 전하고 있다. 2016년 《유장(儒藏)》 정화편(精華編) 경부(經部) 서류(書類) 권16에 장욱욱(張彧彧), 혁아(赫雅)의 교점본이 수록되었다.

4. 내용

《고문상서고》 〈전언(前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늘날 이른바 고문이라는 것은 매색(梅賾)의 책이지 벽중(壁中)의 글이 아니다. 매색은 전(傳)과 기(記)를 긁어모아 위고문을 만들어 후세에 남겼는데, 후세 유자들이 그냥 믿고 따랐기 때문에 동진의 고문이 남고 서한의 고문은 없어지게 되었다.”
책의 맨 첫머리에서 위고문은 매색이 위조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 다음 한고문 58편의 편목 및 정현이 기술한 일서 24편의 편목을 밝혀 그것과 매색본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매색의 무리들이 사사로운 꾀를 모아 고문전기(古文傳記)를 만들었다.”라고 재차 말함으로써 위작을 만든 사람이 매색이라고 단정하였지만, 그 자주(自注)에서는 “위서(僞書)는 당연히 왕숙(王肅)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공영달의 《정의》에 서술된 부분의 오류를 변정(辨正)하면서 고문일구(古文逸句) 가운데 믿을 만한 것 9조를 인용한 후 위고문에서 더해진 편목의 15조를 변증하였는데, 그중에는 정밀한 의의가 많다.
또한 처음으로 위고문을 왕숙의 찬(撰)으로 의심한 내용은 이 책의 〈오자지가(五子之歌)〉편에 보인다.
왕숙 주 《가어(家語)》에서도 ‘금실궐도(今失厥道)’를 하(夏)의 태강(太康)시대로 보았다. 또한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에서는 “왕숙이 주한 《상서》를 보면 그 말이 대부분 《공전(孔傳)》과 같으니, 왕숙이 고문을 보고도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 같은 의심이 든다.”라고 하였다. 《경전》〈서록〉에서 “왕숙 주는 금문임에도 해석의 대부분이 고문과 비슷하니, 혹 왕숙이 혼자 《공전》을 보고 숨긴 것 같다.”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설에 근거하여 혜동(惠棟)은 뒤에 나타난 고문본을 왕숙이 엮은 것으로 의심하였다.

5. 가치와 영향

《고문상서고》 전체의 주제는 위서(僞書) 25편에 대해 그 문구들이 어디에서 베껴진 것인지를 찾아서 염약거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데 있었다. 원래 오징(吳澄)(1249~1333)이 위공본에 대해 “채집하여 보충하고 삭제한 것이 비록 한 글자라도 근본이 없는 것이 없다.”라고 지적한 이후 그것들이 “제경(諸經) 및 《논어》・《맹자》의 말에 의거하면서 그 자구를 훔쳐서 꾸며내었다.”는 점을 매작이 밝혀내었으며, 염약거(閻若璩)(1636~1704)가 각 편 구절들의 원본을 제시하여 베껴진 선진 문헌들이 적지 않게 밝혀짐으로써 위고문 각 편의 조작한 흔적들을 뚜렷이 볼 수 있게 되었는데, 혜동에 이르러서 비로소 각 편 문구 대부분의 원본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나열함으로써 위고문이 위작이라는 확실한 심판을 내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위고문을 변증하는 운동은 혜동에 이르러서야 최후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혜동의 학문은 이후 왕명성(王鳴盛)(1722~1798)으로 이어진다.

6. 참고사항

(1) 명언
• “1,400여 년간 해결하지 못한 의문에 대해 혜동 선생이 홀로 하나하나 증명한 것은 벽경(壁經)이 세상에 출원한 공로보다 더 크다.[千四百餘年未決之疑 而惠松崖先洗獨一賑睡 似之其有功於壁經甚大]” 〈《고문상서고(古文尙書考)》 전대흔(錢大昕) 〈서(序)〉〉
• “이 책이 나온 이후에 《상서》를 읽는 자들은 거의 위고문의 미혹에 빠지지 않았다.[是書出 而後之讀尙書者 庶不爲僞古文所惑矣]” 〈《고문상서고(古文尙書考)》 송정필(宋廷弼) 〈발(跋)〉〉
• “송원(宋元) 이래로 경학을 논하는 서적들이 매우 많은데, 고원한 논의는 고훈(古訓)을 멸시하고 심득(心得)을 자랑하였고, 낮은 논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답습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았을 뿐이다. 오직 혜동만은 대대로 고학(古學)을 준수하여 자득함이 특히 정밀하였다. 예전의 유자에게 빗대어본다면 하휴(何休)와 복건(服虔)의 중간에 자리하니, 마융(馬融)과 조기(趙岐)의 무리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宋元以來說經之書盈屋充棟 高者蔑古訓以言誇心得 下者襲人言以為己有 獨惠氏世守古學 而棟所得尤精 擬諸前儒 當在何休服虔之間 馬融趙岐輩不及也]” 〈《청사고(清史稿)》권481 〈열전〉268 유림(儒林)2〉
(2) 색인어:고문상서(古文尙書), 변위(辨僞), 혜동(惠棟), 오파(吳派), 고염무(顧炎武)
(3) 참고문헌
• 《古文尙書考》(續修四庫全書本)
• 《尙書學史》(劉起釪, 中華書局, 1989)
• 《儒藏》 經部書類16


【이은호】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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