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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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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자진전집(龔自珍全集)』은 1956년 왕패정(王佩諍)이 청(淸) 공자진(龔自珍)이 지은 『정암문집(定盦文集)』의 여러 판본과 각주본을 참조하여 주를 붙여 편집한 책이다. 『정암문집』은 1828년 공자진이 자신의 정론(政論)과 시들을 모아 편찬한 책이며, 『정암문집』 각 판본의 글들을 중심으로, 수한재(邃漢齋) 교정본의 편례(編例)에 따라 정치·학술 논문, 비전(碑傳) 및 기사(紀事), 서서(書序) 및 제록(題錄), 표(表)·계(啓)·전(箋), 금석제발(金石題跋), 불학(佛學) 논저, 운문(韻文), 어록(語錄), 편년시, 기해잡시(己亥雜詩), 사(詞) 등의 11집(輯)으로 편집하여 주를 보탠 것이 『공자진전집』이다

2. 저자

(1) 성명:『정암문집』의 저자 공자진(龔自珍)(1792~1841)
(2) 자(字)·별호(別號):공자진의 또 다른 이름은 공조(鞏祚)이고, 자는 슬인(璱人) 또는 이옥(爾玉)이며, 호는 정암(定盦) 또는 정암(定庵)이다.
(3) 출생지역:공자진은 절강(浙江) 인화(仁和)(현 중국 절강성 杭州) 사람이다.
(4) 주요활동과 생애
공자진은 청대 후기의 학자로 도광(道光) 연간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문학가였다. 단옥재(段玉栽)의 외손자였던 그는 단옥재로부터 고증학을 배웠으나 어려서부터 경세(經世)에 뜻을 품었고 시작(詩作)을 좋아하였다. 그의 학풍은 처음에 장학성(章學誠)의 ‘육경개사설(六經皆史說)’에 영향을 받고 이어 유봉록(劉逢祿)으로부터 ‘공약학(公羊學)’을 배웠으며, 나이 들어서는 강항(江沆)에게서 천태종(天台宗)의 교의를 배웠다. 그의 경세론(經世論)은 당시 정치적, 사회적으로 만연된 부패를 지적하고 청조 사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것에 그 특징이 있었으며 또 그는 ‘서북여지학(西北輿地學)’을 통해 「서역치행성의(西域置行省議)」를 주창했다.
많은 학자들과 관료들을 배출한 명가(名家)에서 태어난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내각중서(內閣中書)·종인부주사(宗人府主事)·주객사주사(主客事主事) 등의 중요한 관직들을 역임했다. 청이 서양의 압력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과 국내의 문제들을 염려한 그는 아편과 해외무역의 금지를 주장하며 임칙서(林則徐)가 아편문제의 해결을 위해 광동(廣東)에 부임하였을 때 글을 보내 자신의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그의 학풍과 경세론은 강유위(康有爲)나 양계초(梁啓超)와 같은 청 말의 혁신론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당시의 보수적인 청조는 그 글들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멸을 느낀 그는 183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글을 쓰며 남은 생을 보냈다. 그는 주로 산문작가로 알려져 있으나 서정적인 사(詞)와 시(詩)를 짓는 데도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여 근대 제일의 낭만주의 시인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5) 주요저작:공자진의 저작은 『저읍정문집(佇泣亭文集)』, 『정암고문(定盦古文)』, 『정암문집』, 『기해잡시(己亥雜詩)』 등이 있다.

3. 서지사항

도광(道光) 계미(癸未)(1828년) 6월에 공자진이 발간한 『정암문집(定盦文集)』은 세칭(世稱) 자각본(自刻本)이라 하며, 문집 상·중·하권(46편), 정암여집(定盦餘集) 상·중·하권, 소작(少作) 1권(18편), 정암시집(定盦詩集) 상·중·하권, 몽초(夢草) 1권, 정암별집(定盦別集) 4권의 9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39년에 『기해잡시(己亥雜詩)』를 발간하니 세칭 우릉별야본(羽琌別野本)이라 하였다. 1869년 오후(吳煦)가 자각본 정암문집 상중하권과 속집(續集) 4권을 엮어 정암문집(오각본(吳刻本))을 간인하였고 1886년에는 주지진(朱之榛)이 정암문집보편(주각본(朱刻本))을 간인하였다. 공자진전집은 자각본 정암문집, 오각본 정암문집·속집·보, 주각본 정암문집보편을 저본(底本)으로 하고 풍우루(風雨樓) 본(本) 『정암별집(定盦別集)』, 『집외미각시(集外未刻詩)』와 연경루(娟鏡樓) 본(本) 『정암유저(定盦遺著)』, 『연보외기(年譜外紀)』, 『공자진외문(龔自珍集外文)』, 그리고 효홍(孝洪)이 필사한 사(詞) 등을 정리하여 편집한 것이다.

4. 내용

『공자진전집』은 공자진이 발표한 정치론과 사회론 등의 정치·사회 학설과 불학론 등의 종교론, 그리고 기해잡시와 같은 시 등이 수록되어 있는 공자진의 학술·문학 전집이다. 그의 초기 정치론과 사회론으로는 「명량론(明良論)」, 「을병지제저의(乙丙之際箸議)」, 「을병지제숙의(乙丙之際塾議)」 등을 들 수 있다. 23세 때 쓴 「명량론」에서는 통치방식과 관료체제에서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였고 24세와 25세 사이에 지은 「을병지제저의」, 「을병지제숙의」에서는 수리·재정·형옥·겸병·개간 등과 같은 허다한 사회문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공양학에 근거한 사론(史論)을 전개하면서 사회적으로 드러난 병폐와 문제점을 해결하고 정치개혁을 실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책적인 건의를 시도한 글들로는 「서역치행성의(西域置行省議)」(1820년), 「최록평정나찰방략(最錄平定羅刹方略)」(1821년), 「임계지제태관(壬癸之際胎觀)」(1822-1823년), 「농종(農宗)」(1823년), 「고사구침론(古史鉤沈論)」(1825년), 「대책(對策)」, 「어시안변수원소(御試安邊綏遠疏)」, 「상대학사서(上大學士書)」(1829년) 등이 있다. 공자진의 경학사상이 전개된 글들로는 「춘추결사비자서(春秋决事比自序)」, 「춘추결사비답문(春秋决事比答問)」, 「대서답문(大誓答問)」, 「오경대의종시답문(五經大義終始答問)」 등이 있다.

5. 가치와 영향

『공자진전집』에서 드러난 공자진의 사상은 대부분 19세기에 추진력을 가졌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현존하는 선례에 대하여 보다 유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기본적인 제도변화에 착수할 것을 호소하는 부분이었다. 그의 행정개혁에 관한 제안들은 근대의 관료적 절차를 예기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인생 전반을 통하여 지식인들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지식인들의 모임을 합법화하는 것, 도덕정치(덕치주의)적 전통의 옹호자로서의 사대부들의 역할을 되살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1890년대에 이르러서야 드러내놓고 토론될 수 있었으며 개혁 정책을 입안하는 관료 및 지식인들에 의해 개혁안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
공자진은 19세기 말엽에 가서 꽃피우게 될 변화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그는 중국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지적 지평을 넓혀서 과거 중국인들의 경험을 모두 포함시켜 주기를 원하였다. 그는 왕조를 지키겠다는 스스로의 약속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쇠퇴에 대한 그의 이해 사이의 모순을 풀어 나가야만 했다. 중국인의 이념, 특히 천명사상(天命思想)은 왕조의 계승과 순환을 가정한 것이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청조를 보존하는 데 헌신하였다. 만약 개혁이 행하여지고 이것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청조는 영원히 통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왕조의 생존에 열정적으로 매진하였으므로 궁극적으로 그의 사후 새로운 세대 지식인들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태동시킬 수 있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예운(禮運)의 문(文)은 상고(上古)를 거란(據亂)으로 삼아 쓰여 졌고, 중고(中古)를 승평(升平)으로 삼았다. 춘추(春秋)의 당흥왕(當興王)일 것 같으면, 수미(首尾) 겨우 240년인데 무엇 때문에 삼세(三世)를 갖추었는가? 답하노니 고금을 통틀어 삼세(三世)라 할 수 있다. 춘추(春秋)의 수미(首尾)도 역시 삼세(三世)이다. 대요(大橈)가 갑자(甲子)를 만드니, 일일(一日)도 역시 그것을 쓰며, 일세(一歲)도 역시 그것을 쓰며, 일장(一章)(76년)일부(一蔀)(19년)도 역시 그것을 쓴다.[問 : 禮運之文, 以上古爲據亂而作, 以中古爲升平, 若春秋之當興王, 首尾才二百四十年, 何以具三世? 答 : 通古今可以爲三世, 春秋首尾, 亦爲三世. 大橈作甲子, 一日亦用之, 一歲亦用之, 一章一蔀亦用之]” 「오경대의종시답문팔(五經大義終始答問八)」
• “어릴 때 역대사서(歷代史書) 및 국정장고(國情掌故)를 읽었는데,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법(法)은 고치지 않은 것이 없고, 세(勢)는 쌓이지 않음이 없으며, 사례(事例)는 변천하지 않음이 없었고 풍기(風氣)는 옮겨 바뀌지 않음이 없었다.[少讀歷代史書及國情掌故, 自古及今, 法无不改, 勢无不積, 事例无不變遷, 風氣无不移易.]” 「상대학사서(上大學士書)」
• “옛날 개국(開國)의 시기에 이성(異姓)이 따라붙지 못해 거란(據亂)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외신(外臣)은 천위(天位)를 공유할 수 없었다. 인주(人主)는 겨를이 없었고, 빈(賓)은 의심과 꺼림을 피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기자(箕子)는 아침에 무왕(武王)에게 서(書)를 주고 저녁에 동쪽 바다 밖에서 다시 떨쳐 일어났다. 세(世)를 바꿔 승평(升平)이 오고 또 세(世)를 바꿔 태평(太平)이 올 것이니, (이렇게 되면) 빈(賓)은 또한 나아가 인주(人主)의 혈족과 동등해 질 것이다.[古者開國之年, 異姓未附, 據亂而作, 故外臣之未可以共天位也, 在人主則不暇, 在賓則當避疑忌. 是故箕子朝授武王書, 而夕投袂於東海之外, 易世而升平矣, 又易世而太平矣, 賓且進而與人主之骨肉齒]” 「고사구침론사(古史鉤沈論四)」
(2) 색인어:공자진(龔自珍), 공자진전집(龔自珍全集), 정암문집(定盦文集), 단옥재(段玉栽), 장학성(章學誠), 육경개사설(六經皆史說), 유봉록(劉逢祿), 공약학(公羊學), 기해잡시(己亥雜詩), 명량론(明良論), 을병지제저의(乙丙之際箸議), 서역치행성의(西域置行省議), 고사구침론(古史鉤沈論), 오경대의종시답문(五經大義終始答問)
(3) 참고문헌
• 『龔自珍全集』(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9)
• 『尊隱 - 龔自珍集』(沈陽: 遼寧人民出版社, 1994)
• 樊克政,『龔自珍年譜考略』(北京: 商務印書館, 2004)
• 陳銘,『龔自珍綜論』(桂林: 漓江出版社, 1991)
• 陳銘,『龔自珍評傳』(南京: 南京大學出版社, 1998)
• 孫文光, 王世蕓,『龔自珍硏究論文集』(上海: 上海書店, 1992)
• 陳恒富,「龔自珍與今文經學」(『浙江學刊』第2期, 1983)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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