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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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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 사고전서(四庫全書) 표제(標題)는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으로 되어있다. 초간본 및 이후 간행된 간본과 초본의 표제는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이고, 일반적으로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으로 통용되므로, 이하의 표기는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으로 통일한다.
은 동진(東晉) 매색(梅賾)이 헌상한 공안국전(孔安國傳) 고문《상서》의 자체적 모순과 허점을 과학적으로 논증하여 진한(秦漢) 이래 천년을 이어 온 《상서》 금고문(今古文) 논쟁을 종결하고 고문(古文)의 위작(僞作)을 증명한 고증학(考證學) 최고의 명저(名著)이다.

2. 저자

(1) 성명:염약거(閻若璩(1636~1704))
(2) 자(字)·별호(別號):자는 백시(百詩), 호는 잠구(潛丘)
(3) 출생지역:고적(故籍)은 산서(山西) 태원(太原(현 중국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이며, 강소(江蘇) 회안부(淮安府) 산양현(山陽縣(현 강소성(江蘇省) 회안시(淮安市)))에서 출생하여 활동하였다.
(4) 주요활동과 생애
순치(順治) 8년(1651), 15세의 염약거는 산양현(山陽縣) 학생원(學生員)이 되어 경사(經史)연구에 매진하며 군서(群書)를 탐독하였다. 20세부터 《상서고문소증》 편찬을 시작하였다. 강희(康熙) 원년(1662) 27세에 고적(故籍)인 태원(太原)으로 돌아와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낙방하였다. 강희 11년(1672) 태원으로 돌아와 4번째 과거에 낙방한 후 고염무(顧炎武(1613~1682))와 교유하며 고적답사를 함께 하였고, 또한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 수 조목을 질정하였다. 강희 17년(1678)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에 추천받아 응시하였지만 낙방한 후 경사(京師)에 머물며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이 해 서건학(徐乾學(1631~1694))의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 수찬사업에 참여하였고, 동시에 만사동(萬斯同)(1638~1702), 고조우(顧祖禹(1631~1692)), 호위(胡渭(1633~1714)) 등 학자들과 함께 역사를 비교하고 여러 책을 참고하여 《자치통감후편(資治通鑒後編)》 184권을 완성하는데 일조하였다. 청장년시절을 경사에서 활동하며, 틈틈이 《상서고문소증》을 편찬하였다. 강희 33년(1694) 그의 나이 59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회안부(淮安府) 산양현(山陽縣)으로 귀향했다. 강희 38년(1699)과 42년(1703), 강희제(康熙帝)가 강소(江蘇)와 절강(浙江)을 방문했을 때 두 번이나 찬송시를 올렸지만 알현하지 못했다. 그 후 염약거의 명성을 익히 알았던 황제의 넷째 아들 은진(胤禛) 태자(훗날의 옹정제(雍正帝))의 초청으로 69세의 염약거는 노구와 질병에도 불구하고 강희 43년(1704) 1월에 경사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염약거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6월 8일 경사에서 사망했다.
(5) 주요저작:《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 《사서석지(四書釋地)》, 《잠구차기(潛邱劄記)》 등

3. 서지사항

처음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 8권이 세상에 나왔을 때, 성경(聖經)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여러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하마터면 그 불멸의 연구성과는 그대로 역사에 묻히고 다음 세대를 기약할 뻔했었다. 이 때문에 염약거 생존 당시, 《상서고문소증》은 단지 초본(抄本)만 유전(流傳)되고 판각‧간행되지는 못했다. 염약거가 세상을 떠난 40년 후에야 비로소 그의 손자 염학림(閻學林)에 의해 회안(淮安)에서 판각‧간행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건륭(乾隆) 10년(1745) 평음(平陰) 주씨(朱氏) 권서당본(眷西堂本)이다. 건륭 37년(1772)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수찬(修撰)되면서 이 판본이 수록되었고, 원각(原刻)은 수몰 폐기되었다. 그 후 다시 가경(嘉慶) 원년(1796) 오인기(吳人驥)의 천진각본(天津刻本), 동치(同治) 6년(1867) 전당(錢塘) 왕씨(汪氏) 진기당(振綺堂) 중수본(重修本), 왕선겸(王先謙(1842~1917))의 《청경해속편(清經解續編)》본이 만들어졌다. 각본(刻本) 이외에도 초본(抄本) 2종이 세상에 전하는데, 하나는 항세준(杭世駿) 발(跋)의 청초본(清抄本) 5권으로 현재 중국국가도서관(中國國家圖書館)에 소장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청(清) 심동(沈彤) 초본(抄本) 5권으로 현재 호남성도서관(湖南省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권서당본이 염약거의 손자가 간각(刊刻)한 것이고, 나머지 본(本)은 모두 권서당본을 기본으로 만든 것이다.

4. 내용

염약거는 20세 즈음에 《상서고문소증》을 쓰기 시작하여, 그 후 40여 년간 죽을 때까지 부단한 수정(修訂)을 가하였다. 송(宋)의 오역(吳棫(1100?~1154)), 원(元)의 오징(吳澄(1249~1333)), 명(明)의 매작(梅鷟(1483?~1553)) 등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기반으로 삼았다. 특히 매작이 《상서》연구에서 개창한 과학적 ‘증거수집방법’을 그대로 응용하여, 삼대 이전의 시일(時日), 예의(禮儀), 지리(地理), 형법(刑法), 관제(官制), 명휘(名諱), 사사(祀事), 구두(句讀), 자의(字義)를 변석(辨析)하여, 지금 전하는 고문《상서》는 한대(漢代)에 발견된 고문《상서》가 아니며, 지금 전하는 공안국 《전(傳)》은 한(漢) 공안국(孔安國)이 지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였다. 《상서고문소증》은 취한 자료가 풍부하고 허회(虛會)와 실증(實證)이 잘 결합되어 있어 논의가 견실하고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허회란 상지(上智)라야 깨달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논의를 말한다. 한 가지 문제에 대해 한 가지 의론을 세워 모두 128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에 28~30, 33~48, 102, 108~110, 122~127 등 총 29조(條)는 궐문(闕文)이므로, 유효한 내용은 총 99조이다.

5. 가치와 영향

《상서(尙書)》는 고대 성왕(聖王)과 현신(賢臣)의 언행을 기록한 유가(儒家)의 경전이자 역사서로서, 공자가 《시》와 함께 필수 교재로 선택한 교과서였다. 유가의 탄생과 한대(漢代) 학관(學官)이 세워진 이래로 최고 경전(經典)의 하나로 군림하면서 지존(至尊)의 위상을 가진 《상서》를 “위조된 것”으로 주장하고 나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천여 년 동안 지속된 공안국전《상서》의 자체적 모순과 허점의 노출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합리적 ‘의심’은 공자(孔子) 이래 한 사람이라는 주자(朱子)에게도 쉽지 않은 사안이었다. 염약거는 주자의 의변(疑辨)을 자기 학설의 보호막으로 삼아 자신의 학문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성법(聖法)과 경도(經道)를 위배하였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한편으로는, 선대(先代) 학자들이 주창한 방법론과 결과물을 운용하여 역사적인 의변 작업을 완성한 저작을 찬(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고증학 불멸의 명작 《상서고문소증》이다. 비로소 경전의 지위에 있던 고문《상서》는 위작(僞作)으로 판명되었고, 위고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전복되고 말았다. 이는 경학학술사상 최고의 과학적 성과로 평가된다.

6. 참고사항

(1) 명언
• “고문《상서》 1권이라고 했는데, 비록 편수를 말하지 않았지만 마융의 《서서(書序)》에서 ‘일(逸)16편’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동한 때 확인되는 고문《상서》 편수이다. 이 《서》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동진(東晉) 원제(元帝(276~323))때 예장내사(豫章内史) 매색(梅賾)이 돌연 《고문상서》를 헌상하였는데 25편이 더 많았다. 그 문장과 형식이 전혀 다른 것은 물론이고 편수도 부합하지 않으므로 위작임을 알 수 있다.[夫曰 古文尙書一卷 雖不言篇數 然馬融書序 則云逸十六篇 是古文尙書篇數之見於東漢者又如此也 此書不知何時遂亡 東晉元帝時 豫章内史梅賾忽上古文尙書 增多二十五篇 無論其文辭格制迥然不類 而只此篇數之不合 僞可知矣]” 《상서고문소증》 〈제1. 전후(前後)《한서》에 기록된 고문 편수가 지금과 다름을 논함〉
• “그렇다면, 이 ‘인심은 위험하고 도심은 미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진실로 그 중을 잡아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16자 심법은 이학(理學)의 좀벌레가 됨이 심한 것이다.[然則此十六字者 其爲理學之蠹甚矣]” 황종희(黄宗羲) 《상서고문소증》 〈서문〉
• “그렇지만 반복해서 정리하고 손질함으로써 천고(千古)의 큰 의문점을 제거했으니, 고증학에서는 혹 이 책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然反復釐剔 以祛千古之大疑 考證之學 則固未之或先矣]” 기균(紀昀) 등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 “학문의 최대 장애물은 맹목적인 신앙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그러므로 염백시의 《상서고문소증》을 최근 삼백년 학술 해방의 제1등 공신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學問之最大障礙物 莫過於盲目的信仰……所以百詩的古文尙書疏證 不能不認爲近三百年學術解放之第一功臣]” 양계초(梁啟超)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2) 색인어:상서(尙書), 금고문논쟁(今古文論爭), 변위(辨僞), 염약거(閻若璩),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
(3) 참고문헌
• 尙書古文疏證(上海古籍出版社, 1987, 影印本)
• 尙書古文疏證(黃懷信‧呂翊欣 校點, 上海古籍出版社, 2010)
• 尙書古文疏證(陳劍 校點, 儒藏 書類 第16冊, 北京大學《儒藏》編纂與研究中心, 2016)


【이은호】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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